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년 여행 |
| 아침을 밝히는 진정한 빛 새해를 목전에 두면 일출을 맞이하고 싶은 욕망이 커진다. 올해는 매일 떠오르는 아침 해만큼이나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하여 향한 곳은 울산이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마주한 구슬땀 맺힌 얼굴들은 여명의 붉은빛만큼 희망찼다. 글·한재원 기자 |
'지금 눈앞을 찬란하게 밝히는 저 붉은 해는 필시 나를 위해 솟아오르는 것일거야.' 구름을 힘껏 밀어내고 동천(東天)을 뚫는 빛을 가슴속에 아로새기며 마음껏 착각에 빠졌다. 산새도 잠에서 깨지 않은 새벽녘에 혼자 산길을 올라 해발 900m 대평원에 선 자부심은 그만큼 대단했다. 50여 년 전 어쩌면 더 오래전에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에 똑같은 태양을 바라보던 이들이 있었다. 새벽시장에 물건을 팔러 가기 위해 산을 넘던 봇짐장수들이다. 예로부터 경남 밀양 사람들이 언양장을 비롯해 많은 장이 열리는 울산에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큰 산을 넘어야 했다. 신불산과 간월산이다. 두 산을 잇는 여섯 고개는 생계를 위해 무거운 짐을 메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이들에게 중요한 기착지였다. 그중 억새가 무성해 '억새만디'라고도 불리던 간월재는 1960년대에 봇짐장수들이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아침 도시락을 먹기도 하는 휴식처였다. 장소의 유래를 알고 나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광활한 억새밭을 비추는 일출을 바라보다 붉은빛 너머로 깊고 흔들림 없는 생의 눈빛들이 어리었다. 생계 걱정을 한 보따리 둘러메고 캄캄한 산길을 오른 고단한 눈동자. 어쩐지 그 속에서 현실에 대한 원망과 고달픔만 읽히진 않았다. 그들과 같은 길을 걸어와보니 '처지에 대한 한탄보다 더욱 값진 감정들이 교차했겠구나' 짐작됐다. 숨 막히는 어둠과 적요를 짊어지고 비탈을 올라오는 동안에는 불평이 일기도 했다. '휴, 다른 사람들은 단잠에 빠져있는 시간에 혼자 무슨 고생이람.' 하루 중 가장 맑은 첫 태양 빛에 땀 맺힌 얼굴을 적시고서야 깨달았다. 아침 해가 나를 깨운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루의 문을 연 보람은 고된 걸음들이 가져다준 결실임을 말이다. 산행 내내 어른거렸던, 바윗덩이 같은 짐을 멘 채 호롱불 하나 들고 묵묵히 산길을 오르는 여윈 뒷모습들도 힘든 여정의 끝에서는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었을 거라 생각되자 조금은 안심됐다. 1980년대 간월재. 서쪽편으로 본 모습.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오늘 울산 '구역전시장'에 새벽 4시부터 좌판을 깐 더덕 장수 할아버지가 밤새 달려온 길도 산길만큼 고달픈 여정이었다. 얼마나 하소연할 상대가 필요했는지 토실토실한 더덕에 관심을 보이는 손님에게 대뜸 고생담부터 털어놓는다. "충북 단양에서 가져오느라 무척 힘들었어요. 오다가 오트바이 기름이 떨어져서 곤욕을 치렀거든요." 한숨짓는 할아버지가 안쓰러워지던 찰나 더덕 껍질처럼 거친 흙빛 주름살이 일순 활짝 펴졌다. "그래도 소백산 더덕만한 게 없어요. 속이 실해서 매번 단양까지 가서 받아와요. 이것 보세요, 단단하잖아요."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품질에 지난밤 고생을 모두 보상받은 듯 보이는 할아버지의 어깨 위로 수줍게 떠오른 아침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각양각색 농작물들이 소복이 쌓인 좌판을 구경하는 재미는 구역전시장을 지나서도 줄기차게 이어진다. 바다와 산을 낀 무역항의 성격을 지녀 삼국시대부터 크고 작은 장터가 형성된 고장이 울산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구는 1960년대에는 인근 연못을 메워 장터로 만들었을 정도로 물자 유통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신중앙시장, 울산 전통시장, 옥골시장, 울산중앙 수산시장 등 여전히 여러 시장이 어깨를 맞대고 거리마다 활기를 뿜어낸다. 그중 학성새벽시장은 부지런한 상인들의 입김이 울산에서 가장 먼저 새벽공기를 데우는 일터다. 새벽 2시부터 개장하는 시장에 들어선 시각은 오전 5시 40분 무렵이었다. 한밤중처럼 어둑하건만 상인들은 이미 한차례 장사를 끝내고 숨을 돌리는 분위기였다. 