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의 증손이라 주장하는 김장춘은 누구인가!

작성자홍화평|작성시간21.02.07|조회수3,022 목록 댓글 0

[김좌진역사바로세우기—제11탄]

 

김좌진의 증손이라고 주장하는 김장춘은 누구인가?

 김 장 춘 진 술 서

 

☐진술일시(기간): 2007년 5월24일~6월2일까지

☐진술장소:

*중국 길림성 연변대학교 민족연구소 노간부처 박창욱 교수 연구실

*중국 산동성 위해시 장춘로5호102실(전재진의 위해사무실)

*5월24일부터 6월2일까지 김장춘•전재진의 동북지방 여정

☐진술인: 김장춘(金長春) (이하 진술인을 “답”이라 함)

☐면담자: 전재진(田在鎭) (이하 “문”이라 함)

☐기록형태: 면담에서 진술인의 언어 가운데 방언과 사투리가 많아 한국 표준어로 기록함.

☐조사기간: 2007년 5월24일~6월2일까지

 

[백야 김좌진 장군의 만주항일무장독립전쟁사와 그의 가족사를 바로세우는 일이야말로 만주항일독립군 전체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다.-필자]

 

가. 신상에 대하여

*문: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답: 김장춘입니다. 한자로는 金長春입니다.

*문: 당신의 국적은? 또 민족은?

*답: 국적은 중화인민공화국이고 민족은 조선족입니다.

*문: 당신의 나이는? 신분증에 따른 생년월일은? 신분증번호는?

*답: 올해 49살이고 출생년월일은 1959년5월13일이며, 신분증번호는 22242419590513001X입니다.

*문: 태어난 곳 즉 본적은 어디인가?

*답: 태어난 곳은 흑룡강성 이춘시 난차취(伊春市 南岔区)입니다만 내가 자라난 사정은 많이 복잡합니다.

*문: 현재 거주하고 있는 주소는 어디인가?                                             

*답: 길림성 왕청현 왕청진 대천가도 십위4조입니다. <吉林省汪淸县汪淸鎭大川街道十委四組>

*문: 학교는 어디까지 다녔습니까?

*답: 가정형편으로 중도에 포기하여 소학교도 마치지 못했습니다.

 

나. 성장과정에 대하여

*문: 방금 성장과정이 복잡하다고 진술하였는데 그 사정을 상세히 말해보시오.

*답: 나는 태어나 석 달이 채 안되어 아버지한테 갔습니다.

*문: 아버지한테 가다니요. 무슨 말입니까?

*답: 그러니까 생부는 생부대로 있고, 나를 키워준 분이 따로 있는데, 나는 나를 키워준 분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문: 키워준 분과의 관계는요?

*답: 내가 생후 석 달이 안됐을 때부터 키워준 분은 김좌진의 둘째아들 김창규입니다.

*문: 생부는 누구입니까?

*답: 김명환이라고 합니다. 김좌진의 맏아들인 김창렬의 둘째아들입니다. 이름이 몇 개 됩니다.

*문: 실례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헷갈리므로 이번부터는 두 분을 창규씨라든가 명환씨로 표기해도 괜찮겠습니까?

*답: 좋습니다. 그렇게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 그렇다면 진술인은 김좌진의 증손자가 되는 것인데 증조모 되시는 김좌진의 부인의 이름을 아십니까?

*답: 예! 오숙근입니다.

*문: 명확하다고 생각하나요?

*답: 창규가 어머니의 이름을 모를 리 없잖습니까? 창규한테 들었고 명환씨도 평소 자식들한테 오숙근이라고 말했으며 명환씨의 작은 기록지에도 나옵니다. 창규는 나를 길러준 분으로 평소에 제게 들려준 얘기가 많습니다.

*문: 미안합니다만 진술인은 질문에만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 예!

*문: 명환씨의 작은 기록지라고 진술했는데 그 기록지를 면담자에게 제공할 수 있습니까?

*답: 요청하면 언제든지 제공하겠습니다.

*문: 창규씨는 왜 한 달도 안 된 조카의 아들을 데려갔습니까? 가능하다면 배경부터 상세히 말해주십시오.

*답: 그러니까 형인 창렬씨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 남은 아들을 동생에게 부탁하였지요. 그런데 조카 명환을 그만 잃어버렸답니다. 그때 당시는 상당히 어두운 세상이였지요. 창규씨는 형의 부탁을 받들지 못할까 하여 흑룡강성 일대를 돌아다니며 조카를 찾았는데 바로 찾은 당시가 제가 태어난 지 석 달이 채 안 된 때였답니다. 그때까지 명환씨는 이름을 바꾸면서 가명을 써 왔기 때문에 찾기가 어려웠답니다. 그런데 창규씨 친구의 제보로 찾게 된 것입니다. 조카 명환을 만나고 보니 공청당서기로 열렬하게 일하고 있고, 저의 어머니 되시는 분은 한족이라서 한국말을 못하니까 창규씨는 저를 가문의 후대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래서 명환의 승낙으로 저와 형인 지강을 데리고 창규씨가 집으로 데려갔답니다.

*문: 두 형제가 창규씨 집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는데 몇 살까지 같이 살았습니까?

*답: 형 지강은 일곱 살이 되면서 학교에 입학해야겠기에 다시 명환씨 집으로 보냈고 저는 계속 창규씨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문: 왜 동생인 진술인을 계속 남겨 두었나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나중에 동네 어른들한테 들은 얘긴데요 제가 형보다 야무졌다는 것입니다. 창규씨로서는 저한테서 김좌진의 핏줄다운 점을 발견했다는 얘기를 자주 했답니다.

*문: 몇 살 때까지 창규씨 댁에서 살았습니까?

*답: 제가 12살인가 13살 무렵에 명환씨 집으로 돌아왔는데 저로서는 명환씨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었기에 다시 창규씨 집으로 가서 창규씨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집에서 살았습니다.

*문: 그래서 사실상 진술인에게는 키워준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된 것인데요. 맞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나를 키워준 분이 더 은혜가 크기 때문에 또 처음부터 아예 아버지로 알고 부르며 자랐기 때문에 저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문: 좋습니다. 그런데 명환씨가 진술인을 왜 가까이 하지 않았을까요.

*답: 그것은요. 저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문: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답: 할아버지의 나라가 해방된 뒤로부터 우리 가족은 끊임없는 추격을 당합니다. 할아버지인 김좌진이 암살당하셨는데 아마 그때부터 왜놈 앞잡이들이 우리 가족을 추적했을 것은 강 건너 불 보듯 뻔한 일이잖아요. 실제로 김좌진의 맏아들 창렬은 47년도에 피살되었습니다. 토지개혁 심판대에서 몽둥이로 맞아 공개 살해된 것이지요. 그걸 할머니와 창규와 오춘택씨가 현장에서 목격했답니다. 그리고 창렬씨의 큰아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졌고, 그 해에 오숙근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문: 가정형편이 어려웠을텐데 생계수단은 어떠했습니까?

