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찻길 옆 나팔꽃
7
8월이 다가는 무렵 드디어 강일의 집의 리모델링이 완성되었다. 뒷마당이 없어지는 대신 아래층과 2층의 공간이 훨씬 넓어져 2층에다 부엌과 화장실을 넣었다. 강일은 동네사람들을 모아 간단하게 저녁을 내기로 하였다. 중국집에다 음식을 시켜서 새로 만들어진 가게 바닥에다 비닐을 깔았다. 그럴 듯해 보였다.
7시가 되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수정이네도 미리 연락을 해서 오라고 하였더니 수정엄마가 일찌감치 와서는 일을 돕는다.
“강일씨! 몇 사람이나 와요?”
“예! 10명 정도 될 겁니다. 그냥 간단하게 하니까요.”
“가계가 매우 아담하게 꾸며졌어요.”
“그래 보이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어떻게 할 거여요?”
“제가 뭘 하기는 그렇고, 세를 주어야겠지요.”
“그러면 뭐가 들어설까? 과일가계? 아니다 과일가계는 길 너머에 있지. 이 곳에 식당도 잘하면 될 텐데.”
“식당이요? 식당이 될까?”
“아니에요. 요즘은 집에서 밥을 잘 안 해 먹으니까 배달도 하고 하면 될 거여요. 문제는 메뉴선택을 잘 하고.”
“저기 어르신들이 오시네요. 수정 어머니도 이젠 자리에 앉으세요.”
“저는 천천히 할게요. 어른들 먼저 드시고 나서. 수정아! 너 이쪽 구석에 앉아서 먹어라.”
사람들이 강일에 대한 칭찬들을 한다. 요즘은 열심히 살아보려고 일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들.
은수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들어왔다. 강일의 어깨를 툭 치더니 눈짓을 하며 수정엄마 쪽을 손으로 몰래 가리킨다. 강일은 어깨로 은수 아버지를 밀쳤다.
“강일이 너 이제 부자다. 가계가 둘씩이나 되고, 이젠 장가가는 일만 남았네. 누가 강일이 한 테 올지 행복하겠어.”
“형! 밥이나 드셔. 쓸데없는 소리는 거두시고.”
“내가 틀린 말 하냐? 사실인데.”
그러면서 수정엄마를 힐끗 쳐다본다. 수정엄마는 못 들은 체 하며 사람들에게 음식을 챙겨주고 있다.
“형! 왜 그래 쓸데없이.”
강일이 귓속말로 은수아버지에게 나무랐다. 은수아버지는 피식하고 웃을 짓더니 자리에 앉는다.
사람들의 자리가 정리되자 통장님이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데 대한 감사의 말을 하였고, 강일더러 인사말을 하라고 한다. 강일은 쑥스러웠지만 인사를 하였다.
“차린 것 별로 없이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저번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동네 어르신 여러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앞으로 동네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강일이 인사말 잘한다. 박수 부탁합니다.”
은수아버지가 나서서 말하고는 강일에게 술잔을 권한다.
“자! 강일이 한잔 받아라.”
“아니 어르신들부터 드려야지!”
“이건 내가 권하는 술이고, 그 다음은 네가 권해라.”
가계 안에는 선풍기 서너 대가 돌아가며 더운 열기를 바깥으로 내 보내고 있었다. 강일은 오랜만에 느끼는 사람들의 정겨운 채취가 너무나 좋았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수정은 미장원에서 놀고 있는데 나머지 정리를 위하여 수정엄마가 거들어 준다고 단둘이 남았다.
“수정 어머니! 은수아버지가 하는 말 관심가지지 마세요. 그 형이 절 놀린다고 한 번씩 그래요.”
“괜찮아요. 그 정도 멋 받아넘길 저도 아니에요. 엉뚱한 소문이나 날까 신경 쓰여서 그렇지. 그런 정도야.”
“아무튼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별 말씀을요.”
“이젠 제가 치울게요. 수정이 기다릴 텐데.”
“그래요. 가 볼게요.”
“고마워요.”
강일은 현관문을 열어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정리를 마쳤다. 그래도 간단하나마 동네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한 것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덥던 더위가 한발 물러나고 아침저녁으론 가끔씩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로 접어들었다. 강일은 날씨가 시원해지자 일거리가 조금씩 늘어 하루 종일 일에 매달렸다. 고철과 재활용품에 대한 가격이 올라 그동안 적재해 두었던 것들을 처분하니 짭짤하게 수익이 올라왔다.
