<역사는 되풀이 된다, 미래를 내다본 역사의 인물 조광조- 기묘사화>
우리는 왜 역사를 배워야하나. 인문학이 사회각층에 인기 있게 관심 갖고 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라고 했다. 산타야나의 말대로면 우리는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역사를 배우고 역사책을 읽어야 한다. 과거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진정한 의미는 “잘못 된 과거를 반복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는 의미이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일을 모르는 것은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아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어린아이로 남지 않기 위해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셈이다. 달리 말하면 성숙한 자아를 갖기 위한 것이고, 미숙한 자아로 남아 있지 않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 역사는 반복 되고 인간은 반복 되는 역사 속에서 과오를 찾고 이를 반성 했을 때 비로소 발전하게 된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개혁적인 인물은 정암 조광조 선생이었다.
조광조는 조선의 개국공신 조온의 5대손으로 어머니는 여흥 민씨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예의에 추호도 어긋남이 없었고 학습 효과도 대단히 높았다.
조광조의 스승은 김굉필선생이다. 김굉필선생은 동방5현 중에 수현으로 평가 받는 인물로 “소학동자”로 불릴 만큼 소학에 가장 뛰어난 성리학자였다.
경북 현풍에 살면서 성리학의 종조(宗祖)인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재식 할 때 정여창, 김일손과 함께 함양에서 같이 공부 했다.
조선의 성리학은 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그 전통이 이어 졌고, 더 윗대로 올라가면, 안향-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진 것이 정통의 성리학파의 맥이다. 정몽주-길재-김종직의 아버지인 김숙자와 정몽주, 길재는 경북이 고향이다. 김종직은 밀양이 고향이다. 밀양은 김종직의 외갓집이다.
조광조는 자신이 한말은 반드시 실핼했고 예법에 어긋 남이 없이 행동했다.
성균관에서 공부 할 때는 예의가 뛰어나 동료들과 유생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성균관 학생들이 학행이 뛰어난 학생을 나라에 추천 할 때 첫 번째로 뽑힌 인물이다. 성균관 유생 300명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중종의 신임을 독차지한 인물이다.
중종은 준비 되지 않은 임금이었다. 연산군이 쫓겨나고 임금이 되었다. 중종은 자기를 임금으로 만들어 준 사람들 즉 훈구파 공신들에게 둘러쌓여 자기의 뜻을 제대로 펼치 수가 없었다.
훈구파의 반대파인 성리학 사림파인 젊은 조광조를 등용 시켜 훈구파와 경쟁 시키면서 조정을 장악 할 계획을 세웠다.
조광조 역시 김굉필에게 배운 성리학을 정치와 교학에 근본으로 삼아 “요순의 왕”도 정치를 실현하는 꿈을 이루고자 했다.
연산군을 밀어 내고 준비 되지 않은 임금 자리에 오른 중종은 임금이 될 때 자기를 옹립 한 많은 공신들에게 높은 벼슬과 많은 녹봉을 줄 수밖에 없었다. 도학 정치에 원리 원칙을 중시하는 조광조는, 이와 같은 훈구파 공신들과 필연적으로 대립 할 수밖에 없었다. 조광조의 개혁정치 중, 현량과 설치, 위훈사제, 소격서 혁파와 향약을 제정하는 것이 주요 정치의 실현 이었다. 소격서는 하늘에 신과, 주요 산천에 제사를 올리는 기관이었다. 유교에 어긋난 기관이기에 이를 폐지하게 했다. 향약의 제정으로 지방을 유교적으로 교화하는데 앞장 서서 지방과 서울을 골고루 발전 시키고자 애썼다. 지금으로 치면 지방분권시대를 꿈꾸었던 것이다.
현량과 설치 설치 제도는, 과거 제도가 공정하지 못하고 공신들 자제의 부정이 많아서 일정한 지방의 인재를 추천으로 발굴하여 면접 정도의 시험으로 지방의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를 말 한다. 현량과를 실시하여 많은 신진사류를 조정에 발탁하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방에 젊은 인재를 발굴하여 조정에 사림파를 대거 등용시켰다고 볼 수있다.
