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의 오숙근 외 4명의 부인설은 우매의 극치

작성자홍화평|작성시간21.01.17|조회수658 목록 댓글 0

[김좌진역사바로세우기—제9탄]

 

김좌진의 오숙근 외 4명의 부인(夫人=妻=아내)설은 우매의 극치

[김좌진 장군의 부인(夫人=妻-아내)이 5명이라는 문헌은 유일하게 충남 홍성군에서 발간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 제7장 장군의 가족(461쪽~469쪽) 편에 기록돼 있으므로 이를 기준으로 한다. 5명 중 오숙근은 정실부인이기에 맨 뒤로하고, 하여튼 김좌진의 부인이라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여 장식한 《1.이복희, 2.김영숙, 3.나혜국, 4.김계월, 5.오숙근》 순으로 분석하기로 한다. 인터넷 카페라는 특성으로 문헌 주석은 생략한다.]

1.이복희(李福姬)

생몰(1910~1920)

책 464쪽에는 “…나이 20세의 이복희가…”라고 썼다. 1910년생 이복희가 20살이 되려면 1930년이 되니까, 다시 말해서 김좌진이 암살당한 해이니까 1920년으로 표기했는지, 아니면 북로군정서 부대가 십리평을 떠난 시대 정황과 맞추려는 의도였는지 하여튼 이해하기 어려운 해괴한 묘사가 벌어졌다.

같은 책 337쪽~338쪽)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북로군정서가 이동한 이틀 후인 1920년 9월 19일 이 마을에 일본군 수색대가 들어와서 북로군정서 본영을 불지르고 난 다음 한인 앞잡이들을 시켜 북로군정서의 요인 색출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서일(徐一) 총재 등 간부들은 이미 지하로 숨어서 찾을 길이 없었고, 앞잡이 한 놈이 김좌진 장군의 아내 이복희 여사가 어느 민가에 숨어 있는 것을 찾아냈다. 일본 수색대는 즉시 그 민가를 포위하고 전 가족과 이복희 여사를 체포한 뒤 그 집을 불태웠다. 그리고 그 일가족을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무참히 총살하고, 이복희 여사는 대로변에 끌어내어 죽창으로 마구 찔렀다. 피투성이가 되어 숨거둔 그녀를 이번에는 칼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어 길바닥에 뿌렸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배 속에는 김좌진의 아기가 들어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일본군 수색대는 사라졌다.》

▶배경 분석

⑴“서일(徐一) 총재 등 간부들은 이미 지하로 숨어서 찾을 길이 없었고” 에서 당시 북로군정서가 본영을 떠난 이유는 이미 일본 대본영이 봉오동전투 참패 이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공포하고, 조선인 대참살을 감행하던 때였으며, 중국 육군 제2혼성여단의 보병 제1단장 맹부덕의 권고로 북로군정서 서일 총재를 위시한 수뇌부가 회의를 열어 졸업식을 9월 9일로 앞당겨 치르고 본영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때 서일 총재의 지휘 아래 부대가 이동한 것이므로 “지하로 숨어서 찾을 길이 없었고”라는 서술은 조사나 연구가 부족한 치졸한 서술이다.

⑵“그녀(이복희)의 배 속에는 김좌진의 아기가 들어있었다고 했다.”에서 길가에 흩어진 태아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라면 임신 6개월 이상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그 흉측한 상황에서 전문가가 검시할 리 없었던 당시 정황으로 보아 “김좌진의 아기가 들어있었다.”고 대한민국 행정기관에서 발행한 책에 확정적으로 서술했다는 것은 저자와 더불어서 《김좌진 사후 음해》 행위에 해당된다.

⑶이복희는 1910년생이므로 북로군정서가 십리평을 떠난 1920년 9월이면 이복희는 10살이다. 32살 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이 10살짜리를 부인으로 삼아 임신케 했다고 묘사한 것은, 당시 책의 저자와 홍성군수가 친일파 또는 『김좌진음해작전세력』에 매수당한 것으로 추측해도 무리가 아님을 말한다.

