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바랍니다
입암서원을 널리 홍보 하고 후손들도 요약된 자료로 서원역사를 조금이라도 이해 하였으면 하는 차원에서 휴대용 A4 용지 6면 팜프렛을 제작하고자 초안작성 게시 하오니 참고하시고 좋은의견 있으시면 전화또는 댓글로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입암서원 유사 권 중 도. 권 태두 올림
立巖書院 沿革
立巖書院
ㅇ 서기 1657년(효종8년) 講堂 및 廟宇 創建
ㅇ 서기 1810년(경오년) 입암서원 懸板 建立
- 영천군수 吳遂燁 書
ㅇ 서기 1868년(고종5년) 서원철폐령 서원강당 毁撤
ㅇ 서기 1907년(순종원년) 산남의진 일경 廟宇 燒失
ㅇ 서기 1913년(계축년) 서원강당 復元
ㅇ 서기 1972년(임자년) 묘우 復元
ㅇ 서기 1986년 경상북도지방문화재기념물 70호 指定
- 지정면적 : 입암서원일원 34,160㎡
日躋堂
ㅇ 서기 1600년(선조33년) 建立
ㅇ 서기 1907년(순종원년) 산남의진전투 일경 燒失
ㅇ 서기 1914년(갑인년) 復元
萬活堂
ㅇ 서기 1604년(선조37년) 建立
- 포항시 관내 가장오래된 목조건물로 추정
- 旅軒 張顯光 先生 거처한곳
旅軒 張顯光 先生 所藏遺物
ㅇ 여헌 선생 影幀 (130cm × 96cm)
- 서기 1633년 鶴沙 金應祖 善山府使 制作
ㅇ 馬上刀 (전장 185cm)
ㅇ 지팡이 (躑躅나무 151cm)
ㅇ 坐 杖 (躑躅나무 77cm)
ㅇ 서기 2015년 소장유물 일체 안동시 國學振興院
이관 현재 복사본 영정 소유
略 說
1.立巖書院
ㅇ 소재지 :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176번지
ㅇ 면 적 : 대지 2,098㎡
ㅇ 규 모 : 목조와가 박공지붕 정면5칸,측면2칸 1동
ㅇ 유 래
입암서원은 서기1657년(효종8년) 여헌 장현광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고장 유림에서 본 건물과 묘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선현들의 배향 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강당 이 훼철되였다가, 1913년 복원 되었으며,
1986.12.11. 경상북도지방문화재 기념물 70호로 지정 되었음 (입암서원 일원 34,160㎡)
2.日躋堂
ㅇ1600년(선조33년) 건립되였으며 정면 3칸 측면2칸 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절벽을 의지하여 자연석 축대로
탁입암을 배경으로 건축되였으며 동방 우란재에는 장 여헌선생과 정우헌이 거처하였으며 서방 열손재에는 손우남 정수암이 거처 하였음
ㅇ1907년 산남의진 입암전투에서 일본군 방화로 소실
되였 다가 1914년 복원되였음
3.萬活堂
ㅇ 1604년(선조37년) 건축된 목조건물로 포항시 관내 에서 가장오래된 건물로 추정되며, 정면3칸 측면2칸 의 박공기와 지붕으로 막돌로쌓은 3단축대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건축되였으며,
ㅇ 가사천 계곡이 굽이처 흐르는 언덕위에 서향으로 배치된 건물로 조선중기 성리학자인 여헌 장현광 선생께서 임진왜란때 피난와서 숨어 살든 곳이다.
ㅇ 임진왜란후 여헌선생은 떠났어도 매년 이곳 경관 에 매료되어 자주 왕래하며 풍류를 즐기시다 향년 84세 이곳에서 고종하셨다.
ㅇ 또한 이 건물은 1907년 산남의진 입암전투에서 일 본군에 의해 모든건물이 소실 되었으나 본건물은 소실되지않아 그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4. 廟宇
ㅇ 1657년(효종8년) 입암서원과 함께창건
ㅇ 1907년(순종원년) 산남의진 의병봉기 일경에 소실
ㅇ 1972 현재 건물로 복원 선현제향봉행
ㅇ 입암서원 묘우에는 문강공 여헌 장현광 선생을 주벽으로 하여 입암 4우인 동봉 권극립, 우헌 정사상, 윤암 손우남, 수암 정사진을 배향하여 매년 2월 하정일에 각처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받들며 유덕 을 기리고 있음
旅軒先生과 立巖四友
ㅇ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동봉선생은 기룡산(자양면)으로 피난했는데 이듬해 피난적지가 아님을 판단하고 손윤암선생과 함께 입암으로 들어와 터를잡았다.
ㅇ 입암에 정착한 두분은 1596년 임진왜란 후반기때 청송 속수촌에서 피난중인 여헌선생을 찾아가 입암승경 을 말하고 한번 찾아주실 것을 권하였든바, 그해 여름 정우헌, 정수암 형제와 함께 입암을 찾아 그 절경에 매료되어 함께 살기로 작정 하였다.