*답: 내가 이춘시 난차취에서 태어나 목단강에서 살다가 왕청현으로 이사했을 때가 아홉 살이었습니다. 창규씨도 나이가 많아 산으로 나무하러 갈 때 돕고 그랬죠. 옥수수, 감자, 콩 농사지어 먹고 살 때였습니다. 그때는 농사도 개인이 아니고 공동으로 하는 집체농사였지요.

*문: 어린 시절 목단강에서 살 때를 기억하시는데 뭐 특별한 추억이라도 있나요?

*답: 창규 할아버지가 제게 늘 말씀하시기를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목단강에 나가 메기를 잡아다 끓여 국물을 제게 먹였답니다. 먹일 젖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목단강에서 살았다는 걸 알지요.

 

다. 가족에 대하여

*문: 창렬이 공개적으로 맞아 죽고 두 달만에 오숙근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충격적입니다만 나중에 진술해 주실 것을 부탁하고, 진술인의 가족은 어떻게 되는가요?

*답: 김좌진 할아버지부터 말하려면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문: 그럼 가계도를 그려 주시겠습니까?

*답: 얘기가 끝나면 가계도를 그려 밝히겠습니다.

*문: 가계도의 근거는 무엇이죠?

*답: 나로서는 창규씨와 명환씨의 유언과 평소 가르침에 근거합니다.

*문: 명환씨의 직계 자손은 어떻게 됩니까?

*답: 3남 2녀로 5남매입니다.

*문: 위로부터 이름을 다 불러주십시오. 한자로도 써 보십시오.

*답: 위로부터 김지강(金志剛, 男), 본인(金長春, 男), 김취(金翠, 女), 김려(金丽, 女), 김지봉(金志鋒, 男)입니다.

*문: 형제들이 모두 결혼을 했습니까?

*답: 다들 결혼했습니다.

*문: 명환씨는 언제 별세하였나요? 생모되시는 명환씨의 부인은 생존해 계십니까?

*답: 명환씨는 세상을 떠났고 생모는 현재 이춘시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문: 창규씨는 언제 세상을 떠나셨지요? 창규씨의 부인은 살아계십니까?

*답: 창규는 1988년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그 3년 뒤에 돌아가셨습니다.

 

라. 왕청현으로 이사하게 된 경위와 생활에 대하여

*문: 흑룡강성은 지역이 넓어 어디든지 이사할 곳이 많았을텐데 왜 창규씨는 왕청을 택했을까요?

*답: 창규씨는 계속적인 추적을 당했기 때문에 한곳에서 오래 머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피신할 준비를 갖췄답니다. 그때는 맘대로 이사도 할 수 없는 시기였으나 어느 분의 도움이 있었답니다. 순전히 우리 가족을 추격하는 무리들을 피해 이사했다는 것이 맞습니다. 형이 피살당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현실에서 창규씨로서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었고 때를 기다렸다고 봅니다. 한편으로 창규씨는 김좌진의 유언을 알고 있었습니다. 김좌진 할아버지는 “내가 죽으면 왕청 십리평에 묻었다가 왜놈이 물러가고 조국이 광복되면 그때 나를 조국에 묻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제가 창규한테 들은 얘기로 분석해 볼 때 창규씨는 이 유언이 있었기에 왕청을 택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문: 왕청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는데 그 동안에는 외부의 탄압이 없었던가요?

*답: 제가 창규 할아버지와 왕청으로 이사한 곳은 첩첩산골이기 때문에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었지요. 숨죽이며 외부와 연락을 끊고 살아가는 데야 탄압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문: 왕청현에 친구들은 어떻습니까?

*답: 어릴 때야 무슨 친구이겠습니까만은 지금이야 원만한 관계의 친구는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집 역사를 바로 고치는 데야 관심 없는 친구들이지요.

*문: 진술인의 느낌으로 창규씨는 왕청에서 어떤 생애를 마쳤다고 생각합니까?

*답: 제 아버지로 살아온 창규씨는 누가 뭐래도 당당했습니다. 목단강에서도 주변의 누구보다도 기골이 장대했고 힘도 좋았습니다. 죽는 날까지 때를 기다렸던 것이지요.

*문: 때를 기다렸다고 두 번째 진술하였는데 그 진의는 무엇입니까?

*답: 저한테 직접 남긴 유언을 근거로 말하겠습니다. 창규씨는 저한테 김좌진의 유물을 제게 물려주면서 “이 유물은 절대로 내놓지 말고 남북이 통일되면 그때 통일 정부에 넘기고 너는 조용히 살아라.”고 말했습니다. 이 유언 속에는 때를 기다렸다는 의미가 들어있고 남과 북을 비교했다는 의도가 있습니다.

*문: 왜 통일 정부에 유물을 넘기라고 했을까요?

*답: 현재 남측에서는 친일파들이 거들먹거리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통일이 돼야 나라가 부강해져서 친일파가 망상대지 못할테니까요. 창규씨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김좌진 할아버지의 고향에 가보지도 못하고 중국 땅에서 친일 앞잡이들한테 쫓기는 신세였는데, 남측 정부는 친일정권이고, 김좌진과 그의 아들이 그놈들한테 추격당하여 피살까지 당했는데, 이 일에는 관심도 조사도 하지 않는 김좌진의 조국이라면 어느 후손이 이를 인정하겠습니까? 어디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우리 가문을 이토록 몰살시킨 게, 죽기 살기로 살얼음판에서 침묵을 지켜온 우리 가족의 잘못입니까? 왜 침묵했을까요? 그쪽에서 대답해 보십시오. 그래서 남측을 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통탄할 노릇입니까?

 

마. 김좌진 장군의 유물에 대하여

*문: 먼저 진술인이 김좌진의 증손자라고 생각하게 된 동기에 대해 말하십시오.

*답: 제가 뭘 알겠습니까? 선친의 말씀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2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창규씨는 저한테 김좌진의 유물을 주시면서 유훈을 남기셨거든요. 그런데도 지금에서야 김좌진의 후손이라는 것을 진술하게 된 데는 또 뼈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창규씨는 저한테 조용히 살라했지만 제 세대에서는 조용히 사는 길이 선친께 오히려 욕되게 하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문: 진술인이 선친한테 물려받은 유물을 분석했다면 결과는 무엇입니까?

*답: 저는 중국글을 볼 줄 모릅니다. 더구나 김좌진 할아버지의 일기는 뜻을 알 수 없었지요. 그저 지도는 작전지도였다는 것과 사진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뿐이었습니다.

