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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원불패의 항일운동의 민족 영웅 - 여천 홍범도 장군

작성자민족정기|작성시간13.09.07|조회수41 목록 댓글 0


영원불패의 항일운동의 민족 영웅 - 여천 홍범도 장군



현재 소련 원동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그의 홍범도일지에 의하면 1868년 8월 27로 명기되어있으며 그의 출생지 또한 일지에 의하면 평양 서문안 문열사 앞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홍범도장군의 본관이 남양 홍씨로 남양 지금의 경기도수원과 화성일 때의 옛 지명이었고, 여천(汝千)이라는 호는 뒷날 의병장이 되어서야 가지게 되었다.


홍범도장군은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홉살 때 아버지마저 별세하여 고아가 되었다. 그후. 15세까지 머슴을 살았으며1883년 나이 두살을 올려 평양 1883년부터 1887년까지 보병 부대에서 나팔수로 복무하였으나 군교들의 부정부패와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보다 못해 한사람을 구타하고 병영을 탈영하였으며 이때의 군영생활은 이후 그가 무장 항일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데 있어서 전술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1887년부터 1890년까지 황해도 수안 지방 부근의 총평 동네 종이공장에서 일을 하였고 이곳에서도 임금문제로 사주와 싸운 다음 금강산에 있는 신계사로 들어가 1890년부터 1892년에 신계사(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 창대리)에서 지담대사 상좌로 수행하면서 간단한 한자나 한글을 깨우쳤으며 이때 지담 대사( 이순신장군의 후손)를 통해 항일의식을 전수 받았을 것으로 추정 된다.


홍범도장군은 얼마 동안 전전한 끝에 함남 단천으로 가서 금을 캐는 광산의 노동자로 2년간 일하고 그곳에서 삼수 출신의 부인과 결혼을 하였으며, 이것이 인연이 되어 1893년경에 다시 삼수로 이거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출중한 사격술이 인정되어 산포수대(山砲手隊)에 들어가 직업적인 산포수 생활을 하였고 얼마 뒤 다시 북청으로 이거, 그곳의 산포수조직인 안산사포계(安山社砲契)에 가입,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 포연대장(捕捐 大將)에 뽑혔다.


이는 관리들과 교섭하여 포획물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정하고 이를 납부하는 일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그는 1907년 의병항전을 개시할 때까지 14년 동안 삼수, 갑산, 풍산, 북청 일대에서 산포수 생활을 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홍범도장군이 의병 활동을 시작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1907년 9월 3일 일제가 공포한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의 졸속한 시행에 있었다. '총포 및 화약류를 판매하는 자는 관찰사의 허가를 얻어야만 한다' 는 법령은 군대해산에 뒤이어 모든 한 국민을 완전히 무장 해제시켜 무력저항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홍범도장군은 안산사포계의 동료들과 함께 일제의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고 즉각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홍범도장군의 인솔하에 약 70여명의 산포수들은 머리에 혁관(革冠)을 쓰고 1907년 11월 15일 북청군 안평사(安坪社) 엄방동(嚴方洞)에서 회집하여 항일 의병전에 나설 것을 천명하였다.


그 이튿날 거사의 성공을 비는 혈제(血祭)를 지내고, 일진회 회원으로 친일파인 안산(安山)면장 주도익(朱道翼)을 총살하고, 계속해서 인근의 부일배들을 소탕하였고 이로써 홍범도장군은 항일독립운동의 대열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후 일생 동안 항일무력전선에 온갖 정력을 쏟았던 것이다. 70여명의 산포수를 근간으로 봉기한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는 점차 광산노동자, 해산군인, 화전민, 토막민(土幕民) 등의 의병지원자를 받아들여 이듬해에는 1천여 명에 달하는 대 부대가 되었다. 이에 따라 거의 초기에 7지대로 나뉘어 십장제(什長制)로 편제되어 있던 의병부대를 이때에 와서는 구한국군의 편제를 모방해서 개편하였다.


