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광산김씨 대제학 인물님들

작성자靑峰/金화백|작성시간11.02.11|조회수115 목록 댓글 0

대제학(大提學)|┌‥‥‥‥ 광김 역사
대태양/김현수 | 조회 98 |추천 0 |2005.09.25. 07:55 http://cafe.daum.net/THETRUELOVE/7A2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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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자(諱字)

직    위 (職   位)

아호(雅號)

시대(時代)

29

익희(益熙)

이조판서(吏曹判書)

창주(滄洲)

효종(孝宗)

30

만기(萬基)

영 돈녕부사(領 敦寧府事)

서석(瑞石)

현종(顯宗)

30

만중(萬重)

예조판서(禮曺判書)

서포(西浦)

숙종(肅宗)

31

진규(鎭圭)

예조판서(禮曺判書)

죽천(竹泉)

숙종(肅宗)

32

양택(陽澤)

영의정(領議政)

건암(健菴)

영조(英祖)

36

상현(尙鉉)

이조판서(吏曹判書)

경대(經臺)

고종(高宗)

37

영수(永壽)

이조판서(吏曹判書)

하정(荷亭)

고종(高宗)

 

대제학(大提學) : 국초에 "대제학"이란 명칭이 예문관, 보문각, 집현전등에 모두 있었는데 태종 때에 예문, 홍문의 양관으로

 

통합하여 양관 대제학과 성균관 대사성(뒤에 知成均館事)의 직을 한 사람이 겸임토록 하고 유림 사원(詞苑)을 모두 통괄케 하니

 

 이를 문형(文衡)이라 칭하였고, 유림들이 또한 그를 본받게 되니 문형은 학문과 도덕이 뛰어나고 가문에도 하자가 없는 석학

 

석유(碩儒)만이 오를 수 있는 직위이며, 관,민을 막라 한 학문과 인격자로서의 최고 지위로, 본인이 사임하지 않으면 종신직

 

이었다. 이에 앞서 김한로(金漢老)가 태종조에서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바 있으나 문형이 아니므로 여기에서 제외되었음.

 

 

 

29世   익희(益熙)

 

(1610∼1656). 47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문(仲文), 호는 창주(滄洲)이고, 아버지는 증영의정 반(槃)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손자.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연산서씨로 증참판 주(澍)의 딸이다.  
신독재 김집, 기암 정홍명, 계곡 장유의 문인이며 1627년(인조 5)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50인으로 합격하였고 1633년(인조 11) 증광시 문과에 병과(丙科) 23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었고, 곧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전적에 승진, 세자시강원 사서로 옮겼고 옥당에 선발, 수찬에 임명되어 정사의 대본과 천리, 인욕, 공사, 의(義)와 리(利)등을 나누어 상소하였으며 부교리 겸 세자시강원 사서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임금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산성을 고수하며 척화를 주장했다. 1639년(인조 17) 어머니 상(喪)을 마치고 교리를 거쳐 이조정랑이 되었다가 영광군수로 나갔다. 이듬해 아버지 상을 당하여 벼슬을 버렸고 1644년(인조 22)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합하여 부른 말)에 들어가 보덕을 겸했는데 이때 대소관원이 무사안일하고 법도가 해이하여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1646년(인조 24) 동부승지, 승문원 부제조를 거쳐 1648년(인조 26) 태안군수로 옮겨 선정을 베푸니 백성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듬해 인조가 승하하자 효종의 부름을 받아 우부승지가 되어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왔다. 1651년(효종 3) 강원감사가 되어 단종의 묘를 수축하고 이듬해 부제학을 거쳐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1653년(효종 5)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고 형조참의, 대사성을 거쳐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곧 성균관 대사성 겸 동지경연사가 되었다가 다시 대사간으로 옮겼다. 1655년(효종 7)  대사헌, 이듬해에 양관대제학에 임명되었다. 곧 사양하니 형조판서로 임명하자 또 사직소를 올렸고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47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과 도의로 사귀었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며 문집이 있다.
配는 정경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묘(墓)는 대전시 유성구 가정동에 있다. (대전시 도지정문화재 제5호)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30세 만기(萬基)

