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가신님 붙잡지 않고 오시는님 붙잡아두오리

작성자티끌|작성시간21.04.18|조회수13 목록 댓글 0

 

가신님 붙잡지 않고 오시는님 붙잡아두오리

 

 

 

가시리 가시릿고  버리고 가시릿고

 

날러는 엇디 살라고 버리고 가시릿고

 

잡사와 두어리마는 선하면 아니 올셰라

 

셜온님 보내옵나니 가시는듯 도셔오소서  ㅡ 누군가의 옛 시. 기억을 더듬어서 ㅡ

 

 

이천년 전 우리주님도 우리는 서럽게 울면서 떠나 보내드릴 수 밖에

없었다(23:27). 그분께서 약속하신대로, 그 때는 떠나가시지만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서러운님 보내옵나니, 가실 때처럼 돌아오세요~ 라고 간절한 사랑의

이별가를 불러드리며 우리는 그님을 보내드렸다. 그런데 정말 보내드렸는가?

 

아니다. 우리는 그님을 절대로 보내드린 일이 없다. 누군가의 옛시에서는

사랑하는 님을 서럽게 보내드리면서 가실 때처럼 다시 돌아오실 것을

간구하고 있었으나 우리는 절대로 그님을 보내드리지 아니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16:1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라고 까지 하시면서 열심히 가르치셨으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대로 놓아 주지 아니했다. 

?  일찍 되고 싶은 탐욕 때문이다.

 

예수님을 떠나보내지 아니하고 있으니,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다시 오실 수도

없다. 우리에게 진리의 길로 인도하실 오늘의 보혜사(다시오시는 예수님) 

오실 수가 없다. 이천년 전, 초림 예수님이 주신 그 비유의 복음에 만족해서

안주하고 있으므로,  오늘날 더는 진리의 새말씀이 우리들 속에 들어갈

자리가 도무지 없다는 말이다.

 

옛것을 새것으로 갈아 엎어야 하는데... 그리하지 아니하고 옛것, 처음것으로

구원의 오케이 송을 연발하고 있으니, 그것이 곧 이미 먼저 되어버린

탐욕이요, 교만이요, 금기의 선악과를 범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회자되는 말 중에

 

"가는 사람 붙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  라는 가십성 유행어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주 진실로 가는 사람 붙잡지 않아야

한다고 신실히 가르치셨다. 나를 위해 울지 말라고도 하셨다.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다. 이는 가는 사람 붙잡지 말고,

다시 오시는 님(오늘의 보혜사)을 붙잡으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마땅히 떠나가셔야

우리에게 유익이다. 떠나 보내야 비유의 말씀을 해독해서 다시 오시는

오늘의 새 이름(재림주) 맞이할 수 있음이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규정한 남종의 값 30십에 팔리는 종으로 오셨기 때문에

마땅히 떠나 가셔야 우리에게 유익이다.

떠나 보내야 자유인으로 다시 오시는 오늘의 새 이름을 맞이할 수 있음이다.

 

초림 예수님은 구약에서 예언된,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로 오셨기 때문에

마땅히 떠나 가셔야 우리에게 유익이다.

떠나 보내야 자유자 사라의 아들 이삭으로 다시 오시는 오늘의 새 이름을

맞이할 수 있음이다. 이스마엘에겐 유업이 없고 이삭에게 유업이 있었다.

 

초림 예수님은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배필중에 첫 아내로 오셨기 때문에

마땅히 떠나 가셔야 우리에게 유익이다. 하나님이 첫 아내와는 이혼을

했던 것이다. 떠나 보내야 하나님의 영원한 배필, 새신부로 다시 오시는

오늘의 새 이름을 맞이할 수 있음이다.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라고 하지 않았는가. 초림 예수님은 구약에서 예언된 처음 성전으로 오셨기

때문에 마땅히 떠나 가셔야 우리에게 유익이다. 떠나 보내야

둘째 성전, 즉 지성소로 다시 오시는 오늘의 새 이름을 맞이할 수 있음이다.

 

초림 예수님은 에덴동산에서 이미 예언된, 아담으로 오셨기 때문에 마땅히

떠나가셔야 우리에게 유익이다.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고 했던 것이다.

생명이 없는 흙을 떠나보내야  "산자의 어미"  라고 이름지어진 하와,

즉 오늘의 새 이름을 다시 맞이할 수 있음이다.

 

초림 예수님은 들 사람 에서로 오셨기 때문에 마땅히 떠나가셔야 우리에게

유익이다. 떠나 보내야 유업을 받게 될 야곱, 즉 오늘의 새 이름을 다시

맞이할 수 있음이다.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하지 아니 했는가.

야곱은 집안에서 집안 식구들에게 때를 따라 말씀의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붉은 죽을 끓이고 있었던 오늘의 사명자였던 것이다. 그것으로 장자권도 샀다.

 

그러므로 이천년 전의 초림 예수님일랑 미련없이 떠나보내 드리고

오늘의 새 이름을 맞이하기로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초대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 초림 예수님으로

이미 구원을 다 받아버린 양으로 서신들을 주고 받고 설교들을 하고 있는가 이다.

 

복음서신에서 초림예수님을 둘째 아담 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둘째 아담은 오늘의 새이름을 뜻하는데, 그렇게 불렀다. 즉 초림 예수님으로

이미 구원사업을 끝내버린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초림 예수님을 절대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떠나 보내면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서신은 초림예수님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 오신

분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창14:18 이하에서 갑자기 나타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써 아브람에게 축복하고 십일조를 받으신 분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또 시편110:4 이하에서는 열왕을 쳐서 파하시고 시체로 가득케 하실  자라고

알려주고 있다.

 

이는 근본 되시는 오늘의 새 이름을 뜻하며, 감추어진 초특급 비밀로,

누설해서는 안되는 천기로 오셔서 아마겟돈을 승리로 이끄실 오늘의

새이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초림 예수님은 결코 십일조(사람십일조인 오늘의 첫열매 144000)

받으신 일이 없고, 아마겟돈에서 열왕을 쳐서 파하신 일도 없고, 갑자기

족보도 없이 오신 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기독인들은 초림주를 일컬어 멜기세덱의 반차라고 칭하여

초림예수님으로 구원사업을 끝장내버린 것이다. 초림 예수님은 갑자기

오신 분이 아니고, 명백히 족보 따라 오셨음에도 족보없이 오시는 멜기세덱

이라고 불렀으니, 이는 모두 탐욕의 선악과를 범한 까닭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초림 예수님을 절대로 떠나 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떠나 보내면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떠나 보내야만

진정 다시 오시는 구원의 새주님을 만나게 되는데 말이다.

 

예수 천당 이라고 밤낮없이 노래를 불러대고 있으니

오늘의 새이름을 어찌 만날꼬. 에고, 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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