마지막 개혁과제가 위훈삭제였다. 중종 때 조광조를 필두로 사림파는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면 필히 중종 주변의, 공신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사간원, 홍문관, 승정원에 소속 된 사림파와 함께 강력하게 위훈삭제를 밀어 붙였다. 오늘날 검찰 개혁을 떠 올리는 대목이다. 한 달 내내 조정이 들끓고 정치가 마미 되었다. 중종이 심한 압박감을 느낄 정도로 강력했다. 이 때 대사헌(지금의 검찰총장) 조광조는 대신인 남곤 까지 맹열히 공격하였다. 처음에 중종은 조광조의 뜻을 거부하였다. 조광조 등 사림파는 항의의 뜻으로 일제히 사직하였다. 어쩔 수 없이 중종이 위훈삭제를 허락하게 되었다. 2,3등 공신의 일부와 4등 공신의 전원, 즉 전체 공신의 3/4에 해당하는 76인을 훈작 뿐만 아니라 노비와 재산 까지 모두 뺏앗아, 훈구파에 일대 파란이 일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걔혁정치라고 평가받는 것이 조광조의 위훈삭제였다.
여기서 남곤을 주목하기 바란다. 남곤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로 치면 조광조에게는 스승 김굉필보다 먼저 김종직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한 때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물러난 적도 있었으나 문장이 출충하다고 하여 다시 등용 된 인물이다. 그는 심정, 홍경주와 손을 잡고 조광조를 몰아낼 계략을 꾸미게 된다. 홍경주의 딸인 희빈 홍씨를 중종이 총애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이용해 궁중에서 조광조를 모함하게 했다. 희빈 홍씨는 경빈 박씨까지 설득하여 함께 모함하게 되자, 중종은 조광조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남곤, 심정, 홍경주는 궁중의 여인들을 움직였다. 여인들에게 시켜 대궐의 오동나무 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꿀물로 쓰서, 벌레가 파 먹게하여, 조광조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거찟말을 퍼뜨리고, 희빈 홍씨와 경빈 박씨가 이 나뭇 잎을 중종에게 받쳤다. 기말한 모락이었다.
중종은 이것을 하늘의 뜻으로 믿고 사림파가 왕의 자리를 넘본다고 믿고 주초위왕이란 나뭇 잎 글자로 조광조가 왕을 넘본다는 사실로 믿고 조광조를 하옥하기에 이르게 된다.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는 성균관 유생들의 반발을 불러와서 유생 이약수 등 150여명이 대궐 앞에서 상소를 올리고, 조광조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통곡한 그 곡소리가 대궐 뜰에 진동했다. 중종의 반응이 없자 중종 14년11월17일 성균관 생원 임봉 등 240여명이 상소해 조광조의 억울함을 아뢰고 감옥에 함께 들어가겠다고 청했다. 그 후 19일에도 성균관 유생 300여명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계속 해서 조광조의 구명 운동이 펼쳐졌다. 궁궐 안에서 엄청난 시위가 일어났던 것이다. 지금의 대학교수 들과 연구자들의 시국선언과 오버랩 된다.
주초위왕의, 나뭇 잎 사건으로 조광조, 김정은 사사(귀양지에서 사약을 받음)되고 나머지 사림파는 절도에 유배 보내는 등 수백명의 사림파가 희생 된 사화를 “기묘사화”라 한다. 조선의 4대 사화중 하나이다.
처음엔, 조광조는 사형의 국문이 정해졌으나, 영의정 정광필이 조광조는 나라를 사랑하고 임금에게 충성한 죄 밖에 없다고하는, 적극적인 비호로 사형이 감형되어, 과거 동기인 양팽손의 고향인 전라도 능주(화순)로 유배가게 되었다. 그 후 훈구파인 김전, 남곤, 이유청 등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된후 그들 훈구파에 의해 기묘년 12월에 능주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아래와 같은 절명시를 남기고 죽임을 당하였다.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애군여애부 우국여우가 백일임하토 소소조단충)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했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했노라.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내 충성된 마음을 환히 비추리라.
그의 고향은 용인이었다. 마지막 유언이 관을 얇게 만들어라. 이곳 능주에서 용인까지 내 시신을 운구하려면 힘들지 않겠는가?는 유언을 남기고 사약을 받아 마셨다.
12월에 사사 되어 겨울 추위 때문에 용인으로 운구하지 못하고, 가매장 한후 그 다음 해 봄에 용인으로 운구하여 장사지냈다. 조광조의 마지막 제자는 소쇄원을 만든 양산보이다. 스승이 사사 되는 현장에 있었고, 다음 해 봄에 장사 지내고 담양으로 돌아와 소쇄원을 만들면서 평생 출사를 포기하고 소쇄원이란 원림(조경)을 만들면서 보냈다.
기회 되면 양산보와 소쇄원에 대해서는 다시 쓰 보기로 하겠다.