1907년 11월 22일 홍범도장군의 의병들은 북청 후치령(厚峙嶺)에서 매복하였다가, 기만적인 방법으로 무기를 회수해 가던 일군 무기수송대을 섬멸시켜 버렸다. 이를 이어 홍범도장군의 의병은 역시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갑산으로부터 북청으로 향하던 우편마차 호위 일군을 공격, 전멸시켰으며 그 다음 날에도 홍범도장군의 의병은 후치령에 잠복, 북청에서 혜산진으로 향하던 일군들을 전멸시키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들의 잇다른 승리에 놀란 일군 북청수비대는 궁부(宮部) 대위의 지휘하에 2개 소대 52명을 후치령으로 급파, 홍범도장군의 의병을 공격케 하였다.그러나 홍범도장군의 의병은 이를 알고 11월 25일 후치령에서 잠복, 대기하고 있다가 역시 유리한 지형에서 유격전으로 이들을 격퇴시켜 승리를 거두었다.


후치령 전투를 시발로 홍범도 의병부대는 삼수, 갑산, 북청 등지에서 험산준령을 타며 유격전을 펼쳐 이들을 추격해 오는 일군토벌대를 맞아 연전연승을 거두어 점차 그 명성을 더해 갔다.


그러나,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는 1908년 3월 차도선(車道善), 태양욱(太陽郁) 등 의병수뇌부가 일제의 회유공작에 말려 수난을 겪게 되었고홍범도장군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도선, 태양욱 양인은 '귀순'을 원하던 2백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1908년 3월 17일 일군에게 '귀순'해 버렸으나 일군들은 무장해제 유예기간 1개월의 약조를 지키기는커녕 '귀순'의병들을 즉각 무장해제시켜 버렸고 이에 저항하던 태양욱은 총살되었고, 차도선 등은 홍범도를 유인할 목적에서 피체, 투옥되었습니다.


이들의 '귀순'은 의병부대의 전력에 중대한 손실을 가져와 항일전 수행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 무렵 일제는 홍범도장군을 위협, 유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의 아내와 아들 용범(龍範) 등 가족을 구류시켜 인질로 삼는 비열하고도 잔인한 짓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홍범도장군은 구국대의를 위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의병부대의 전열을 가다듬기에 바빴고 결국 그의 가족(부인과 큰아들)은 끝내 일군에게 희생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그후 불굴의 투지로 의병부대의 재편성에 착수한 홍범도장군은 1908년 4월부터 5월 중순까지 삼수, 갑산, 무산, 북청 일대를 몸소 돌아다니면서 아직 의병부대에 가입하지 않은 산포수들과 청년들을 권유하여 의병에 가담시켰다.

그 결과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는 재편되어 1908년 4월 말에는 5백여명, 다시 5월 중순에는 650여 명에 달해 새로운 항일전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홍범도장군은 1908년 4월부터 의병항전을 재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같은해 12월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길 때까지 삼수, 갑산, 장진(長津), 북청 등지를 오가며 각처에서 일군과 조우,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일진회 회원 등을 비롯한 부일주구들을 처단, 민족반역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하였다.


홍범도장군은 한반도 북부지방의 의병항일전을 주도하는 핵심인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이 일대의 주민들로부터는 열렬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이때 당시 함경도 북부지방에서 그의 의병부대의 항일전을 찬미하며 불리던 노래가  “날으는 홍범도가“이다.



이처럼 홍범도장군이 도처에서 일군들을 격파하며 의기(意氣)를 드높히자, 일제는 크게 당황해 일군 동부 및 북부수비관구 전 병력을 동원하여 6, 7월 2개월을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 '대토벌' 기간으로 정해 놓고 홍범도 의병 '토벌'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홍범도장군은 신속한 유격전술을 효과적으로 벌여 이들의 예봉을 피해가며 영웅적인 항전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홍범도 의병부대는 전력이 점차 소모 되었다. 한 기록에 의하면,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가 1907년 11월 15일 봉기 이후 탄약 고갈로 고통을 받던 1908년 9월까지 일군과 약 37회의 대소 회전을 치뤘다고 한다.


홍범도장군이 연해주로 건너간 것은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는 일방, 연해주 일대의 의병부대 및 남한의 의병부대와도 연락을 취해 대규모 의병항전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그는 그러한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安重根), 엄인섭(嚴仁燮) 등이 인솔하는 의병이 국내진입작전에서 일군에 패한 뒤 연해주의 의병항전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던 까닭에 그의 의병규합노력은 여건상 불리한 형편이었고 결국홍범도장군은 1910년 3월 마침내 일단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서간도의 장백현(長白縣) 왕개둔(汪開屯)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1913년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겼고이로써 홍범도장군의 의병항전은 종료되었다.