아침에 일어나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동네가 어수선하였다. 신문에서 역과 철길이 다름 곳으로 옮겨가고 철길은 중앙로로 변하고 역 주변과 넒은 철도부지엔 공공건물과 상업시설이 들어서는 종합 마스트플랜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접도 변에 묶여 재산권행사를 하지 못했던 철도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땅값이 올라서 좋아하게 된단다. 그러나 결국 땅이라는 것도 많이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겨우 작은 집 한 채를 가진 사람들이야 크게 생활이 변하진 않을 것 같았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 미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냥 저녁 먹고 자기 집에서 맥주나 한잔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자고 대답을 하고서는 마음이 불안하다. 무슨 일 때문일까?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 마트 근처에서 물건을 사려온 수정엄마를 만났다. 아무래도 미라의 집을 드나들자면 수정엄마의 눈에 띌 수도 있고 해서 미리 오해의 소지를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마트 다녀오세요?”
“예! 살 것이 좀 있어서.”
“저녁에 미라가 맥주한잔 하자고 하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회사에 안 나가는가?...”
“그래요? 나 한 테도 그러든데. 무스 일이지? 그러고 보니 개 요즘 좀 고민이 있는 것 같았어요.”
“무슨 고민일까? 애가 중심을 잡아야 할 텐데. 그럼 나중에 같이 가보죠.”
“예! 그래요.”
강일은 집에 돌아와 가스렌지에 물을 올렸다. 배는 고프지만 막상 숟가락을 들면 입맛이 없어 몇 숟가락 먹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아예 라면이나 하나 끓여먹고 미라 네에서 술이나 마시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곱 시가 넘어 일부러 미장원에 들러서 수정엄마와 수정을 데리고 미리의 방으로 올라갔다.
“언니 오빠 어서와!”
“무슨 일이 있나? 이 시간에.”
“무슨 일은? 그냥 보고 싶어서.”
“세상 오래살고 볼 일이네.”
“앉아! 그냥 간단하게 준비 했어.”
미라는 방구석에 있는 상을 가져왔다. 중국집에서 시켜 온 음식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더니 맥주를 꺼내었다.
“뭘 이렇게 많이 준비 했어?”
“이게 뭘...수정인 이 케이크 먹고.”
“원 애 것 까지 준비를 했네.”
“네 생일이가? 이상하다 너 오늘.”
‘아니야. 그냥 술이나 마시자.“
미라는 술을 주는 대로 받아 마시고 있다. 원래 주점에 나가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남들보다 술을 잘 마신다고들 하지만 오늘은 술을 마시기로 작정을 한 사람 같다.
오늘 따라 술을 별로 마시지 못하는 수정엄마도 건네주는 잔을 마다않고 비우고 있다. 강일은 두 여자와 같이 술을 마시면서도 내심 불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맥주병이 거의 열병이나 비워졌다. 그러고 보니 미라는 두 사람이 오기 전에도 술기운이 약간은 있어 보였다. 미라가 자신의 혀가 꼬꾸라질 즈음에 드디어 본론을 끄집어내었다.
“언니 오빠! 나 내일 고향에 간다.”
“고향에? 왜 다니려 가니?”
“아니 나 아주 간다.”
“그럼 단란주점 그만 둔거야?”
“그래 오빠 나 이제부터 착하게 살래.”
“생각은 잘 했는데 그렇다고 갑자기 떠나니?”
“어차피 이 바닥에서 나 생각해줄 사람 있어? 그래도 언니 오빠는 고마운 사람들이고. 그 나머진 아무도 없어.”
“그래도 미라씨 간다니 정말 서운하다. 나도 여기가 객지라서 느낀다.”
“언니는 좋은 사람 만나 살아 이렇게 혼자 있지 말고.”
“그게 어디...”
“난 언니가 오빠랑 좋아졌으면 한다.”
“미라야! 그런 애기는.”
“오빠도 언니 좋아 하잖아?”
“그 건 당사자들의 문제니 이 자리에서 이야기 하지말자.”
“물론 두 분이 알아서 하고, 난 그저 그게 좋아 보여서 그래.”
“내일 당장 간다고? 고향으로 갈 거야?”
“응! 아무래도 그게... 더 방황해봐야 결과가 뻔해.”
