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세상 사는 야그

7. 코친차이나 사이공

작성자구름나그네|작성시간17.10.21|조회수715 목록 댓글 0

7. 코친차이나 사이공

 

내가 묵을 아시안 호텔은 동코이 거리에 팍슨 사이공 이라는 쇼핑센터의 코너에 위치해 있다. 동코이(đồng Khởi)거리는 호치민의 1지역(District 1) 중에서도 온갖 유명한 건물들이 늘어선 중심가로, 우리로 치자면 청담동 가로수길 쯤 된다고 할까. 노트르담 성당에서 시작해 역사 깊은 특급호텔인 렉스호텔이 있으며 크고 작은 또는 개성 있는 음식점, 호텔, 옷가게, 기념품가게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으며 맨 끝 남단 마제스틱 호텔을 끝으로 약 1.5km 가량 이어지다 사이공 강을 만나면서 끝난다. 기억나지 않는가, 북한 스파이들이 머물던 마제스틱 호텔.

 

럭셔리 스트리트라는 칭호답게 동코이 거리는 호치민의 앞날이 보이는 듯 화려하고 아주 이색적이다. 갤러리와 디자이너 숍 그리고 주변의 노트르담 성당과 시민극장 등등 소위 프랑스 콜로니 시절에 지은 아주 색다른 유형의 건물들이 꽉 들어차 도시의 중후함을 느끼게도 한다. 사이공이란 말이 바로 그 무렵 지은 도시이름이라는데 이곳에서만은 여전히 사이공의 한복판이라 해야 할 것만 같다.

 

노트르담 성당만 해도 1884년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직후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본 따 만들어졌다는데 그 재료를 전부 프랑스에서 운반해와 지었다 한다. 그 옆에서 동코이 거리를 바라보고 서 있는 성모 마리아는 2005411일 피눈물을 흘렸다 하여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조각상이다. 종교 자체를 부정하고 종교인들을 탄압했던 대부분의 공산주의와 달리 호치민은 '지도자가 정치를 잘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하는 것' 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이를 정치를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로 삼으려 했다 하니 지도자로서 그의 능력을 알 것도 같다.

 

방 배치를 받았다. 생각대로 좁은 공간, 엘리베이터를 보자 이탈리아 엘리베이터가 생각이 났다. 이탈리아에서도 묵은 호텔은 바로크 양식의 그럴듯한 형상이었는데 엘리베이터는 아주 작은 기이하게 생긴 세모 형태였었다. 이는 어쩔 수없이 용도가 생겨나 건물 어느 구석을 이용해 달아낸 것이다. 보잘것없지만 건물은 그런대로 오래된 건물임을 말하는 반증이기도 한 셈이다. 벨 보이들이 부지런히 가방을 나른다. 팁 문화에 익숙하다 싶다. 1달러를 건넸다. 여행의 묘미는 바로 그런 후한 인심도 한 몫 한다. 언제 그렇게 평소 허세 부리며(일본말로 기마이 쓰며) 살았던가.

(노트르담 사원 )

 

가만 생각해 보니 기마이란 이 말은 그 언젠가 기분 좋을 때 아버지가 쓰던 말투다. 그런데 큰일이다 싶다. 방이 좁은 것은 이해하겠는데 침대가 더블 형이다. 나와 김 이사가 함께 투숙하기로 되어 있는데 부등 켜 안고 잘 수도 없고 난감한 노릇이다. 몇 번을 excuse를 해서 방을 바꿔 받았다. 고마움으로 인삼캔디를 듬뿍 건넸더니만 환한 미소를 띠는 예쁜 아오자이 여인, 영어를 곧 잘해 자꾸 말을 걸게 된다. 호치민에 도착해서 내가 대뜸 알아차린 것은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꽤 드물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영어 발음도 그들 말에 훈을 딴 것같이 온전하지도 않다.

예를 들면 경찰 폴리스를 프랑스식 말이 혼용된 듯 폴리찌 폴리찌 하는 식이라 영어로 발음한다 해도 쉬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민 선생님은 우리를 불러 모으더니 계획을 말한다. 내일 시내투어를 위한 계약을 하고 시간이 남으면 주변을 둘러보고 편안한 마음으로 저녁을 먹자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뒤를 졸졸 쫓았다. 호텔 바로 건너 편 20미터도 채 안 되는 Le Thanh Tong(레딴똥) 거리와 만나자 바로 시야가 탁 트이면서 광장과 더불어 큰 건물이 나타났다. 인민위원회 청사다.

