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일과를 마치고 친구들과 무·배추를 심을 장소를 둘러보기 위하여 시골을 다녀왔다. 한적한 도로인 줄 알았었는데 오가는 길목은 다니는 차량들로 넘쳤다. 살아가며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그 사이를 못참아 새치기를 하는 차들을 보면서 한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배려는 많이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새치기 하는 것을 너그러이 보아 넘기는 것은 결코 배려나 관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대부분 습관적으로 질서를 파괴하고 있고, 그러한 것을 방관하는 일일지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용서라는 말을 많이 접하였다. 성경말씀에는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하셨다.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용서의 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공동체 안에서는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란다.
삼국지를 읽다 보면 七縱七擒(칠종칠금)이란 말이 나왔다. 제갈량과 맹획 사이에서 나온 고사 성어로서 당시 맹획은 오랑캐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었다. 제갈량이 그를 잡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으나, 그의 마음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갈량은 맹획을 잡았다가 놓아주기를 7번 반복했다. 결국엔 맹획은 마침내 복종하고 부하가 되었다. 여기서의 칠종칠금은 상대를 마음대로 다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갈량의 칠종칠금은 용서가 아니라, 작전이고 회유이다. 맹획이란 사람을 꾀어서 자기 사람으로 삼기위한 계략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가끔 정치인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을 보아왔다. 그것을 두고 ‘악어의 눈물’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강자인 그들이 왜 약자인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보일까? 그것이 진정한 후회이고, 용서를 바라는 것일까? 아니라는 생각이 앞섰다.
가식, 읍소,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동정심을 유발하고 표심을 얻어 보자는 얄팍한 계산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자라면 또 모르되, 남자가 왜 눈물을 아무데서나 보이냐고? 울고 싶으면 집에가서 이불 뒤집어 쓰고 울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악어가 큰 고깃덩이를 삼킬 때는 꼭 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슬픔이나 참회 때문이 아니라 욕심 사납게 먹이를 탐내 종종 자기 입보다 훨씬 큰 덩이를 삼키기 때문이다.
'악어의 눈물'은 사실 반사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악어는 자기 입보다 큰 먹이를 한꺼번에 삼키고 나서 숨을 급하게 들이쉬는 습성이 있어 이 때 눈물샘이 눌리게 돼 마치 먹이를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눈물은 인간의 감성을 자극해 동정심을 유발한다. 그러나 `악어의 눈물'은 '참회의 눈물'이 아니라 `거짓의 눈물' `위선의 눈물'에 불과하다. 물과 뭍에서 최고의 강자 중의 하나인 악어가 다른 동물을 잡아먹은 뒤 흘리는 눈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1970년에 개봉된 우리나라의 영화 중에 장동휘 주연의 ‘용서받지 못할 자’란 영화가 있었다. 한 사내가 사기, 공갈, 협박 등의 죄목으로 복역한 뒤 출감한 후 과거의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동료가 이를 거절하자 그의 아내를 납치하여 폭력을 가해 정신이상자를 만들었다.
이에 격분한 동료는 상대방의 딸을 유괴하는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의 사업을 철저히 방해한다. 결국 복수를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마는 해피엔딩이 아닌 불행으로 막을 내리는 영화이었다.
정말 이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일이 있을까?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인 사형수들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는 종교에 귀의하거나 참회의 눈물을 보인다고들 하였다. 그것이 참회라는 것은 믿어 의심하지 않지만, 그것을 두고 세상사람들이 용서를 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예수가 말하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이고, 제갈량의 칠종칠금과 정치인들이 흘리는 악어의 눈물은 용서와 관련된 내용은 아닐 것 같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상대방을 누구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또한 그의 마음속에서도 항상 께림찍한 그 무엇이 남아있을 것이다.
후회와 용서라는 과정을 남기지 않도록 미리부터 아름답게 세상을 살면 더 좋으련만, 그러하지 못하더라도 모든 걸 용서하며 사는 삶이 진정 행복한 삶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