홍범도장군(1968. 8. 27. ~ 1943. 10. 25.)은 전설적인 항일영웅이다. 빈한한 농민가정 출신인 그는 청소년시절부터 항일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중국혁명의 조선족가운데서는 제일 처음으로 민심을 한 덩어리로 묶어 세우는 기적적인 조직능력과 주밀한 통찰력, 예민한 판단력, 령활한 작전술, 신비로운 백발백중의 사격술로 보무당당한 항일부대를 거느리고 원쑤 왜놈참략자와 친일파들을 호되게 족쳤다.


홍범도장군은 우리 민족가운데서 제일 첫 사람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기치인 레닌의 초청을 받게 되었으며 그이의 빛나는 선물도 받아 안게 되었다. 장군님이 친히 지휘한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의 혁혁한 성과는 천세만세 길이길이 빛나리라.


소위 “빨갱이”라고, “독립군두목”이라고 국내외 “인명사전”과 “대백과사전”, “조선족혁명투쟁사”에도 제대로 떳떳이 오르지 못하던 홍범도장군의 눈물겨운 사적을 우리 다 같이 두고두고 잊지 말자!



홍범도장군은 1927년 10월 쏘련공산당에2)에 가입하긴 하였으나 열 다섯살 여린 나이때로부터 가정보다도 우리 민족의 운명을 더 걱정했고 한일의 곡식도, 한치의 천도, 한푼의 돈도 아끼고 또 아끼면서 일제왜놈들과 그 주구놈들에게 불벼락을 안기였으며 단순히 자기가 태여난 조선땅만이 아닌 중국, 쏘련땅을 주름잡으면서 국제주의 혁명정신을 만방에 빛 뿌렸다.


하기에 홍범도장군은 레닌의 초청으로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레닌의 접견을 받게 되었으며 그이한테서 마르세르식(모젤)권총과 금화 100루블이란 후한 상까지 타게 되었다. 그러기에 홍범도장군은 생전에 항상 레닌이 준 권총을 차고 다니기 좋아했다. 그러나 홍범도장군은 아주 겸손하여 자신에 대해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때문에 쏘련공산당 당원이며 희곡가이며 쏘련 까자흐스딴공화국 공훈예술가인 태장춘의 손을 거쳐 1941년에 실화희곡 “홍범도” 가 세상에 태여나게 되었으며 “홍범도”연극이 공연(1942년-1947년)된 뒤 10년만에 “홍범도”연극 후편인 “빨찌산”이 중앙아세아에서 또 공연되였으며 쏘련작가 김세일이 쓴 장편소설 “홍범도”  도 나타나게 되었다.


홍범도장군은 비록 파란만장의 눈물겨운 인생항로를 걸어왔지만 항상 “평양수심가” 보다도 경쾌한 우리 민요 “양산도”를 무척이나 즐겼으며 1941년 1월 16일 쏘련 까자흐스딴 크쥘오르다시에서 “홍범도”연극을 관람하신 홍범도장군은 “연극이 맘에 드십니까?”라는 물음에 “너무 추네, 추어! 허나 연극을 아무리 잘 놀아도 백두산포수의 백발백중 총재간이야 보여주지 못하지.”라고 하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6장군님의 겸손한 인격, 예술인들에 대한 한없는 추구심이 슴배인 그의 웃음소리가 오늘도 나의 귀전에 울리는것만 같다.


우리 민족의 “챠빠예부”라고도 불리우는 홍범도장군의 전설적인 항일투쟁사에 감동된 쏘련작가 김세일은 장장 5년간이란 심열을 기울려 장편소설 “홍범도”를 이 세상에 내놓을 수가 있었다. 


홍범도장군의 전설적인 항일사적에 너무너무 감동된 연변사회과학원 연구원이며 혁명렬사자제인 강룡권씨는 자전거 방울 울리며 수만리, 동3성은 물론이요, 내몽골, 북경, 천진, 산해관을 답사하면서 항일투사들이 눈물겨운 사적들을 차곡차곡 수집정리한 끝에 1991년에 “홍범도장군”이란 무게 있는 저서를 만천하에 펼쳐낼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의 빛나는 혁명전통을 앞장서서 아주 멋지게 엮어나가는 “항일투쟁반세기”와 대형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개척”에서도 우리 민족의 더없는 자랑인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님, 최홍빈교수님, 중앙민족대학 황유복교수님의 지성어린 손길아래 홍범도장군의 사적이 지구촌을 놀래우고 있다

.

