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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첼로소나타 1번' 이 곡은 브람스가 32세 때 완성되었다 3악장으로 마무리되었으나 사실은 이 사이에 들어갈 아다지오의 느린

작성자아스팔트정글|작성시간23.08.06|조회수56 목록 댓글 0

https://youtu.be/fswUjjn6LvQ

 

[브람스 첼로소나타 1번 Op.38]

 

브람스는 첼로와 피아노용의 2중주곡을 적어도 3개 이상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그 중에는 18세 전후의 작품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첼로 소나타로서는 작품 38번과 작품 99번 2곡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 중 ‘1번’은 유명한 ‘독일 레퀴엠’이 거의 완성되었을 무렵, 브람스의 특유의 우수에 찬 서정성이 강하게 나오기 시작한 제2기의 작품이고, ‘제2번’은 원숙한 수법을 보여주는 만년의 작품이다.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와 함께 자주 연주되고 있는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는 명실공히 낭만파 시대의 첼로 소나타의 대표적 걸작이다.

 

이 곡은 황량한 느낌을 주는 북국의 정취를 지닌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각 악장이 모두 단조로 이루어진 데서 기인된다 그리고 또 첼로가 고음역에는 좀처럼 올라가지 않고 언제나 피아노보다 낮은 위치에 있으면서 깊숙한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악장의 서정적인 선율과 피아노의 기교적인 음향은 이 시기 작품 특유의 낭만적인 정서를 잘 부각시키면서 첼로와 피아노의 2중주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남성적인 감정을 내뿜는다.

 

이 곡은 브람스가 32세 때 완성되었다 3악장으로 마무리되었으나 사실은 이 사이에 들어갈 아다지오의 느린 악장도 함께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성악가이며 첼로 연주자인 친구 갠스바허(Joseph Gansbacher,1829--1911)의 조언을 받아들여 아다지오 악장을 버리고 곡을 다시 꾸몄다 새로이 제3악장을 작곡하여 완성된 뒤 도움이 많았던 캔스바허에게 헌정했다.

 

제1악장(Allegro non troppo) E단조, 소나타 형식

 

기악적으로 만들어진 주제는 첼로에 의해 제시된다 청년기의 브람스 특유의 텁텁한 서정이 가득하다 대위법이나 카논을 도입한 튼튼한 구성이 차가운 맛을 더한다.첼로의 남성적인 무거운 음악에 브람스가 지닌 특유의 우수가 가미되고, 피아노는 침울한 감정을 떨쳐 버리듯이 높낮음의 묘한 정취를 발휘한다.

 

제2악장(Allegretto quasi menuetto) A단조, 3부 형식

 

어둡고 구슬픈 메누엣이다 그러나 그지없이 아름답다 중간부에서는 첼로가 서정적으로 노래한다. 우수는 완전히 떨쳐 버려지지않고, 첼로는 무거운 기분을 계속하면 이끌어 주려고 하는 피아노를자꾸 제압한다.

 

제3악장(Allegro) E단조, 푸가풍의 카프리치오

 

곡은 세 악장이 모두 단조이어서 마지막 악장에서도 밝은 기분은 나타나지 않는다 북독일의 겨울 풍경 같은 황량감이 첼로와 피아노의 교묘한 앙상블로 쓸쓸하게 그려지다가 끝맺는다.울적한 기분은 여기서 노도처럼 세차게 흐른다. 초조와 격앙의 클라이맥스에서 급전하며 조용해져서 누그러진 정취가 떠오르고, 화려한 코다로 급진한다.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Mstislav Rostropovich)

 

로스트로포비치라는 이름은 첼리스트의 이름을 뒤지다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한다. 므스티슬라브와 레오폴드(1892∼1942) 부자가 그들이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20세기 초의 전설적인 첼리스트로 남은 파블로 카잘스의 제자였다. 그리고 므스티슬라브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핏줄 탓인지 환경 탓인지, 므스티슬라브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4세 때 폴카를 작곡해 스스로 연주할 정도였다 한다. 5세 때는 집안이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모스크바 방송 교향악단에서 연주하며 그네신 음악원에서 가르쳤다. 므스티슬라브도 그곳에서 코졸루포프에게 배우기 시작했다. 10세 때인 37년, 레오폴드와 오케스트라 연주여행에 동행했던 그는 최초로 협연의 기회를 잡았다.