*문: 분석 결과는 뒤로 미루고 창규씨한테 물려받은 유물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차근차근 하나씩 말해보십시오.

*답: 지도는 한장짜리가 있었고, 책처럼 엮어진 지도도 있었습니다. 사진은 김좌진 할아버지가 말타고 찍고, 오숙근 할머니도 말을 타고 찍은 사진, 가족사진, 어떤 지도자급들과 찍은 사진이 있었습니다. 또 일기책이 여덟 권이 있었습니다.

*문: 지금 가지고 있나요. 아니면 그 유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답: 유물에 대해서는 얘기가 깁니다. 난들 조상의 역사를 바르게 고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창규씨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저는 김좌진 할아버지에 관한 출판물을 거의 다 봤습니다. 그러던 중 왕청현 교육국 문호갑 선생님과 연변대 민족연구소 박창욱 교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두 분은 역사학자시거든요. 특히 중국에서는 사학자로 정통성과 덕망이 높으신 분들입니다.

*문: 이분들이 유물을 어떻게 하셨나요?

*답: 박교수님은 연구소 일로 바쁘셨기에 저한테 별다른 말씀이 없었는데, 문호갑 선생님은 동북지방의 항일운동사와 김좌진장군의 역사를 연구하시는 분으로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저는 물려받은 유물을 문호갑 선생님한테 원본 그대로 모두 넘겼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문호갑 선생님의 부인과 아들을 만나면 상세하게 증언할 것입니다.

*문: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답: 당장이라도 연락이 됩니다.

*전재진: 그럼 연락하십시오. 갑시다.

 

〈다음은 필자가 2007년5월25일 오전에 김장춘과 함께 문호갑 선생의 아들 문일범씨 댁을 방문•취재한 내용임〉

*전재진: 부친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문일범: 장춘씨한테서 다 들으셨겠지만 저희 아버지는 공직에 근무하시면서도 향토사에 관심이 많으셨고, 돌아가시기 전에는 김좌진장군에 대해 김장춘씨와 각별히 논의하셨습니다. 장춘씨가 저희 아버지 양자로 들어와 같이 살기까지 했거든요. 장군에 대해서는 왕청현 일대를 다 돌아다니면서 조사했지요.

*전재진: 부친께서 김장춘씨한테 받으신 김좌진장군의 유물에 대해서 아십니까?

*문일범: 물론 다 알지요.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어요. 장춘씨는 100이면 100 틀림없이 김좌진의 후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는 부친께서 흑룡강성으로 회의를 다녀오시더니 “이제 장춘이 문제가 다 결정되어 한국에 간다. 같이 갈 수 있게 되었다.” 면서 상당히 기뻐하신 적도 있습니다.

*전재진: 부친께서는 뭘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문일범: 친필 일기장에서 확신을 얻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재진: 친필일기장이라니요?

*문일범: 김좌진 장군이 쓴 친필 일기장이 있었습니다.

*전재진: 그 밖에 다른 자료들은요?

*문일범: 군사지도도 있었고, 참대의자에 앉아 찍은 사진도 있었고, 장군의 일기도 있었고,

말 타고 찍은 사진도 있었고, 가족사진도 있었습니다.

*전재진: 문선생님께서 그런 자료들을 직접 보셨나요?

*문일범: 예! 제가 아버지 방에서 아버지와 함께 보았습니다.

*전재진: 그럼 할머니(문호갑씨의 부인)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문일범씨의 모친: 꼭 그렇지요. 장춘이는 후손이 딱 맞습니다. 우리집 영감이 헛소리나 할 그런 분이 아닙니다. 틀림없는 분이었어요.

*전재진: 옆에 계신 며느님(문일범의 아내)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문호갑씨의 며느리: 저는 시아버지 시중을 들었습니다. 손님이 올 때마다 말씀하시는 걸 옆에서 듣고 또 자료들을 보았지요. 시아버지께서 상당히 기뻐하셨거든요.

*문일범: 제가 오히려 질문을 드리렵니다. 한국이 사회, 경제적으로 발전한 것이 사실인데, 이렇게 유명한 장군의 후손이 어째서 이렇게 썩고 있는가? 한국사회의 수준이 의심스럽습니다. 화룡 일대에서 3천명의 적을 무찌른 분입니다. 그런데 그 장군의 후손을 이토록 방치했으니 우리도 분개합니다. 중국 옛말에 선조를 모르는 사람과는 상대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김좌진이 있기에 오늘의 한국이 있는건데 이걸 모르는 나라라면 어찌된 것이냐? 이겁니다. 말씀해 보세요.

*전재진: 좋습니다. 제가 한국 정부를 대신해서 무슨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김장춘이 김좌진의 후손이니 이를 인정해 달라는 공식적인 문서 접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한국국가보훈처에는 독립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이 있습니다. 또 이에 따라 서류를 접수하는 방법까지 공지했습니다. 그래서 서류를 정식으로 접수하고 인정받지 못했을 때 다시 응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제가 최종 심사자는 아닙니다만 지금 말씀하신 자료만 제출하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아니 국가보훈처에 제출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 귀중한 자료는 다 어디에 있습니까?

*문일범: 강용권이 다 가져갔는데 끝까지 아버지한테 반납하지 않았습니다. 강용권은 김좌진장군과 한국역사의 대죄인입니다. 아버지는 강용권이한테 자료를 찾으러 몇 번이나 갔었습니다. 전화하면 집에 없고, 시간이 없다고 핑계대고는 결국 내놓질 않았죠. 어디에 팔았어도 모를 일입니다. “장춘이 고생하다가 성공하게 됐다. 비행기로 모시고 가겠다.”고 한국에서 온 어느 여기자인지 소설가인지 하는 사람도 다녀갔어요. 부친은 한국의 윤모 교수가 쓴 책을 보시고 김좌진 역사가 잘못되어 바로잡아야겠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전재진: 강용권이 언제 가져갔죠?

*문일범: 1989년인가 그리 될 겁니다. 김창규가 김장춘에게 물려주고 김장춘이 부친에게 제공한 유물을 강용권의 손에서 행방불명되었으니 강용권이 장춘의 목을 벤거나 다름없지요.

*전재진: 부친께서 그렇게 무모하게 처세하지는 않으셨을텐데요. 어쩌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을까요?

*문일범: 강용권이는 그 자료를 달라고 올 때는 꼭 자전거를 타고 왔어요. 연길에서 왕청까지 80킬로미터가 다 되는데 그 길을 자전거를 타고 와요. 아버지는 그런 강용권이를 볼 때 동정심이 유발했는지도 모르죠. 아버지는 워낙 상대방을 믿기만 하셨어요. 그때는 사실 강용권이도 역사탐방을 열심히 할 때였으므로 부친도 의심하지 않았던 겁니다.