“잘 생각했다. 떠나도 생각나면 찾아오고.”
“그게 될까?”
“사람 사는 일 누구도 장담 못해.”
“이젠 할 말 다 했으니 술이나 마시자. 언니 자 잔 받아.”
“수정 어머니 오늘 많이 마신다. 괜찮겠어요.”
“미라씨 애기 들으니 저도 마음이 매우 심란하네요.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살게 되었는지.”
“미라야! 내가 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됐어. 새삼스럽게. 술이나 마셔라. 오빠야.”
세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잔을 돌리고 있고, 수정은 혼자서 놀다가 재미가 없는지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고향에 가서 어떻게 지낼 거니?”
“지금으로선 계획 없어. 가서 새롭게 무엇이든 해야지 객지에 돈 번다고 나왔다가 이게 무슨 꼴인지.”
“아직 나이가 있잖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마라.”
강일은 그래도 옆집에서 살며 때로는 말동무가 되었던 미라가 갑자기 떠난다고 하니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앞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던 수정엄마가 스르르 옆으로 쓰러진다. 미라가 그녀를 바로 눕히려 해 보지만 미라도 이미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몸이 흐느적거리고 있다. 얼마 후 미라마저도 결국엔 뒤로 넘어져 버렸다. 강일은 조금 황당했다. 미라야 자기 방이니까 그냥 자게 놔두면 되겠지만 수정과 그 엄마를 여기다가 두고 혼자만 가야 할 것인지? 아니면 집에다 데려갈 것인지가 난감했다.
수정이야 안고 가면 되겠지만 수정엄마는 그렇지가 못했다. 무겁기도 하지만 동네 사람들이라도 볼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강일은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문도 안 잠기었는데 혹시나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생각하다 다시 미라의 방으로 올라갔다.
이대로 세 여인을 둘 수는 없었다. 어째든 자신을 믿고 같이 술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아닌가?
우선 수정엄마의 호주머니에서 미장원 열쇠를 꺼내고 수정을 안았다. 그리고 미장원 문을 열고 2층으로 올라갔다. 불을 켜고 수정을 눕혔다. 그리고 다시 미라의 방으로 향했다.
미라의 방에 온 강일은 수정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다시금 세게 흔들었다.
“수정 어머니! 수정 어머니! 일어나 봐요.”
일어날 기미가 도저히 없어 보인다.
“수정 어머니! 아 참 이를 어쩐다.”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그녀가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것인지. 아마도 그녀도 외롭게 살던 이웃이 떠난다니 자신의 처지 같아 마음이 울적한 것 같아 보였다. 강일은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미라의 방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간단히 메모를 남겼다. 문을 잠그고 열쇠를 가져가니 내일 이야기를 하라고 적었다.
수정엄마를 들쳐 업었다. 보기 보단 상당히 몸무게가 나간다.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강일의 온 몸으로 전해져 온다. 가까스로 계단을 내려와 미장원 이층으로 올라간다. 떨어질세라 한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치고 한 손으론 계단의 손잡이를 잡고 오른다.
드디어 방에 도착해서 살며시 그녀를 수정이 옆에다 눕혔다. 둘이서 자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아 보았다. 부드럽고 포동포동한 살결이 느껴지며 가슴이 설렌다. 하얀 목덜미를 이어 내려온 불룩하게 솟은 그녀의 가슴이 돋보인다.
한참동안 자는 모습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러다 수정이가 잠이라도 깬다면 매우 민망스러울 것이라 생각되었다. 계단을 내려가다 망설였다. 순간 강일의 가슴이 방망이질을 해댔다.
강일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가져갔다. 순박한 얼굴에 도톰한 입술이다. 조심스레 그녀의 입술에다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달착지근한 느낌에 휩싸이며 너무나도 황홀하였다. 이대로 끌어안고 싶었지만 가볍게 입술을 몇 번 빨고서는 허리를 일으켰다. 강일은 두 모녀의 옆에서 잠들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어났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고 그래도 이 모녀를 지킬 수 있는 한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밤을 지으려니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수정엄마가 손에 그릇을 든 채 문 밖에 서 있었다.
“수정 어머니가 아침에 웬일로...?”
“들어가도 돼요?”
“오세요.”
“어젯밤에...그냥 두시지 그랬어요.”
“무슨 말씀...?”
순간 수정엄마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숙이며 다소곳이 말을 이었다.
“저랑 수정이 우리 집에다...”
