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쓸 메모리(Muscle Memory) 12 - 맞수
지은이 : 홍현웅
머슬 메모리 (Muscle Memory) -12
맞수
2008년 10월 말부터 시작된 탁구가 어느새 4개월째 접어들고 있었다. 처음엔 그랬다. '한 3개월 정도 치면 어느 정도 하겠지.'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은 평택 위의 오산이란 것을 3개월 내내 사무치도록 느꼈다.
그동안 탁구장을 여러 곳 다녔다. 교류전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도 쳐봤고, 공식경기에도 나갔다. 비슷한 부수에서 통하던 내 공격력을 고수들이 별로 어렵지 않게 받아 내거나 아예 공격할 기회를 잘 주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이건 내가 혓바닥으로 쓸어가며 맛본 경험이다.
이번 글은 가끔 내가 운동하는 탁구장에 얼굴을 드리 밀고 모든 사람들과 잘 통하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그를 '맞수'라고 부르는 3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같은 5부였고, 또 다른 하나는 동갑이란 특수한 관계 때문이다. 그리고 탁구를 배우고 있는 서로 다른 관장님들께서 죽마고우로 우리 둘은 그분들의 5부 애제자다. 물론 시합을 하면 항상 박빙의 승부를 연출한다. 그러던 이 친구와 나는 지난 2009년 7월 안산협의회장기 생활탁구 대회에서 말 그대로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안산에서 탁구치는 사람이 이 친구를 모른다면 일단 간첩이거나 오픈경기에 전혀 출전하지 않은 사람이다. 쾌활하고 붙임성이 강력접착제 수준의 성격은 현수의 트레이드 마크다. 어딜 가나 웃음을 주는 그가 난 참 부럽다. 무대 매너가 좋은 가수가 있다면 아마도 '이현수'의 경기 매너는 어지간한 게그맨 한 트럭을 드리부어도 탁구장에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머피의 법칙'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바라지 않은 상황이 그날 일어났다. 130명 정도가 출전한 5부 경기에서 이제 나도 입상권으로 지목되는 정도가 되었다. 지난 번 대회부터 왜 아직도 5부에 있냐는 핀잔 아닌 눈치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현수는 일 년 전 부터 이런 소릴 달고 다녔다. 입상권의 실력 이란 것을 누구나 인정해 주는데 대회만 나가면 32강 16강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셨다.
난 예선전을 빡빡하게 통과했다. 64강전은 가볍게 통과 했지만 32강 전 부터는 지뢰밭의 연속이다. 누구와 만나도 장담할 수 없는 경기가 속출하는 것이 공식 대회다. 어쩌면 32강전에서 함께 운동하는 P형과 붙게 될 지도 모를 대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P형과의 매치는 성사되지 못했다. P형을 이기고 올라온 나 보다 꽤 젊어 보이는 친구와 32강을 치러야 했다. 그 친구의 기세에 눌린 나는 첫 세트를 주고 말았다. 중펜을 치는데 그 친구 컨디션이 상당히 좋아보였다. P형을 물리친 실력이니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이번 대회는 그동안 가르쳐 주셨던 신관장님의 고별 무대다. 우리 동호회 회원들은 마지막으로 관장님이 가시는 길에 좋은 성적으로 보답하자고 다짐했었다. 새로 오신 임관장님이 내 벤치를 봐주셨고 신관장님은 경기장 맞은 편 관중석에서 회원들 치고 있는 모습을 계속 보고만 계셨다. 1세트를 내주고 들어온 나에게 임관장님은 이런 주문을 해주셨다.
"첫 세트해보니까 뭐가 제일 잘 되요."
"백 사이드로 찢는 드라이브가 좀 먹혀요."
"좋아요. 그럼. 커트를 빽 쪽으로 길게 주고 어디로 넘어오든 자신 있게 스윙하세요. 자신 있게 해야 해요. 경기이사님 드라이브가 좋아 충분해요. 1세트 잃은 것 잊어 버리구요."
새로 오신 관장님은 나보다 나이가 어리시다. 나는 운동이든 뭐든 스승과 제자사이에 나이는 불문이라고 생각한다. 새로 오신 관장님과 나는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 존대하는 사이가 되었다.
P형과 이 친구의 게임을 지켜본 후 상대 화쪽으로 보내는 커트의 회전량이 적어 젊은 친구에게 P형이 드라이브와 스매싱 공격을 계속 허용했다고 생각했다. 젊은 친구의 공격 성공률은 아주 좋았다. 파워와 스피드 또한 여느 5부와는 충분히 구분 될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그쪽으로 보내는 커트에 회전을 많이 줘서 몇 번 보내면서 공격적으로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친구는 드라이브 범실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떨결에 첫 세트를 줬던 것이다. 그리고 상대는 더욱더 의기충천했다.
