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와 지휘자의 역사
중세 사회는 기악 연주자를 낮게 평가했다. 기악 연주자들의 사회적 처지는 교회 음악 이론가나 성악가에 비해 형편없이 낮았다. 기악 연주자들은 영주의 성대한 행사와 마을 축제,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불려 나가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이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 주거도 일정치 않고 소속도 없었다. 그저 음악이 필요한 곳이면 찾아가서 악기를 연주했다. 마을 사람들이 원하면 줄타기도 하고 공던지기도 했다.
카톨릭 세력이 약해지고 봉건 영주의 영향력이 커지자 기악 연주자들도 궁정에 소속된 정식 악사가 되었다. 영주는 악사들의 신분을 보장해 주었고 악사들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영주에게 음악을 헌정했다. 궁정에 속하지 않은 음악가들은 공식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길드 조직이 발전적으로 해체되면서 음악가들의 사회적 신분은 조금씩 향상되었다.
궁정악사와 길드에서 성장한 악사들이 서로 뒤섞이면서 일정한 규모의 악단이 만들어졌다. 최초의 체계적인 악단, 즉 오케스트라를 조직한 사람은 프로이센 공국의 프리드리히 대제였다. 그는 드레스덴 궁정에 많은 악사들을 불러들였다.
최초로 지휘봉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장 밥티스트 륄리는 루이 14세 시대 궁정 악단의 지휘자였다. 그 악단은 '왕의 24대의 바이올린' 이라고 불렸다. 6대의 바이올린, 6대의 베이스, 12대의 비올라로 이뤄진 악단이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무도회나 연회 때는 현악이 연주되었고 사냥이나 국빈 영접 때는 타악기와 관악기가 동원되었다. 참고로 지휘봉을 처음 사용했다는 륄리는 너무나 열정적으로 지휘를 하다가 그만 지휘봉으로 제 발을 찔러 죽고 말았다. 이 당시 사용하던 지휘봉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아니고 가벼운 지팡이나 바통이었다.
바로크 시대의 오케스트라는 궁정에서 오페라를 반주하거나 교회에서 칸타타와 오라토리오를 반주하는 단체였다. 이때까지도 오케스트라는 궁정과 교회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때의 지휘자는 아직 통솔자이자 해석자의 위치에 이르지 못했다. 시작과 끝을 알리고 템포를 조절하는 정도의 역할만 했고 따로 지휘대를 가지지도 못했다. 바이올린 주자나 건반 악기 주자가 손바닥이나 발로 템포를 조절했다.
오케스트라의 비약적인 발전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루어졌다. 황제와 교황이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짐에 따라 더 이상 궁정과 성당은 음악의 무대가 되지 못했다. 대신 새롭게 떠오른 시민계급이 음악을 수용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한 대규모의 음악당과 오페라 하우스를 건설했다. 공연장이 커지고 청중도 몇 배로 늘어남에 따라 자연히 오케스트라 단원의 숫자도 커지면서 오케스트라는 점점 대규모로 바뀌었다.
교향곡이 처음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하이든 시대의 오케스트라 단원은 약 20여 명이었다. 에프테르하치공의 궁정 악단에서 하이든은 바이올린 10명, 비올라 2명, 첼로 2명, 오보에 2명, 바순 2명, 호른 2명 등을 데리고 직접 건반 악기를 치면서 연주했다.
고전주의의 정점 베토벤을 거쳐 낭만주의로 이행하면서 대규모의 오케스트라를 요구하는 장대한 관현악곡이 속속 등장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지휘자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지휘자 없이는 연주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오케스트라의 숫자도 많아지고 악보도 세밀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누군가 앞에 서서 조화롭게 통제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지휘자는 단순히 통제하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안단테' 와 '알레그로'를 자신의 정서에 따라 조율했다. 누가 지휘대에 서느냐에 따라 '안단테'는 그보다 더 느릴 수도 조금 빠를 수도 있었다.
브람스와 말러로 대표되는 후기 낭만주의에 오면 오케스트라의 편성 규모는 더욱 확대된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을 연주한 빈필은 104명에 달했다. 말러는 음악 표현의 외향적 확대를 꾀하기 위해 1000명의 관현악단을 필요로 하는 교향곡 8번 [천인 교향곡]을 쓰기도 했다. 물론 그 이전에 베를리오즈가 467명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구상하기도 했다.
이 시대에 이르면 지휘자는 완전히 신적 권위를 가진다. 요컨대 지휘자는 음악을 해석하고 창조하는 절대자로 올라서는 것이다. 19세기 말에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가 된 한스 폰 뷜로는 신적 권위를 가진 지휘자 상을 최초로 정립한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브람스의 교향곡으로 새로운 음악 세계를 열었다. 구스타프 말러도 작곡가이기 이전에 천재적인 지휘자였다. 그가 기다란 타원(객석)과 반원형(연주석) 사이의 중심 공간에 올라서면 객선과 연주석의 모든 눈과 귀가 그에게 쏠렸다. 그는 악보에 적힌 음악을 새롭게 해석하고 창조했다.