인민위원회 청사와 호치민 동상 (야경을 담았다)

프랑스 식민시절인 1902년 프랑스에 의해 만들어져 1975년 인민위원회청사로 이름이 바뀌었고 현재 호치민 시청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다. 유럽의 성을 보는듯한 화려한 느낌에 광장 앞 호치민의 동상까지 곁들이자 이곳이 바로 호치민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 시대 프랑스의 베트남에 대한 최초의 관심은 무역보다 선교활동에 있었다. 바스코 다 가마가 1498년 인도항로를 발견한 이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취하고 있던 유럽세력은 베트남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던 그 무렵이다. 1540년 포르투갈을 선두로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베트남에 진출하였으나 가장 집요했던 나라는 가장 늦게 진출한 프랑스였다.

알렉상드르 드 로즈(Alexandre de Rhodes) 신부는 1624년 베트남에 도착한 후 8년여 선교활동을 하였는데 그는 선교활동을 돕기 위하여 라틴어와 베트남어로 된 교리문답과 번역사전을 편찬하면서 베트남어를 로마로 표기하한 인물이기도 하다. 베트남 왕조는 프랑스의 선교활동을 계속 박해하다가 1802년 구엔(응우옌) 왕조가 들어서면서 포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서구 제국에 문호를 개방하려 하였으나 1819년 영국이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서구세력의 진출에 의구심을 품고 돌연 통상협정을 거절했다. 1825년에는 카톨릭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고, 국내 반란을 카톨릭교도들이 지원하자 선교사 8명을 포함한 다수의 베트남인 신도를 처형하기도 하였다. 1836년에는 선교사를 살해하는 것은 살인죄가 되지 않는다는 칙령까지도 선포하였다.

 

어째 황사영백서와 신유박해로 말하는 그 무렵의 우리나라와 비슷하지 않은가. 1839년 중국에서 일어난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자 서구 열강의 힘을 인식한 베트남은 억류된 선교사를 석방하라는 프랑스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동안 이들을 석방하고 유화정책으로 선회했었다. 그러나 1847년 다낭에서 프랑스 군함과 베트남 함대와 충돌이 있자 베트남 정부는 대대적인 박해정책을 취하여 유럽인 선교사 25명을 포함하여 3만여 명의 베트남인 신도를 처형하였다. 그러자 프랑스는 185891일 스페인과 연합하여(스페인 주교도 처형되었음) 다낭에 상륙하여 5개월 동안 다낭 항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아래쪽을 택했다. 바로 사이공이다. 그 무렵은 각종 질병과 우기가 겹쳐 후에로 진격도 어렵고 제2차 아편전쟁으로 인해 중국으로 병력전환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이후 프랑스군은 18609월 중국에서 전쟁이 끝나자 70척의 군함과 3,500명의 정예 육군을 베트남으로 보내 베트남군을 공격하여 1862년 초 프랑스군은 호치만 근처 미토, 지아딘 , 비엔 호아를 점령하였다. 어쩔 수없이 구엔왕조의 투둑 황제는 프랑스의 요구대로 186265일 제1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는 없었다. 이 또한 우리의 을사늑약과 닮아 있지 않은가.

이 조약에서 프랑스는 식민화의 기반을 완전히 닦아놓은 셈이 되었다. 베트남으로부터 3을 할양받은 프랑스는 1863년에는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의 지배권을 넓혀가기 시작하였다. 프랑스군은 마침내 1867년 메콩 델타 지역도 점령하였다. 메콩 델타는 베트남의 쌀의 주생산지로 이곳의 점령은 베트남으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캄보디아를 거친 물줄기는 무려 4020km의 곡창지대를 이루며 메콩 삼각주에서 생산되는 쌀만하여도 베트남 전체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 수확량이거대하다. 이 통계자료를 보면 메콩델타가 왜 중요한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1933~1937년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677,000톤의 쌀을 수출하였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 총 수출의 41%를 점하는 양이었고, 석탄도 15만 톤을 본국으로 수송하였다.

