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역사바로세우기—제7탄]
□증발된 김좌진 장군의 두 아들 창렬과 창규
가. 김좌진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⑴중국 공산당 흑룡강성 보청현 당안 기록
(중략)김명환의 가정은 빈농이고, 김명환 본인은 학생 출신이며, 위만주국 강덕11년(1944년)에 시마쌘즈(徐馬架子)에 거주했다. 그때 김명환은 겨우 10세였다. 가족이 4명이었는데 김명환 본인과 할머니와 삼촌과 그의 아버지였다.(이하 생략)
⑵중국 공산당 추이란삼림공업엽위원회 조직부 당안 기록
토지개혁 때인 7월에 보청현 제3지구 동광촌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던 어느날 오전에 (아버지) 체포하여 보청현 구류소에 감금했고, 보청현 만금산으로 끌고가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그 후 두 달 뒤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중략)나는 어릴 때부터 숙부와 함께 생활하였고, 빈농인 숙부를 따라 다녔다. 나의 아버지는 집안일을 하지 않고 주로 숙부에게 의지해 살았다.
⑶중국 길림성 보청현 교육국 향토사학자 문호갑의 증언
문호갑은 김좌진의 일기(8권 분량)를 모두 분석•숙지하고 장남 문일범에게 “김좌진이 덕원리(서대파 십리평)에서 독립군 활동할 때 서일 장군과 아래윗집에서 살았는데 두 집 자식들이 사이가 아주 좋았다 한다.”고 전했다.
⑷윤자형 가족에게 전해진 김좌진의 두 아들
윤자형은 1907년부터 고종황제의 칙령(勅令:정2품가의대부윤자형. 의병대장겸호남3도육군대도독부)에 따라 의병대장으로 지리산을 거점으로 호남지방에서 활동하다가 만주로 갔다. 평소에 만주 독립군무장활동 단체와 군사정보가 오고간 것으로 추정된다. 만주에서 독립군부대를 창설하는 등의 활동하다가 김좌진의 신민부 시절에 대부호(大富豪) 이대성의 발해농장에서 일하며 신민부의 군자금 모집을 담당했었다. 윤자형은 김좌진보다 21살 많아 김좌진이 아버지처럼 스승처럼 지냈다고 김장춘이 그의 선친의 입을 빌어 증언했다. 김좌진은 윤자형이 병영(兵營)에서 활동하는 것이 고생스러울까 하여 이대성이 운영하는 발해농장에서 일하도록 하였다는데, 사실상 군자금 확보와 모금이었다. 이때 김좌진은 아들 창렬의 신변보호와 활동을 위해 윤자형에게 맡긴 것으로 분석되는바 이때 창렬은 군자금과 군사정보를 전달하는 일을 다 해냈다. 사실상 창렬도 독립군 활동과 마찬가지였다. 이때 둘째 아들 창규도 오가며 함께 생활했다 한다. 두 아들 곁에 오숙근 여사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보안유지에 각별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⑸김명환이 자식(김장춘 외 4명)에게 남긴 자필유서
“나의 조부는 김좌진이고, 나의 아버지는 김창렬이라 한다. 숙부는 김창규이고, 나의 할머니는 오씨이고, 내게는 고모가 한 분 있었다. (이하 생략)”
⑹ 서일 총재 후손에게도 "김좌진의 가족이 서일 총재의 가족과 이웃하며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7)위 ⑴의 김명환은 김좌진의 장남 창렬의 아들이고, 이 본인 김명환을 포함한 가족 4명 중 할머니는 김좌진의 정실부인 오숙근여사이며, 삼촌은 김좌진의 둘째 아들 김창규이고, 아버지는 김창렬이다.
나. 김좌진 족보에서 관찰되는 두 아들의 이름칸
⑴충남 홍성군 홍주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김좌진의 호적에 부인이 오씨로 기재되었다.
⑵김좌진의 족보
①김좌진의 동생 김동진의 아들 문한이 족보에 등재됨.
②김좌진의 아들 등재란에는 항렬만 기재한 것으로 보아 두 아들이 있었음을 암시함.
③김좌진이 등재요청을 할 수 없었으므로 두 아들의 이름을 기재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됨.
④김좌진은 두 아들의 신변의 위험을 우려하여 이름자에 항렬을 쓰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됨.
⑤1926년에 발간한 “안동김씨 대동보제5간 병인보”로 보아 그 이전에 두 아들이 있었 음을 시사함.
다. 위에 나열한 근거로서 김좌진에게는 창렬, 창규 두 아들이 만주에서 같이 생활했음이 확인된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의 김좌진 역사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누구의 잘못으로 증발되었는지 따져볼 문제이다.
라. 김두한과 김철한이 김좌진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점은 [김좌진역사바로세우기 제10탄]에 서 밝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