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스토옙스키라는 나침반 |
F.M. 도스토예프스키. N. 도스가 촬영한 사진. 1876년 |
| 살아오며 수많은 만남이 있었다. 사람과의 만남, 도시와의 만남, 책과의 만남, 그리고 나 자신과의 만남. 그러나 그 모든 만남을 하나의 축으로 묶어보라면, 나는 주저 없이 한 이름을 말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나는 그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당연히 그럴 수 없다. 그는 19세기 러시아의 사람이고, 나는 21세기 한국의 사람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만남이 있다. 문장을 통해, 사유를 통해, 고통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건너간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날, 그것은 단순히 한 권의 책을 펼친 날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인생의 방향이 조용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바뀐 날이었다. 그때 나는 어렸고, 불안했고, 무엇이 옳은지 확신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세상은 복잡했고,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나 자신조차 낯설었다. 그때 내 손에 들어온 것이 『죄와 벌』이었다. 나는 그 소설 속에서 한 살인자를 만났고, 동시에 한 인간을 만났다. 나는 처음으로 인간을 심판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 보는 경험을 했다. 죄를 저질렀지만 단순히 악인으로 정리할 수 없는 존재, 오만하지만 동시에 연약한 존재, 자기 자신을 신이라 여기지만 결국 눈물 앞에 무너지는 존재. 그를 따라가다 보니, 나는 나 자신을 따라가고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내게 인간을 위아래로 재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학력, 재산, 계급, 지적 능력, 종교적 신념, 그 어떤 잣대로도 사람을 끝내 규정할 수 없다는 것.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틀리고, 부서지고, 상처 입었지만,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나는 그를 통해 연민을 배웠다. 연민은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아니라, 함께 고통받는 능력이라는 것을, 그가 보여 주었다.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그는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다는 것을. 내가 힘들 때, 방향을 잃었을 때,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 때, 그의 문장들은 나를 붙들어 세웠다. “조금 더 보라, 조금 더 이해하라, 조금 더 견뎌 보라.” 그는 나를 위로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서, 나는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결국 그의 4대 장편을 혼자 번역하게 되었다.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많은 이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단순한 번역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인간과의 긴 대화였다. 나는 그의 문장을 옮기면서 그의 고통을 따라갔고, 그의 질문을 따라갔으며, 그의 절규와 화해를 함께 겪었다. 번역가는 작가의 그림자라고들 말한다. 나는 기꺼이 그의 그림자가 되기를 선택했다. 그의 사유가 이 땅에서 다른 언어로 숨 쉬게 하는 일, 그것이 나의 소명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를 통해 배웠다. 사람은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에게도, 가장 추해 보이는 이에게도, 여전히 신의 형상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내게 인간을 높낮이 없이 보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쳤다. 위대한 자도, 비열한 자도, 성자도, 살인자도, 모두 같은 질문을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래서 나는 그를 내 인생의 선생님이라 부른다. 조금 더 애정 어린 호칭으로는, ‘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내 삶의 방향을 잡아 준 사람, 내 사유의 근육을 길러 준 사람,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 놓은 사람에게 붙이는 이름이다. 그와의 만남은 나를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동시에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연민은 약함이 아니라 가장 강한 힘이라는 것을, 나는 그의 인물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 방식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말할 수 있다. 생이 나를 지상에서 솎아 내는 날까지, 나는 이 만남에 감사할 것이라고. 내가 도 선생님의 그림자로 살 수 있었다는 것, 그가 전하고 싶었던 말을 이 땅에 옮겨 심는 일을 했다는 것, 그것은 내 인생의 가장 깊은 축복이었다고. 어떤 만남은 짧게 스쳐 지나가지만, 어떤 만남은 한 생을 관통한다. 도스토옙스키와의 만남은 내게 그런 만남이었다. 그는 내 삶을 대신 살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내 삶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질문들은 지금도 나를 앞으로 밀어낸다. 나는 여전히 그의 문장을 읽는다. 여전히 그의 인물들과 대화한다. 그리고 매번 새롭게 느낀다. 만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진정한 만남은 시간 속에서 계속 깊어진다는 것을.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만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가 나를 불러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만남 덕분에, 나는 조금 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만남 / 김정아 인문학자·(주)스페이스눌 대표 *1969년 출생.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학사, 석사를 거쳐 美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어문학부 대학원 슬라브 문학으로 석·박사 학위 취득. 저서로는 『패션 MD』 시리즈 3부작, 『모칠라 스토리』, 『라틴 아메리카의 보석 콜롬비아』. 20여 권의 러시아 관련 번역서 출간. 10년에 걸쳐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죄와 벌』(2020) 『백치』(2021) 『악령』(2023)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2025)’ 단독 완역. 2024년 주한 콜롬비아 대사관 공로상 수상. 現 ㈜스페이스 눌 대표(2017~), 번역가, 작가로 활동 중. 나노 바나나 2 이미지 생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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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핑크하트 작성시간 26.06.23 new
안녕 하세요...망실봉님
감동방에 좋은 글 고맙습니다..
좋은 일 많은 행복한 화요일 보내세요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
답댓글 작성자망실봉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3 new
반갑습니다, 핑크하트 님!
남겨주신 다정한 글귀가
마음을 참 포근하게 만들어 주네요.
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다는 그 한마디에
피로가 모두 씻겨 나가는 듯합니다.
핑크하트 님이야말로 오늘 가장 행복하고
기쁨 넘치는 화요일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늘 평안하시고 행복하세여! 🌸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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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목자 작성시간 26.06.23 new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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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망실봉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3 new
안녕하세요, 목자 님!
감동방에 발걸음 해주시고 따뜻한 인사까지
남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웃음 가득한 편안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늘 건강하세요! 😊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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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승 작성시간 26.06.23 new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