다시 같은 책 463쪽으로 가보면

《…이복희의 솜씨로 지은 밥을 먹기 시작했고 가족이 아무도 없이 홀홀 단신인 김좌진으로는 동생처럼 귀엽게 여겨 사냥할 때도 데리고 다닌 일이 있었다. 그리고 몇 달을 한 집에서 지내다가 다정스럽게 지내니 이진경 노인도 흐믓하게 여겼다.…》

▶배경 분석

⑴김좌진의 고향 충남 홍성에서 “홀홀 단신인 김좌진”이라 기록한 것은 무식의 소치이다. 또한 이진경이란 사람의 존재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몇달을 한 집에서 지내니" 라는 일은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사관생들의 군사적 정서나 군기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⑵김좌진의 증손자라고 주장하며 각종 역사적 배경을 말하는 김장춘은 “김좌진 할아버지가 류망(流氓: 정처 없이 떠도는 유랑인, 바람둥이)이란 말입니까? 빼앗긴 나라를 찾아야 하고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항일전투부대를 이끈 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왜놈들한테 짓밟힌 나라를 구하려고 고향을 떠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북만주 일대에서 왜놈들을 잡던 분이신데 그런 큰 뜻을 가졌던 할아버지를 류망(流氓) 취급이라니요. 지금 한국에서는 오숙근 할머니 말고도 몇 사람을 더 할아버지의 부인이라고 하는데 이거 제대로 해야 합니다.”라고 필자에게 호소했다.

 

2. 김영숙(金英淑)

같은 책에 김좌진의 부인 중의 한 사람인 김영숙은 생몰이 1919년에 출생하여 1928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국민 여러분! 여기서 수 년 전에 김좌진의 후손문제를 야기했던 중국 동포 위연홍씨를 떠올리셔야 합니다. 당시 위연홍씨는 김좌진의 외손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위연홍씨가 외손녀라면 직계존속으로 김좌진 딸의 딸이라는 것이지요? 그럼 여기서 위연홍씨의 생모인 김강석의 탄생에 대해 홍성군이 발행한 같은 책에 따라 분석해 보겠습니다.

김좌진의 부인이라고 하는 즉 위연홍의 할머니라고 하는 김영숙은 1919년생입니다. 위연홍씨의 생모라고 하는 김강석은 1928년생입니다. 김영숙이 1928년에 출산하려면 1927년에 임신해야 합니다. 1927년이면 김영숙이 8살입니다. 이때 김좌진은 38살입니다. 제 계산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38살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과 8살짜리 김영숙이 동침하였기에 김영숙이 임신하여 9살에 김강석을 낳았다는 것인데요. 대한민국 산부인과학회와 한의사학회와 여성인권단체에 문의하건대 8살에 임신하여 9살에 정상분만이 가능합니까? 더구나 일제의 참혹한 학살만행이 서릿발처럼 서려 있고, 찢어지게 곤궁한 시기에 말입니다. 그럼 여기서 김강석의 탄생신화를 홍성군 발행 같은 책을 인용하겠습니다.

같은 책 464~465쪽.

《…오빠 김영기와 동생 김영욱과 함께 중국으로 1921년에 망명하여 있던 중 팔로들의 중신에 응하면서 조강지처인 오숙근여사에게 편지로 승낙받고 장군에게 시집온 사람이다. 이들은 신방 차린 정해식 집의 반칸방에서 고생하면서 1년을 지냈다. 1928년 김좌진 장군은 김기철, 강익선 등 5명과 같이 동산시에서 해림으로 오는 길에 산속에서 괴한들이 김영숙을 살해하고 도주한 사건 현장을 발견하고 김영숙을 장사지냈다. 그리고 그날 낳은 애기를 안아왔다. 산속에서 낳은 애라 해서 이름을 산조(山鳥)라고 지었는데 이가 김강석(金剛石)이다.

(중략) 1930년 1월 24일 장군이 순국하자 팔로(八老: 정해식, 이달문, 이덕식, 김기철, 이동호, 김기석, 장사학, 장기덕)등은 중국에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라면서 산조를 중국집에서 찾아와 김기철이 친딸처럼 길렀다. 찾아올 때 3살이었고 김기철은 산조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 재산을 팔고 자식들의 교육에도 지장을 주면서 산골로 이사했다.》

▶배경 분석

⑴팔로 즉 여덟명의 노인의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⑵신민부 내에서 민정파와 군정파가 극단의 대립상태였을 때 38살 김좌진이 8살짜리 어린 여아와 신방을 차렸다는 것은 지구상 그 어떤 소설 속에도 없는 치졸한 소설이다.

