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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의 意(의)는 어떤 것인가? (수정완결본)

작성자조성래|작성시간15.09.25|조회수926 목록 댓글 5

오늘 아침에는 매우 기분이 좋다. 왜냐하면 지난 10일 간 心(심), 意(의), 識(식)의 정확한 개념을 잡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그것들의 개념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설명해놓은 개념에 가려, 많이 헷갈리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잘못된 것들임을 알고, 다음과 같이 意(의)에 대해 정리한다.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의 意(의)를 뭐라고 번역해야 할까?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에서 意(의)는 어떤 것이고, 앞에 나온 오온에서의 識(식)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조계종표준 한글 반야심경에는 한역(漢譯) 반야심경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을 단지 안 이 비 설 신 의도 없고, 색 성 향 미 촉 법도 없으며,”이라고만 번역돼 있어, ‘意(의)’와 ‘法(법)’의 뜻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데, 意(의)와 法(법)의 뜻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다. 

  意(의)를 뭐라고 번역해야 할까? ‘뜻’?, ‘마음’?, ‘의식’?, ‘생각’? ....? 과연 意(의)를 무엇으로 번역해야 법을 대상으로 하는 감각기관이 될까? 그럼 여기서 법은 뭘까? 법은 사념처(四念處), 즉 신수심법(身受心法)의 법으로서 ‘마음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들’이다. 법이 이런 것이라면, 意(의)는 뭐라고 번역해야 할까?

 

      意(의, manas)는 ‘심안(心眼)’, ‘마음’, ‘의식’ 등으로 번역돼야한다

 

  意(의, manas): 여기서 意(의)는 산스크리트어 manas(마나스)를 한역한 것으로, ‘말나(末那)’로 음사(音寫)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흔히 유식(唯識)계통의 학파에서는 意(의) 또는 말나(末那)에 대해 복잡하고도 어렵게 설명하고 있으나,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법(法), 즉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法]을 지각하는 감각기관이다.

意(의)는 이해, 심정, 양심, 상상, 생각, 개념, 의향, 욕망, 의지, 기분 등 자신 내부의 대상들, 즉 심리현상들을 지각(知覺)하는 감각기관으로, 心(심), 意(의), 識(식), 知(지), 意識(의식), 意念(의념), 心意(심의), 心識(심식) 등으로 한역돼 있는데, 이 중 心(심), 意(의), 識(식), 知(지)는 모두 ‘아는 작용’, ‘지각작용’일 뿐이고, 그 외의 것들도 같은 것인데, 굳이 意識(의식), 意念(의념), 心意(심의), 心識(심식)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면, 그것들은 ‘지각(知覺)하는 그 자체를 지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意(의, manas)를 ‘마음의 상태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法]을 보는 눈’이라는 뜻으로 ‘심안(心眼)’, ‘마음’, ‘의식’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말나식(末那識)’은 유식학파들이 유식이론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낸 말

 

 意(의)에 대해 설명하면서 흔히 “意(의, manas)는 제6식인 意識(의식, mano-vijñāna)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意(의)’라고 하지 않고 ‘말나(末那)’ 또는 ‘말나식(末那識)’으로 음역(音譯)하여 사용한다”고 하며, 마치 意(의, manas), 말나(manas), 意識(의식, mano-vijñāna), 이 세 가지가 다른 것인 양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식학파의 사람들이 유식학 이론을 세우기 위해 이와 같은 언어조작을 통하여 ‘말나식(末那識)’이라는 識(식)을 하나 만들어내어, 유식학 이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意(의, manas)도 자신의 내면의 일을 지각(知覺)하는 것이고, 意識(의식, mano-vijñāna)도 똑 같은 것이거나 ‘지각하는 마음[意] 그 자체를 지각[識]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心(심), 意(의), 識(식)은 똑 같은 의미로 사용됐다

 

 석가부처님은 心(심), 意(의), 識(식), 이 셋을 같은 것으로 보아, 그 차이를 구분해 보인 적이 없었고, 이들을 나란히 함께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초기불교의 논서인 <품류족론(品類足論)>과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등에 의하면, “심(心)이 곧 의(意)이고, 의(意)는 식(識)이라서, 이 셋은 이름만 다를 뿐, 실체[體性]는 하나다”라고 했다. 초기불교의 대표적 논서인 세친(AD.4세기)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도 “심(心), 의(意), 식(識)은 이름만 다를 뿐, 실체는 하나다”라는 내용이 나오고, 또 AD.5C에 저술되고 남방불교에서 중요시되는 <청정도론>에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또 대승불교의 대표적 논서인 <유식론唯識論>에서도 “심(心), 의(意), 식(識), 요별(了別) 등 이 넷은 같은 것이고, 이름만 다르다”고 했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논서도 ‘심(心), 의(意), 식(識)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3C초 번역가인 지겸(支謙)은 <대명도경大明度經>의 번역에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대신 ‘眼耳鼻口身心(안이비구신심)’으로 번역하여, 意(의) 대신 心(심)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心(심), 意(의), 識(식)과 산스크리트어 citta(찟따), manas(마나스), vijñāna(비즈나나)는 같은 뜻을 가진 동의어이기 때문에 citta(찟따)心(심), 意(의), 識(식) 등으로 한역돼 있고, manas(마나스) vijñāna(비즈나나)心(심), 意(의), 識(식) 등으로 한역돼 있다.            

 하지만 <지관(止觀)> 제2권에서는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 목석(木石)과 다르므로 ‘心(심)’이라 하고, 心(심)의 생각하[籌量,思量]는 작용을 ‘意(의)’라고 하고, 또렷이 식별(識別)해서 아는[了了別知] 작용을 ‘識(식)’이라고 한다”고 하며, 意(의)와 識(식)을 心(심)의 한 작용으로 보아, 여기서부터 조금 다르게 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올바로 본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 이 글은 다음카페 위빠사나금정선원 조성래 원장의 글입니다. 이 내용에 동의하시면, 카톡 또는 문자로 복사하여, 다른 분들께 전달해주시고, 더 많은 글을 보려면 위빠사나금정선원 카페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불교'라는 종교는 있어도 붓다의 가르침도 없고, 여법(如法)한 수행도  없는 이 시대, 사이비들이 자기가 깨달았다고 큰 소리치며 광고하고 있는 이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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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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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조성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9.25 뒷 부분 다시 덧붙여 넣었으니, 다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조성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9.28 다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yimdream | 작성시간 15.09.29 읽어보겠습니다~~
  • 작성자반야 | 작성시간 15.09.29 고맙습니다
  • 작성자조성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10.01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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