*전재진: 부친께서 살아 계신다면 어떨까요?

*문일범: 저희 아버님은 신체도 좋으셨습니다. 축구와 스케이트를 잘하셔서 40대 후반까지 단위에서는 선수로 직접 나섰습니다. 1992년에 68세로 돌아가셨어요. 지금 살아계신다면야 이 문제는 쉽게 될 수 있을 겁니다.

*전재진: 할머니하고 문선생님하고 며느님께서도 사진을 찍으셨으면 합니다. 왜냐면요 현시점에서 거짓 없이 최선을 다하자는 의미이고 역사에 남겨야죠.

<모두 증언을 마치고 사진을 찍음>

*전재진: 저는 이번 동삼성 여행에서 김장춘씨와 관련지역과 관련된 분을 만날 계획입니다. 왕청에서는 십리평의 역사적 의미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후에 논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장군의 역사를 바로잡는데 협조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문일범씨 집에서 대화를 마치고 문일범, 김장춘, 전재진이 점심식사를 같이함.]

 

바. 동북지방 여정

[기차를 타고 왕청을 출발하여 목단강역에서 하차. 다시 버스를 타고 가목사까지 감. 가목사에서 쐉야산을 다녀와서 이춘으로 감. 쐉야산에는 김좌진장군의 부인 오숙근여사한테 누님이라고 부르며 장군의 가족을 돌보던 오영선씨의 며느리 김복록씨가 생존해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오영선씨는 해주 “오”씨로 오숙근여사와 본관이 같아 누님으로 여기고 장군의 가족을 돌보는데 최선을 다했다. 김장춘의 안내로 오영선씨의 아들 오춘택의 부인인 김복록(80세)씨를 자택에서 만났다. 김장춘은 김복록씨를 외숙모라고 불렀다.]

*전재진: 시아버지에 대해 묻겠습니다. 먼저 성함을 말씀해 주시고요. 오숙근 여사와는 어떤 관계였었는지 아시는대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복록: 김복록입니다. 저는 오숙근 여사를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아버지께서 저한테 한 얘기는 다 말하지요. 제 시아버지 이름은 오영선입니다. “해주 오씨”이지요. 오숙근 할머니도 “해주 오씨”였고 또 그때는 친척이 없었으니까 친누님으로 알고 장군의 가족을 돌봤답니다. 장군은 몇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위엄이 대단하셨던 분이였다고 시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전재진: 시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김복록: 1964년도에 73세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평안도 초산군이 고향인데 18세에 만주로 건너오셨다더군요. 그 후로 왔다 갔다 하시며 사셨겠죠.

*전재진: 김좌진장군의 장남과 오숙근 여사에 대해 들으신 게 있습니까?

*김복록: 사실 그때 중국에서는 함부로 말하면 큰 일 날 때였지요. 어디서든 함부로 말했다가 만약에 감시대상으로 점 찍히면 큰일이었어요. 죽어요. 해방 이후로 장군의 가족은 쉴 새 없이 난리를 피해 다녔답니다. 소식 없이 피신하신 것이지요. 장군의 장남이 토지개혁 때 맞아 죽었다는 걸 남편한테서 들었습니다. 그 뒤로는 모릅니다.

*전재진: 남편께서는요?

*김복록: 제 남편은 3년 전에 돌아가셨지요. 금년으로 87세 되시는데, 시아버지는 “고모 한 분이 계셨다.”는 말씀을 하셨답니다. 그분이 오숙근 여사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전재진: 시아버지나 남편한테 또 달리 들은 얘기를 해 주십시오.

*김복록: 더 없어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장춘이가 장군의 후손이라는 점입니다. 남편만 살아계셔도 많은 것을 알고 있을텐데 그만 돌아가셨죠. 참으로 아쉽습니다.

*전재진: 피살당했다는 장남 창렬씨와 오숙근여사에 대해서는 더 말씀하실 게 없습니까?

*김복록: 해방 이후에 보청 근처에서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지 언제 어디서 또 누가 어떻게 돌아가시게 했는지 모르죠. 시신도 어떻게 되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전재진: 혹시 집안에 시아버지께서 남기신 유물이라든가 근거가 될 만한 자료는 보관하고 있습니까?

*김복록: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편도 자료를 다 없앴습니다. 불태웠지요.

*전재진: 왜 불태웠을까요?

*김복록: 그때 당시는 문화혁명 때라서 만약에 공산당 생각으로 집안에 불결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이 있으면 그 집안은 몽땅 망하거든요.

[김복록씨의 집에서 때늦은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김장춘과 나는 여관에서 휴식하고 다음날 2007년5월27일 아침 일찍 흑룡강성 보청현 쐉야산에서 이춘을 향하여 출발함.]

[흑룡강성 이춘伊春시에는 김장춘의 가족이 모두 살고 있는 곳이다. 김장춘은 김좌진의 손자 김명환의 슬하에 5남매 중 둘째아들이다. 어릴 적부터 생모의 정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49세인 지금도(2007년) 지금도 생모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는다. 형제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생모 우소근于素芹씨는 남편과 살던 집에서 옛날과 변함없이 살고 있다. 장남은 가까운 마을에, 큰딸은 인근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둘째딸은 재혼하여 상점을 꾸렸고, 막내아들은 건강이 좋지 않아 쉬고 있다. 그들 김장춘의 가족은 호구부에 조선족으로 적혀 있지만 한국말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형제들끼리 서로 부딪치는 일 없이 원만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안내하는 김장춘이 장본인이라서 중국말 통역을 맡길 수도 없었거니와 생모와의 관계가 불편하다 보니 형제들과도 친숙하지 못하여 장군에 대한 얘기는 꺼낼 수 없었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함께 이틀 밤을 지냈다. 그들은 나를 정겨운 가족으로 대했다. 마지막 식사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 없는 이별의 시간이었다. 장춘의 가족과 나는 아리랑을 부르며 함께 춤을 췄다. 순박한 그들의 모습에 감동하였다. 그리고 다시 장춘과 함께 왕청을 향하여 발길을 돌렸다.]

 

사. 유물과 자료를 제공하게 된 경위에 대하여

 

*문: 건네준 자료를 최초로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답: 문호갑 선생님이시다.

*문: 자발적인가? 요청에 따른 것인가?

*답: 내가 자료에 대해 먼저 말했다. 그랬더니 이 분야에 관심이 많으셨던 문호갑 선생님께서 제집으로 찾아와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나는 문선생님께서 왕청현 일대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 조사하시는데 협력했다. 수렁에 빠진 역사를 발굴한다는 의도였기 때문에 자발적이다 라든가 요청이라는 말은 적절치 않다.