“사실 제가 어째야 할지 몰라서요.”
“부끄럽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어쩌다 내가 그런 줄도 모르고.”
“저도 술김에 어느 게 옳은지 몰라서 그렇게 되고 말았네요.”
“저어...이거 반찬 만들어 놓은 건데 잡수세요.”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잘 먹겠습니다.”
수정엄마가 막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미라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
“아니! 언니가 여기에 웬일로? 혹시 어제...”
“아니야! 아침에 반찬 좀 가져온다고.”
“같이 있다고 질투 안 하고 떠날 테니 걱정 마!”
“미라 너 몇 시에 가니 내가 짐 터미널까지 실어다 줄까?”
“짐 이랄 것도 없어. 지금 얼굴 보고 갈 테니 잘들 있어.”
“서운해서 어떡하니 미라씨!”
“언니! 고마워. 오빠도. 참 오빠 우리 방 열쇠 주라.”
“여기 있다.”
세 사람은 문밖으로 나왔다.
“언니! 오빠 잘 있어.”
“미라야! 그럼 잘 가서 잘 살아.”
“미라씨! 잘 살아요.”
세 사람은 인사를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강일은 웃음이 나왔다. 어제 밤 그녀를 업고 방에다 뉘어 놓고 온 것을 생각하면 잘 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도 상당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강일 자신이 그녀를 몸을 만지고 업어다 자리에다 뉘었을 생각을 한다면...
강일은 내일의 할 일을 위하여 억지라도 잠을 청하려 몸을 뒤척였다.
요즈음 며칠간 오후 늦은 시간이면 수정이네 미장원 앞에는 고급 승용차가 주차하고 있다. 강일은 무슨 일인가 노심초사하며 차량 주인에 대한 정보를 살피던 중 다름 아닌 역전 사거리에서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사내였다. 소문에 의하면 지난 몇 개월 전에 자동차 사고로 마누라를 잃었다고 하였고, 빵집을 매출이 많아 종업원을 두 사람이나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강일의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자가 수정엄마를 마음에 두고 작업을 벌리는 것 같아 기분이 매우 착잡하다. 그렇다고 내 놓고 관여하거나 방해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지나다니며 자동차만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려댔다.
벌써 서너 번째 차가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수정엄마가 승낙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저녁시간에 은수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수아버지는 집에서 전화를 받았다.
“형! 어디야?”
“집인데. 웬일이야?”
“응! 지금 좀 나올래? 술이나 한잔 하게.”
“나야 마다할 일이 아니지만 무슨 일 있니?”
“무슨 일은? 그냥 형하고 소주한잔 하고 싶어 그러지. 굴다리 밑으로 와.” “알았다. 지금 그리로 갈게.”
후덥지근한 날씨에도 굴다리 밑 선술집에는 벌써부터 몇 사람의 손님들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고 있다. 은수 아버지에게 무슨 이야기들을 해야 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5분도 지나지 않아 달려왔다.
“형! 빨리 오네. 나도 이제 막 왔는데.”
“뭐 시켰어?”
“아직 안 시켰는데. 형 뭐할까?”
“더운데 맥주나 먹자.”
“아줌마! 여기 맥주하고 그리고 안주는...가만있자. 그냥 노가리 주세요.”
“예! 잠깐만 기다리세요.”
술을 시키고는 잠시 동안 이야기가 없었다. 더운 열기를 밖으로 내보내려고 낡은 선풍기가 열심히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있다. 강일은 은수아버지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서 이야기를 꺼냈다.
“형! 저 사거리에서 빵집 하는 이사장인가 하는 그 사람 잘 알아?”
“아! 그 키가 작고 통통한 친구?”
“응! 그래. 까만 자동차 타고 운동회 때 폼깨나 잡던 사람.”
“조금은 알지. 그런데 왜?”
“그 양반이 요즘 며칠 수정이네 와서 살더라.”
“전번에 마누라 교통사고 나서 죽었다더니 혹시 수정엄마 넘겨다보는 거 아니야?”
“내 생각이 그래.”
“야 그럼 너 어쩌니? 큰일이네.”
“형! 무슨 좋은 방법이 없어?”
“지들 좋다면 끝이지 누가 뭐라겠어.”
“그렇지? 아 정말 미치겠네.”
“네가 수정엄마를 직접 만나보지.”
“만나서 뭐라고 그래? 그 사람 않 좋으니까 나랑 살자고?”
