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순이의 대박
무작위로 던져 준 화투 두 장, 앞면의 그림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조심스럽게 뒤집어 본다. 활짝 핀 빨간 목단 꽃이 두 장. 이게 웬 횡재람. 이 목단 꽃 두 장으로 오백 원짜리 동전 열 개가 내 것이 된다. 회심의 미소를 감추고 헛기침을 한다. 좌중의 눈치를 살핀 다음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 마디 던진다.
“땡이야요”
“아니, 또?”
열심히 패를 살피며 수를 가늠하느라 눈에 힘을 주고 있던 일행들. 입으로 원성을 쏟아내지만 한바탕 웃음이 자지러진다. 나는 제법 수북해 보이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의기양양하게 쓸어온다. 이런 재미를 손맛이라 하는 걸까. 마치 노름꾼이라도 되는 양 손맛까지 떠올리다니 스스로도 우습다.
그 게임의 진수는 사실 내가 내민 ‘땡’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보너스라고나 할까. 같은 그림이 두 장 들어오면 ‘땡’을 외치며 판돈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은 본 게임의 판돈과는 별개였다. 나의 ‘땡’ 은 동전을 부르는 종소리가 되었다. 그러자 다들 나를 ‘땡순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놀이나 게임에 별로 흥미를 못 느끼는 데다 화투는 더구나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다 할 수 없이 하게 되어도 매번 졌다. 그러니 더 재미가 없을 수밖에. 그날 율리따의 용문 집에 모인 사람들이 월남뽕을 하자고 했을 때 내심 걱정스러웠다. 뽕이라는 어미에서 그게 화투놀이라는 것을 눈치는 챘는데 피할 길이 없었다.
학교 후배인 율리따는 건강이 좋지 않아 주말이면 그곳에서 지냈는데 지인들을 자주 초대했다. 시간이 없어, 부를 때마다 가진 못했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초대에는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곳 주변 경관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모이는 사람들이 유쾌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그날따라 늦가을 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밖에 나가 산책을 할 수도 없으니 ‘월남뽕’이나 하자는 말에 모두 반색을 했다. 나는 할 줄 모르니 빠지겠다고 꽁무니를 뺐지만 소용없었다. 해보면 그 재미에 푹 빠질 것이라며 입을 모아 부추겼다.
거실에 큼직한 담요가 펼쳐지고 율리따가 묵직해 보이는 바구니 하나를 들고 나왔다. 바구니에서는 철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자 만원씩 내세요"
주인의 명령에 모두 주섬주섬 만원 지폐를 내놓았다. 그러자 바구니 뚜껑을 연 율리따는 오백 원짜리 동전 스무 개씩을 각 사람 앞에 놓아주는 게 아닌가. 모르긴 해도 판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심은 없어도 집에서 하는 화투의 판돈은 점 백 이나 십 정도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월남뽕’이라는 놀이를 위해 동전까지 준비되어 있다니 대체 얼마나 재미난 것일까 궁금하기는 했다.
처음인 나를 위해 간단하게 룰을 알려준다. 먼저 둘러앉은 사람 모두에게 좌장이 화투 두 장씩을 나누어 준다. 그리고 나머지를 갖고 있다가 그 중 한 장을 제시한다. 그때 패가 무엇이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것이다. 게임에 들어가기 전에 나누어 준 동전 하나씩을 가운데에 내놓아야 한다.
제시된 화투의 달(月)이, 손에 쥐고 있는 화투 두 장의 달 안에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가령 일월과 십일월이 들어왔다면 돈을 딸 확률이 그만큼 높다. 마찬가지로 두 장의 숫자가 가까울수록 확률도 낮았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제시된 화투에 비 그림이 그려 있으면 암만 패가 좋아도 그만 죽어야 했다. 게다가 이월과 구월 정도로 넉넉하게 사이가 떴어도 안심할 수 없다. 이월은 일월이 ‘나 여기 있어’ 할 것이고 구월은 또 시월이나 십일월이 ‘메롱’ 할 것이다.
그 게임의 묘미는 거기에 있었다. 얼핏 확률이 높은 것 같아도 실패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전혀 가망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 좁은 틈을 비집고 행운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네 삶과 닮은 것 같지 않은가.
꼭 맞아떨어질 것 같아 동전 몇 개를 호기롭게 던져보거나 아니면 올인도 마다 않는다. 그러다 뜻밖에 비나, 들고 있는 패 바깥의 달이 나올 때 탄식과 더불어 웃음소리가 천정을 찌르는 것이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적나라한 즐거움은 그 순간 죄를 물을 수가 없다.
나는 그 때 아마 땡을 다섯 번 이상은 했을 것이다. 본전의 갑절을 가져왔으니 대박을 친 셈이다. 살면서 그런 일은 또 없으리라. 노름에 빠지는 사람들의 심리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놀이와 노름의 아슬아슬한 경계, 그 너머의 함정도 더 확연히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 이복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