ㅇ 여헌선생은 정수암으로 하여금 흰돌에 연치대로 이름을 암혈에 장수하게 하고 청유의 약속을 맺고 이 네 분을 언제나 네벗(四友)이라고 불렀다.
ㅇ 1597년 여헌선생은 가솔을 이끌고 입암에 들어와 사우와 함께 도의를 강마하고 입암의 승경을 완상하였다.
그후 4우의 요청에 따라 입암(선바위)을 중심으로 28개 처의 이름을 붙이니 비로소 바위와,물이 각기 이름을 얻게 되어 제값을 하게 되었다.
ㅇ 난리가 평정되자 제각기 귀향길에 올랐는데 동봉선생 만 입암에 영주하게 되어 지금도 그 후손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ㅇ 立巖四友 人的事項
장여헌선생 : 인동인. 휘 현광, 자 덕해 (1554∼1637)
권동봉선생 : 안동인, 휘 극립, 자 강재 (1558∼1611)
정우헌선생 : 오천인, 휘 사상, 자 여섭 (1563∼1623)
손윤암선생 : 일직인, 휘 우남, 자 덕보 (1564∼1623)
정수암선생 : 오천인, 휘 사진, 자 군섭 (1567∼1616)
立 巖 (선바위)
ㅇ규모 : 높이20여m 둘레10여m 직립한 괴암
ㅇ임진왜란 이전에는 사람이 살지않은 깊숙한 골짜가에
이름없는 바위
ㅇ권동봉,손윤암선생이 임진왜란 피난처로 들어와 거처 함으로서 사람이 살게 되었다 (1593년)
ㅇ1597년 여헌선생이 입암이라 명명한후 현재 지명으로
되어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로 불리운다.
東峯 權先生 遺墟碑
ㅇ동봉 권극립(1558∼1611))영천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입암에 들어와 절경에 매료되어 정착
ㅇ임진왜란후 여헌선생과 제현들은 모두 떠나고 권동봉
선생만 남아 세거 함으로서 이곳이 안동권씨 후손들 의 세거지이다
ㅇ선조10년 동당시에합격, 선조17년 향시를거처 선조19년 동당시 장원하였으나 벼슬에 나기않고 학문에 집중
ㅇ임진왜란때 의병활동공적으로 선조38년 선무원종공신 록에 제3등 의병장을 근거하여 인조3년 가선대부공조 참판겸오위도총부 부총관 증직 되었음
ㅇ서기1998년 후손들이 입암서원 정원에 유허비 제막
蘆溪 朴仁老 詩碑
ㅇ 노계 박인노(1561∼1642)선생은 조선중기 가사문학 의 대가로 문무를 갖춘 선비이며, 임진왜란때는 의병
활동으로 종군하여 공적을 남김
ㅇ 1599년 무과급제 수문장선전관 조라포만호 벼슬역임
ㅇ 노계선생은 여헌 장현광 선생과 교분이 각별하여 69세
때 여헌선생을 찾아 입암에 왔다 가경에 섭취하여
지은 시조 29곡이 노계문학중 빼어난 작품
ㅇ 입암서원앞 소공원에 노계선생의 시비가 건립되어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음
立 巖 書 院
포항시북구 죽장면 죽장로 79(입암리)
TEI : 054- 243-
관련 사진은 최종 교정시 인쇄소에서 삽화 합니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권영철(호민2) 작성시간 18.07.31 할배요, 수고 많으시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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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권영훈(상민36) 작성시간 18.08.02 수고가 많으십니다.
여헌선생과 입암사우 항목에서 넷째단락 끝부분 "각기 이름을 얻게되어 제값을 하게 되었다." 를
"각기 이름을 얻게되어 오늘날의 '입암 28경' 이라 일컫는다"로 표기하는 것이 어떨지?
기타 오.탈자, 띄어쓰기등은 인쇄에 앞서 최종교정시 바로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한자어는 한글 병기하고 한글만 표기된 것은 한자 병기하여 이해를 돕도록 하고 해석을 곁들여 놓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 : 척촉나무 - 척촉(철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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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권영세 작성시간 18.08.03 할배, 아재 두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일제당의 동쪽방은 열송재, 서쪽방이 우란재 입니다. 1700년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이 지은 <입암유산록立巖遊山錄>에도 있습니다. 아마 복원 당시 잘못 걸어둔 현판으로 지금 현제까지 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 빨리 바꿔 달아야 할 것으로 앎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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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권영택(상민23) 작성시간 18.08.03 후손들을 위한다면 어른 눈 높이 문장이 아닌 청소년 눈 높이의 문장도 함께 싣는 방안은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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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권영철(호민2) 작성시간 18.08.12 할배요,
위의 내용을 보면 부분적으로 수정하게 될 거 같은데,
내용이 수정되어 인쇄 들어가기 전에 최종 교정지가 나오면 다른 건 몰라도 오탈자와 맞춤법, 띄어쓰기 등은 제가 교정 보는데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거 같으니
필요하시면 말씀하시소.
6개 면을 각 사진 찍어 카톡으로 보내주시면 되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