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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의 불생불멸(不生不滅)에 대한 해설의 한 단편, 말장난 불교를 비판함.

작성자조성래|작성시간15.04.04|조회수95 목록 댓글 2

오늘은 저의 반야심경 해설의 일부를 찢어 옮깁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중아함경> 제18권 중아함 75 장수왕품에 <정부동도경(淨不動道經)>이 있는데, 그것을 한 번 보자.

 

"세존이시여, 비구가 어떻게 수행해야 반드시 열반을 얻나이까?"

"아난아, 만약 비구가, <‘나’라는 것은 없는 것이고 ‘내 것’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며, 미래에도 ‘나’라는 것은 없을 것이고, ‘내 것’이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라고 그렇게 수행하면 과거에 있던 것도 곧 다 버리게 될 것이다. 아난아, 만약 비구가 평정[捨]을 좋아하지 않고, 평정[捨]에 집착하지 않으며, 평정[捨]에 머물지 않는다면, 아난아, 이와 같이 수행하는 비구는 반드시 열반을 얻는다."

"세존이시여, 만약 비구가 취하는 것이 없으면 반드시 열반을 얻나이까?"

"아난아, 만약 비구가 취하는 것이 없으면 반드시 열반을 얻느니라."

그 때에 존자 아난이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미 청정한 움직임이 없는 도[不動道]를 말씀하셨고, 이미 청정한 무소유처도(無所有處道)를 말씀하셨으며, 이미 청정한 생각 없음의 도[無想道]를 말씀하셨고, 이미 무여열반(無餘涅槃)을 말씀하셨나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거룩한 해탈(解脫)입니까?"

세존께서 대답하셨다. "아난아, 많이 들어서 아는 거룩한 제자는 이와 같이 관찰한다.

'현세의 탐욕이나, 후세의 탐욕이나, 혹은 현세의 몸[色]이나, 후세의 몸이나, 혹은 현세의 탐욕이라는 생각이나, 후세의 탐욕이라는 생각이나, 혹은 현세의 몸[色]이라는 생각이나, 후세의 몸[色]이라는 생각과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 소유가 없는 곳이라는 생각, 상(想)이 없다는 생각 등 이 모든 생각들은 다 무상한 법이고, 괴로움이며, 사라지는 것들이다. 이것을 ‘자기가 존재하는 것[自己有]’이라고 말한다. 만약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태어나는 것이고, 늙는 것이며, 병드는 것이고, 죽는 것이다.'

아난아, 만약 이 법이 있어서 모든 것이 다 소멸하여, 남음이 없고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는 곧 태어남이 없고,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없을 것이다. 거룩한 제자는 이와 같이 관찰한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벗어나야 할 법이고, 만약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열반이 있다면 그 이름은 감로(甘露)일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이 관찰하고, 이와 같이 보면 반드시 욕구, 탐욕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할 것이고, 존재[有]의 번뇌와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할 것이다. 해탈한 뒤에는 곧 해탈한 줄을 알아, 태어남[生]이 이미 다하고, 거룩한 행[梵行]은 이미 확립되었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다음 생을 받지 않을 줄 있는 그대로[如眞] 안다.

 

위의 경의 밑줄 친 부분을 잘 보면 ‘모든 것’으로 표현된 오온이 다 소멸하여 남은 것이 없고,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나 더 이상 생로병사의 고통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불생불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오온이 다 소멸하여 남은 것이 없고,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다면’이라고 표현했다.

 

원래 이런 불생불멸의 의미가 후기 대승불교 경전에서 변색되어 달라지는 것을 <해심밀경>에서 볼 수 있다. 해심밀경은 후기 대승의 유식사상(唯識思想)을 설한 경으로, 3세기 후반 무렵에 나온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깊은 비밀스러운 내용을 이해시키는 경’이라는 <해심밀경解深密經>의 경제목에 나타나 있듯이 석가부처님에 의해 설해지지 않았던 내용의 가르침을 이렇게 설할 수 있는 것은 성문승(聲聞乘)이나 대승(大乘)을 넘어선 가장 뛰어난 일체승(一切乘)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이 경의 5장 말미(末尾)에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상한 불교가 시작되는 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심밀경解深密經>

 

“만약 어떤 중생이 이러한 견해를 따르지는 않지만, 남에게서 홀연히 ‘일체 법은 다 자성이 없고, 생겨남[生]도 없고, 사라짐[滅]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이다’라는 말을 듣고는 문득 두려움을 내며, ‘이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마군(魔軍)의 말이다’라고 하며, 이런 소견을 내고는 이 경전에 대해 비방하고 헐뜯고 욕을 한다면, 이런 인연으로 큰 쇠퇴와 손해를 얻고 큰 업장(業障)을 범하리라.”

 

위의 <해심밀경>의 내용 중 ‘일체법은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이다’는 것이 석가의 교설과 달라진 내용이다. ‘본래 적정한 자성이 열반’이라는 대승의 새로운 교설을 하나 만들어냄으로써 아주 쉽고도 명료했던 석가의 법에 잡것을 섞어 넣어 난해한 불교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건 정말로 마군(魔軍)의 말이지 부처님의 말씀은 아니다. 석가의 법에서는 볼 수 없던 이런 난해한 교설을 만들어내어 불법을 파괴한 자들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해괴한 언어로 순진한 중생들을 데리고 노는 자들이 아직도 한국 불교계에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밝음과 밝지 않음을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에 둘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둘 없는 자성이 바로 진실한 자성입니다. 진실한 자성은 어리석은 범부라고 줄어들지도 않고, 현명한 성인이라고 불어나지도 않으며, 번뇌 속에서도 어지럽지 않고, 선정 속에서도 고요하지 않습니다. 끊어지지도 않고, 이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중간에 있지도 않고, 안이나 바깥에 있지도 않으며,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자성과 모습이 한결같아 늘 머물러 변하지 않음을 이름하여 도(道)라고 합니다.”

 

  위의 글은 요즘 떠들썩한 무심선원의 김태완 원장의 <육조단경>에 대한 해설 글인데, “번뇌 속에서도 어지럽지 않고, 선정 속에서도 고요하지 않다”는 등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끌어 모아 놓은 해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자 여러 분은 이런 내용을 접해보면, 한국불교가 그동안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알 수 있다. 석가 가르침과 180도 다른 자성자리 때문에, 또 자신도 모르면서 잘 아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그것을 본 것처럼 떠벌리는 것 때문에 일반인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미궁(迷宮)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런 말장난 불교에 빠진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이런 식으로 평생 해봐야 석가 집안의 문 앞에도 못 가보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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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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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반야 | 작성시간 15.04.04 박수 짝짝짝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조성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4.05 반야님께서 박수를 쳐주시니, 기분이 좋습니다. 반응을 보여주시면 말한 사람이 머슥하지 않거던요. 아무 재미도 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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