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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제2분,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작성자조성래|작성시간14.11.09|조회수907 목록 댓글 0

  금강경 제2분에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이라는 말이 있다. 지난번에 이 카페에서 이것에 대한 해설을 붙인 적이 있는데, 그것을 보완하여 다시 올립니다.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구마라집)

應云何住 云何修行 云何降伏其心 (보리유지)

云何應住 云何修行 云何發起菩薩心 (진제)

云何住應 云何修行應 云何心降伏應 (급다)

應云何住 云何修行 云何攝伏其心 (현장)

云何應住 云何修行 云何攝伏其心 (의정)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여기서 원문의 ‘住(주)’와 ‘降伏其心(항복기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위의 6가지 번역 중 구마라집의 번역을 제외한 나머지 5종의 번역이 모두 云何住(운하주)와 云何降伏其心(운하항복기심) 사이에 云何修行(운하수행)이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머문다[住]’, ‘수행한다’, ‘그 마음을 항복 받는다’는 말은 비슷하거나 같은 의미다. 인도의 불교경전 표현의 특징 중 하나는 동의어의 반복을 통해 의미를 명료하게 하거나 뜻을 강조하는 것이다.

  대승불교가 아닌 초기의 석가불교에서는 ‘마음을 자신의 몸과 마음에 머물게 하여, 몸의 동작이나 움직임, 느낌, 마음의 상태, 마음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 해가라’고 가르친다. 이런 석가의 방법을 ‘사념처(四念處) 수행’이라고 하는데, 사념처(四念處) 대신 ‘사념주(四念住)’라고도 한다. 여기서 ‘處(처)’나 ‘住(주)’는 ‘머문다’는 뜻으로, 마음이 자신의 몸과 마음 이외의 다른 대상으로 달아나지 않고, 줄곧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금강경에서는 이런 석가의 사념처(四念處) 수행법과 다른 방법으로 수행해서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한다고 가르친다. 그럼 금강경에서는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한다고 가르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금강경의 경문에 이미 나와 있는데, 조금 뒤에 알게 될 것이다.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위의 질문은 석가가 닦았던 선정을 닦지 않고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대승불교의 보살은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질문은 석가불교와 판이하게 다른 대승불교의 새로운 방법의 특징이 뭔지 말하기 위해 깔아놓은 질문이다.

  대승의 금강경불교는 석가가 ‘닦아라’고 한 선정과 지혜는 닦지 않고,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인욕(忍辱), 수지독송서사(受持讀誦書寫) 등을 통하여 무량한 복덕만 닦는다. 물론 대승불교의 경전에도 ‘선정’과 ‘지혜’라는 단어는 많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선정과 지혜는 강조되지 않고, 오직 액난(厄難)소멸과 무량한 복덕(福德) 얻음만 강조됐다. 이런 사실은 대승불교 경전에는 선정과 지혜를 닦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잘 말해주고 있다. 실은 대승불교에는 제사나 기도, 다라니, 독경, 보시 등을 통하여 복을 비는 기복불교의 신앙만 강조되었지, 선정과 지혜를 닦는 수행은 강조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은 금강경 제6분에 “여래가 입멸한 후 500년 뒤에 계를 지키며 복(福)을 닦는 자가 있어, [금강경의] 이 글귀를 보고 신심을 일으켜, 이것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구절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분명히 이 부분에서 ‘계를 지키며 선정과 지혜를 닦는다’고 말하지 않고, “계를 지키며 복을 닦는다”고 말하고 있다.

  또 이런 사실은 구마라집이 금강경을 번역하면서 운하주(云何住)와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 사이에 있던 ‘운하수행(云何修行)’이라는 구절을 빼버린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대승불교의 주된 고객인 일반대중들은 사실 “수행하라”는 말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액난소멸’이나 ‘업장소멸’, ‘무량한 복덕 얻음’ 등과 같은 듣기 좋은 말만 하려고 구마라집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수행해야한다’는 말을 빼버린 것이다. 금강경을 받아 지녀, 공부하고, 독송하는 이유가 무량한 복덕을 얻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반야지혜를 닦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위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정말로 반야지혜를 닦기 위해 이 금강경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한다면,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반야지혜는 독송을 아무리 많이 해도 생기지 않고, 오직 선정에 들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해가야만 생기기 때문이다.

  금강경에 나오는 부처의 가르침을 보기 전에 먼저 석가 부처님의 마음 머무는 법과 수행하는 법, 그리고 그 마음을 항복 받는 법을 알아보자. 부처님의 유언법문인 유교경(遺敎經)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괴로움을 다스리는 법

 

   1) 감각기관[오근]을 통제하라.

 

  너희 비구들이여, 이미 계에 머물 수 있거든 마땅히 오근(五根)을 통제하여, 방일(放逸)하여 오욕(五欲)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소치는 사람이 막대기를 들고 지켜보아, 소가 함부로 날뛰어 남의 곡식밭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汝等比丘。已能住戒當制五根。勿令放逸入於五欲。譬如牧牛之人執杖視之。不令縱逸犯人苗稼)

 

  만약 오근을 제멋대로 하도록 놔두면 오욕이 끝이 없어서, 다스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길들지 않은 야생말과 같아서 고삐로 매어두지 않으면 장차 사람을 끌어다 구렁텅이에 빠뜨릴 것이다. 도적에게 겁탈 당한 피해(害)의 고통은 한 생애에 그치지만 ‘오근’이라는 도적이 끼치는 화(禍)의 재앙은 여러 생에 걸쳐 그 피해가 대단하니,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若縱五根。非唯五欲將無崖畔不可制也。亦如惡馬不以轡制。將當牽人墜於坑陷。如被劫害苦止一世。五根賊禍殃及累世。爲害甚重。不可不愼)

 

  이런 까닭에 지혜로운 자는 오근을 통제하여, 오욕을 따르지 않느니라. 오근을 지켜가는 것은 마치 도적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설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만약 오근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더라도 그것들 또한 오래지 않아 알아차려서[見], 그런 상황이 끝이 날 것이다.

