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호폭침사건 개요 (浮島丸爆沈事件 槪要)
1945년 8월15일 일왕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 가 포츠담선언에 굴복하고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서 한반도는 그 지독했던 일제의 식민지시대가 끝나고 잃었던 나라와 주권을 다시 찾았다. 한반도 삼천리강산은 차치물론하고라도 일본 본토와 전쟁터로 강제연행되었던 한국인들은 광복의 기쁨에 넘쳐 그 감개무량함이란 이루다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이 때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에서 광복을 맞이한 조선인의 수가 9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한국인에게는 대본영 해군성의 지령과 전쟁터에서 한국인을 으레 죽여 왔던 일본군이 직접 자행한『조선인섬멸작전』에 휘말리게 된다. 이『조선인섬멸작전』의 통제권은 오미나토해군경비부의 총지휘권을 쥔 우가키(宇垣完彌)였고, 우가키는 대본영의 해군성 지령에 따른 것으로 유추가 가능하다. 결국 오미나토항에서 우키시마호 출항지령은 오미나토해군경비부 사령관인 우가키(宇垣完彌) 해군 중장이 내렸고, 당시 사령관 차석이었던 참모장 가노메젠스케(鹿目善輔) 해군소장은 우키시마호가 출항하기 전에 도쿄로 출장 가 있어 오미나토에는 없었다. 따라서 업무의 책임서열은 우가키에 이어 주석참모인 나카다 시게모토(永田茂元) 해군대좌이다.
▲①선명(船名): 우키시마호(浮島丸) ②선주(船主): 오사카상선 대표
(大阪商船 代表) ③제조(製造): 미츠이타마시마 조선소(三井玉島造船所)
④제조일(製造日): 1937년 3월15일(1937年3月15日)
⑤선종(船種): 화객병용(貨客倂用) ⑥총톤수(總t噸數): 4,730톤(四千七百三十噸)
⑦길이(長): 108.43미터(108.43m) ⑧선박번호(船舶番号): 42601
⑨계약양식(契約樣式): 1(一) ⑩징발년월일(徵發年月日): 1941년 9월 3일(1941年9月3日)
⑪용도별(用途別): 포함<대형>(砲艦<大>)⑫소관(所管): 요코스카해군경비부(橫須賀海軍警備部)
▲①침몰 지점: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시 마이즈루만 해상 헤비지마와
도리시마 사이 시모사바가 전방 3백미터. ②침몰일시: 1945년 8월24일 오후 5시20분.
③침몰원인: 한국과 일본 양측의 주장이 엇갈림.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은 8월9일부터 전쟁에 개입했다. 이때 일본군은 사할린에서부터 홋카이도와 일본본토를 향해 진군해 내려오는 소련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소련군 가운데 황색인종이 다수 있어 이를 한국인이 소련군 스파이로서 안내를 맡고 있다고 단정하고 한국인을 닥치는대로 학살했다. 일왕의 항복 방송이 대본영에서 흘러나간 뒤에 퇴각하던 일본 해군들이 저지른 사할린 가미시스카경찰서 화염학살과 미즈호항 냉동학살 그리고 마이즈루만 수장학살로 이어진 잔인무도한 학살만행인《우키시마호폭침사건》은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70년이 지난 지금도 원형그대로 남아있다.『조선인섬멸작전
▲1953년 10월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선체를 조사할 때 배의 안쪽 밑바닥이 부서진
파편으로 엉켜있는 모습. 이 사진은 타무라씨가 사진기를 주머니에 넣고 몰래 찍은
사진을 오사카 국제신문이 공개했다. 조사자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9년 전 선실 안에서 죽어있을 조선인의 유해를 감안하여
조일우호협회가 유해의 원형을 보존할 것을 건의했으나
배를 인양한 이노사루베지 측은 배를 다시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여 인양했다.
이로써 9년 전 희생당한 조선인들은 또 다시 다이나마이트 폭탄 세례를 맞았다.
(마이즈루 우키시마호진상구명회 회장 리병만 제공)
▲1953년 10월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찍은 사진. 선체 벽 부분의 철판이
밖으로 휘어져 있어 내부 폭발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물증이다.
(마이즈루우키시마호사건진상구명회 회장 리병만 제공)
▲1953년 10월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건져 올린 유해.
9년 동안 해저에 유기되어 두개골과 굵은 뼈만 남았다.