역사에 가장은 없다.
많은 사학자들이 1500년대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중종이 받아들여 시행 했다면, 우리나라는 100년 정도 앞선 발전을 했을 것이라 평가하고 있다.
그 후 다산 정약용은 유배 중에 공무원의 비리를 낱낱이 고발하고 고쳐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위정자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조선은 반드시 망할 것이라 경고하면서 쓴 책이 목민심서 이다. 목민심서로 위정자에게 경고한 후, 100년도 못 되어 우리는 나라를 일본에 빼앗겨 36년이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치욕의 역사를 겪고 그 후유증으로 6.25라는 전쟁으로 나라가 폐허가 되었다.
지금은, 6.25 이후 70년 만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선진국 무턱에 서있다.
지구상의 수많은 나라가 건국을 하고, 산업을 일으키고, 민주주의가 달성 되면, 그 다음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것이 순서라고 본다. 수많은 나라 중 건국에서 선진국으로 우뚝 선 나라는 많치 않다. 우리는 선진국으로 나아가느냐, 여기서 또다시 뒤걸음 치느냐는 중요한 갈림길에 서있다.
그래서 향 후 5년 또는 10년이 매우 중요한 시기에 놓여 있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온 나라가 매우 혼란 스럽다. 정치, 경제, 외교, 민주주의 발전 등등 어디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어 보인다. 무척 걱정 스럽다.
모든 역사의 발전은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지나온 역사도 그렇치만 세계인이 부르워하는 선진국 대열에 우뚝서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한민족은 우수한 민족이다. 그리고 똑똑하고 지혜롭다.
좀 더 멀리 보고 기다리면서 차분히 준비하는 지혜의 민족, 우수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고 싶다.
사슴을 쫒는자 산을 보지 못하고, 썩은 나무로는 조각 할 수 없다라는 성현들의 고언을 모든 지도자들은, 항상 가슴에 담고 살아가기를 바랄뿐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한나라의 양 기둥은 종교와 교육이라고 믿고 싶다. 종교는 곧 정신이고, 교육은 미래이다.
종교인이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존경 받을 수 없고 교육자가 부정을 저지르면 누가 그 사람 아래서 교육을 받겠는가?
종교와 교육은 거짓이 없어야 한다. 진실 해야하고 정직해야 한다.
종교와 교육에 거짓이 있으면 이는 다른 직능에 종사하는 사람보다 더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또한 종교인과 교육자는 부정직한, 돈과 명예를 멀리해야 한다. 종교인과 교육자가 돈을 가까이 하려면 종교인과 교육자임을 포기하고 사업을 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최근에 전국 대학교 교수와 연구자들의 시국 선언이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 10월 28일 가천대를 시작으로 채 한달 만에, 총55곳의 대학에서 3,000여명이 넘어서고 있다.
교수 시국선언은 김용련 한국외대 교수의 말대로 “한국 현대사에서 더 이상 여지가 없을 때 터져 나오는 지식인들의 종지부 같은 것”이었다.
4·19 혁명 당시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던 전국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을 비롯해, 1987년 6월 항쟁, 가깝게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변곡점마다 교수들의 외침이 빠지지 않았다. 지금 터져 나오는 교수들의 목소리는 규모와 수위 면에서 과거 어느 때 못지않다고 언론들은 평가하고 있다.
참여 교수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최근 ‘명태균 게이트’로 불거진 국정농단 의혹과 정치인이나 주변인물에 대한 불공정한 법 집행뿐 아니라 이태원 참사, 채 상병 순직 사건, 역사 왜곡, 호전적 대북 정책, 부자 감세, 의료 대란 등 국정 전반에 걸친 이 정부의 무능·무책임을 성토하고 있다.
용기있는 교수, 연구자들과, 지식인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조광조, 다산선생이 오버랩 되는 새벽이다.
성철 스님,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 다음으로 내가 존경하는 종교 지도자가 없음이 무척 안타깝다. 이영희 교수님 이후로 내가 본받을 수 있는 올곧은, 스승이 없다는 것 또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남은 21세기에 우리나라 곳곳에, 교육과 종교가 양 기둥이 되어 대한 민국의 정신세계를 똑바로 받치고 있을 때 국민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종교인과 교육자가 다른 어떤 직능의 사람들보다, 가장 깨끗한 물줄기가 되어 도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믿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한다. 세계에 우뚝서는 선진 대한민국이 되는 그날까지!!!
24. 11.24 여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