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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세한도(歲寒圖)

작성자長樂山人 이종인|작성시간15.02.23|조회수239 목록 댓글 0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세한도(歲寒圖)

 

세한도(歲寒圖)

 

 

세한도(歲寒圖)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歲寒然後 知松栢之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꿋꿋함을 알 수 있다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화제(畵題) 세한도(歲寒圖),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국보 제180호

제자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에게 세한도(歲寒圖)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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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려서부터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랐다. 추사선생은 나의 고향 충남 당진과 인접한 예산출신의 큰 선비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는 200여 년 전 그가 출생한, 그리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반가(班家)의 기품을 지닌 53간의 「추사고택」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내가 어려서 들은 이야기는 그가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만들어 낸 천하의 명필이었다는 것과, 그가 태어날 때 집 뒤뜰의 우물물이 갑자기 말라 버리고 뒷산인 팔봉산의 나무와 풀들이 모두 시들었다가 그가 태어나자 다시 샘도 솟고 나무도 소생했다는 신기한 전설들이었다.

 

  이는 아마도 추사선생의 천재성에 감탄하면서 팔봉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그의 선조를 모신 가야산(伽倻山: 충남 서북부의 祖山, 일명 象王山)정기를 타고 났기 때문이라고 믿거나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들일 것이다.

 

  어쨌든 그는 명산의 정기를 타고 났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만큼 불세출의 천재였으니 신필(神筆)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글씨는 물론, 글씨에 못지 않게 뛰어 난 문장가였고, 문장에 못지 않게 빼어난 화가였으며, 경학(經學)과 금석학(金石學)에도 정진하여, 그 때까지도 무학대사가 세운 것으로만 알았던 북한산진흥왕순수비(北漢山眞興王巡狩碑)를 밝혀 고증하였을 뿐 아니라, 신라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황초령비(黃草嶺碑)를 찾아내어 고석(考釋)하는 등 뚜렷한 업적을 남긴 조선후기의 대학자였다.

 

  추사의 집안은 순조(純祖) 연간의 이른바 세도정치시절에 안동김씨와 자웅을 겨루던 경주김씨 가문이었으니 영조(英祖)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그의 집안 대고모이고, 그의 증조할머니는 영조대왕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和順翁主)였으며, 그의 고조부 김흥경(金興慶)이 영의정을 지낸 명문이었다.

 

  이러한 환경이 그의 어린 시절 학문연찬을 순탄케 했고, 일직이 출세가도를 달리게 하여 24세의 젊은 나이에 북경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조강(曹江) 등과 교류함으로서 경학과 서화(書畵)의 대가를 이루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나, 후일 정쟁에 밀리어 멀리 남으로는 제주도에서 북으로 함경도 북청까지 전후 10여 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의 부친 김노경(金魯敬: 1766~1840 이조판서)과 함께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유배 길에 오른 것은 표면적인 구실이야 있었겠지만 안동김씨 김조순(金淳祖)의 딸이 세자빈(世子嬪)에 간택될 때 이를 반대했던 것이 후일 큰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김조순의 딸은 끝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후일 순조비(純祖妃)가 되었고, 안동김씨의 세력이 커지면서 김노경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으며, 그를 신임하던 순조도 부득이 그를 전라도의 고금도(지금의 완도)로 유배(1830, 순조 30년)했다가 2년 후에 풀어 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에 추사 부자는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얼마 후에 부친은 돌아가고 추사도 사직하였다가 다시 등용되어 험난한 관직생활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조가 승하하고 세손(世孫)이었던 헌종(憲宗)이 직위하여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 하면서 문제가 재연된 것이다.

 

  10년 전 일을 다시 들추어 이번에는 병조참판으로 있던 추사를 제주도로 유배(1840, 헌종 6년, 당시 55세)시켰고, 9년간의 긴 세월을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서화로 시름을 달래다가 겨우 풀려 나서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고 있던 그에게 어이 없는 일이 또 한 번 밀어닥친 것이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할머니의 치마폭에서 통치수업을 마치고 겨우 홀로서기를 한 헌종이 스물 세살의 나이에 갑자기 승하(昇遐)하자 안동김씨 일파에게는 비상이 걸렸다. 세도정치가 한창 무르익어 가던 판에 그 날개가 꺾인 것이다.

 

  반안김세력(反安金勢力)이 고개를 들려고 하자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것이 나무꾼 강화도령을 데려다가 왕으로 앉혀 놓고 다시 순원왕후가 섭정케 한 것이었으나, 헌종의 3년상을 치르고 나서 난감한 문제가 생겼다. 전왕의 칠촌 아저씨로 대통(大統)을 이었으니 조선왕조 왕통(王統)과 전주이씨 가통(家統) 사이에 혼선이 비저진 것이다.

