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머님의 심부름을 잘 하였던 초등학생 때의 이경용이다.
정미소 공장에서 근무했던 직공 이씨(얼굴이 길고 갈비씨 아저씨)가 출근이 늦으면
어머님께서 경용아! 아저씨 집에 가서 아저씨를 깨워라! 하셨다.
아저씨 집에 너무 많이 가서, 집의 위치(벌집 위)를 지금도 기억한다.
깨우러 가면 아저씨와 부인이 함께 자고 있을 때가 많았고, 부인의 머리는 거의 산발이었다.
술을 좋아했던 직공 이씨에게 줄, 막걸리가 필요하면 경용아 막걸리 사와라!
황금색의 양은 주전자 또는 2리터의 큰 병을 들고서 막걸리 심부름을 수없이 다녔다.
2. 막 낳은 쥐새끼를 입에 넣고 삼켜버린 직공 이씨 아저씨.
정미소 담벼락의 높은 곳에 덧 붙어있던 볏짚의 가마니에서 “털도 없고, 눈도 안 뜬 빨간색의 쥐의 새끼”가 땅 바닥에 떨어지자, 주워서 곧바로 입에 넣고는 삼켜버리셨다.
쥐의 새끼와 토끼의 새끼는 막 태어나면 너무 똑같이 생겼으나,
쥐의 새끼는 꼬리가 길고 토끼의 새끼는 꼬리가 거의 없는 것이 차이점이다.
정미소 공장 안으로 들어가서는 긴 대나무 장대(공장 기계의 바퀴와 바퀴 사이에 걸린 단단한 벨트를 벗기거나 끼울 때, 쓰는 물건임)를 갖고 와서는 담벼락에 붙은 가마니를 톡톡 건드리니, 쥐새끼 몇 마리가 떨어질 때마다 손바닥으로 받아서는 곧바로 입에 넣고 삼켜버리셨다.
너무 충격을 받은 초등학생 4학년이던 11살의 경용이가 “아저씨! 어떻게 쥐새끼를 먹을 수 있어요”하자, 이렇게 어린 쥐새끼를 먹으면 최고의 보약이라고 하셨다.
직공 아저씨는 감기에 걸리면 큰 그릇에 소주1병을 붓고, 고춧가루를 한 주먹 넣은 뒤에 손가락으로 휘저어서 그 자리에서 원샷했던 분이다.
60년이 지났지만 이경용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다.
직공 이씨는 우리 정미소 공장이 망할 때까지 오래오래 근무하셨던 분이시다.
3. 정미소 안의 쥐를 잘 잡아 주었던 개(이름: 매리)가 있었다.
쥐가 개를 보자마자 도망치며 숨은 곳이 쌀 공장 바닥의 땅 구멍으로 들어갔는데, 그것을 본 개, 매리가 연기(밥을 짓는 아궁이 불에서 새어 나옴)가 나는 구멍 옆에서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연기의 메움을 참지 못한 쥐가 나올 때, 덥석 물어 죽이는 것을 많이 보았다.
쌀가마니가 많은 정미소에는 쥐가 많이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고양이보다 쥐를 더 잘 잡는 개 매리 때문에 쥐가 많이 박멸되었다.영리한 개 매리는 예쁜 새끼 강아지도 수없이 많이 낳았다.
매리는 정미소 공장이 망하기 몇 달 전인 1968년 가을에 죽었는데, 그 모습이 생생하며 슬프기 그지없었다. 경용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약 4년간 함께 살았던 개 매리였다.
식당에서 일을 하던 14살~15살에 개 매리를 보고 싶어서 꿈에서 여러 번 만날 정도로 매리와 너무 친하게 지내었던 초등학생 때의 경용이었다.
4. 정미소 공장이 망한 뒤에 길거리에서 엿장수를 하신 직공 이씨였다.
공장이 망한 약2년 뒤(1971년 경)에 시골집의 도로에서 외할머니는 리어카에 엿을 싣고 엿장수를 하던 이씨를 만났다고 훗날 손자 이경용에게 알려주셨다.
서로는 너무 반가워서 헤어지가 아쉬웠으며, 직공 이씨와 외할머니는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경용이가 직공 이씨를 만나게 되면 후하게 식사 대접하고 술도 사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싶다.