홍범도장군의 항일투쟁사적은 “조선족략사”와 “조선족혁명투쟁사”, “연변인민항일투쟁사”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으니 우리 어찌 전설적인 항일영웅 -- 홍범도장군을 대대손손 잊을수 있으랴?!



1. 파란만장의 가정출신과 집안식구

홍범도장군은 1868년 음력 8월 27일, 조선조 순조때의 웅기(雄氣)와 지혜와 문재(文才)에 뛰여난 혁명가 홍경래의 먼 후손인 홍윤식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빈번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것만 해도 서운하기 그지 없었는데 설상가상으로 홍범도는 태여난지 7일만에 어머님을 잃게 되었다. 심봉사 신세가 된 홍범도 아버지는 동네방네 찾아다니며 동냥젖으로 홍범도를 아글타글 자래웠으나 홍범도가 아홉 살이나 던 해에 그만 열병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고아가 된 홍범도는 숙부네 집에 몸을 기탁하긴 하였으나 너무 째지게 가난한 집이라서 할 수 없이 부자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한 많고 외로운 소년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열 다섯살때부터 홍범도는 조선에 나팔수, 사격수, 격검수로 항일의 불씨를 온몸에 태우면서 기적적인 조직능력과 백발백중의 사격술로 1500여명(홍범도장군의 “자서전”을 기준함)의 반일의병대 10)를 묶어세워 일본놈들과 전성준, 주도익, 리쾌년 등 일본놈 개다리들을 수십명이나 처단하였으며 일본돈도 8480엔을 빼앗아내고 수많은 무기와 탄약들을 탈취하고 구입도하여 항일무장건설을 다그쳤다.


그러나 홍범도장군이 항일의 진두에 나서게 되는 바람에 홍범도장군의 집안은 왜놈들과 그 개다리 친일파 깡패조직인 “일진회”회장에 순사대장인 림재덕과 부회장인 김원홍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었다.


림, 김 두 개다리는 장군의 부인 리옥녀와 항일부대 중대장으로 있던 맏아들 양순이를 체포해 감옥에 가둬놓고는 홍범도장군을 암해하려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네가 서방한테 글을 쓰되 ‘당신이 일본천황 앞에 귀순할 것 같으면 천황께서 당신에게 백작벼슬을 주자고 하오니 항복하세요. 그러면 당신이 백작벼슬을 하게 될 것이고 나도 귀한 사람의 안해가 되고 자식들도 귀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써라. 내가 쓰라는대로 써보내면 좋거니와 거절하면 너의 모자를 어육으로 만들테다!”


개다리들의 호통질에 잠자코 있던 장군의 부인 리옥녀는 “나같은 계집의 실오리같은 목숨은 없어지면 그뿐이다. 계집의 글자로 영웅호걸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니 망상이로다. 네놈들은 나와 말치 말고 마음대로 해라!”라고 분노의 글발을 날렸다.


림, 김 개다리는 리옥녀를 당장에서 반주검이 되도록 형벌을 가하다가 1908년 5월에 잔인하게 참살하였다. 그후 이 개다리 두목들은 리옥녀의 글씨를 본따서 “일진회” 8명 졸개들을 시켜 여덟 통의 귀순 권유서를 홍범도장군한테 들여보냈으나 답장은커녕 바라들어간 놈들은 한새끼도 기여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림, 김 개다리들은 이에 누그러들지 않고 1908년 3월 30일에 맏아들 양순이를 감옥에서 끌어내여 홍범도장군에게 위조한 편지를 전달하게 했다.

이에 홍범도장군은 노발대발하여 “이놈아! 너는 전번 달에는 내자식이였지만 네가 왜놈들의 감옥에 갇혔다가 그놈들의 말을 듣고 나를 해치자고 들어 왔으니 너부터 쏴죽여야겠다!”고 하면서 권총을 쏘았는데 양순이는 귀방울이 떨어졌다. 1908년 6월 16일 양순이는 일본놈 토벌대들을 족치다가 조선 정평바배기에서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양순이보다 일곱 살 아래인 둘재아들 룡환이는 쏘련 연해주 최병준(홍범도장군의 친우)에게 맡겨 외롭게 자라다가 1915년 우리 연변 훈춘땅에서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몰려 훈춘감옥, 연길감옥에 갇히워 옥고를 치르다가 유지인사 구춘선의 노력으로 옥살이를 면하긴 하였으나 끝내 얄궂은 페결핵 병마 때문에 아까운 청춘을 잃게 되었다. 후에 쏘련에서 리인복이라는 녀성을 안해로 맞아들이고 리인복과 함께 한까이호수가에서 리인복의 외손녀 까쟈를 중간에 세우고 1929년에 찍은 사진이 남아있긴 하다만 우리 장군의 슬하엔 결국 일점 혈육 하나도 없다.