*문: 어쨌든 문선생님께 자료가 넘어간 것은 본인이 자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자료를 전부 내드린 의도는 무엇인가?

*답: 나는 중국글을 다 모른다. 명환씨는 창규씨한테 글을 배웠는데 필체도 아주 좋았다. 나는 선친한테서도 글을 배우지 못했다. 장군이 남기신 일기가 여덟권이 있었는데 웬만한 사람은 그 글을 읽지 못한다. 그런 자료를 내가 분석하지 못하므로 역사학자이신 문호갑 선생님께 드린 것이다. 나는 그 자료로서 할아버지의 잘못된 역사를 증명하려 했다. 그러면 자연히 한국에서 잘못된 역사가 바로 잡힐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에 내드렸다.

*문: 자료 요청자의 목적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답: 문호갑 선생님 역시 만주 일대의 항일독립운동 역사를 바로 정리하고자 하셨다. 특히 김좌진장군의 역사에 관심이 많으셨다. 나는 문 선생님의 뜻에 동의했다. 문호갑 선생님은 사욕을 챙기시는 분이 아니었다.

*문: 제공한 자료를 돌려받지 못했다면 그 이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문호갑 선생님은 자료를 소중히 여기셨고, 일일이 분석하시며 일하시는 것을 옆에서 보았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시던 자료가 강용권이라는 사람한테 다 넘어갔다. 강용권한테서 돌려받지 못하니까 내게도 돌아오지 못하는 것 아닌가. 문 선생님은 자료를 훼손한다거나 없앨 분이 아니다. 강용권의 손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나한테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문: 강용권의 손에서 없어졌다면 강용권이 어떻게 처리했다고 생각하는가?

*답: 참으로 답답하고 애통한 일이다. 그저 강용권이라는 사람은 당시에 한국 사람들과 흑룡강성역사박물관 관계자들과 연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는데, 그토록 무모하게 자료를 내놓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결국 없어졌으니 소각하거나 폐기하지 않았다면 한국측의 어느 관련자의 손에 들어갔을 것으로 생각한다.

*문: 한국에 강용권과 관련자가 있다면 누구를 말할 수 있겠는가?

*답: 지금으로서는 말하기 어렵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과 다르게 또 연도나 수치도 맞지 않게 주장해 온 사람들, 바로 할아버지의 역사를 왜곡하려는 그 사람들일 것이다.

*문: 할아버지의 자료가 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면 잃어버린 자료를 찾기 위해서 한국 정부에 수사를 의뢰할 생각은 있는가?

*답: 내 예상이 맞아떨어져 찾을 수만 있다면 수사를 의뢰하겠다.

 

아. 장군의 역사 가운데 고쳐야 할 점과 잘못에 대하여

*문: 장군의 역사바로잡기에 대한 견해는?

*답: 내가 생부와 생모 곁에서 떨어져 할아버지인 김창규씨를 아버지로 알고 자라온 것을 생각하면 우리 집안이 왜 그토록 파란만장했을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좌진 장군의 역사를 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김좌진장군의 장남 창렬씨가 동생인 창규씨에게 아들 명환을 부탁하는 유언에 따라 조카 명환을 돌보다가 창규씨는 나를 키웠다.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하시고 오숙근 할머니가 아들 창렬과 거의 같은 시기에 돌아가신 뒤로 창규, 명환으로 이어지는 우리 가족의 생활사는 말로 다하기 어려운 사연이 많다. 왕청에서 또 연변대학 민족연구소에서는

장군의 가족사가 정리돼야 장군의 역사가 바로 선다고들 말한다. 나는 평소에 청산리전투에서 전사하신 분들을 생각해 왔다. 그 분들도 가족이 있었고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일제 앞잡이들이 독립유공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나는 할아버지의 역사를 그들과 말하고 싶지 않았다. 중국에서 장군의 일가가 숨어 지내야만 했던 사정을 누가 알겠는가?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모른다. 우리 일가가 정체모를 인간들에게 탄압과 추격을 받을 때 한국에서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던 사람들이 할아버지에 대한 역사를 잘못 정리한 점이 있으므로 이를 바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 할아버지 김좌진 장군은 부인이 몇 분 된다는 점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김좌진 할아버지가 류망(流氓:정처없이 떠도는 유랑인, 바람둥이)이란 말입니까? 빼앗긴 나라를 찾아야 하고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항일전투부대를 이끈 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왜놈들한테 짓밟힌 나라를 구하려고 고향을 떠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북만주 일대에서 왜놈들을 잡던 분이신데 그런 큰 뜻을 가졌던 할아버지를 류망流氓 취급이라니요. 지금 한국에서는 오숙근 할머니 말고도 몇 사람을 더 할아버지 장군의 부인이라고 하는데 이거 제대로 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주장하는 김좌진의 후손들이 진정한 후손이라면, 할아버지가 바람이나 피우던 그런 분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따지고 고쳐야지 서로가 머리를 들이대고 자기들이 후손이라는 것만 주장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를 아들처럼 키워주신 창규씨는 중국 땅에서 그 숱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우리가 장군의 후손이라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습니다. 말을 하면 당장에 맞아 죽을 형세였거든요.

*문: 가족사에 대한 논란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제가 가장 억울하고 분한 것은 오숙근 할머니가 자식을 낳지 못했다고 한국의 몇몇 사람들이 소문을 번졌다는 점이다. 할머니의 자식인 창규씨의 손에서 내가 자랐고, 해방 뒤에는 할머니는 큰아들과 함께 흑룡강성에서 이리저리 피신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자식을 낳지 못했다니 도대체 누가 이러는 건가? 김좌진의 고향이 있고 가문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김좌진 할아버지의 동생인 동진씨가 있고, 분명히 한국에는 그 후손이 살고 있을텐데 김좌진 장군이면 큰아버지인데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를 이렇게 욕되게 해도 가만히 있으니 그 사람들 그 가문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말이다.

자. 손자로서 할아버지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문: 할아버지는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나?

*답: 내가 할아버지를 어떤 인물이었다고 어떻게 평하겠는가. 오숙근 할머니를 누님으로 따르고 장군의 가족을 돌보던 오영선씨의 며느리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아버지께서는 김좌진장군을 몇 백 년에 나올까 말까 하는 위대한 장군이셨다. 체격도 웅장하고 성품이 좋고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였단다.

*문: 오영선씨의 가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답: 나는 오영선씨의 며느리 되시는 분을 외숙모라고 부른다. 중국 흑룡강성에서 유일한 하나뿐인 친척이다.

*문: 할아버지가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알고 있다면 무슨 연유로 누가 그랬다고 생각하는가?