직공 아저씨는 하얀 얼굴이며 친절하고 웃기도 잘하셨는데 기억에 너무 생생하여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만나면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다.
직공 아저씨는 어머님보다 나이가 많이 적기 때문에 지금(2026년) 약 80대 중반이실 것이다.
아저씨! 보고 싶습니다. 어디 계시든,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5. 아궁이 불을 많이 피웠던 초등학생 이경용이었다.
어머님을 도와서 대식구의 밥상을 차리던 이정임 누나를 돕기 위해 가마솥 밑의 아궁이에 수시로 불은 피웠던 초등학생 이경용이었다.
정미소 공장의 백미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왕겨(맵재)와 미강(죽제)의 부산물이 공짜로 생겨난다.
왕겨는 아궁이 불을 피우는데 쓰고, 미강은 돼지(미강+쌀뜨물을 섞어줌)와 닭의 사료로 쓰였다.
풀무(풍무)에 달린 바람이 나가는 구멍 위에 마른 연료(종이, 짚, 솔잎 등)를 올려놓고 밑불을 붙인 후에 그 위에 왕겨를 뿌리면서 풀무의 손잡이를 돌려서 바람을 불어넣으면 불꽃이 계속 세게 일어난다.
까맣게 재가 된 왕겨를 집 뒤편의 퇴비장에 쏟아 부었으며, 검게 탄 왕겨 위에 돼지 똥, 닭똥, 사람 똥을 섞어 놓으면 최고의 퇴비가 된다.
초등학생 때, 풀무의 손잡이를 돌리며, 왕겨에 불이 세게 일어났던 추억이 생생하다.
지금 사람들은 풀무가 무엇 인지?를 잘 모를 것이며,
아궁이 속에서 ①왕겨 불을 피워서 ②가마솥에 밥이 만들어 지는 과정을 제대로 알 수가 없을 것이다.
6. 닭 먹이에 쓰일 개구리를 잡으러 다녔던 초등학생 이경용이었다.
정미소 공장 뒤편의 빈터에서 ①돼지를 오래 사육하다가 ②1964년경에 양계장으로 바꾸었으며 ③1966년경에는 양계장 터에 기와집을 지었다.
양계장을 할 때, 닭의 먹이로 쓰일 개구리를 많이 잡아야 하였다
개구리 잡는 도구는 “대나무 막대기 끝에 납작하고 딱딱한 재질”을 붙인다.
논으로 가서 논둑길 등에 있는 개구리를 그 도구로 때리면 맞자마자 4개의 다리가 쫙 퍼지면서 기절을 해버린다. 개구리가 필요할 때마다, 철사 줄에 꿰어 몇십마리를 잡아서 왔다.
개구리를 가마솥에 삶은 뒤에 미강에 섞어서 닭에게 주면 최고의 사료가 되었다.
초등학생 경용이는 수없이 개구리를 잡으러 다녔다.
어려서부터 집에 도움을 주는 “심부름, 아궁이 불, 개구리 잡기, 토끼 키우기, 돼지 새끼 출산 도움(아버지 옆에서 출산 시중을 듦) 등”의 일을 많이 하였다고 할 수 있다.
7. 야생의 새 새끼를 어른 새로 키웠다.
10살(초등학교 3학년)의 이경용을 예뻐해 준, 동네 청년인 손길동 형이 “큰 나무에 기어 올라가서 잡아준 새 둥지 안의 털도 안 나온 새끼”를 집에서 키웠더니 방(암캐: 매리, 수캐: 도크를 묶어 놓은 앞방)안에서 날라 다녔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경용의 어깨에 앉기도 하였다.
새 먹이로 파리, 애 벌래, 계란 노른자 등을 주었다. 초등학생 3학년이던 이경용을 어미인양 새소리로 반가워했으며, 먹이를 주면 좋아했는데 어린 날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8. 왕잠자리를 잡으러 혼자서 수없이 쏘다녔다.
지금 71세의 나이에 가끔 개천, 저수지에서 왕잠자리를 보게 되면, 어린 초등학생 때의 왕잠자리를 잡았던 생각이 난다. 왕잠자리는 날아다닐 때는 절대로 잡기가 어렵다.