 

  철종(哲宗)의 증조할아버지인 진종(眞宗: 사도세자의 형, 법통상 정조의 아버지)이 가통으로는 증조지만 왕통으로는 오대조가 된 것이다. 종묘(宗廟)의 정전(正殿)에는 금상(今上)의 고조까지만 모시고 오대조가 되면 영영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시는 것이 법도였다. 이를 조천(遷)이라 한다. 진종을 계속하여 정전에 모실 것이냐, 조천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왕통이라지만 조카를 아버지로 하여 계대(繼代)해야 하는 민감한 문제였으므로 홀로 책임지기 어려운 예조(禮曹)에서는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과 유현(儒賢)에게 물어서 결정토록 했다. 철종옹립을 애초부터 못마땅하게 여겼던 반안김세력은 어떻게 실질적인 왕의 고조도 아닌 증조를 조천하느냐고 반대했으니 이는 간접적으로 왕통이 잘못 이어졌음을 항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발끈한 안김은 다시 순원왕후을 등에 업고 조천을 관철하는 동시에 반안김의 영수였던 권돈인(權敦仁)을 탄핵하면서 그의 막역한 친구인 추사를 연루시켰다. 조천반대의 논리가 추사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아무 근거도 없이 다만 권돈인과 친구인 것이 죄였다.

 

  그래서 추사는 제주도에서 풀려 난지 1년 여만에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1851, 철종 2년)되었다가 다음해에 해배(解配)되었으니 장년 이후의 그의 생애는 정쟁(政爭)에 휘 말린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그도 벼슬길에서 밀려나 향리에 은둔할 때나 장기간의 유배생활에서 얻어지는 한가로운 시간들을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로 삼아 학문(學問)을 연찬(硏鑽)하고 서화(書畵)의 기예(技藝)를 닦았다.

 

  송강(松江)과 고산(孤山)에게 정치적 역경이 없었던들 어찌 우리 문학사에 찬연히 빛나는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같은 명작이 남을 수 있었으며,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이나 정약전, 정약용(丁若銓 丁若鏞) 형제에게 긴 유배기간이 없었던들 어찌 구운몽(九雲夢) 같은 소설이나 자산어보(玆山魚譜)와 목민심서(牧民心書) 같은 대 학술저서가 나올 수 있었겠는가.

 

  추사선생도 9년간의 제주도 유배기간 중에 글씨로는 그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시켰고, 그림으로는 그의 대표작이요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문인화(文人畵)로서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를 남겼다. 그러하기에 세한도의 진품을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그의 모사본이나 인쇄본을 한두 번 보지 못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토록 유명한 세한도는 그가 제주도로 유배 된지 5년째 되던 59세 때에 그린 것으로서 세로 23.3cm, 가로 108.3cm의 종이에, 네 그루의 소나무와 단출한 초가 한 채를 그리고, 우측 여백 상단에 예서체(隸書體)로 「歲寒圖」라는 화제(畵題) 세 글자를 횡으로 쓴 다음, '우선은 감상하라' 는 뜻의 우선시상(藕船是賞) 넉 자를 종으로 쓴 후에, 그 옆에 완당(阮堂)이라 써서 낙관(落款)을 했다.

 

  그리고 좌측에는 반듯한 해서체(楷書體)로, 종으로 열 다섯 자씩 스무 줄의 발문(跋文)을 정성스럽게 써서, 염량세태(炎凉世態) 속에서도 변함 없는 제자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에 대한 고마움과, 제작과정에 서린 자기의 처연한 심경을 공자말씀을 인용해 가면서 절절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세한도의 명성은 그림 그 자체보다도, 전체 지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화제와 낙관, 발문이 그림의 구도에 무게와 안정감을 주면서 그림의 품격을 한층 높이 밀어 올렸다 할 것이고, 그림과 글씨 모두에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했던 추사의 예술세계가 이 소략(疏略)한 그림과 정제(整齊)된 글씨, 고결한 문장 속에 흥건히 배어 나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발문 첫머리에 세한도를 그리는 연유를 이렇게 쓰고 있다. "지난해에는 만학(晩學), 대운(大雲), 두 문집을 보내 주더니 올해에는 우경(藕耕)의 문편(文編)을 보내 왔도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만리 먼 곳으로부터 사 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쉽게 단번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역관(譯官)이었던 제자 이상적이 북경을 자주 오가면서 신간서적들을 구해다가, 그것도 어떤 것은 한 질이 120권씩이나 되어 수레로 실어 와야 할만큼 방대한 물량의 귀한 것들을 권문세가(權門勢家)에 갖다 주지 않고, 세가 꺾이다 못해 천리 밖 외딴 섬에 귀양 와 있는 스승에게 보내 주고 있으니 그것을 받는 선생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했겠는가.

 

 

그래서 선생은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꿋꿋함을 알 수 있다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고 하신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제자의 절의를 높이 평가하고 그림의 제목을 세한도(歲寒圖)라 했다.

 

  서울에서 이러한 화제와 발문이 붙은 세한도를 받아 본 이상적 또한 감격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해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수행하여 북경에 가는 길에 청(淸)나라 선비들에게 자랑 삼아 보이고 싶어서 이를 가지고 갔으며, 오랫동안 사귀어 온 문사들이 초청한 환영연에 이를 가지고 참석했다.