⑶어쩌면 그 넓고 넓은 만주에서 김좌진의 부하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 현장을 직면하고 김영숙을 장사지내고, 당장에 태어난 아이를 안아왔을까요?

⑷괴한들이 김영숙만 죽이고 태아는 죽이지 않았군요.

⑸당시 김좌진이 일본 경찰, 헌병, 중국 군경, 일제 밀정들의 추격 속에 생명이 위태롭게 살았지만 8살짜리 어린 여아를 부인으로 삼아 임신하도록 동거했다는 것은 일제 밀정이 우글거리는 만주 땅에서 설득력이 없다.

⑹1930년 장군 순국 이후 팔로들이 어린아이를 중국집에서 찾아왔을 때에 3살이었다는 것이므로 산조(김강석)의 출생연도는 책에 기록한대로 1928년ㅇ이다. 생모 김영숙이 살해당했다는 해였다.

⑺문제는 8살에 임신하여 9살에 출산했다는 점이다.

⑻김장춘은 위연홍을 일축하고 있다.

다시 같은 책 465쪽으로 가보면

《만주로 이주한 한국 농민의 딸 김여사(김강석)의 어머니는 18세 꽃다운 처녀의 몸으로 중국인 지주에게 진 집안 빚 때문에 그 집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김장군이 그녀를 구하고 뒤를 돌봐주다 사랑이 싹텄다. 아기를 가진 그녀는 산속에서 비밀리에 아기를 낳은 후 돌아가는 도중 중국인 지주가 보낸 자객의 손에 피살되었다.》

▶배경 분석

김강석의 생모이자 김좌진의 부인이라는 김영숙이 18세의 몸이라면, 김영숙이 1919년생이므로 1937년이다. 이때 김좌진은 암살로서 순국한 지 7년이 지난해이다. 유령과는 동침이 될 수 없으며 잉태도 될 수 없는 것이 상식이다. 이 책의 저자와 발행인은 그래도 할 말이 있단 말입니까?

 

3. 나혜국(羅惠國)

1901년에 출생하여 1992년에 한국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나혜국은 여동생 나혜정과 함께 자매는 일제 밀정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같은 책 466쪽을 보면

《키가 훤출하고 미녀인 나혜국은 어느 날 장군을 찾아 인사하고 장군의 뒷바라지를 해줄 것을 간곡히 청한다. 장군도 처음 보는 여자는 아니었기에 그의 청을 들어주고 지내는 동안 애정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인연이 된 장군은 1927년경부터 동거생활을 시작하여 1929년 2월 26일 아들 철한(철한)을 낳았으며 장군이 순국하던 1930년까지 약 3년간 장군을 모셨다.》

▶배경 분석

우선 두 문헌을 도입하겠다. 하나는 조선일보 김연파 특파원의 《백야 조문가는 길에(4-2) 1930년 3월 9일자 조선일보 보도자료》이고, 또 하나는 《홍성군 발행 대한독립군총사령관 백야김좌진장군전기 제7장 장군의 가족》편이다. 조선일보 김연파 기자가 영구(중국 길림성 마을 지명)에서 만난 이OO씨가 소개해준 전OO씨에게 물었을 때 전OO씨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도입-1 조선일보]

《…“백야 선생의 가족형편”을 간단히 물었다. 씨는 참담한 안색을 띄우고 “백야 선생의 가족 말씀입니까? 참 무어라 말씀할 수 없이 참담하게 되었습니다. 백야형의 자당은 그 부인이 모시고, 석두하자참에서 20리 가량되는 팔성지에 계신데 백야형의 자당께서 금년 68세의 고령 노인으로 지금 이 사건 이후 자리에 의지하여 누웠는데, 병환이 심상치 않으며, 그 부인으로 말하면 지난 음력 11월에 여자아이를 낳으신 후 산후증이 미쾌한 중 이번 사변을 당하고 더욱 병환이 덧치어서 생활난 여부는 차치하고 위선의 병환들로 인하여 참아 볼 수 없습니다.”하고 기타 유족과 그 친제 동진씨는 지금 산시에 있다고 한다.》

[도입-2 홍성군 발행 책]