저수지의 수초 위에 “앉아서 짝짓기 중인 암수 왕잠자리 2마리”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
잠자리채는 직접 만들었다. 대나무 끝에 철사를 둥글게 만들어 붙인 뒤에 둥근 철사 안에 거미줄을 얹혀서 잠자리채로 쓰면 된다.
왕잠자리 암컷의 다리 2개를 실로 묶어서, 오아! 오아! 하고 수컷을 부르면 수컷이 암컷에게 달려들어 붙었을 때, 쉽게 수컷 잠자리를 잡았다.
짝짓기 중인 수컷1마리만을 잡았을 때는 수컷의 가운데 등은 색깔이 청색이기에 암컷의 색깔(노란 녹색)에 맞추기 위하여 청색위에 호박꽃을 따서 문지르면 암컷의 색깔과 비슷해서 암컷으로 알고 수컷이 짝짓기 하려고 달라붙었다.
지금 나이 71세로, 60년 전의 초등학생 3~4학년 때, 왕잠자리를 잡았던 추억으로 젖어 들어가니 어린이가 된듯하다.
9. 초등학생 경용이가 낚시로 대형 장어를 잡았다.
초등학교 4~5학년 때, 이경용 혼자서, 둠벙(논 가운데의 웅덩이)과 저수지로 낚시를 가서 붕어 미꾸라지 장어 등을 잡았다.
아버지가 하시던 낚시를 보고 배운 것이 있어서 경용이 혼자서 낚시를 다녔고 직접 낚시 대를 만들었으며, 낚시에 쓰일 지렁이는 흙을 파헤쳐서 직접 잡았다.
대나무를 구해서 낚시 줄을 매달고 찌, 낚시 바늘, 봉돌을 달았다. 찌는 마당을 쓸던 빗자루에서 속이 솜같이 하얗고 가벼운 재질을 빼서 썼다.
대형 장어를 잡은 일화를 소개한다. 시골 과수원의 미륵산을 혼자 넘어가면 큰 저수지가 있었다.
찌가 갑자기 쭉 들어가서 낚시 대를 힘껏 잡아당겼는데 물고기가 전혀 나오질 않았고 계속 세게 잡아당겼다가는 낚시 줄이 끊어질 것 같았다.
해는 져서 어둑해질라 하고. 옛날 미륵산의 절에 호랑이가 밤에 스님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낚시를 끝내고 미륵산을 넘어가야 하였다.
물고기는 생물이라 계속 낚시 줄을 잡아당기면 힘껏 버티어서 줄이 끊어 질 것은 분명하였다.
5분 이상, 당기지 말고 마냥 풀어 주었다가 방심한 틈을 타서, 끊어지든 말든, 인정사정없이 잡아당기자는 생각을 실행했더니
낚시 줄에 뱀 같이 긴 것이 올라와서 웬 뱀이야? 하고 기절초풍할 뻔 했는데 대형 민물장어였다. 집에 와서 배를 갈라보니 작은 물고기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미련하지 않고 지혜롭게 머리를 써서 대형 장어를 잡았던 초등학생(4~5학년) 이경용이었다.
10. 토끼를 키워 새끼도 수없이 낳아 길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용태 형이 토끼 새끼를 주어서 기르게 되었다. 토끼는 보통 5마리~8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새끼를 막 낳으면 털이 하나도 없으며 1달 정도 자라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토끼장은 직접 만들었으며 토끼장을 청소하기 위하여 어미와 새끼를 하루만 분리시킨 후에 합사하면 자기 새끼가 아니라고 물어버리기도 한다.
이럴 때는 어미가 싼, 오줌을 새끼의 몸에 조금 발라주면 자기 새끼로 알게 된다.
토끼장을 만든다고 부모님께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사각 막대기, 널판자(나무 사과 상자에서 나옴), 대나무, 철사를 구해 와서
초등학생 4학년이던 이경용이 톱으로 사각 막대기와 널판자를 자른 뒤에 못을 박아서
①사각형 상자 틀을 만들고
②널판자로 3면(윗면, 양 옆면, 뒷면)에 벽을 만들고
③철사로 정면의 앞면 약 80%에 철망을 손으로 짜서 만들고
※. 나무틀에 못을 박은 뒤에 못에 철사를 걸어서 사각형으로 엮어 가면 철망이 된다.
