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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의 글 중에서

우리 동네 사람들

작성자석경|작성시간26.06.21|조회수24 목록 댓글 0

아내가 모임에 간 날, 나는 대낮에 혼자서 영화를 보고 아주 기분이 좋아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일 층 현관 입구, 슬라이드식 자동 유리문엔 한지에 立春大吉 넉 자를 먹으로 적은 춘방이 붙어 있습니다. 약간 서툰 글씨지만 정성을 쏟아 쓴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가게 기둥에 입춘이라더니, 두루마기 입고 자전거를 타는 모습처럼 조금 어색해도 드나들 때마다 기분이 좋습니다. 아마 나이 지긋한 누군가가 우리 골목 오십 세대 두루두루 크게 길하라고 붙여놓은 모양입니다.

일 층의 백삼 호에는 목소리가 큰 노인 회장이 삽니다.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유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합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더러 뵙게 되는데 시원시원한 성품인 이분의 악수는 조금 동작이 크고 요란스럽습니다. 함박웃음을 띈 얼굴로 손을 얼마나 힘차게 잡고 흔드는지, 나를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악수라는 서양 인사는 상대의 손을 너무 세게 잡고 흔드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도 나는 맞잡은 손에서 힘이 느껴지는 사람에게 신뢰가 갑니다.

그저께 아파트 일 층의 현관문을 나서는데 난데없이 실비가 내렸습니다. 내 뒤를 조심스레 따라 나오던 젊은 여인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탄성을 냅니다. 시인인 줄 알았습니다.
"빗님이 오시는구나!"

며칠 전 십칠 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도토리묵 한 모를 보내왔습니다. 고향의 선산에서 주운 도토리로 빚었다고 했습니다. 향이나 맛이 기가 막혔습니다. 냄새가 한동안 코끝에서 맴돌았습니다. 오늘 오후에 집을 나서다가 출입문 손잡이에 걸린 검정 비닐봉지를 보았습니다. 싱싱한 상추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연세가 지긋하고 점잖으신, 교직에서 퇴임하셨다던 그 여자분이 보낸 것 같습니다.

십오 층의 인사성 바르고 언제 만나도 밝은 젊은 부부를 존경합니다. 지적장애를 가진 두 아이를 가진 부부입니다. 늘 행복하기를 빌어주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영혼이 맑은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아침마다 거실의 베란다 쪽으로 난 유리문을 열며, 옹기종기 모여 앉은 화초에 '안녕하세요'라고 상큼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는 지금은 이사 가고 없는 중년 부인 이야깁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그녀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자기 집 개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줌을 싸도 치울 생각도, 미안해하지도 않더라는 겁니다.

우아한 옷차림을 한 그 부인의 겉모습 어디에도, 그런 몰상식한 행위와 연결 지을 구석이 떠오르지 않아 고소를 금치 못합니다. A 선생이 저명한 수필가인 K 선생을 두고 하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글과 사람이 너무 다르다던 …. 어제는 위층의 Y 선생이 내게 싹싹한 우리 옆집 새댁의 험담을 늘어놓는 바람에 참으로 난처했습니다. 말 도중에 '아, 예' 하고 대꾸를 한 것이 여간 찜찜하지 않습니다.

이사 온 지 근 일 년이 다 되어 갑니다. 어차피 사람 사는 동네는 크게 다르지는 않은가 봅니다. 이러는 나도 따지고 보면 남의 험담을 늘어놓는 꼴일 터이니 딱한 노릇입니다.

 

 

윤정혁의 수필집 '남향집'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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