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은 수가 아니라 존재이다

작성자선머슴아|작성시간22.02.03|조회수127 목록 댓글 2

 

0은 수가 아니라 존재이다

 

 

 

어떻게 0이라는 수를 놓고 두 분 선생님이 다르게 말씀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술 선생님은 0이 자연수라고, 수학 선생님은 자연수가 아니라고 했다.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이라는 논리학의 세 가지 추론 원칙을 아직 모를 때였지만, 어린 내 생각에도 하나의 사물이 무엇이면서 동시에 무엇이 아닐 수는 없었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서 수학 시간에 질문했다. “기술 선생님께서는 0이 자연수라고 하시고 선생님께서는 자연수가 아니라고 하시는데……”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선생님은 벌써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것 같았다. “너 이리 나와!”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갔다.

나는 평소에 태권도 2단이라고 자랑하던 선생님의 온갖 기술을 받아내며 사정없이 맞았다. 주먹 지르기로 시작해 앞차기, 돌려차기, 옆차기 등등 스무 대 이상을 맞은 것 같았다. 맞아서 뒤로 밀리면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선생님 앞으로 다가갔다. 키 147센티미터의 중학교 2학년생은 선생님이 태권도 2단이 맞구나 싶었다. 학급 친구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무술을 관람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날 수업이 모두 끝난 뒤 수학 선생님이 나를 찾았다. 선생님은 그 해 대학을 졸업한 신참이었다. 교무실로 불려간 내게 선생님은 "선생님들을 그렇게 싸움 붙이면 되나?"라고 했다. 무엇이면서 이지 않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나의 믿음이 선생님들을 싸움 붙이는 장난으로 오해되었다. 나는 방송실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기술 선생님은 방송실 담당이었다. 수학 선생님은 내가 기술 선생님 편을 들면서 자신을 골탕 먹인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게다가 기술 선생님과 수학 선생님은 늘 자기들이 공부한 대학을 우리들에게 자랑했다. 기술 선생님은 한국의 MIT라고 자랑했고, 우리는 MIT가 뭔지도 몰랐다, 수학 선생님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라고, 오래된 것은 고물이다, 자랑했다. 나는 오해를 바로 잡고 싶지 않았다. 무어라 말한다 해서 이미 일어난 일이 바뀔 것은 없었다. 끔찍했던 하루가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께도 보고했다고 말했는데 무참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 걱정되었던 것 같다. 교장 선생님은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은 평소에도 교사들에게 자율성을 권유할 뿐 말씀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나 역시 운수 사나운 날의 에피소드 정도로 여겼다. 집에서도 말하지 않았다. 다음날 기술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0이 자연수라는 것을 왜 모를까?”라면서 독백처럼 말했다.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러서 “맞은 건 맞은 거고 그렇다고 소심해지지는 말라”고 격려도 했다.

내가 수학 선생님에게 물었던 까닭은 자연수가 ‘사람들이 셀 수 있는 수’라고 정의된 것 때문이었다. 내가 볼 때 양수는 물론이고 음수도 셀 수 있고 심지어는 0도 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빵이 세 개 있었는데 다 먹고 하나도 없다고 할 때 우리는 빵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빵이 0개 있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0을 셀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는 수학 선생님의 견해보다 기술 선생님의 견해에 경도돼 있었다. 자연수는 ‘0이 아닌, 사람들이 셀 수 있는 수’라는 정의에 나는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왜 사람들은 0을 셀 수 없다고 할까?’가 나의 의문이었다.