 

1941년, 14세의 나이로 첼로와 피아노과를 동시에 졸업한 그는 이듬해 아버지 레오폴드를 잃었다. 당시 레오폴드의 나이 50세에 불과했다. 므스티슬라브는 15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첼로 클래스를 물려받았다. 그는 10대 후반에 이미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 등을 스승이자 동료로 두었다. 모스크바 필과 연주여행을 다녔고, 10년 이상 연상인 리히테르를 독주회 반주자로 두었으며, 길렐스·코간과 피아노 트리오 활동도 했다. 1945년 모스크바 콩쿨을 시작으로 프라하, 바르샤바, 부다페스트에서 콩쿨을 석권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로스트로포비치라 하면 사람들은 모두 레오폴드를 떠올리기보다 므스티슬라브를 떠올렸다. 카잘스에 비한다면 로스트로포비치의 젊은, 아니 어린 시절은 '화려한 인생' 그 자체였다.

 

그가 어린 시절 피아노를 병행해 공부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그는 훗날 부인인 소프라노 가수 갈리나 비슈네프스카야의 독창회 반주를 암보로 연주할 정도로 전문 피아니스트 수준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는 지휘자로서도 큰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처음 첼로의 길을 걸을 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협주곡에서 독주악기로 오케스트라와 대적할 때, 그의 연주는 특히 빛을 발한다. 이는 첼로로 피아노가 내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의도했기 때문이다. 유리처럼 딱딱하고 금속적인 소리에서 돌변해 꿈꾸듯 부드러운 소리를 내고, 어떠한 어려운 기교도 악상에 맞게 소화해 내는 연주. 아버지 레오폴드를 통해 내려온 카잘스의 주법이 므스티슬라브에 이르러, 약 50년만에 다시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그의 연주는 초인적이다' '그는 첼리스트가 아니다. 자연현상이다'라는 찬사를 받았고, 그를 아는 거의 모든 작곡가는 그에게 앞다투어 곡을 헌정했다. 그의 레퍼토리가 현대 곡에 폭넓게 포진해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거꾸로 그의 폭넓은 표현력과 강렬한 연주효과는 작곡가들에게 첼로 협주곡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다고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가 현대 곡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초인적인 연주만큼 그의 레퍼토리도 초인적으로 넓다.

 

1956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가 된 그는 구 소련에서 인권운동을 펼치던 노벨상 수상작가 솔제니친을 옹호한 죄로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했다. 이 또한 정치와는 무관한 인류애의 발로였다. 따라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 앞에서 연주하던 그의 모습이 전혀 쇼나 이벤트로 비치지 않은 것이다.

 

이후 그는 미국을 근거지로 활동하며 지휘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떠나기 전, 쇼스타코비치와 한 약속을 잊지 않았다. 위대한 작곡가의 교향곡이 서방세계에서 영원히 울려 퍼지게 하겠다는 약속이 그것이었다. 이전에도 그의 연주 모습을 보면 협연석에 앉아 오케스트라를 향해 몸으로 얘기하는 듯한 동작을 자주 취하곤 했다. 몸 속에 정열이 끓어오르던 그는 지휘자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안탈 도라티의 후임으로 1977년부터 워싱턴 내셔널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된 그는 이후로도 첼로와 지휘를 병행하며 양쪽 어느 하나 허술함이 없었다. 그가 지휘한 텔덱 레이블의 음반 중에는 이미 수작으로 거론되는 음반들이 상당수 있다. 특히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이나 바이올리니스트들과의 협연 음반들이 좋다. 하지만 그가 어린 시절부터 연주활동을 펼치며 첼리스트로 남긴 구 소련시절의 연주들은 그가 아직 타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전설중의 하나로서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Sviatoslav Teofilovich Richter, 1915 - 1997)는 1915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서 피아니스트이자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와 역시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폴란드 태생의 독일인이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제자였다고 한다.  '독소(獨蘇)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는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피살되었고 어머니는 독일로 망명하여 리히터는 러시아에 혼자 남게 된다.

양친이 음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리히터는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리하여 15살 때인 1930년, 오뎃사 극장의 연습 피아니스트로 일하게 되었고, 1934년엔 쇼팽의 작품으로 리사이틀을 열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직업적인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37년, 비로소 처음으로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위해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겐리히 네이가우스(부닌의 祖父)의 문하에서 수업한다.

 

네이가우스는 이 나이 많은 제자를 극진하게 가르치고 갈무리 해 주게 되는데 그의 소개로 프로코피에프를 알게되어 그의 소나타 6, 7, 9번을 초연하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1945년, 전 소련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소련과 동구(東歐)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게 된다. 1960년, 고소공포증으로 비행기를 타지못하고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하여 서방세계 최초의 연주회를 가졌다. 이를 계기로 그의 이름이 비로소 서방세계에도 알려지게 되었고 세계적인 명성을쌓기에 이른다. 

 

글출처: 하늘바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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