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 레퀴엠중 분노의 날

작성자정남진1|작성시간24.05.17|조회수39 목록 댓글 1





Verdi-Requiem (Dies Irae) Tullio Serafin(지휘)Rome Royal Opera Chorus(Album)



베르디의 레퀴엠 △

그는 그의 생애를 통해 로시니와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의 데뷔 곡은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서곡이었다. 

게다가 그는 1868년 로시니의 사망을 접한 베르디는 
그의 1주기를 기하여서 여러 유명 작곡가가 참여해 만든 
레퀴엠을 연주하여 그를 기리자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위원회가 구성되고 곡의 전반에 관해 논의하였으며 
각기 악장들을 배분 받아서 곡을 쓴 후에 발표하기로 하여서 
이듬해 1주기에는 이미 대부분의 준비가 이루어졌었다. 

베르디는 그 중 마지막 곡인 Libera me를 맡아 썼다. 
모든 준비가 다 이루어져서 연주만을 남겨놓고 있었지만
예기치 못한 연주자 사정으로 인하여 초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악보만을 봉헌하려한 것조차도 
이루어지지 않고 말았다.

1873년 아이다를 다시 상연해 올리기 위해서 연습하고 있을 때 
그는 I promessi sposi의 작가인 만포니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레퀴엠을 이미 작곡해 보았던 베르디는 
만포니를 위해서도 
그의 기념일에 연주할 곡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만포니는 베르디가 존경하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 후 리코르디에게 쓴 편지에서 
그가 만쪼니는 베르디가 존경하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 후 리코르디에게 쓴 편지에서 
그가 만쪼니의 1주기 기념일에 연주할 레퀴엠을 써서 
미사를 드리려 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를 위해서 그 시대에 유럽에서 행해지는 
레퀴엠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자신이 쓸 형태를 결정하게 되는데 
그는 당시 유행하던 형식에서 조금 탈피하여서 
독창과 중창의 비중을 한결 높여서 레퀴엠을 완성하였다. 

그 중에 어느 악장은 악장 전체가 독창과 중창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그가 로시니 레퀴엠을 기획하고 작곡한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상관 관계는 
최근의 로시니 레퀴엠 전곡이 발견됨으로서 증명되었다. 

베르디는 레퀴엠 이외도 스타바트 마테르, 
네 개의 성가곡(Quattro Pezzi Sacri)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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