 

김만기(1633 ∼ 1687)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 숙종의 장인이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서석(瑞石), 아버지는 충정공(忠正公)

 

 익겸(益兼)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해평윤씨로 참판 지(?)의 딸이다. 구운몽을 지은 서포 만중은 그의 아우이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효종 4년(1652년) 생진양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장예원, 승문원 주서, 설서를

 

역임하고 예조, 병조좌랑과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한

 

후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논란이 일자 서인으로 윤선도 등을 공격했다. 1660년(현종 4) 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응교, 사복

 

시정, 성균관사성, 의정부 사인, 동부승지를 거쳐 1666년(현종 8)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편모를 떠나 멀리 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대사간이 되고 곧 좌승지로 옮겼다. 이듬해 예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그 후 광주부윤에 제수되어 선정

 

을 베풀었다. 1671년(현종 13) 딸이 세자빈이 되었고, 이후 예조참판에 승진, 승문원 제조, 도총부부총관, 관상감 제조를 겸했다

 

가 병조참판으로 옮겼다.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곧 부제학으로 전보되었다가 양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동지의

 

금부사를 겸임했다. 이듬해 병조판서에 지춘추관사를 겸했고 1674년(현종 16) 예조판서로 옮겨 정헌대부로 승진되고 이듬해

 

(숙종 2) 국구로서 영돈녕부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책봉되었고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를 겸했다. 1680년

 

(숙종 7)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1686년(숙종 13) 풍정도감(豊呈都監) 도제조를 지냈다.

 

 

 


 

30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인조 15∼숙종 18))조선시대 문신, 문학가.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1665년(현종 6) 정시

 

(庭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정언(正言),수찬(修撰)을 역임하였고 71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 삼남(三南)의

 

 민정을 살폈으며 75년(숙종 1) 관작이 삭탈되기까지 헌납(獻納), 부수찬(副修撰), 교리(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79년(숙종 5)

 

다시 등용되어 예조참의, 공조판서, 대제학, 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의 사건에 연루

 

되어 선천(宣川)으로 유배되었다. 88년(숙종 14) 풀려났으나 다시 탄핵받아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구운몽

 

(九雲夢)》을 쓴 뒤 병사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났고, 유복자로 태어나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 윤씨를 위로하기 위하여 국문

 

소설을 많이 썼다고 하는데, 알려진 작품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뿐이다. 《구운몽》은 전문을 한글로

 

집필한 소설문학의 선구로 꼽힌다. 특히 그 구성에 있어 선계(仙界)와 현실계(現實界)의 이중구성을 택하였고, 불교적인

 

인생관을 형상화 하였다. 그 외의 작품으로 《서포집(西浦集)》《서포만필(西浦漫筆)》《고시선(古詩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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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世  진규(鎭圭)

 

(1658∼1716). 59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 아버지는 문충공(文忠公) 만기(萬基)이며, 어머니는 서원부부인(西原府夫人) 청주한씨로 군수 유랑(有良)의 딸이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며 1682년(숙종 9) 진사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1686년(숙종 13) 정시 문과에 갑과 1인으로 장원급제하여 전적에 제수되고 예조좌랑(禮曺佐郎)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689년(숙종 16) 기사환국으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다. 1694년(숙종 21)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자 다시 지평(持平)으로 기용되어 수찬, 헌납, 부교리, 이조좌랑, 정랑, 사서, 교리 겸 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소론(少論) 남구만(南九萬)으로부터 척신(戚臣)으로서 궁중 출입이 잦고 월권 행위가 많다는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고, 그 후 대신들의 천거로 사인, 보덕, 사간, 필선, 부응교를 지냈고 1696년(숙종 23) 회양부사가 되었다. 1699년(숙종 26) 통정에 승진되어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가 되어 스승 송시열을 배반한 윤증을 공박하여 소론(少論)과 대립하였다. 1700년(숙종 27) 예조참의, 좌부승지, 공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대사간, 대사성, 좌승지, 호조참의을 거쳐 가선에 승진 호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이조참판(吏曹參判), 공조참판을 거쳐 1706년(숙종 33) 병조참판에 이르렀다가 소론의 집권으로 덕산에 유배되었다, 1710년(숙종 37) 양관대제학, 1712년(숙종 39) 예조판서, 이듬해 정헌에 승진, 좌참찬(左參贇)이 되었다. 문장에 뛰어났고, 전서(篆書), 예서(隸書) 및 산수화(山水畵), 인물화(入物畵)에도 능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청공(文淸公)이며, 저서로 축천집이 있으며 아버지 서석보를 이어 광산김씨의 족보를 편찬했으니 죽천보(竹泉譜)이다. 영정(影幀)이 있으며, 거제(巨濟)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배향되었다.
配는 정경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 繼配 정경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이다.
묘(墓)는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國史大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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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世 양택(陽澤)