“그것도 말이 안 되지만 어째든 막아야 안 되겠나?”
“그러니 미친다고...어떻게 해야 할지...”
강일은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천정을 쳐다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주인아줌마가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와 꼬랑지가 타다 만 노가리를 한 접시 가져다 놓는다. 강일은 손으로 노가리의 몸통을 쪼개서 뼈를 추려내고 있다. 은수 아버지도 술좌석을 같이 하긴 해도 별다른 묘안이 없어 서로가 얼굴만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은수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사람일이란 게 마음대로 안 되는 기다. 너도 그렇고 이 사장인가 하는 그 친구도 마음대로는 안 될 끼다.”
“그 양반 나이가 몇이야?”
“나보다 대여섯 살 더 하는가 보더라.”
“그럼 사십 정도 되겠네?”
“그렇겠지. 자식 생긴 건 깡통 같이 생겼는데 돈은 조금 있는가 보더라.”
“수정엄마 고생하는데 가게라도 번듯하게 차려주면...”
“미리 포기하지 마라. 사람일 이라는 게.”
“형! 말이라도 고마워. 술이나 마시자.”
“그래. 한번 기다려 봐라. 어쩌니.”
강일은 지금 이 순간이라도 수정엄마와 관련한 내용을 잊으려 술을 마셔댔다. 그러나 마시면 마실수록 그 사내의 모습과 수정엄마의 모습이 번갈아 머릿속을 스쳐가곤 하였다.
은수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강일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철길을 걸었다. 중간에 화물열차가 달려오는 순간엔 철길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도 잠시 느꼈지만 휘청거리는 다리를 쓸쓸히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 듯 집 앞에 가까워졌다. 건너편 수정이네 미장원을 보니 불이 켜져 있었다. 다가가서 뭐라고 말이라도 해 볼까 했지만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돌아서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다가왔다.
“누..누구..?”
“저예요. 수정엄마.”
“웬일로?...”
“잠시 애기 좀 하고 싶어서요.”
“저 한 테 무슨? 제가 문제 있나요?”
“아니에요. 다름이 아니라 저어...”
“괜찮습니다. 수정 어머니 입장...좀 편하게 사셔야지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여요?”
“저 사거리 이 사장님 이야기...”
“저도 그 이야기를 하려 왔어요. 왜 먼저 넘겨 집고 그러셔요. 제가 그분이랑 어떻게 하기라도 하나요? 왜 괜히.”
“전 그 사람이 며칠씩이나 왔다가서.”
“강일씨는 전 그렇게 보세요?”
.왜 그렇게?.“
“제가 강일씨가 한 말을 거절하고 그 사람하고 결혼이라도 하면 이 동네에서 어떻게 얼굴 들고 살아요? 그리고 전 어려워도 그 까짓 돈 때문에 우리 수정이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미안합니다. 제가 오해를 해서.”
“그럴 수도 있을 거여요. 그리고 전 저번에도 말했지만 재혼 같은 건 안 해요. 우리 수정이가 있는 한.”
강일은 속으로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요 며칠 동안 얼마나 가슴을 조이며 지내왔었던가. 그러나 끝내 자신과의 결합도 하지 않겠다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간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제 딴엔.”
“저도 미안해요. 이런 일이 안 생겨야 했는데. 이젠 그 사람 안 올 거여요. 제가 확실하게 매듭을 지었으니까요. 그럼 주무세요. 가 볼게요.”
강일은 문 앞까지 나와서 그녀를 배웅했다.
“수정 어머니! 잘 주무세요. 오늘 애기는 잊어버리시고.”
“알았어요. 들어가세요.”
강일은 3일 째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공연히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서였다. 잠도 잘 오지 않는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이 나고 어릴 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나 마음을 여리게 만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물을 마셔대고, 배가 고파 못 견딜 정도가 되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가 일쑤다. 그리고 가끔씩 창문너머 먼 하늘을 쳐다보거나 아래 미장원과 수정이네 방을 응시하기도 하였다.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자리에 누워 천정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왔다. 영덕에 사는 누나였다.
“누나야?”
“저녁은 먹었니?”
“응! 어떻게 전화했어?”
“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래?
“내가 왜?”
“결혼을 해야지 밥도 제대로 못해 먹고 어쩌려고 그래.”
“걱정 마! 어떻게 되겠지.”