 

  이 환영연의 주빈은 물론 이상적이었고, 주인 오찬(吳贊)을 비롯한 16명의 선비가 참석했는데 그 중에는 35년 전 추사가 두 달 동안 북경에 머물 때 교분을 가졌던 이도 있었고, 추사가 평생을 스승으로 모시며 서신으로 가르침을 받았던 옹방강선생의 제자들도 있어서 추사의 문명은 이미 북경의 문예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세한도를 보자 그들은 모두 그림과 글씨, 문장이 고매한 문인의 높은 격조를 들어내는 작품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다투어 제(題)와 찬(讚)을, 혹은 시(詩)로, 혹은 문(文)으로 써 주었다. 이것이 세한도에 붙어 있는, 세한도의 품격을 높이는데 시너지효과를 일으킨, 이른 바 청유십육가의 제찬(淸儒十六家題讚)이다.

 

  이상적은 이 제찬들을 한 권의 횡축(橫軸)으로 합장(合裝)하여 하나의 서화축(書畵軸)을 만들어 가지고 돌아와서 추사에게 보고를 겸하여 다시 보였고, 선생은 이를 보고 다시 한 번 감격했다.

 

  그런데 이 장축(長軸)의 세한도 두루마리는 이상적이 죽은 후 그의 제자였던 매은 김병선(梅隱 金秉善)에게 넘어가서 그의 아들 김준학(金準學)에게로 이어졌다가 휘문고등학교를 설립한 민영휘(閔泳徽)와 그의 아들 민규식(閔奎植)이 소장했었는데 안타깝게도 민규식이 동양철학자이자 서화수집가였던 일본인 후지츠카 지카이(藤塚隣)에게 팔아 넘겼다.

 

  그 후 1943년,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무렵, 서예가요 서화수집가로서 특히 완당의 서화를 좋아했던 소전 손재형(素 孫在馨)은 후지츠카가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노심초사하면서 여러 번 그의 집을 찾아가 값의 고하를 불문하고 양도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 당하고 말았다.

 

  그 다음해 여름, 전세가 불이해 짐을 예감한 추지츠카는 일본으로 돌아갔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소전은 나라의 보물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현해탄을 건너가서, 도교에 있는 그의 집으로 찾아가 간절이 호소했지만 후지츠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전은 뜻을 버리지 않고 매일 같이 찾아가 예의를 갖추고, 같은 문예인으로서의 충정에 호소하기를 무려 두 달, 후지츠카는 마침내 소전의 열정에 굴복하여 "세한도를 간직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선비가 아끼던 물건을 돈으로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니 어떠한 보상도 원치 않는다. 오직 잘 보존 해 주기만을 바란다." 고 하면서 세한도를 건네 주었다.

 

  소전이 이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받아 들고 돌아 온지 석 달쯤 지난 1945년 3월, 후지츠카 가족이 공습을 피해 소개해 있던 사이에 그의 집은 폭격을 맞았고, 그가 수집했던 수 많은 서화들도 모두 불타 버리고 말았다. 다행하게도 그 와중에서 유일하게 세한도만이 살아 남은 셈이었다.

 

  광복후의 어수선한 시기를 지나자 소전은 이 사실을 관계요로에 알린 후에 세 분의 명사에게 보이고 발문을 받았다. 완당의 학문을 좋아했던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그의 예술을 사랑했던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당시 부통령으로서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던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 세 분이다.

 

  모두 세한도의 감격적인 귀환을 칭송하는 글들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세한도에는 완당 자신의 발문 외에 청나라 선비 16명과 우리 나라 명사 세 분의 발문이 추가되어 도합 20명의 발문이 붙은, 긴 두루마리의 진귀한 서화축이 되었다.

 

  그러나 훗날 소전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선거자금에 쪼들리자 겸재(謙齋)의 금강전도(金剛全圖) 같은 명품까지 삼성의 이병철회장에게 팔아 넘기면서도 세한도만은 후지츠카의 뜻을 생각하여 참아 팔지 못하고 사채업자에게 저당 잡혔지만 국회의원에 낙선하여 결국은 찾지 못했다. 사채업자의 손에서 미술품수장가 손세기(孫世基)에게 팔려 넘어간 세한도는 지금 그의 아들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러한 불후의 명작 세한도를 남기신 추사 김정희 선생은 북청 유배에서 67세에 풀려 난 후, 여생을 관악산 밑의 과천에서 보내면서 과천을 뜻하는 노과(老果), 과파(果坡)등의 아호를 즐겨 쓰기도 했고, 잠시 봉은사(奉恩寺)에 은거하여 불경을 탐독하면서 험난했던 삶의 속진(俗塵)을 모두 떨쳐 버린 후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 천수를 다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선생은 평생을 통한 진지한 연구와 부단한 연마로 그의 독특한 추사체와 문인화를 대성하고 경학과 금석학의 태두가 되었다. 이처럼 위대한 업적들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세상을 위하고 학문을 위한 것이었으니 그의 고결한 인품과 강인한 정신은 가히 백세의 사표(師表)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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