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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광원 작성시간21.01.10 『오숙근 할머니는 가족을 이끌고 장군을 따라 만주로 와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국 흑룡강성 보청현에서 피신과 은둔생활로 살다가 1948년 장남 창렬이 토지개혁심판대에서 맞아 죽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현장에서 정신을 잃고 졸도하였습니다. 장군의 둘째아들 김창규와 인척 오춘택이 교대로 업고 집으로 돌아와서 정성들여 간병했지만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김창규가 약방에 약 지으러 간 사이에 잠든 어린 손자 명환을 끌어안고 돌아가셨습니다. 장군의 아들 창렬과 오숙근 할머니의 묘는 보청에 있습니다.』
오숙근 여사께서는 해방 후 딸린 아들과 손자들까지 있어서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발이 묶여 있었다. 1946년부터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에 대해 「비장의 카드」로 내민 토지개혁공작단의 활동이 막바지에 이른 1948년 봄이었다. 오숙근여사의 큰아들 김창렬은 보청에서 중공의 토지개혁 심판대에 서게 된다. 토지개혁심판대는 김창렬을 토비 김좌진의 아들로 지목했고, 동북항일련군 장령 두 명을 일본군에게 밀고하여 죽게 했다는 허무맹랑한 간첩죄목을 씌웠다. 이 날 김창렬은 어머니의 눈앞에서 맞아죽었다. 그의 심판조서에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인 김뇌진이라는 이름도 같이 쓰여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