바야흐로 20세기 음악사는 지휘의 역사로 바뀌게 되었다. 19세기 말 거장들의 영향으로 독일을 중심으로 한 낭만주의 지휘 계보가 성립된다. 아르투르 니키슈가 뷜로의 대통을 이어받았고 이를 다시 푸르트벵글러가 물려받아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전통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브루노 발터, 에리히 클라이버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지휘 계보는 20세기 음악사의 가장 거대한 산맥이었다.
여기에 직접적으로 대응한 지휘자가 이탈리아의 토스카니니였다. 그는 즉물주의로 함축되는 지휘 철학으로 베토벤과 브람스를 재해석해 냈다. 그에게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은 [운명]이 아니라 단지 '알레그로 콘 브리오(빠르고 쾌활하게)' 일 뿐이었다. 그는 주관성과 연주장의 감정을 일체 배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악보 속으로 들어가 정면 대결을 벌였다.
토스카니니의 즉물적인 해석은 단숨에 거대한 찬반 양론을 불러 일으켰다. 독일의 지휘 계보를 잇는 거장들은 토스카니니를 [군악대장]이라고 비난한 반면, 그 외의 많은 지휘자들은 토스카니니를 응원했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말러로 이어지는 독일 음악사, 곧 세계 음악사의 전통을 그대로 잇는다고 하는 독일의 지휘 계보에서는 당연히 토스카니니가 이단아로 보였다. 그러나 그 밖의 지휘자들은 '독일의 베토벤' 만이 아닌 '프랑스의 베토벤', '이탈리아의 베토벤'을 가능케 한 토스카니니의 즉물주의적 해석에 찬사를 보냈다. 미국의 NBC 방송국은 그를 위해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주었으며, 토스카니니는 NBC 오케스트라와 함께 숱한 걸작을 녹음했다. 토스카니니가 죽자 NBC 교향악단은 1년 동안 추모 음악회를 연 뒤 자진 해산했다.
지휘의 두 계보를 대표하는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는 음향학적으로 모노 시대의 지휘자들이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스테레오가 개발되어 녹음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뤄졌으나 이때는 이미 브루노 발터를 빼고는 거의 대부분 유명을 달리했다. (살아 생전에는 토스카니니가 푸르트벵글러보다 대중적으로 선호되었으나, 두 사람의 사후에 푸르트벵글러에 대한 평가가 제고됨에 따라 오늘날 지휘계의 흐름은 푸르트벵글러의 지휘관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거장의 뒤를 노리는 야심찬 지휘자들이 대거 입성했다. 그들은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평화기(?)가 비교적 오랫동안 계속됨에 따라 '시대를 고뇌' 해야 하는 부담(?)도 덜게 되었다. 모노 시대의 거장들이 망명과 자살, 도피와 변명 등으로 자신의 예술적 자존을 지켜내야 했던 것에 비하면 스테레오 시대 지휘자들은 비교적 행복한 세대에 속했다. 그러다 보니 갖가지 개성들이 고만고만한 실력으로 겨루게 되었다. 서로들 개성이 너무 강하다 보니 개성 없는 연주를 해도 하나의 개성이 되는 일도 있었다.
스테레오 시대를 대표하는 카라얀은 [지휘계의 황제]하는 찬사와 [거만한 독재자]라는 혹평을 동시에 들은 사람이었다. 어떤 평가를 받든 그는 분명 스테레오 시대를 가장 잘 활용한 지휘자임에는 틀림없었다. 푸르트벵글러가 죽자마자 베를린 필을 휘어잡은 그는 이후 자신이 죽을 때까지 베를린 필을 자기의 성채로 삼았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죽기 직전까지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후임자로 되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히틀러를 찾아가 친위대 악장을 자임했던 카라얀의 오만한 행동과 장식적인 음악관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을 장악하자마자 푸르트벵글러의 잔영을 지우는 데 온 힘을 썼다. 푸르트벵글러의 심오한 예술지상주의를 무시하고 라틴적인 화려한 감각을 도입했다. 그는 감각적인 충격 효과를 주기 위해 셈과 여림, 여림과 느리고 빠름의 폭을 주도면밀하게 계산했고 스테레오 기술은 그의 그런 드라마틱한 음폭을 그대로 재생해 냈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된다. 독단적으로 여성 클라리넷 연주자 자비네 마이어를 단원으로 추천하자 더 이상 카라얀의 독단을 참을 수 없게 된 베를린 필의 단원들은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반항하기에 이른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에서 물러났고, 물러난 지 1년도 안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죽음으로 스테레오 명장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