④바닥은 대나무를 반으로 길게 잘라서 간격을 두고 붙이면 토끼 똥, 오줌이 잘 빠진다.
⑤토끼장 문은
Ⓐ철망 옆의 나무 기둥 오른 쪽에 널판자 문을 고무(낡은 고무신 등에서 구함)로 붙이고,
Ⓑ문고리는 널판자 문의 오른 쪽의 나무 기둥에 긴 못을 약간 박아 놓은 뒤에 망치로 쳐서
기역자로 꺾어 놓고서 밑으로 제키면 널판자 문이 열린다.
토끼는 후각이 예민하여 사람의 손으로 털도 안 난 새끼를 만지면 죽여 버리기도 한다.
손을 깨끗이 씻거나 깨끗한 면장갑을 끼고 낳은 새끼를 만져야 한다.
물이 묻은 풀 등을 먹이면 설사를 하게 되며, 토끼는 설사가 최고로 나쁜 병이다.
영산강 주변의 들로 나가서 풀을 베었으며, 비가 와서 풀을 벨 수 없으면 집에 있는 보리밥, 쌀밥, 야채 등을 갖다 주면 잘 먹었다.
용태 형 집에 종자가 좋은 수컷이 많이 있었기에 토끼 암컷을 갖고 가서 짝짓기를 시켜 수없이 새끼를 낳아 길러 보았다. 토끼는 교미 후에 1달 만에 새끼를 낳는다.
토끼 암컷은 처음으로 수컷을 만나게 되면, 교미를 하지 않으려고 도망을 가거나, 꼬리를 밑으로 숨겨버려서 교미 성사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쉽게 하는 방법이 있다.
꼬리를 굵은 실로 묶은 뒤에 등 위로 실을 잡아당기면 꼬리가 확 앞으로 제켜진다.
실을 잡아당긴 상태에서 귀를 잡고 수컷의 앞에다가 갖다놓으면 수컷이 올라타서 곧바로 교미 성공이 되고, 수컷이 옆으로 넘어지면서 찍 소리를 내고서 금방 교미가 끝나버린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기른 토끼는 새끼를 낳을 때, 모르는 사람들이 보게 되면 새끼를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장터에서 기르는 토끼는 사람이 보든 말든 새끼를 잘 낳는다.
초등학생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토끼에 관한 추억들이 많은 71세의 이경용이다.
11. 여동생 이순옥(5살)이와 빠꿈살이 했던 추억 등이 있다.
이경용이 7살 때, 정미소 공장 안에서 여동생 이순옥(5살), 이웃집 사진관 여자(5살) 아이들과 빠꿈살이(소꿉놀이)를 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 소꿉놀이: 아이들이 장난감 그릇 따위를 가지고 살림살이하는 흉내를 내는 놀이이다.
여동생 순옥(7살)이는 남동생(5살)이 양팔을 옆으로 벌려서 못 가게 하면 남동생이 무서워서 앞으로 가지를 못하였던 모습을 여러 번, 옆에서 지켜봤던 9살의 경용이었다.
초등학생 때, 동네 친구들과 영산포 초등학교 뒤의 길가 부근에 여동생이 묻힌 공동묘지를 지나가면, 뭔지 모를 아픔이 스쳐 지나갔으며, 묘지가 너무 작아서 더 애처롭게 느껴졌다.
어머님이 100세로 돌아가시기 전에 순옥이를 찾았다가 “죽었지!”하셨다.
어머님한테는 가슴 깊이 묻어둔 너무 아픈 손가락이었던 딸 순옥이었다.
여동생 순옥이가 7살 때, 저세상으로 가버렸지만 71세의 이경용한테는 옛 추억으로 살아 있다.
12. 이경용은 초등학교 시절이 가장 행복했고 즐거웠다.
① 심부름 잘하고 집안일을 잘 도왔지만 공부는 하지 않았다.
어머님이 시키는 심부름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지 않고 부지런하게 집안일을 도왔다.
그러나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고, 숙제도 해본 적이 없었고, 책1권을 읽은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1~2학년 때는 글을 잘 읽지를 못하여 받아쓰기가 10점~20점이고 성적이 양, 가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선생님 설명을 제대로 듣기 시작하여 공부를 잘하기 시작하였다.