《키가 훤출하고 미녀인 나혜국은 어느 날 장군을 찾아 인사하고 장군의 뒷바라지를 해 줄 것을 간곡히 청한다. 장군도 처음 보는 여자는 아니었기에 그의 청을 들어주고 지내는 동안 애정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이와같이 인연이 된 장군은 1927년경부터 동거생활을 시작하여 1929년 2월 26일 아들 철한(徹漢)을 낳았으며 장군이 순국하던 1930년까지 약 3년간 장군을 모셨다.》

위에 도입한 두 기록을 보면 김좌진 장군이 사망 직전까지 장군을 모신 부인이 있었다. [도입-2]를 살펴보면 “장군이 순국하던 1930년까지”라고 하였으니 그가 나혜국이란 말이 된다. 물론 한 방안에서 두 여자와 동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기상천외할 일이 벌어진다.

먼저 위 [도입-1]의 내용을 살펴보면 장군의 “…부인으로 말하면 지난 음력 11월에 여자아이를 낳으신 후 산후증이 미쾌한 중…”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지난 음력 11월은 1929년 11월이다. [도입-2]를 살펴보면 장군이 순국하던 1930년까지 장군을 모셨다는 사람은 키가 훤출한 미녀인 나혜국으로 명시돼 있다. [도입-2]에 명시된대로 나혜국은 1929년 2월26일에 철한을 낳았다. [도입-1]에서 장군의 부인으로서 지난 음력 11월에 여자아이를 출산한 여자는 [도입-2]에 기술한대로 장군이 순국하던 1930년까지 장군을 모신 나혜국이라는 얘기인데, 나혜국은 2월26일 아들 철한을 낳고 그해 11월에 여자아이를 또 낳았으니, 철한을 출산한 지 9개월만에 또 여자아이를 출산하였다는 것인바 이는 생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혜국은 분명 아니고 또 다른 여자가 있었단 말인가? 하여 필자는 이 같은 조선일보 보도나 홍성군 발행 책의 저술을 의도성 음해설로 단정한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조작이기에 나혜국은 장군의 부인이 아니었으며, 나혜국이 낳은 아들도 딸도 김좌진의 자식이 될 수 없다. 이 문헌으로 조작이라는 의혹이 짙으므로 행정기관은 그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여기에 등장한 나혜국에 대해 연변대학노간부처 박창욱 교수는 아침 일찍 필자의 숙소로 찾아와 “당신은 내 말을 다 듣고 가야 하오. 이곳 사정을 한국에 전할 사람은 당신뿐이오.”라며 만주지방의 항일운동사에 대해 격앙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시면서 “나혜국은 여동생이 있었는데 두 자매가 일제 특무였소.”라고 단단히 일렀다.

 

4. 김계월

같은 책 463쪽에도 생몰이 없음.

다음 카페 http//cafe.daum.net/ddangjjj –만주독립군의얼을기리는집-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주)- 김좌진역사바로세우기—제8탄 “김좌진과 김계월의 조우설”을 보라!

 

5. 오숙근(吳淑根)

같은 책 462쪽에는 생몰이 “1988~1958”로 기록되었는바 이는 행정기관 홍성군의 21세기 행정치고는 한숨덩어리 행정이라고 평가한다. 홍성이 낳은 김좌진의 전기를 교정도 수정도 하지 않았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이같은 엉터리가 김좌진의 역사로 국민에게 알려졌다. 그런데도 홍성군과 충청남도는 2021년 1월 현재까지 이를 바로잡겠다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출생년도는 오타라 쳐도 사망년도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이상 전혀 사실과 다르다. 당시 행정기관에서 조사를 하지 않았음을 반증하고 있으며, 저자의 소설적 왜곡과 조작을 체념한 행정이었다. 필자는 《중국 공산당 흑룡강성 보청현 당안, 취란삼림공업엽위원회 조직부 당안, 김좌진 장군의 일기가 전해주는 사실, 김장춘 이웃들의 증언》을 김좌진의 가족상황 근거자료로 제시한다.

오숙근은 해주오씨로 경기도 안성에서 15살에 김좌진과 혼인했다.

하여 김좌진의 정실 오숙근 여사는 《1887년에 출생하여 1947년에 사망》하였음을 밝힌다.

