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하면 어김없이 한두편의 공포영화가 개봉됩니다만 올해처럼 많은 공포영과가 줄이어 개봉하는 일도 드문 것 같습니다. 2, 3년 전엔가 [가위]를 필두로, [해변으로 가다], [찍히면 죽는다], [공포택시] 등이 연이어 개봉한 적 있었지만 모두 [13일의 금요일] 스타일의 함량미달 작품들이었습니다. 특히 [공포택시]는 그 말도 황당무계함으로 전율을 느끼게 해줬던 게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올 여름 개봉된 공포영화들, [장화홍련], [여고괴담3], 그리고 어제 본 [4인용 식탁] 등은 모두 나름대로의 완성도를 가진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나름의 치명적인 결함들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공포영화는 싼 돈으로 큰 흥행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사실 공포영화처럼 돈이 적게 드는 장르영화도 드뭅니다. 공포영화는 빅 스타를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신인들을 쓰는 것이 더 성공적이라는 불문률마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4인용 식탁]은 좀 예의적으로 느껴질만큼 스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공포영화라기 보다는 일종의 심리 스릴러에 더 가깝기 때문이겠죠.
영화의 전반부는 아주 탄탄하게 시작합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정원은 우연히 지하철에서 나중에 사체로 발견되는 두 어린아이를 만나게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은 아이들이 정원의 4인용 식탁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기면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연의 눈에도 그 아이들이 보이는 겁니다. 즉 [4인용 식탁]은 보이지 말아야 할 것들이 보이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결말을 알기 싫으신 분들은 더 읽지 마세요. 지난번에 장화홍련의 결말을 그냥 말한 것 때문에 야단을 많이 맞았어요!)
감독은 이 이야기를 어린 시절의 어두운 상처로 몰고 갑니다. 정원의 무의식 속에 묻혀있다가 연에 의해 의식으로 드러나는 어린 시절의 무서운 기억, 그리고 정원과 마찬가지로 연에 의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알게된 문정숙의 정신착란 등은 정원이 곧 행복한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가족의 화목을 강조하는 4인용 식탁이라는 주요 장치에 의해서 가족 속의 상처와 학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 듯 합니다. 그런데 이게 좀 촌스럽다는 거죠.
정원의 상처, 그 내용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단지 정원과 연의 대화 한번으로 스르르 드러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관객들은 비밀의 내용보다는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을 더 보고싶어하니까요. 그리고 정원의 과거가 얼마나 아픈 것인가, 그것 자체가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가요? 관객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과거를 알게 되어서 그후로 어떻게 되었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더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정원이 아니라 연입니다. 연의 죽음으로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 보이는 능력은 정원에게 옮아가는데 이런 묘사를 통해 감독은 보여지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 진실이 있다, 뭐 그런 주제를 말하고 싶은지는 몰라도 관객들로서는 몹시 모호합니다.
[4인용 식탁]은 꽤나 신선하고 탄탄한 시나리오로 출발했지만 감독의 의욕과잉 때문인지, 아니면 정작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분산된 탓인지 공포보다는 찜찜함을 더 남겨주는 영화입니다. 일단 애들이 너무 많이 죽어요. 애들 좀 그만 괴롭히지....... 그리고 이 감독은 다른 것보다 머리가 깨지는 소리를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그 소리도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제가 원한 건 공포지 혐오감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다른 영화보다 전지현의 연기는 좋았습니다. 전 전지현하면 스타일은 죽이지만 연기력 빵점의 무늬만 배우인 샴푸 모델쯤으로 생각했는데 그녀에게도 개발의 여지는 있었나 봅니다. 박신양은 평소와 별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줬고, 오히려 가장 자연스러웠던 건 정원의 약혼녀로 나온 유선이었습니다. 깜찍한 미모는 아니지만 지적이고, 목소리가 참 매력적이더군요. [여고괴담 3]이 여러가지 유치한 묘사와 어슬픈 연출에도 불구하고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기본기에 충실했다면 [4인용 식탁]은 훨씬 다듬어진 대사와 연출이 엿보이지만 어딘가 다 소화가 되지 못한 듯한 불편함을 주는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4인용 식탁에 왜 그렇게 우리집 거랑 비슷하게 생겼는지 몹시 찜찜하더군요........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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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쟝폴고티에 작성시간 03.08.15 오랜만에 님의 글을 봤는데... 정말이지 감탄밖에 할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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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꿈꾸는 당나귀 작성시간 03.08.17 뼈대가 장국영 유작인 '이도공간'이랑 비슷하군요.전,이도공간을 구입하려구 합니다^ ^ 새벽에 혼자 우두커니앉아 보는데...한숨이 나오더군요...저리 잘생기고 연기잘하는 이가 왜 생을 버렸나하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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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동준 작성시간 03.08.19 웬만한 유명인의 평론 저리가라네요. 훌륭한글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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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호떡맨 작성시간 03.09.08 몇년전이었던거같은데, 베스트 극장에서 유선이 나온적이 있죠. 행정고시 지망생의 애인으로 나와서는 고시원에 있는 애인을 그저 마지못해 만나주다가는 합격하고난뒤에는 발목을 잡고 결혼에 성공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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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호떡맨 작성시간 03.09.08 그런 약간 얄미운 역의 여인역으로 연기를 했었는데, 어찌나 자연스레 연기를 잘하던지... 그때부터 눈여겨 보고 있는데...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는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