5학년 때, 담임 선준규 선생님이 공부를 못했던 애가 어떻게 성적이 이렇게 좋냐? 고 하셨다.
집에서 공부를 한 적이 거의 없었지만 학교 공부만으로 성적이 좋았던 것이다.
②. 어린 시절에 뛰어다니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자치기(나무막대), 숨바꼭질, 팽이치기, 딱지치기, 쥐불놀이, 구슬치기, 말 타기 놀이 등을 하며 재미있게 놀았다.
1960대로 약60여년이 지났지만 동네에서 같이 놀던
어린이들은 용태, 용채, 광호, 창연, 경영....더 이상, 이름이 안 떠오른다.
얼굴은 더 많이 생생이 생각난다.
③. 나의 어린 시절에 최고의 놀이 동반자는 김용태 형이었다.
3년 선배인 벌집(양봉하는 집)의 김용태 형과 제일 친하게 지냈고, 토끼 먹일 풀을 베기 위하여 영산강 변의 들판으로 수없이 같이 다녔다.
너무 보고 싶지만 일찍 세상을 떠서 마음이 아플 지경이다.
인생의 슬픔, 고통을 모를 나이였기에
동네 골목의 또래 친구들과 들, 산, 강으로 많이 놀러 다니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시절이 이경용에게는 가장 재미있게 놀았던 좋은 추억들이 많이 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1963.3월~1969. 2월)에 있었던 일로,
수십 년이 흘렀지만 71세의 이경용에게는 좋은 추억이 되어 있다.
13. 불우한 초등학생 시절을 보내던 동생 3명을 돌봐준 이경용이다.
이경용은 초등학생 시절을 너무 즐겁게 행복하게 보냈지만 동생 3명은 그러지 못하였다.
과수원에서 식당 집에 합류한 1970, 2월에 동생3명의 나이가 만4살, 6살, 9살이었다.
이런 동생 3명을 보고 있으면 동생들의 처지가 너무 불쌍하였고, 작은 식당 안에 딸린 방에서 동생 3명이 놀고 지내는 환경은 최악이었다.
동생 3명에게 돈 10원씩을 주고서 만화가게에 가서 TV를 보라고 하였으며, 외할머니와 아버지한테 청자 담배를 사드렸다.
불우한 환경에 놓인 동생 3명을 “식당, 배달, 공무원, 부동산 일”하면서 함께 살았으며 학교를 뒷바라지 해주었고, 장성한 뒤에는 동생 3명을 분가시키고 잘 살게끔 도와주었다.
동생 3명에게 “이경용은 부모”같은 역할을 해준 형이었다.
특히 막내 일곱째 동생은 넷째 형이 아버지처럼 돌봐줘서 고맙다고 하였다.
14. 손자와 같이 돌아다니면 동심으로 돌아간다.
나이 71세이지만 동심의 마음이 많아서, 10살 손자(현성)와 같이 돌아다니면 너무 즐겁다.
손자와 같이 사마귀, 잠자리, 거미 등을 잡아주니 “할아버지!최고”한다.
최근에 개천에서 같이 물고기도 잡았는데 손자가 너무 좋아한다. 덩달아 더 기분이 좋아진다.
손자 현성이는 생물을 너무 좋아하여 집에서 도마뱀, 거미, 사마귀, 미꾸라지, 구피를 키운다.
도마뱀 등이 죽으면 미안해! 미안해! 하면서 울기도 하였는데, 이제는 슬픈 표정만 짓는다.
밖의 흙 속에 고이 묻어 주고 작은 나무 비석도 세워주면서 명복도 빌어주는 손자이다.
거미의 암수를 짝짓기 시켜서 알을 낳고 새끼를 부화한다. 사마귀도 알에서 새끼가 나온다.
잠자리 수채(유충)를 잡아 와서 기르며, 성체가 되면 올라오라고 나뭇가지를 넣어 둔다.
곤충, 생물에 대하여 너무 많이 알고 있으며, 할아버지는 손자에 비하면 무지하다.
손자는 이경용의 어린 날과 너무 닮은 점이 많다.
손자 때문에 더 행복하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2026.6.9.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