“애가. 그러지 말고 다음 주에 우리 집에 좀 왔다가라.”
“왜 그러는데?‘
”우리 동네에 참한 아가씨가 있어서. 네 애기했더니 마음이 있어 하더라. 한번 만나보고 마음에 들면 사귀다 결혼도 하고.“
“거기까지 가야 돼?”
“노는 셈 치고 한번 다녀가면 되지 안 그래?”
“생각 해 보고.”
“생각은 무슨 그럼 기다린다.”
“급하긴. 내 연락할게. 들어가.”
“알았어. 꼭 와야 해.”
결국 누나까지 나서서 자신의 장래에 대한 일을 걱정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씁쓸했다. 어쩌다 자신이 이렇게 되고 말았단 말인가? 막 잠이 들려는데 미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일은 반가웠다.
“미라야! 너 잘 있는 거지?”
“그럼 오빠도? 그리고 미장원 언니도 잘 있어?”
“그래 다 들 잘 있어. 넌 어떻게 지내?”
“그냥 집안일 좀 돕고 있어. 늦으나마 공부를 하려고.”
“잘 생각했다. 아직 너 안 늦다. 정말 좋은 생각이다.”
“잘 시간인데 전화했지? 언니랑은 어때?”
“어떻기는 그냥 그렇지.”
“오빠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 봐. 여자는 끌어당기면 딸려온다.”
“당길 용기도 없다. 이젠. 다음에 놀려 한번 와라.”
“그럴게 오빠 고마워 갑자기 생각나서 전화 했어. 잘 자.”
“그래 공부 열심히 해라. 다음에 보자.”
강일은 그래도 미라가 늦게라도 이곳을 떠나 고향으로 간 것이 자신의 일 마냥 좋았다. 어쩌면 자신의 주변에서 어려운 이웃이 하나 구제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강일은 어제 먹은 술이 덜 깬 채 아침부터 자리에 누워있었다. 밖에는 가량비가 내리고 있다. 어젯밤에 누나에게서 걸려왔던 온 전화를 생각하며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강일은 뒷산 꼭대기에 있었다. 자신의 집과 철로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바위에 걸터앉아 먼 하늘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한참동안 머물더니 서서히 동편으로 밀려가면서 새털구름이 높이 솟아 있었다.
건너편 아파트 끝자락에 걸려있는 산자락은 온통 과수원으로 이루어져 푸른 잎들로 줄지어져 있고, 도회의 자동차 소리, 사람소리, 갖가지 소음이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 어우러져 기이한 굉음을 내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내려 아래쪽 자신의 동네를 보니 누군가가 기찻길 옆의 철조망을 타고 올라 온 나팔꽃 덩굴을 걷어치우는 것이 아니가. ‘아 안 돼!’ 강일은 소리치며 급히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정하지 않은 계단에 굴러 떨어지고, 바윗돌에 무릎을 찧었다. 그러나 아무리 빨리 달리려 해도 발걸음이 내 딛어지지 않는다. 팔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발을 놀려댔으나 허사였다. 강일은 안타까웠다. 하는 수 없이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내리막길에서 팔을 앞으로 뻗는 순간 그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순간 강일은 잠에서 깨어났다. 뭔가 불길한 꿈이었다. 창밖을 보니 가량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추리닝을 입고 집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달렸다. 그리고 건널목을 건너는 순간 우산을 든 수정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맞은편에선 짐을 실은 트럭이 빠른 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강일은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후두를 자극하는 소독 냄새와 뭔가 바삐 움직이는 물체들에 휩싸여 있다는 기분에 눈을 살며시 떴다. 머리가 둔기에 맞은 듯이 뻐근해져 오고 눈꺼풀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순간 누군가가 소리쳤다.
“강일이 깨어났다.”
“정말! 정말이다.”
강일은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자신이 하얀 침대시트 위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옆에는 은수아버지와 통장님, 그리고 수정엄마가 있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강일아! 병원 응급실이다.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그래! 네가 수정이 살렸다.”
강일은 이제 어렴풋이 자신이 처해 있던 상황이 생각났다. 트럭이 빠른 속력으로 건널목을 향하여 달려오고, 수정이 우산을 든 채 상황을 모르고 건널목을 횡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시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강일은 수정을 향하여 몸을 날렷다.
수정엄마가 팔을 뻗어 두 손으로 강일의 손을 잡았다.
“강일씨! 고마워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뭘요. 수정인?”