이 사건의 전반적인 문제를 간추리면서 승선자수를 추산해 보면, 미사와비행장 해군11, 12, 13, 14부대에 투입한 인원, 가바야마비행장에서 일한 10개 중대 규모 인원, 해군23부대에서 일한 인원, 2개 국영기업체와 11개 민간토건업체에서 일한 인원 등으로도 승선자수가 9천2백여 명에 육박한다. 출항에 앞서 페인트를 칠해 배 이름을 지웠고, 기관실 옆 창고에 자폭장치를 부착했다는 증언이 오미나토 해군공작부 조기과에 근무하던 보일러공이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8월21일 승선을 완료하고 22일 오후 10시에 출항했다. 무츠만을 빠져 나온 우키시마호는 애초부터 부산항을 향하지 아니하고 일본 본토 해안선을 따라 남하했다. 해군승무원 대부분이 양주에 취해 있었고, 자신들의 소지품을 바다에 던져 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승무원들은 한국인들에게 “너희들이 오늘을 무사히 넘기면 이 물건을 주는 것이 어찌 아깝겠는가!” “가다가 적을 만나면 싸워야 한다. 뒤에 폭탄도 많이 실었다.”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겠구나!” “이 배는 가다가 어디론가 들어간다.”는 등의 언행을 서슴없이 죄다 토해냈다.
|
사건명 제원 |
카미시스카경찰서 학살사건 |
미즈호항 학살사건 |
우키시마호 폭침학살사건 | |
|
발생년월일 |
1945. 8. 18 |
1945. 8. 19 |
1945. 8. 24 | |
|
발생 장소 |
카미시스카 경찰서 |
미즈호항 |
마이즈루항(만) | |
|
공
통
점 |
발생시기 |
일본 패전 직후 |
일본 패전 직후 |
일본 패전 직후 |
|
소행집단 |
퇴각하던 일본해군 |
퇴각하던 일본해군 |
퇴각하던 일본해군 | |
|
학살형태 |
집단몰살 |
집단몰살 |
집단몰살 | |
|
학살수법 |
화염학살 |
냉동학살 |
수장학살 | |
|
조선인 동향 |
광복・환희・ 비무장 |
광복・환희・ 비무장 |
광복・환희・ 비무장 | |
|
발생동기 |
①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불안감. ②조선인이 소련군을 안내하고 있다는 소문(소련군 스파이) ③소련군이 들어오게 되면 일본인이 저지른 죄악상을 소련군 에게 폭로할 것이라는 점. | |||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전 직후 사할린에서부터 퇴각하던 일본 해군들이
자행한 조선인 학살사건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만으로 항진해 들어갈 때 이미 소해완료라는 신호를 받고 입항했다. 이 배는 처음부터 부두 접안을 시도하지 아니하고 헤비지마와 도리시마 사이 해상에서 멈춰 섰다. 배가 멈춘 뒤에 해군승무원들은 구명보트를 내려 타고 모선을 탈출했다. 해군승무원들이 거의 다 빠져 나간 뒤에 폭발소리가 났고 곧이어 두 번째 폭발음이 났고 배는 가운데부터 꺾이면서 침몰했다. 일부 승무원들은 갑판위에서 한국인을 구조하였다기보다 오히려 사람이 매달려 있는 로프를 칼로 잘라 더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 임시로 설치한 나무사다리가 부러져 선실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은 나오지 못하고 용솟음치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바다는 온통 중유로 덮였고, 뱃기름을 뒤집어 쓴 사람들은 눈만 뒤룩거리다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인근 어촌마을에서 거룻배를 몰고 구조에 나섰으나 그 배마저 뒤집힐까 하여 물에 빠진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피하면서 겨우 구조했다. 살아난 사람들은 밤길을 걸어 마이즈루 평해병단에 임시 수용되었다. 그 날 밤 임시수용소 2층에서 또 한 번의 미증유의 폭발이 일어나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마이즈루 바닷가로 가족을 찾아 나섰으나 시신이 뱃기름으로 덮여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어 가족을 찾지 못했다. 이 때 해군들은 시신을 밧줄로 줄줄이 엮어 바닷가에 묶어 맺다. 마을 사람들은 긴 장대와 갈퀴를 들고 나와 바다에 떠있는 가방과 보따리를 끌어내 속에 든 돈을 챙겼다. 그들은 비겁하게 부자가 되어 마을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으므로 고향을 떠난것으로 밝혀졌다. 참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비극적인 참사였다. 이 같은 대참사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침몰원인을 조작했고 사망자수를 축소 발표했다.