홍범도장군의 “자서전” (“홍범도장군” 연변인민출산사. 1991년 P281)을 훑어봐도 가정식구형편은 텅비여 있다. 그러나 항일의 흔적은 력력하다, 레닌의 접견을 받은 감격스러운 장면과더불어.


일본놈 주구단체 “일진회”를 지혜롭게 일망타진

“일진회” (一進會)는 조선 리조말년의 악질적인 친일단체다. 1924년 송병준, 윤시병이 조직한 “유신회”(維新會)와 리용구가 조직한 “진보회”(進步會)가 서로 한덩어리가 되어 그 이름을 “일진회”라 고쳤는데 회장으로는 림재덕, 부회장으로는 김원홍이였다.


홍범도 장군 부인과 장남에게 악마의 손을 뻗치고도 성차지 않아 림재덕, 김원홍은 왜놈들과 짜고 들어 왜놈 190명과 “일진회” 개다리 190명을 출동시키고 홍범도장군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최후통첩”을 받은 홍범도장군은 백여명 명사수들을 북청 땅 후치령에 배치해놓고는 부하들이 써준 “귀순편지”를 가지고 홀몸으로 적의 소굴에 들어갔다.


홍범도장군은 자기 신분과 이름을 가짜로 말하고 소위 “친필 홍범도의 귀순의향 편지”를 김원홍이에게 넘겨주었다. 그 순간 김원홍은 온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르르해서 너털웃음을 쳐댔다.

“너희들 소원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해주마!”하면서 김원홍은 쪽지를 홍범도장군한테 넘겨주었다. 왜놈들과 “일진회” 개다리들로 무어진 200여명이 사기등등하여 북청땅 후치령기슭에 기여들었을 때 사전에 매복하고 있었던 홍범도부대 100여명 전사들은 서리발치는 불벼락을 안겼다. 그바람에 200여명이나 되는 놈들이 몽땅 무리죽음을 당했는데 그 속에는 왜놈군 미야베대위와 “일진회” 악당 두목인 림재덕과 김원홍도 들어었었다.


우리 속담에 “도깨비는 방망이로 떼고 귀신은 경으로 뗀다”고 한것처럼 “비(飛)장군”이라고도 소문이 난 우리 홍범도장군은 민심을 한마음으로 묶어 세우는 뛰여난 조직능력, 주밀한 통찰력, 예민한 판단력, 령활한 작전술, 신비로운 사격술로 우리 민족의 특대 시라소니 가운데 하나인 “일진회”를 끝끝내 일망타진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오늘도 민간에선 “홍범도장군은 진짜 홍길동이야, 제갈량이야!”


동북 3성에서 신출귀몰한 홍범도장군

홍범도장군은 조선땅에선 항일무장부대 의병장으로 547명에 달하는 왜놈침략자들을 죽여버렸으며 “일진회” 왜놈개다리들을 58명(잘 따져보면 100명이 훨씬 넘는다.)이나 처단하였다.


쏘련땅에서는 1922년 1월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막되고 레닌그라드에서 페막된 “극동공산주의적혁명조직 제1차대회”에 52명 조선사람대표가운데 한사람으로서 리동휘, 려운형, 김립, 박순진 등과 함께 레닌의 접견을 받고 모젤권총과 금화 100루블이란 후한 상까지 받았으며 쏘련홍군전사로도 활약한 국제주의전사 - 홍범도장군인것만은 사실이다. 13) 그러나 홍범도는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더없이 폭넓은 항일투쟁의 빛나는 한페지를 남겨 놓았다.


길림성 집안현성, 유수현, 흑룡강성 횡도하자, 김림성 장백현 왕가구, 흑룡강성 밀산현, 길림성 안도현 명월구, 장백산기슭 밀림속에서, 도문시 봉오동, 황청현 대감자 부흥툰, 연길현 의란구, 로두구, 안도현의 내두산, 화룡현 어랑촌, 와록구, 명개골, 만기구, 시거우, 천보산, 고동하강반의 오도양차, 흑룡강성 밀산현, 호림현 등지에서 신출귀몰하면서 왜놈참략자들의 머리우에 불벼락을 안겨 “천하무적”이라던 일본침략자들의 기염을 여지없어 꺾어놓았다.