 

(是故智者制而不隨。持之如賊不令縱逸。假令縱之。皆亦不久見其磨滅)

 

   2) 마음을 항복받아라.

 

  이 ‘오근’은 마음이 그 주인이다. 이런 까닭에 너희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통제해야 한다. 마음은 독사나 맹수, 원수나 도적보다도 더 무서워해야 할 존재이니, 큰 불이 번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꿀이 담긴 그릇을 손에 든 채 가볍고 성급하게 움직여, 단지 꿀만 보고, 깊은 구덩이는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한 마치 광분한 코끼리를 제어할 갈고리가 없는 것처럼, 원숭이가 나무를 만난 것처럼, [마음이] 마구 뛰어오르고 분주히 내달리는 것을 가히 막기 어렵도다. 빨리 그 마음을 제지하고 꺾어, 제멋대로 설치고 돌아다니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런 마음을 제멋대로 하도록 놓아두는 사람은 좋은 것을 잃게 되지만, 마음을 통제하여 줄곧 한 대상에 머물게 되면, 이루지[辦]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런 까닭에 비구들은 부지런히 정진하여,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

 

 (此五根者心爲其主。是故汝等當好制心。心之可畏甚於毒蛇惡獸怨賊大火越逸。未足喩也。動轉輕躁但觀於蜜不見深坑。譬如狂象無鉤。猿猴得樹騰躍跳躑難可禁制。當急挫之無令放逸。縱此心者喪人善事。制之一處無事不辦。是故比丘。當勤精進折伏其心)

 

  위의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마음을 통제하여 줄곧 한 대상에 머물게 하는 것이 머무는 것이고, 그렇게 한 대상에 많이 머문 결과, 더 이상 마음이 다른 데로 달아나려는 뜻이 쉬어진 것이 그 마음을 항복받은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 줄곧 한 대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선정(禪定)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또 유교경에서 붓다는 선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禪定(선정), 늘 마음을 안으로 거둬들여 선정에 머물라.

 

  "여러 비구들이여, 만약 마음을 안으로 거둬들이면, 선정(禪定)에 머물게 된다. 마음이 선정에 머물기 때문에 몸과 마음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生滅] 존재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까닭에 여러분은 항상 꾸준히 노력하여 온갖 선정을 닦아가야 한다. 만약 선정을 얻게 되면 마음이 어지럽지 않느니라. 이것은 마치 물을 소중히 여기는 집에서 연못의 제방(堤防)을 잘 관리하는 것과 같다. 닦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지혜’라는 물을 모으기 위해 선정을 잘 닦아 [마음이 밖으로] 새 나가지[漏失] 않도록 하는 것을 ‘선정’이라고 한다." 不漏失, 無漏

 

(汝等比丘。若攝心者心則在定。心在定故能知世間生滅法相。是故汝等。常當精勤修集諸定。若得定者心則不亂。譬如惜水之家善治堤塘。行者亦爾。爲智慧水故善修禪定令不漏失。是名爲定)

 

  우리는 여태껏 붓다가 말하는 머묾과 그 마음을 항복 받는 방법에 대해 알아봤다. 그럼 금강경에서는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한다고 가르치는가? 금강경에서는 선정이나 지혜를 닦으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온갖 종류의 수많은 중생들을 내가 다 제도했지만 실은 한 중생도 제도된 바가 없다고 보는 것이 ‘그 마음을 항복 받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금강경에서는 “應無所住而生其心(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 하여, “머무는 곳이 없이 그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모습에도 머물지 말고, 소리, 냄새, 맛, 감촉, 법 등에도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과연 모습에도 머물지 않고, 소리, 냄새, 맛, 감촉, 법 등에도 머물지 않고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마음은 모습, 소리, 냄새, 맛, 감촉, 법 등 그 대상에 의지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약 감각기관이나 그 대상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마음은 일어날 수 없다. 마음은 언제나 그 둘을 의지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부분에 문제가 있다. 아마 이 말은 굳이 선정을 닦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려고 한 것 같다. 석가불교의 수행법인 선정의 필요성을 없애버리려고 한 것이고, 수행자체를 없애버리려고 한 것이다. 초기의 대승불교는 오로지 수행만 강조하는 석가불교에 대한 반발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수행’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금강경의 이 부분의 번역에서도 엿볼 수 있다. 구마라집은 다른 5종의 이역본들에 들어있는 云何住(운하주)와 云何降伏其心(운하항복기심) 사이에 있던 ‘云何修行(운하수행)’을 빼버리고 번역했다. 즉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번역과정에서 빼버린 것이다. 이것을 보면, 초기 대승불교도들이 ‘수행’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다. 하라는 수행은 하지 않고 무량한 복덕만 바라는 불자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 ‘붓다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다. 붓다의 제자는 선정과 지혜, 자비관을 닦음으로써 수행도 하고, 무량한 복덕도 짓는다.

* 금강경은 대승의 최초기에 만들어진 경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범본 금강경에는 아직 ‘대승’이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고, 또 범본뿐만 아니라 한역본 금강경에도 ‘空(공)’이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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