*답: 할아버지 암살설은 여러 가지이지만 나는 선친한테 들은 말을 그대로 전달하겠다. 나를 길러주신 창규씨는 내게 말하기를 할아버지는 “일본인 앞잡이나 일본놈의 사주를 받은 놈들이 총을 쐈다. 중국공산당이 그럴 리 없다. 또 독립군들도 서로 의사가 맞지 않는 경우도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같은 독립군이 그러지도 않았다. 일본놈들이 조선인 앞잡이를 시켜 할아버지를 저격하게 하고, 이를 중국공산당과 김좌진장군의 반대파가 했다고 매도했다.”고 하였다. 오숙근 할머니와 장남 창렬씨가 해방 후에 계속 정체모를 놈들한테 추격을 당한 것도 수 천 명의 왜놈을 때려잡은 장군에 대한 복수로 그 놈들의 짓이 분명하다. 그놈들이야말로 친일개놈들이자 민족반역자들이 아닌가 말이다.

*문: 중국에서 장군의 유적이나 공적에 대해 아는 대로 진술하시오.

*답: 나는 왕청에서 가까운 십리평을 가장 좋아한다. 군관학교를 시작했던 자리이다. 강을 건너면 널따란 평지가 있고 평지 한쪽 편에는 나지막한 산이 마치 지휘본부처럼 형성되어 있다. 김좌진 장군의 유적이나 공적에 대해서는 한국에서 더 잘 알고 있잖은가?

*문: 한국 정부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답: 나는 나를 키워준 김창규(장군의 둘째아들)의 생애를 직접 봐 왔기 때문에 창규씨를 가장 불쌍하게 생각한다. 창규씨는 당신의 모친과 형이 몰매 맞아 죽는 현장을 목격하고 살아왔는데 그 얼마나 통한의 세월을 살았겠는가. 이 점을 생각하면서 김좌진 장군이 민족의 영웅이기 전에 우리 가족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 더 절실하다.

*문: 한국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말하시오.

*답: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진실은 국민이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월이 지나면 그렇게 될 것으로 믿는다.

*문: 마지막으로 선친의 유언이 있었다면 말하시오.

*답: 내게 아버지는 김좌진장군의 둘째아들인 김창규이다. 목단강에서 메기를 잡아 끓인 국물로 나를 키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족보상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알고 자랐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 분은 내게 장군의 유물을 주시면서 “우리나라가 통일이 될 때까지 절대로 장군의 후손이라는 말을 하지 마라. 통일이 되면 그 통일정부에 이 유물을 바쳐라.” 고 하셨다.

 

자. 2007년 이후에서 2020년에 이르러

김장춘은 2007년 이후 직장업무로 김좌진 역사 진상규명이 침체상태에 머물다가 퇴직한 뒤인 2020년 2월 1일자로 필자에게 전자우편을 보냈다. 이를 계기로 김장춘은 본격적으로 “김좌진역사바로세우기”에 돌입한다. 전자우편 내용은 사진과 같다.

[김장춘은 중국군에 입대하여 만기 제대하고 중국 길림성 왕청현 수도국에서 일하였다. 수도국에서 정년퇴직한 김장춘은 “할아버지의 유물을 통일 정부에 바쳐라.” 한 선친의 유언을 되새기며 한국에서 김좌진 할아버지의 역사를 바로잡아 줄 것을 기대하며 세월을 보냈다. 김장춘은 직장업무 중에도 연변대학교 민족연구소 박창욱 교수 외 다수의 원로 사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장군의 역사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의지를 굳혀갔다. 김장춘은 “통일이 안 된 할아버지의 나라엔 가고 싶지 않다. 친일파가 판치는 대한민국엔 가고 싶지 않다.” 고 필자에게 누차 말했다. 그렇다해도 기다리고 기다려도 김좌진의 역사와 가족사는 더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면서 가짜들이 판치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다며 2020년 2월 1일자로 필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유전자대조검사를 하여 김두한과 가짜와 진짜를 판가름하자는 취지였다. 김장춘의 근황을 묻고 김좌진과 관련하여 몇가지 문제를 확인하고 요약하여 정리한다.]

 

1. 유전자대조검사 요청에 대하여

문: 갑자기 전자메일로 소식을 전했는데 심경에 어떤 변화라도 있었는가?

답: 심경의 변화라기보다는 이제 퇴직하고 생각해보니 김좌진 가문의 주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어 연락했다.

문: 유전자대조검사를 요청했는데 쉽지는 않지만 나도 동의한다. 주요 목적이 무엇인가?

답: 목적이라면 당연히 진작 매듭지었어야 할 일이었잖은가! 한국 정부 측에서 김좌진 문제만큼은 해결해 줄 것으로 알고 기다려왔는데, 해결하지도 않고 또 앞으로도 해결하리라 기대할 수 없어 요청했다.

문: 김좌진 문제를 구체적으로 말하라.

답: 김좌진의 피가 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가짜들이 남의 가문에 올라타 진짜 행세하고 있잖은가! 그래서 그들이 자신 있다면 조상의 묘를 파서라도 유전자대조검사를 하자는 것이다. 김두한과 김을동이 해도 너무한다. 한국 정부 또한 친일정부가 아니라면 이 문제를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 가족 문제에서 맨 먼저 떠오르는 문제는 무엇인가?

답: 김좌진의 가족사를 누가 이토록 처참하게 만들어놨는지는 잘 알고 있잖은가 말이다. 김좌진 역사와 가족사는 완전히 망가졌다. 아들들과 증손인 내게 이르기까지 그 생활은 통한의 세월을 살아왔다. 그 억울한 가족사를 무엇으로 다 말하겠는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가족을 다 희생하면서 일본놈들과 싸운 할아버지 김좌진이 암살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김좌진의 장남인 창렬이 토지개혁심판대에서 맞아 죽고,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바라본 어머니 오숙근은 기절하여 병석에 누워 두 달 만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이같은 사건이 한국에서는 싹 다 지워버렸잖은가 말이다. 나를 키워준 아버지는 사실 아버지가 아니고 할아버지다. 김좌진의 둘째 아들 창규였다. 내가 생후 석 달도 채 안 되었을 때부터 나를 키웠기에 내게는 아버지이다. 나를 키워온 아버지의 일생이 가장 불쌍하고 억울하여 참을 수 없다. 반드시 김두한과 유전자대조검사를 하여 판을 가르겠다.

문: 유전자대조검사를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답: 나는 필요하다면 조상의 묘를 파겠다. 김을동도 자신있다면 김두한의 묘를 파서 김좌진과 대조하라는 것이다.

문: 김좌진의 유체도 아직 귀환하지 못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인가?

답: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오숙근 할머니가 한국으로 모셔가 밀장했다는데, 오숙근 할머니는 한국에 가지 못했다. 해방 이후에도 가지 못하고 두 아들과 손자와 만주에서 머무르시다가 돌아가셨다.