1920년 6월 4일 새벽부터 6월7일까지 벌어진 도문시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장군의 직접적인 지휘밑에 진행되였는데 조선족항일무장투쟁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겨놓았다.


봉오동전투는 삼툰자, 후안산, 봉오골, 피파골에서 벌어졌다.

삼툰자에서는 우리 항일무장부대나 왜놈침략군이나 다 큰 손실은 없었다.

후안산에서 벌어졌던 전투에서도 왜놈 1명이 죽고 우리 측 2명이 희생되였을뿐이였었다.


봉오골에서 벌어진 전투는 아주 치렬하였는바 무려 4시간이나 지속되였다. 이날따라 오후 4시좌우부터 번개가 번쩍, 천둥이 꽈르릉-하더니 폭풍우와 더불어 황소눈알같은 우박까지 사정없이 쏟아지는 바람에 왜놈들은 더 큰 참패를 보았다. 아마 하느님도 천추에 용납못할 왜놈침략자들을 아니꼽게 본탓이리라.


홍범도장군은 봉오동 서산 341고지에 지휘소를 정하고 매복작전을 벌렸고 최진동부장이 령솔한 아군은 봉오동 동산 354고지에서, 심민단이 령솔하는 아군을 봉오동 남산 518고지에서 매복전을 벌렸기에 봉오동에 기여든 일본놈들은 독안에 든 쥐가 되어 사면초가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을 백파군과의 싸움에서 용맹을 떨치던 3명 홍군전사가 봉오동전투에 참가했던 것이다. 이 3명 홍군전사의 이름은 지금 알수 없으나 그들은 일찍 1919년 봄부터 천하명장 - 홍범도장군을 견결히 따랐던 것만은 사실이다. 원래는 홍범도부대를 끝까지 따르겠다는 홍군전사는 6명이였는데 3명전사는 봉오동전투가 있기 전에 희생 되여 3명만이 남게 되었는데 봉오동전투에서 일제놈들을 호되게 족쳤다.


이 봉오골전투에서는 왜놈 대대장, 중대장, 준사관 각기1명, 병졸 49명이 천벌을 받았으며 숱한 부상자가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 홍범도부대는 그저 2명이 희생되고 2명이 경상을 입었을 따름이다. 미구하여 쏘련 홍군부대에서는 감사편지와 더불어 홍범도장군에게 중기관총 1정을 보내왔는데 이 중기관총은 청산리전투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도문시 량수진 경영촌 피파골에서 있은 전투는 그야말로 관운장도, 제갈량도 울고 갈 지혜로운 승전이였다.

1920년 6월 7일 땅거미질 무렵, 봉오골에서 참패를 당하고 꼬리기고 내빼던 왜놈 야스가와부대를 증원하기 위해 경영촌과 두만강을 사이둔 조선 온성군의 왜놈지원부대는 서로 상대방을 홍범도부대로 오판하고 치렬한 개싸움을 벌렸는데 숱한 사상자를 내였다.


당시 홍범도장군은 왜놈 증원부대가 개미떼처럼 기여드는 것을 보고 항일전사들을 경영촌 피파골에 매복시켰다가 놈들이 사격권안에 들었을 때 약간의 사격을 퍼붓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떴었다. 결국은 홍범도장군의 지략에 걸려들어 왜놈들은 큰 참패를 보았다.


“봉오동전투는 우리 민족의 항쟁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전투였다. 봉오동전투는 계획적인 매복전을 진행하여 일본침략군을 참패시킨 항일군의 첫 전투였고 첫승리로서 반일부장항쟁의 첫 발단을 열어놓았다.” 


봉오동전투가 끝난후인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화룡현청산리 백운평의 직소, 와록구, 천수동, 어랑촌, 황구령 맹개골, 만기구, 시거우, 천보산, 고동하강반 오도양차 등 9곳에서 왜놈침략자들을 때려부신 전투가 또 벌어졌는데 이 전투를 통털어 “청산리전투”라고도 하고 “청산리전역”이라고도 하는데 홍범도장군은 또 불멸의 공훈을 세웠다.