“수정인 바로 옆에 누워 있어요?”
“수정인 괜찮아요? 수정인?”
“예! 괜찮아요. 잠시 놀랬을 뿐이고. 지금 자고 있어요.”
“그래요. 다행이네. 녀석 참!”
“통장님! 우린 이제 가죠. 강일이 깨어나고 여긴 수정엄마가 좀 돌보면 되겠네요.”
“그럴까. 강일아! 우린 간다. 몸조리 잘해라.”
“헤이! 용감한 총각! 형님 간다. 넌 갈비뼈에 금이 조금 갔단다. 며칠 쉬면 괜찮을 거란다. 나중에 보자.”
“고맙습니다. 통장님! 형님!”
두 사람이 돌아가고 난 후 이어 강일은 통증이 심해져서 주사를 맞고 잠이 들고 말았다.
일반 병실로 옮겨진지 이틀이 지났다. 이젠 통증도 가시고 집에서 쉬기만 하면 되겠다는 담당 의사의 이야기가 있었고, 간호사는 오후쯤에는 퇴원 준비를 하라고 한다. 강일은 병실을 나와 건물 앞 나무 밑의 벤치에 앉았다. 무엇보다 수정이 멀쩡한 것이 다행이었다. 어린 것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수정엄마가 얼마나 슬퍼할까 생각하니 자신이 다친 것이 훨씬 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찾았는데 여기 나와 있어요?”
어느 새 왔는지 수정엄마가 수정이의 손을 잡고 뒤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수정의 모습을 보니 해맑은 얼굴이 너무나 고와 보인다.
“수정이 어서 오너라.”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파요?”
“아니! 지금은 안 아프다. 밥 잘 먹었어?”
“예! 아저씨!”
“강일씨! 오늘 퇴원해도 된다면서요?”
“예! 그러라네요.”
“정말 감사해요. 안 그랬음 우리 수정인...”
“그런 불길한 애기 하지 마요. 이렇게 둘 다 멀쩡하잖아요.”
“갈비뼈 부러진 게 멀쩡해요?”
“이젠 다 낳았어요. 뭘 그까짓 것을 가지고. 다신 이번 애기 꺼내지 마요.”
“알았어요. 그럼 올라가요. 퇴원준비 하게요.”
“퇴원수속은 제가 할 테니 수정이 데리고 먼저 가세요.”
“아니요. 수속은 제가해요. 그리고 우리 집으로 같이 가요.”
“수정이네로요?”
“예! 완쾌 될 때까지 우리 집에서 지내요.”
“수정이네서요?”
“그래요. 저 이제 결심했어요.”
“수정 어머니!”
강일은 자신도 모르게 수정엄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던가. 기뻐 날뛰며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수정엄마는 벤치에 앉은 강일을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고 있었다. 수정은 혼자서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고 강일은 그녀의 두 손을 자신의 어깨너머로 당겨 잡았다.
“수정 어머니! 아니 명희씨 고마워요.”
“아니에요. 강일씨가 우리 수정일 그렇게 아껴주는지 정말 몰랐어요. 제가 재혼을 안 하려고 했던 건 만일 재혼을 해서 수정이 동생이 생기면 우리 수정이가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서였어요. 그런데 강일씨가 우리 수정일 좋아하는 걸 보고는 느낀 점이 많았어요.”
“수정이가 우릴 맺어 준 셈이네요.”
“그리고 수정이가 사고 나던 날 그날 사실은 수정이가 강일씨가 가르쳐 준 나팔꽃 있는 데를 갔다 오다가 그렇게 되었대요.”
“뭐라고요? 그럼 결국은 나 때문이네. 수정이가.”
“그리고 우리 수정아빠도 돌아가시기 전 나팔꽃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역 안 울타리에다 심었었어요.”
“결국 그 나팔꽃이 다 인연이네요. 수정 아빠도, 수정이도, 그리고 우리도...”
“그럼 셈이네요.”
“명희씨! 앞으로 제가 우리 수정일 훌륭하게 키워 낼 게요. 나팔꽃처럼 아름답고 줄기차게 뻗어 나가도록...”
“고마워요. 강일씨! 전 이젠 마음이 아주 편해졌어요. 우리 아이에게 든든한 보호자가 생겨서요.”
강일은 그녀의 잡은 손에 힘을 더 하였고, 명희는 그러한 강일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끝)
(부평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