0에 대한 궁금증은 그 불상사가 일어나고 십 수 년이 지난 뒤, 파르메니데스를 읽으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그가 존재와 사유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없는 것은 알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고 말한 데에서 나는 0이 없는 것이고 따라서 알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것임을 추론했다. 물질에 관해서는 오직 ‘그것은 존재한다’는 표현만 허용되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사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누구도 없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다. 0은 없음이니 생각할 수 없고, 파르메니데스가 자연수에 대해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0은 자연수가 아닌 것이다. 하긴 빵을 다 먹으면 빵이 없다고 말하지 빵이 0개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0은 자연스럽게 자연수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파르메니데스는 기원전 515년에 이탈리아 남부 엘레아에서 태어나 445년에 죽었다. 파르메니데스가 태어날 즈음 엘레아에서 조금 더 남쪽인 크로토네에는 피타고라스가 자리를 잡고 문하생들을 가르쳤다.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570년에 지금은 터키 지방 이오니아 바다의 사모스에서 태어나 이곳저곳을 주유하다가 크로토네로 왔고 정변에 휘말려 다시 크로토네에서 멀지 않은 메타폰툼으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495년에 죽었다. 파르메니데스가 피타고라스를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그럴지언정 파르메니데스가 초기에는 피타고라스의 기본 신조를 따랐으니 피타고라스의 수 이론은 어떤 형태로든 파르메니데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점이나 자갈을 이용해서 수들을 표현했다. 실제로 계산을 뜻하는 calculation은 라틴어로 ‘자갈 다루는 법’을 의미했으니 여기에서도 자연수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자갈이든 달걀이든 하나 단위로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있는 수만이 우리가 셀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없음도 없고 0도 없다. 그들에게 0은 자연수가 아니다.

그런데 왜 파르메니데스는 굳이 없는 비존재, 그러니까 없음에 대해 말해야 했을까? 그가 없음이 없다고 말하는 그 순간에 이미 없음은 우리의 사유 안으로 들어온 셈이고 따라서 사유 안에 들어온 없음은 있음이다. 그런 전통은 이후에도 이어져 플라톤은 “있지 않은 것들은 적어도 어떻게든 있어야 한다”라고, 헤겔은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무는 동일하다”라고 ‘망언’들을 했다. 존재하는 것을 사유하는 일은 무를 사유하는 일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일이고 이것은 수로서의 자연수에 양의 정수와 더불어 0도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라고 나는 억견을 만들기 시작했다.

생각이 그쯤에 미칠 즈음 공교롭게도 박인성 교수가 번역한 《나가르주나》가 세상에 나왔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0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우리가 존재자들의 실재를 자성(自性)인 것으로 지각한다면, 우리는 또한 이 존재자들을 인(因)과 연(緣) 없는 것이라고 지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과와 원인, 행위의 주체, 행위 수단, 작용, 발생과 소멸, 그리고 인과응보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어서 나가르주나는 이렇게 말했다. “연기인 것, 그것을 우리는 공성(空性)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세속의 언어 관습(假名 또는 假說)에 의존한다(緣). 그것 자체는 중도이다.” 그러니 단 하나의 법(法), 그러니까 단 하나의 존재도 인과 연을 따라 생겨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일체의 모든 법이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연기는 공성이다.’ 이 공은 sunyata인데, 이는 《중론》에서 무(無)라 번역된다.

다시금 나가르주나는 이렇게 말했다. “연기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연기한 것이 아닌 실체는, 연기하지 않은 사물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공한 것만 남게 되고 공한 것으로부터 연기하여 법이 생겨난다. 그러면 공에 대해 존재이니 비존재이니 하는 언급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됐다. 그것은 0이라는 수를 두고 자연수이니 자연수가 아니니 하는 구분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0도 공도 그냥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면서 나는 20년 전 기술 선생님이 이런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했다. 그 뒤로 나는 0에 대한 수많은 문헌들을 찾았는데 ‘아무 것도 아닌’ 0에 대해 이렇게 많은 연구가 있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나는 론 하워드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영화 《파바로티》의 한 장면에서 0에 대한 추억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 장면은 0에 대한 수많은 역사, 나의 탐구의 여정을 허물어뜨렸다. 파바로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엇인가?

성공했나요? 아니면 그냥 유명한가요?

그건 모르겠어요. 상관없어요

나는 사람들이 길에서 나를 알아본다는 것을 알아요. 아주 좋아요.

하지만 내게는 아내와 세 딸이 있어요.

그리고 내가 집에 있을 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정확히 0.

그러나 나는 행복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0에 대해 너무도 먼 길을 돌아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0은 수가 아니라 존재였다.

 

- 김은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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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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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소래남 | 작성시간 22.02.03 좋은글에
    다녀갑니다

    행복한 저녁시간 되시길.
  • 답댓글 작성자선머슴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2.03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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