화룡진에서 서남쪽으로 20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청산리마을이 있고 청산리에서 백운평마을(일본놈들이 온마을을 불태웠기 때문에 지금은 인가가 한호도 없음)까지 10킬로메터, 백운평에서 2키로메터 떨어진 곳에 직소(直沼)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청산리전투가 벌어졌던 첫 번째 전적지이다.


잉어령에서 발원된 해란강 물이 웅위로운 범바위틈으로 흘러 흐르다가 폭포를 이루었다고 직소라 했는데 지금은 그 직소의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해발 1676.6메터 베개봉(증봉산이라고도 함) 동북쪽 산기슭에 있는 이 직소 량켠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도 없고 공지로 불리우는 개활지도 없다. 그저 소수레나 통할수 있는 오솔길이 있는데 이 골짜기는 어찌도 좁은지 그 넓이가 20메터 좌우밖에 안된다.


이 직소 골짜기에서 김좌진장군이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경에 매복전을 벌려 왜놈침략자 90여명을 거의 소멸하였고 이어서 10월 22일 새벽 5시경에 갑산촌 천수동에서 일제 왜놈 40여명을 짓부셨다. 하지만 전반 청산리전투에서 결정적역할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의 자랑스러운 홍범도장군이였다.


와록구,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시거우, 천보산, 오도양차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제왜놈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기게 된 것은 다름아닌 신비로운 우리 홍범도장군의 뛰여난 전략전술과 조금도 갈라놓을수 없다.


와록구(臥鹿溝)는 완류규(完流溝)라고도 하는데 어랑촌 서북쪽으로 뻗은 골짜기를 말한다. 일제왜놈 아즈마소장은 1920년 10월 22일 오전 우리 홍범도장군을 눈에 든 가시로 보고 와록구에서 홍범도부대를 협공하여 일망타진하자고 망상했다.


그러나 한번 뛰면 10만 8천리를 날아간다는 손오공도 부럽잖게 뛰여난 재질을 가지고있는 우리 홍범도장군은 와록구 천리봉 산허리에 항일전사들을 매복시켜 남와록구와 북와록구로부터 추격해오는 간악한 아즈마부대를 동시에 반격하다가 교묘하게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 바람에 아즈마부대는 서로서로 상대방을 홍범도부대라고 오인하고 란발탄을 쏘아댄 결과 500여명이 참살당했다. 결국은 돌을 들어 제발등을 깐셈이 된다.


1920년 10월 22일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어랑촌 남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홍범도장군은 김좌진장군과 배합하여 탁월한 지휘 재능으로 침착하고도 완강하게 900여명에 달하는 일제왜놈 이이노부대, 아즈마부대를 물리쳤다. 어랑촌 남산에서 있은 싸움은 전반 청산리전투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가장 치렬한 전투였다.


1920년 10월 23일 오후 3시경에는 황구령 맹개골에서 홍범도부대와 김좌진부대는 왜놈기병 10여명을 죽여버렸으며 맹산하에서 10킬로메터 떨어져있는 만기구에서 30여명의 왜놈들을 소탕하였으며 이튿날 아침에는 맹개골 시거우(쉬거우라고도 함)에서 이리떼처럼 몰려들었던 왜놈 기병대 대부분을 섬멸하였다.


1920년 10월 24일부터 10월 25일에 천보산전투에서 일본놈들을 호되게 타격한 홍범도부대는 고동하강반 오도양차에서 또 치렬한 전투를 벌렸다.


1920년 10월 26일, 오도양차에서 홍범도장군은 왜놈 아즈마부대의 수색대에게 무리죽음을 안겼다. 10여성상의 반일무장투쟁속에서 풍부한 작전경험을 쌓은 홍범도장군은 놈들의 습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여 개놈들이 우리 항일부대의 매복전에 걸려들게 하였다.


홍범도장군은 수림속에 우리 전사들을 매복시켜놓고는 엉뚱한 곳에 우등불을 피워 적들을 유인했다. 진짜 제갈량의 꾀를 피운 셈이다 .


과연 놈들은 홍범도장군의 “지휘”에 따라 우등불가로 부나비처럼 날아들다가 백발백중 명사수들의 사격통에 2개 소대(100명좌우임)가 무리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놈들은 “맹렬한 총소리는 산천을 진동하고 광경은 처참해!”라고 자신들의 패전을 동북에서 처음으로 자인했다. 


