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의 주역 신미대사(信眉大師)
한글 창제의 산파역할을 한 신미대사,
그가 주지로 있던 복천암(福泉庵)은 한글 창제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도량(道場)이다.
복천암 사적기(福泉庵事蹟記) "세종은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대사로부터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梵語)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복천암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5백미터 가면 신미대사부도탑(보물 제1416호)이 있다.
세인의 관심을 다시 끌고 있는 세종의 왕사(王師)였던 신미대사(1403~1480)가 한글 창제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설은 그동안 종종 제기되어 왔었다.
그동안의 정설은 세종대왕이 명령으로 집현전(集賢殿) 학자들이 이의 실무 작업을 맡았고,
구체적으로는 우리 입의 발음기관을 본 떴다는 것이었다.
현재 가장 유력시 되는 설은 범자(梵字) 모방설이다.
조선초기 유학자인 성현(成俔1439-1504)의 저서 용재총화(慵齊叢話)나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도 언문은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와같이 한글 창제의 주역인 신미대사 친동생인 집현전 학사 김수온(金守溫)이 쓴
복천보강, 효령대군(孝寧大君) 문집, 조선실록(朝鮮實錄), 영산김씨 족보등 각종 자료를 근거로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산파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이 한글 창제 후 불경(佛經)을 언해(諺解)하기 시작한 것도 신미대사의 영향이며
언해할 서책이 많은데 굳이 불경부터 한 이유는 신미대사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세종이 한글 창제의 초석을 다진 고마움의 표시로 복천암에 삼존불(三尊佛)을 조성,
시주했으며 죽기 전에 유생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유언으로 신미대사에게
`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
(禪敎宗 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礙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올라있지 않지만 신미대사의 속가 집안인 영산 김씨 족보에 스님이 집현전 학자로
세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러가지 문헌이나 기록으로 보아 한글 창제의 모델이 범어가 분명한데
그 당시 범어를 아는 스님은 신미대사 밖에 없었다고 한다.
신미대사가 실제 한글을 창제했다고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것은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으로
집현전 학자들 중에 반대하는 학자 최만리, 김문, 정창손 등 많았으며
한글창제를 극력 반대하는 상소문(上疏文)까지 올리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세종이 한글을 오랫동안 지키고 신미스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고, 신미대사에 대한
세종(世宗)의 신뢰가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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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학계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한글은
옛 몽골의 파스파 문자를 모방한 것`이라고 깎아내리는 분위기가 있었다.
일부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한글은 결코 파스파 문자의 단순한 모방이라고 할 수 없는 독창적인 문자다.
우선 한글의 자형(字形-글자 모양)은 어떤 문자와도 다르다.
발음기관과 천(天).지(地).인(人)을 표현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자형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ㅇ`자를 써서 모든 모음을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
종성((終聲-받침)이 있는 것도 파스파 문자에 없는 한글만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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