전국 각지에서 직송된 싱싱한 농산물을 구하려는 도매인들이 물건을 떼가고 난 새벽 4시쯤부터 일반 소비자들이 찾아오는 오전 8시 무렵까지는 잠시 쉴 수 있는 고갯마루 같은 시간이다. 포장마차에 앉아 어묵과 떡볶이로 요기하거나 난로 앞에 삼삼오오 모여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호호 불어가며 담소를 나누는 작은 여유에서조차 다부진 생활력이 감지됐다. 체면치레, 허세 같은 실없는 자세들은 소용없고 생계를 위한 억척스러운 노력만 필요한 삶의 현장에서는 일상을 이루는 낡고 사소한 조각들이 눈에 밟혔다. 무거운 상자를 나르는 팔을 감싼 꼬질꼬질한 토시, 음식을 배달하는 아주머니의 김칫국 묻은 앞치마, 채소 장수가 골똘히 내려다보는 두툼한 장부의 헤진 귀퉁이…. 주인의 정직한 땀이 눅진하게 배어든 자국들을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할 것만 같아 점포들을 무심히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시장에는 최선을 다한 삶의 흔적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종합 식료품 가게 '어울림 식품'의 김민철(46) 사장은 부모님이 30여 년 동안 꾸려온 장사를 물려받은 지 14년째에 접어들었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대기업에 다니다가 아버지의 건강 악화로 장사를 잇게 된 그는 가게를 지키기 위해 그동안 후회 없는 노력을 쏟았다. 전통시장의 쇠락이란 시대 흐름에 부모님이 평생 일군 과업을 쓸려 보낸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하루 한 시간만 자면서 이 악물고 장사에 매진했어요. 힘들었지만 내 일, 내 가게라는 생각이 드니까 나태해질 수가 없더라고요. 다행히 소용없는 노력이 아니었어요. 부모님이 하실 때보다 다섯 배나 매출이 올랐으니까요."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직장을 그만둔 미련이 조금도 비치지 않는 그의 얼굴에는 커다란 성취감이 가득했다. 매일 새벽 3시에 가게 문을 여는 피로감은 잠시도 머룰 자리가 없어 보였다. 밤잠 포기하고 시장 구경에 나선 여행자의 피곤함까지 덩달아 달아날 무렵, 해가 완전히 밝아졌다. 가게마다 맑은 햇살과 나란히 동네 주부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근처에서 30년 넘게 고깃집을 운영하는 여주인도 장사 준비를 앞두고 음식에 들어갈 마늘을 사러 일찌감치 장을 보러 나왔다. 23년 단골 가게인 '경북깐마늘'에서 오늘도 주인과 정다운 아침 인사를 나누며 마늘을 사가지고 간다. 양손 무겁게 마늘을 받아 들고 가게를 나서던 그녀는 맵싸한 향에 끌려 기웃대던 여행자와 눈이 마주치자 홍보위원을 자처했다. "이 집 마늘 아주 좋아요. 친절하고요. 지금 사장님 부모님이 할 때부터 내가 다녔는데 가족이 다 성실해." 단골의 칭찬을 들은 권기태(44)˙양은진(43) 부부는 밝은 목소리로 손님을 배웅했다. 남편 권기태 씨 부모님의 손때 묻은 가게에 유난히 짙은 마늘 향이 감도는 까닭은 부부가 엄선한 싱싱한 마늘이 경북 영천과 경남 창녕에서 매일 직송되기 때문이다. 신선도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들은 품질이 변질될 우려가 있어 택배 발송은 일절 하지 않는다. 한식의 기본 재료를 가장 신선한 상태로 공급한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부부는 새벽 한두 시에 시작하는 하루가 전혀 고단하지 않다. 온라인쇼핑의 대중화나 불경기에 영향받지 않고 꾸준히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이유를 부모님 때부터 지켜온 한결같은 품질 덕분이라 믿는 부부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새벽부터 생업에 나선 상인들이 어느덧 장사를 마무리할 시간. 마지막까지 정성스러운 손길로 바구니에 정연하게 담아놓은 과일이며 채소에 온전히 제 빛을 찾은 햇살이 내려앉는다. 아기 엉덩이처럼 뽀얀 알타리,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밀감과 귤, 한눈에 봐도 아삭함이 느껴지는 탱글탱글한 파프리카 같은 먹거리들의 자태가 곱디곱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하루를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다는 긍지가 깃든 오색 결실들이야말로 아침을 밝히는 찬연한 빛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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