전반 청산리전투에서 홍범도장군은 왜놈침략자들을 일망타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놀았는바 “죽은 자로는 련대장 1명, 대대장 2명, 기타 장교이하 1,254명(적들이 호상 참살한 자 500명), 부상자는 장교이하 200명”이였다. 왜놈들을 섬멸한 수자는 1200명이도, 우리 항일부대의 전사자는 200명이라고도 할수 있는바 놈들의 참패상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전설적인 영웅 홍범도장군은 비록 중국공산당 당원은 아니였지만 진짜 당원답게 살았다. 비록 1927년 10월에야 쏘련공산당에 가입했지만 그가 반일투쟁에 몸을 담근 전반 과정을 보면 시월혁명의 기치, 국제주의적기치아래에서의 남정북전한 빛나는 일생이였다.

하기에 홍범도장군은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안타깝게도 우리 곁을 영영 떠나갔지만 오늘날에 쏘련(러시아)까자흐스딴 크쥘오르다시 중앙공동묘지에 조용히 잠들고 있다.


로씨야 각국인민들은 홍범도장군의 불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이가 만년에 사시던 쓰쩨쁘나야쁘롤레따리거리를 “홍범도거리”라고 명명하였고 1984년도에는 홍범도장군의 유해를 면례하여 크쥘오르다시 중앙공동뵤지 입구에 단독으로 정중하게 모시고 홍범도장군 청동반신상까지 세웠다. 


러시아 각족 인민들은 해해년년 청명, 추석마다 우리 빛나는 전설적인 영웅 - 홍범도장군의 묘소를 찾아뵙군 한다.

우리 연변혁명렬사릉원에도 홍범도장군의 청동반신상이 모셔져 있는 꿈을 나는야 자주 꾸는데 조만간에 이 꿈이 꼭 진짜 현실로 되리라는 걸 나는 굳게 믿는다.


실로 세세대대 길이길이 빛날 우리의 홍범도장군님이시여, 부디부디 해와 달처럼 만천하에 빛을 뿌리라!---홍범도장군 서거 60돐을 기념하면서


연변대학 중조한일문화비교연구중심 리영자


[주해]

1) “60청춘닐리리” 동희철,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2년. P233

2) “홍범도장군”, 강룡권, 연변인민출판사 1991년. P280, P456

3) 동상서, P455

4) 동상서, P349

5) “홍범도에 대한 새로운 재조명”, 핀란드 헬싱키국립대학 교수 고송무, “구주신문”. 1998년 5월 10일

6) “홍범도장군의 전투경로와 쏘련에서의 만년생활”. 쏘련 조문판 신문 “레닌기치”. 1989년 4월 11일.

7) “원동에서 1918년-1922년 쏘베트정권을 위하여 투쟁한 조선인 국제주의자들” 김 마뜨웨이 찌모레예위지(1901년~1983년), 쏘련 조문판 신문“구주기치” (유럽기치.) 1985년 5월 31일.

8) 쏘련 조문판 신문 “레닌기치” 1965년 10월 23일~1969년 10월 24일, 전 124회에 걸쳐 발표됨.

9) “홍범도장군”, 강룡권. 연변인민출판사, 1991년 P2

10) “홍범도자서전” 동상서, P281 ~ P283

11) “홍범도장군”. 연민, “항일주쟁반세기”. 김양. 료년민족출판사, 1995년, P158 ~ P159

12) 동상서, P160

13) “홍범도장군”. 강룡권. 연변인민출판사, 1991년, P455.

“조선족략사” (한문판), 박창욱, 김봉각, 고영일, 황룡일, 황룡국, 최홍빈, 연변인민출판사, 1986년, P56

“조선족략사” (한문판). 최성춘, 연변인민출판사, 1997년, P54

14) “봉오동전투”, 최홍빈,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1). “개척”, 박창욱, 민족출판사, 1999년 P499

15) “청산리전역”, 허송남. 동상서, P511 ~ P522

“청산리대립, 강룡권, ‘홍범도장군’. 강룡권 연변인민출판사, 1991년, P186 ~ P522

“조선족혁명투쟁사”. 황룡국, 료녕민족출판사, 1988년, P72 ~ P75

16) “매일신보”. 1920년 10월 31일, 제3면.

17) “홍범도장군”. 강룡권, 연변인민출판사, 1991년, P287.

DATE: 13.05.2004 -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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