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가 조사・분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침몰원인으로 미군이 투하한 기뢰에 닿아 폭발・침몰했다고 발표했지만 촉뢰가 아니라는 과학적 논리가 성립된다. 기뢰는 감응기뢰, 음향기뢰, 부유기뢰라는 성상과 기전으로 폭발한다. 감응기뢰는 수압이나 직접접촉으로 폭발하고 음향기뢰는 기관소리 즉 음파의 세기로 폭발하고 부유기뢰는 수중에 떠 있으면서 부딪쳐 폭발한다. 우키시마호가 폭파되어 침몰할 때는 배가 완전히 멈춰 서 있었기 때문에 위 세 성상 기뢰는 폭발 기전에 맞지 않는다. 마이즈루만에 미군이 투하한 기뢰가 다수 있었다고는 인정되지만, 배가 완전히 멈춘 상태에서 2백25명의 해군승무원이 구명보트를 타고 모선을 다 빠져 나간 뒤에 “촉뢰”란 있을 수 없다. 배가 멈춘 상태에서는 수압이 작용하지 않고, 기관소리도 없고, 직접 접촉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군이 투하한 기뢰에 부딪쳤다는 근거가 없으며 선체 파괴상태로 보아도 선체 내부에서 폭발했음이 밝혀졌다. 특히 조선인 일본헌병 미나미는 마이즈루에 당도했을 때 기관실 쪽으로 늘어선 전기줄을 발견하고 이를 끊으려 했으나 도구가 없어서 끊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촉뢰가 아닌 폭발물에 의한 폭파침몰이다.
두 번째로 사건을 철저하게 은폐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사망자 수가 터무니없이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가라앉은 배의 선실에 몇 명의 조선인이 숨죽이고 있었을까? 이는 감출 수 없는 자연현상 그대로였지만 GHQ도 사건 은폐에 합류했다. 배를 인양하지 아니하고 사망자를 524명으로 발표한 점, 도리우미 함장이 GHQ에 사망자를 260명이라고 축소・조작하여 보고한 점, 침몰한 우키시마호를 인양하여 조사하지 아니하고 일주일만에 사건을 종결한 점, 재일조선인연맹이 제소한 소를 정당한 이유 없이 기각한 점 등은 모두 가해국 일본과 GHQ가 국제사회에서 불리해 질 수 있는 정황이었으므로 은폐했다. 이 문제는 미국이 전후처리 과정에서 패전국인 일본과 발가벗고 동침한데서 확연히 드러났다. 대형전범인 미치노미야 히로히토를 사형에서 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후처리의 부당성은 피해자의 인권을 짓밟았다는 점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침몰원인 조작과 사후처리 부당성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였다.
시모키타반도 군사시설 공사현장에서 일한 조선인 수와 우키시마호 승선자 수와 마이즈루만 사건 현장 사망자 수는 서로 삼각함수 관계이다. 8월15일까지 일한 노무자 수가 정해지면 승선자 수가 정해지고 승선자 수가 정해지면 사망자 수를 추산할 수 있다. 그러나 지옥의 삼각함수는 온데간데없이 일본 정부의 교만과 잔인함과 야만으로 지금도 풍화되고 있다. 하여튼 우키시마호를 폭파 침몰시키는 수법으로 된『조선인섬멸작전』이 대본영의 지시냐 아니면 오미나토해군경비부의 소행이냐 아니면 퇴각하던 항명파 해군들의 일왕에 대한 맹종성 난동이냐를 분명하게 따져야 한다. 왜냐하면 현재 일본정부가 책임을 회피・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키시마호는 참혹하게 침몰당한 뒤 67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목적지였던 부산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조선인 강제연행・강제노동의 참상과 일본의 침략전쟁이 빚어낸『조선인섬멸작전』인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이다. 이 사건의 책임 소재는 가해국인 일본이 가장 원천적인 책임이 있다. 한국 정부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다. 1965년 한일기본협정에 거론되지 않았으므로 그 뒤로 진상을 규명하여 해결해야 했으나 그러하지 아니한 책임이 있다. 미국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미국은 연합군총사령부의 사령관 맥아더와 함께 초특급전범 히로히토를 살려야 했기 때문에 난징대학살, 경신년간도대참살, 731부대인간생체실험, 조선인 강제연행・강제노동. 일본군성노예종군위안부, 아시아대규모약탈, 민간인대량계획학살등을 조사・제소하지 않았던 바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사건이 바로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