 

풍전등화의 베트남은 18744월 베트남과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조약의 내용은 프랑스가 점령한 남부 지역의 주권인정, 홍하 개방, 하노이와 하이퐁 등에 프랑스 영사 주재 승인, 프랑스 국익에 위배되는 외국과의 조약체결 금지 등이었다. 1882425일에는 하노이를 점령하고 베트남의 보호국화, 하노이 할양 등의 가혹한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급기야 구엔 왕조의 투둑 황제는 이를 거절하고 중국 청조에 구원을 요청하여 청조는 이에 응하여 중국, 베트남 국경지대에 군대를 파견하여 무력시위를 하기도 했지만 코가 석자인 청나라가 이를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8837월 투둑 황제가 사망하자 왕위를 승계하는 과정에서 권력투쟁과 음모로 1년여 기간에 4명의 황제가 바뀌었다. 프랑스의 침략에 대해서도 친불파, 반불파로 나뉘어 암투가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통치가 오히려 베트남에 유익하다는 논리도 다수 있어 국론통일도 되지 못했다. 민비와 대원군 아관파천 등등 어쩌면 우리나라가 식민지화 되는 때와 그렇게 흡사한지 모르겠다. 이 틈을 노려 바로 프랑스군은 통킹으로부터 후에로 진격하였고 외우내환으로 저항이 불가능한 응우옌왕조는 825일 아르망(Harmand)조약(1차 후에조약, 계미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의 보호국이 될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후 종주국 행세를 해 온 청국과 2차에 걸쳐 무력충돌이 있었으나 청국도 18856월 프랑스와 제2차 천진조약을 맺고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하고 말았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코친차이나(남부 베트남), 안남(중부 베트남), 통킹(북부 베트남)으로 나누어 분할 통치하였다. 여기에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합하여 5개 지역을 프랑스 식민 성 예하 인도차이나 총독이 통치토록 하였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이제 프랑스에만 봉사하는 <동양의 진주>로서 프랑스의 착취와 압박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해 습득, 공유, 전달이 되는 행동 양식으로서의 문화란 말, 화창한 봄날의 벚꽃이 연상되는 이 말이 나는 참 이율배반적이란 생각을 한다. 인류에 있어서 문화 창달이나 문명은 침략이나 외적 영향으로 꽃피우는 산물이 되고는 했다. 멋진 활이 불에 지지고 두들겨 다른 형태로 변모하여 새로운 산물이 된 것 같이 한 맺힌 고난과 고통의 격정의 나날을 견뎌낸 후 고유와 더불어 새 문물은 토착화되어 비로소 그들 특유의 모습을 갖추었다. 스페인의 기독교에 병합한 이슬람 문화가 그렇고 동서양이 합쳐진 터키의 유물들이 또 그렇다.

 

후세들은 그 덕분으로 경이로움을 느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굳이 이국적이 아니라 해도 폭군의 노예로 산 시절의 산물은 엄청난 과실을 맺는다. 자금성도 경항 대 운하도 만리장성도 모두 그러하지 않았던가. 동코이 이 거리도 마찬가지 어느 지배의 산물로서 울며불며 어렵게 생겨난 거리다. 이렇게 화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스러웠다는 반증이다. 호치민은 넓다. 면적이 서울의 3배에 달한다. 만약 수백 년 이질적 시간이 교차한 이 동코이 거리가 없었다면 넓은 이 도시가 그 이름을 날렸을까.

 

그런데 그 모습도 어느 외적영향이냐에 따라 확연히 달라진다. 수도 하노이와 호치민은 1700에 이르는 거리만큼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청나라 영향을 받았던 하노이와 프랑스의 지배하의 사이공. 지난 번 다녀 온 하노이의 명소로 꼽히는 호안끼엠 호수나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에서는 그래서인지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느꼈었다. 반면 이곳에 눈에 띄는 건물은 모두 서양식이다. 인민위원회 청사를 기점으로 도보 20분 이내에 펼쳐지는 붉은 색과 갈색 벽돌로 채색된 레러이(Le Loi), 동코이(Dong Khoi) 거리. 지금은 문화유산이지만 암울한 지배 시대는 숨죽여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 세력의 확장과정

지배는 단지 생활이나 콜로니알이라는 축조물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전형적인 불교국가 베트남에서의 20% 가톨릭 신자. 왜 인류는 지배를 하면 믿음부터 바꾸려 드는 것일까. 인류 전쟁사에서 종교문제는 여전히 큰 이슈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훗날 종교문제가 큰 이슈로 대두된다. 순종하고 말 잘 듣는 속국으로 삼기에는 아마도 의식개조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어서가 아닐까. 그렇게 애욕어린 인류는 믿음을 뺐고 마음을 짓밟고 유린하며 또 다른 의식을 쌓고 낳으며 이날 이때 역사라는 미명하에 흔적어린 유물을 아이러니하게 남기고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