 

(1712∼1776). 65歲,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서(士舒) , 호는 건암(健菴)이며, 아버지는 문청공(文淸公) 판서 진규(鎭圭)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연일정씨로 소하(昭河)의 딸이다.


1741년(영조 18)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1743년(영조 20) 알성 문과에 병과(丙科) 3인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

 

문학을 거쳐 강동현감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홍문관 부수찬이 되자 좌의정 정석오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려 임금의 노여움을

 

받았다. 곧 산청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다시 수찬이 되고 시강원 필선이 되었다. 1751년(영조 28) 통정에

 

승진되어 좌승지가 되었다가 부사로 나갔다. 그 후 대사성(大司成),이조참의, 양관대제학과 병조, 이조판서를 거쳐 1776년

 

(영조 53) 의정부 영의정에 오르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며

 

 1784년(정조 9) 벼슬을 추탈당하였다가 1864년(고종 2) 복관되었으며 문집이 있다.


配는 정경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묘(墓)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건건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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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世 상현(尙鉉)

(1811∼1890). 80歲.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위사(渭師), 호는 경대 (經臺),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9대손, 아버지는 증판서 재곤(在崑)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기계유씨로 경주(擎柱)의 딸이다.
1827년(순조 28) 증광 생원시에 3등 2인으로 합격하여 인릉참봉, 사재감 봉사, 군자감 봉사, 직장, 주부, 청양현감, 증산현감을 지냈는데 가는곳마다 유도를 숭상하고 학문을 진흥시켰다. 영평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859년(철종 11) 별시 문과에 갑과(甲科) 3인으로 장원급제하여, 통정에 승진, 공조참의, 동부승지, 좌부승지, 병조참의, 대사간, 안동부사를 거쳐 1864년(고종 2) 좌부승지, 이조참의를 거쳐 1866년(고종 4) 가선에 승진, 한성좌윤, 형조참판, 도총부부총관, 동지경연, 의금부, 돈녕부, 춘추관, 성균관사, 개사성, 이조참판, 홍문관제학, 도승지, 제용감 제조를 역임했다. 그 후 경기, 평안감사, 양관대제학, 도승지, 제용감 제조를 역임했다. 그 후 보국 봉조하에 들어가고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묘(墓)는 서이면 일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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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세 영수(永壽)

조선 후기의 문신. 字는 복여(福如), 호는 하정(荷亭), 아버지는 증우의정 우현(宇鉉)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남양홍씨로 목사 집규(集圭)의 딸이다.
1858년(철종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사로 군수를 지냈고 1870년(고종 8)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 2인으로 급제하여, 규장각의 요직을 거쳐 승지에 승진되었고 임오군란과 신미양요에 호종한 공이 있으며 양관대제학, 시강원(侍講院) 이사를 역임하고 보국에 승자(陞資)되었으며, 평안도, 경상도 관찰사, 1884년 전환국 관리(典還局管理), 협판내무부사, 1886년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어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고 유고가 있다.
묘(墓)는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지음리 사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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