나는 2세트부터 3구 공격의 비율을 높였다. 그리고 서브 리시브는 철저히 상대가 커트로 넘기도록 빽 쪽으로 깊숙이 밀어줬다. 대신 내 서비스에서는 회전량을 그리 만이 주지 않고 상대가 커트로 리시브 할 수 있도록 평범하게 넣었다. 상대는 중펜의 빽 공격을 가끔은 하지만 대부분의 서비스를 커트로 리시브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부담은 없었다. 그리고 가끔씩 빠른 횡회전 서비스를 섞었다. 나에 이런 작전은 2-3세트 내내 통했다. 내 공격력은 시간이 갈수록 더 좋아졌고 상대방이 꽤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히 들어왔다. 결국 16강을 통과했다.
문제는 16강이다. 이 문턱만 넘으면 4부 승급이다. 지역5부에서 4부가 되려면 130명 중 8강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6강에서 현수를 만난 것이다. 이 전 대회에서도 4부 승급 문턱에서 고배를 마셨던 나에게 현수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두 번은 쳐봤던 경험을 토대로 경기 전 어떤 전술을 구사할지 골몰했다. 그동안 경험에 비추면 현수는 화쪽 드라이브 범실이 많은 편이었다. 삼일 전 오픈 경기에서도 예선에서 만났는데 그쪽에 대한 약점을 그때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지지 않는 게임'으로 전략을 세웠다.
내가 이런 전략을 꾸린 대에는 내 약점 또한 화쪽 공격 범실이 많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현수는 여느 5부와 다르게 커트 리시브가 화쪽으로 짧고 빠르게 들어온다. 이것을 공격하기는 내 실력으론 아직 만만치 않다. 빠른 횡회전 서비스 또한 미리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여지없이 화 쪽 쇼트에 당하고 만다.
나에 이러한 작전은 첫 세트엔 잘 통했다. 공은 살짝 뜨지만 회전이 많은 커트 리시브를 현수는 네트에 몇 개를 꼴아 밖았다. 서비스도 횡회전 서비스 보다는 너클성 짧은 서비스로 상대의 범실을 유도했는데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문제는 2세트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첫 세트의 전략을 그대로 유지했고 현수는 다른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현수의 횡회전 서비스를 잘 받아서인지 이쪽으로 서비스가 잘 안 들어왔었다. 그런데 2세트부터 다시 강하고 빠른 횡회전 서비스가 섞이기 시작했다. 사실 난 강하고 빠른 횡회전 서비스에 많은 약점을 갖고 있다. 밋밋하게 리시브 된 공은 여지없이 3구 공격에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허무하게 2세트를 넘겨줬다. 벤치를 보던 임관장님이 나를 불렀다.
"수비, 공격 어떤게 감이 더 좋아요."
"서비스 리시브가 불안해요."
"왜 그런 것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수비, 공격 어떤게 감이 더 좋아요."
임관장님은 처음 했던 말을 다시 물었다.
"공격을 해야겠어요."
"자신 있게 하세요. 스스로를 믿구요. 평소 더 많이 이겼잖아요."
"네."
이날의 승부처는 3세트 였다. 나는 평소의 내 스타일로 돌아섰다. 연타에 약한 나는 너클성 화 서비스에 이은 3구 공격을 선호한다. 중앙으로 치우쳐 화쪽으로 조금 떠서 오는 공은 빽이든 화든 다 찢을 수 있는 드라이브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던 터다. 3세트의 경기가 끝 무렵까지 내가 10:8로 앞섰다. 그러나 누가 그러던가. 가장 위험한 스코어가 10:8이라고. 서비스권이 현수에게로 넘어갔다. 나는 현수가 빠른 횡회전 서비스를 넣을 꺼라고 예상했다. 역시 예상은 맞았다. 그러나 그 서비스는 평소보다 더 높고 빠르게 들어왔다. 낮게 들어올 것을 예상해서 약간 앞쪽으로 이동했는데 그게 화근이 되었다. 얼떨결에 리시브한 공은 탁구대를 벗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두 번째 서비스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결국 이날 경기에서 난 현수에게 완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4부 입성은 또 문턱에서 좌절되었다.
경기가 끝나고 우린 웃으며 악수를 하고 서로 앉아주었다.
"현수야. 꼭 우승해라."
"알았어. 현웅아. 고마워."
결국 그날 현수는 우승의 기염을 토했다. 4강전에서는 0:2로 지고 있던 게임을 뒤집었고, 결승전에서도 역전 드라마를 썼다. 나는 그날 성적은 내지 못했지만 현수의 우승으로 많은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신관장님께 줄 선물을 챙기지 못한 아쉬움만큼은 쉽게 지워지질 않는다. 몇 일 전 현수에게 전화가 왔다.
"야. 홍오부."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그대로 응수해 주었다.
"어. 이사부."
"맥주한잔 하자."
"맥주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