같은 책 462쪽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1901년 음10월 22일 15세의 나이로 장군과 결혼하여 고향집(장군의 생가)에서 살림하다 장군을 따라 취운루 옆 초가집으로 이사했다.. 장군이 독립자금 모금관계로 체포되어 투옥되자 초가집도 팔고 다시 고향(갈산면 행산리)으로 내려와 생활했다. (같은 책 뒷장에는 김좌진의 혼인 연도가 1902년으로 기술되었음)

(중략)…장군이 공산당의 흉탄으로 순국하자 다시 고국으로 시어머니와 둘째 딸을 데리고 서울 필동에서 은거하면서 장군의 혈육인 김두한을 찾아 이재희(李載熙)와 결혼시켜 동거하면서 살다가 1934년에 방물장사를 가장하여 장군의 유해를 북만에서 보따리에 모시고 왜경의 눈을 피하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했다가…》

▶배경 분석

⑴오숙근은 김좌진의 정실 부인이다.

⑵오숙근이 김좌진의 사망 직후 시기에 귀국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⑶방물장사로 가장하여 유해를 옮겨 밀장했다는 것은 당시 왜경의 삼엄한 경계와 검문으로 보아 설득력이 없다.

⑷“김두한을 찾아 이재희와 결혼시켜 동거하면서 살다가 1934년에 방물장사로 가장하여…”라면 김두한이 1934년 이전에 결혼했다는 것인데, 1934년이면 김두한이 17살이었다. 김두한은 1944년에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론

1. 이복희

김좌진의 부인이라고 하기에는 김좌진의 민족사상적, 도덕적, 북로군정서 군기감찰 등으로 보아 설득력이 없다. 9살에 임신하여 10살에 피살당하여 길가에 흩어진 창자 속에서 태아를 식별하고 김좌진의 씨라고 결론을 내린 것은 행정기관의 조사방침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김좌진의 부인이라고 볼 수 없다.

 

2. 김영숙

8살에 임신하여 9살에 출산했다는 것은 세계 기네스북에도 없는 것 같다. 하여튼 이같은 국내기록은 없다. 있다 해도 김좌진의 신민부 군기감찰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후음해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김영숙은 김좌진의 부인이라고 볼 수 없다.

 

3. 나혜국

⑴1930년 2월 이후 당시 조선총독부의 조작보도전략 등 언론의 보도는 “김좌진 모해음해죽이기” 전략이었으므로 신뢰의존해서는 안된다. 지금도 한국의 친일강단사학계 는 일본의 실증주의 주장에 놀아나고 있다.

⑵만주무장독립군 순국희생자의 공적을 사취한 전형적인 사례로서 김철한은 그 얼굴 모습에서부터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라고 김장춘은 중국 연구자들의 입을 빌어 말한다.

⑶나혜국이 진정으로 김좌진의 씨를 잉태하여 김철한을  낳았다면 김철한과 김좌진의 둘째아들 김창규와 유전자대조검사를 통하여 판가름해야 한다. 중국 길림성에 거주하는 김장춘의 주장이다.

⑷조선일보 보도기사와 홍성군 발행 책을 살펴보면 나혜국은 1929년 한 해에 두 번 출산한 것으로 분석되는 바 이는 좀 더 명확한 조사를 필요로 하며, 나혜국 자신이 밀정이기에 조작은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4. 김계월

⑴1917년 9월 10일 서울 종로 계동 최부잣집 기습사건은 좀 더 명확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당시 대한광복회에서 일제경찰이 깔려있는 종로 한 복판에서 군자금을 강모하라는 무모한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⑵이미 1917년 8월에 김좌진은 대한광복회 길림지부 부사령으로 파견되어 9월 10일에는 서울에 없었다. 그러므로 김좌진과 김계월의 “한 달 동거라든가 3개월 처가살이”라는 홍성군의 역사기록은 완전 개차반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⑷김계월은 김좌진과 합방할 수 없었으므로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다.

⑸김계월이 기어코 김좌진과 동침하여 김두한을 잉태했다면 김두한과 김좌진의 둘째아들 김창규와 유전자대조검사를 하여 판가름해야 한다는 것이 중국 길림성에 거주하는 김장춘의 주장이다.

 

5. 오숙근

혼인 절차 등으로 보아 김좌진의 정실 부인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