문: 그렇다면 김좌진의 유체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인데, 유전자대조검사는 될 수 없다. 어쩌란 말인가?

답: 김좌진의 선친 김형규 묘가 있을 것 아닌가? 김두한은 김형규와도 맞아야 하니 말인데, 자신 있으면 선친의 묘를 파라는 것이다.

문: 김을동은 어떤가?

답: 김두한이 아니면 그 이하 다 아닌 것이다. 김을동은 비교할 상대가 아니다.

문: 지금까지 안동김씨 가문에서 침묵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답: 김좌진의 친동생 동진이 있었다. 만주까지 와서 같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해방 후에 잘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잘 돌아갔다는 말도 들리는데, 그들이 정말 김좌진의 핏줄이라면 바보 멍청이라고 본다. 동진의 후손들이 살아 있을텐데, 큰할아버지가 이토록 가짜들한테 짓밟히고 있는데도 김을동한테 달라붙어 있다는 것은 바보 멍청이 아니고서야 어찌 저럴 수 있는가 말이다.

문: 지금 김을동은 자기의 부친인 김두한을 김좌진과 유전자대조검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답: 김을동도 김두한이 장군의 아들이 아닌 가짜라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다고 본다. 도올 김용옥 교수가 오래전에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다. 언젠가는 진짜 후손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한 말에 대해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있다는 점으로도 김을동은 속셈을 다 차리고 있을 것이다.

문: 유전자대조검사에 대해 가장 실효적인 방안이 있으면 말하라.

답: 어렵지 않다.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 하고, 나혜국이 낳은 김철한도 김좌진의 아들이라고 하니, 모친은 달라도 씨는 같을 것이니 김두한과 김철한은 아버지가 같은 형제로 돼 있으니까 두 사람이 김좌진과 유전자가 맞을 것이다. 두 사람이 김좌진의 혈통이라면 유전자가 맞을 것이다. 그 문제를 먼저 풀어라. 그때 김좌진의 둘째 아들 창규의 유전자를 내놓겠다.

문: 왜 둘째 아들인가? 장남 창렬도 있잖은가?

답: 창규는 내가 모셨기에 가까운데 산소가 있지만 창렬의 묘는 흑룡강성 보청현에 가서 찾아야 하므로 기일이 걸린다.

김장춘의 제안을 알기 쉽게 그렸다.

 

*김장춘은 선친 김창규의 묘를 파묘하여 북경 소재 국가급 연구소에 본인과 유전자대조검사를 의뢰했다.

 

2. 김을동이 제시한 가족사진에 대하여

문: 김을동이 제시한 가족사진을 보았는가?

답: 보았다.

문: 어떻게 보았는가?

답: 인터넷에서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으면 자세히 말해 달라.

답: 한국에 엠비씨라는 방송국이 있는데, 거기서 1989년에 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을 방송했다. 그때 김을동이 사진을 들고나와 설명하면서 “오숙근여사, 이소사 진주할머니, 자신의 어머니 이재희, 여섯 살 때 본인”이라고 말했다.

문: 사진을 보았다면 어땠는가?

답: 내게 김좌진의 가족사진이 있었고, 김좌진 할아버지와 오숙근 할머니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래서 오숙근 할머니의 얼굴을 안다. 김을동이 제시한 사진에는 할머니 얼굴이 없다. 그 사진은 완전 조작품이다.

문: 김을동이 여섯 살 때 찍었다면 1950년이 된다. 그때 오숙근 여사는 돌아가신지 3년이 지났을 때인데 어떻게 생각하나?

답: 그렇다. 오숙근 할머니는 1947년 중국 흑룡강성 보청현에서 큰아들이 토지개혁 심판대에서 맞아 죽은 걸 보고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사망하였는데 어떻게 3년 뒤에 김을동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가. 이런 엉터리를 인정하는 한국 사회도 문제

다.

 

3. 김좌진 장군의 유택에 대하여

김장춘은 "김좌진과 오숙근의 합장은 김두한이 조작한 패륜적 범죄이다."라고 말한다.

문: 김두한은 1958년에 (1957년이라는 기록도 있음) 오숙근 여사와 장군을 합장 장례식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누구의 시신을 장군과 합장했단 말인가.

문: 김두한이 김좌진과 오숙근을 합장했단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답: 그런 잡놈이 어디있는가. 또 그런 범죄를 묵과하는 한국 정부는 과연 백성의 정부인가를 묻고 싶다. 누구의 시신을 묻어놓고 할아버지의 부인이라고 하는가. 오숙근 할머니 묘는 흑룡강성 보청에 있다. 한국에 가지 못했다. 누구든지 생각해보라. 나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라.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잖는가 말이다.

문: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답: 할아버지의 시신도 한국으로 갔는지 확실하지 않다. 내가 할아버지의 묘소를 확인할 것이고 또 현재 한국에 있는 할아버지의 유체가 맞는지도 확인하겠다. 하지만 김좌진의 묘는 한국 정부가 나서서 찾아주기 바란다.

 

4. 김창렬의 사망에 대하여

문: 김창렬의 사망에 대하여 상세하게 말하라.

답: 좋다. 말하겠다.

문: 참으로 처참한 질문을 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취지이니 이해바란다.

답: 김창렬은 김좌진의 장남이다. 아버지 감좌진이 암살되기까지 비밀리에 활동을 많이 했다. 아버지의 반일운동에 연관되어 일본놈한테 잡혀가 고문을 심하게 당해 정신병자가 될 정도였다. 풀려나왔을 때 고통이 너무 심하여 아버지가 약담배를 사 줄 정도였다.

문: 약담배가 뭔가?

답: 아편으로 알고 있다.

문: 창렬에 대해 계속 말하라.

답: 김좌진 할아버지는 가족을 보호하려고 한족이 많이 사는 마을에서 살도록 조치했다. 그렇지만 한족 마을도 위험해 그때마다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오숙근 할머니가 아들들을 데리고 피신해 다닌 것이다. 피신해 다닐 때 밤길을 걷는데 배가 너무 고파 중국 사람들이 산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놓고 간 떡을 주워 먹기도 했단다.

문: 그런 사정을 어떻게 알고 있나?

답: 아버지 창규한테 들었다. 창규는 나에게 많은 얘기를 들려줬다.

문: 창렬의 죽음에 대해 말하라.

답: 창렬이 죽게 된 것은 토지개혁심판대이기는 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아니고 일본 밀정인 조선인이었다고 창규가 여러 번 말했다. 일본한테 돈을 받아 먹고 그런 짓을 하는 밀정이 많았다. 김좌진 주변에도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일제 밀정이 많았다.

문: 그렇다면 누구한테 체포되었는가?

답: 당안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문: 당안이 뭔가?

답: 당안은 중국 공산당이 개개인의 신분을 조사하여 기록한 문서이다. 김좌진의 가족이 기록된 당안은 중국 공산당 흑룡강성 보청현 당안이 있고, 흑룡강성 취란삼림공업엽위원회 조직부의 당안이 있다. 그 당안에 다 나와 있다.

문: 무슨 내용인지 소개할 수 있겠는가?

답: 그러니까 가족 4명이 있었다는 점, 김창렬의 죽음, 오숙근 할머니의 죽음, 항일연군에 가담한 조선인 허기호의 동생 허기훈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점, 만금산으로 끌려갔다는 점 등이 기록되어 있다.

문: 그렇다면 김창렬이 허기훈한테 체포되어 만금산으로 끌려가 토지개혁심판대에서 공개적으로 맞아 죽었다는 얘긴데, 맞는가?

답: 그렇다.

문: 김창규에 대해 독자들이 궁금해 할 것이다. 상세히 말하라.

답: 김창규는 김좌진의 둘째아들이다. 나가 태어난지 석달이 채 안 지났을 때부터 나를 키워준 분이라서 내가 아버지라 부른다.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는 것을 알기에 내가 가장 불쌍한 분으로 안다.

 

5. 추가 증빙자료에 대하여

문: 김좌진 역사와 가족사 문제에 대해 한국 사람들은 김두한과 김을동에 푹 빠져 있어 김장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 “서울의소리”에서 몇 차례 방송을 하니 조금은 알게 된 형편이다. 김장춘이 김좌진의 후손이라는 점을 밝힐 만한 증빙자료가 있는가?

답: 있다.

문: 뭔가?

답: 중국 공산당 흑룡강성 보청현 당안과 취란삼림업엽위원회 조직부 당안이다.

문: 어떤 내용인가?

답: 김좌진의 장남 김창렬의 죽음과 오숙근 할머니의 사망 연유와 당시 김좌진의 유족이 4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문: 그밖의 증빙자료가 있다면 무엇인가?

답: 김창규의 친구 이철우의 육필 진술서, 왕청현 교육국 향토사학자 문호갑의 아들 문일범의 육필 진술서, 김창규의 이웃사촌 권상육 육필 진술서, 김창규의 이웃사촌 김인한의 육필 진술서, 오영선의 아들 오춘택의 친서도 있다.

 

6. 김장춘이 말하는 새로운 사실

문: 지금 한국의 서울의소리 유튜브 방송에서 김좌진에 대해 계속 방송하고 있다. 지난번 첫번째 방송에 영상으로나마 출연하여 증언해 준 점에 고맙다. 국민들은 당사자인 김장춘 본인이 한국에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언제 오려는가?

답: 지금 다 아시다시피 국가적으로 코로나 때문에 항공길이 다 막혔잖은가. 코로나가 안정적으로 풀리고 동북에서 비행기가 뜨면 가겠다.

문: 김좌진은 1917년 8월에 대한광복회 길림지부 부사령을 파견되어 반일무장투쟁에 전념하시다가 1930년 1월 24일 암살당했다. 그런 일련의 세월 속에 독립운동을 함께 한 최진동, 최운산, 서일, 김혁, 윤자형이 있고, 발해농장을 경영한 이대성도 대부호로서 김좌진에게 군자금을 조달했다. 이 일을 아는가?

답: 다 알고 있다.

문: 안다면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답: 선친 김창규한테서 다 들었다.

문: 그렇다면 최진동에 대해 아는대로 말하라.

답: 최진동은 아주 훌륭한 분이다. 그 형제들이 있었다는데 형제들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재산이 많아 군자금을 조달했고 봉오동전투에서 공을 크게 세운 분으로 알 고 있다.

문: 김혁에 대해서 아는가?

답: 신민부 시절 중앙집행위원장이었다는 것과 김좌진과 성동학교를 세워 교장직을 맡았다는 것 쯤으로 안다.

문: 서일 총재에 대해서 아는대로 말하라.

답: 북로군정서 때 할아버지와 함께 사관생도들을 훈련시켰고, 대종교적으로도 훌륭한 분이시다. 덕원리에서 김좌진 가족과 이웃하며 살았다는 사실이 있다. 그때 서일의 큰아들과 김좌진의 큰아들이 친하게 잘 지냈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문: 윤자형이라는 분에 대해 들은 얘기가 있는가?

답: 윤자형은 김좌진보다 나이가 많았고 학식이 풍부한 분이라고 했다. 해서 김좌진이 아버지처럼 스승처럼 모셨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김좌진의 활동지역에 머물도록 하지 않았다. 이대성이 경영하는 발해농장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관리했다고 들었다. 그때 김좌진의 큰아들 창렬이 윤자형의 심부름을 했다. 군자금을 전달하는 일도 했다고 들었다.

문: 발해농장이라고 했는데 어떤 농장인가?

답: 발해농장은 동경성 일대에 있다. 이대성 일가가 경영하던 농장인데 면적이 상당하다고 했다. 대부자였다. 이대성은 신민부에 군자금을 상당히 많이 조달했다.

문: 할아버지 김좌진에 대해서 못다한 얘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답: 할 말은 너무 많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김좌진은 재산을 다 버리고,가족을 돌볼 틈도 없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본놈과 싸운 사람이 잖은가. 결국 일본놈 밀정한테 암살당했다.  그런 분의 기족사를 한국에서 망쳐놨다는데 너무 분하다. 또 망쳐 놓고도 바로 잡지 않는 것이 더 분하다. 내가 한국에 가면 다 털어놓겠다. 도대체 무슨 역사를 그토록 개망태기로 만들어 놓았는지 한국이 한심하다.

문: 김좌진의 문제는 쉽게 정리되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장군의 아들은 김두한이다. 김좌진에 대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어떤가?

답: 내 나이 60이 넘도록 바로잡지 못하여 조상한테 죄스럽다. 하지만 김좌진 가문의 주인으로서 가족사항과 족보를 바로잡겠다.

문: 마지막으로 할 얘기가 있으면 말하라.

답: 지금 한국에서는 김두한과 김철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김좌진의 씨를 받았다는 것이므로 둘이서 유전자대조검사를 하면 아버지가 같다고 나올 것이다. 김두한과 김철한이 김좌진의 배다른 아들임이 증명되면 김좌진의 둘째 아들 김창규의 유전자를 내놓겠다.  서로 대조하면 누가 가짜이고 누가 진짜인지 판가름날 것이다. 김두한과 김철한이 먼저 똑똑하게 제대로 하라!  이 문제는 한국 정부가 나서야 한다. 그렇잖으면 한국정부를 상대로 진상규명을 하자는 고소장을 내겠다.

 

(김장춘에 대한 사연은 조사되고 자료가 입수되는 대로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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