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난 4월 3일, 제주도에선 우리의 아픈 역사를 다시 한번 되짚어볼 수 있었던
‘제70주년 제주 4.3 사건 희생자 추념식’이 열렸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추념식에 참석해 국가폭력의 피해를 입은
희생자와 유족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며 그 아픔을 달래주었는데요.
사실 제주 4.3 사건은 국민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사건이었으나
이번에 조금씩 관심을 받으며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4.19 혁명이나 광주 민주화 운동은 많이 알려졌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이 사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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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선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려
많은 주민이 모여있었고 행사가 끝나자 군중들은 가두시에 나섰습니다.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던 곳을 지나가다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아이가 채이는
사건이 일어났고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 군중들이 달려들어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이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한다는 생각에 주변의
사람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고 이 일로 6명이 죽고 6명이 부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경찰은 이 발포가 치안을 위한 정당방위라고 주장했고 3월 1일의 시위와 관련하여 여러 명이 끌려가게 되자 제주도의 민심이 크게 동요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동요된 민심은 남로당 (남조선노동당)에게 힘을 실어주며 제주도 내의 좌익 세력을 모으고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하게끔 했습니다.
3월 10일에 발포 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이 도내에서 일어났고 점차 제주도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는데요.
중앙정부였던 미 군정은 이를 무시하며 제주도 대부분 사람들을 좌익으로 몰아가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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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 온 서북청년회 소속의 사람들이 파업으로 해임된 경찰의 자리를 메꾸게 되었고 파업 참여자들에 대한 검거가 심해져 검거된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1948년에 들어서면서 고문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하며 민심은 더욱더 흉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봉기를 일으켜 제주도 내의 경찰지서 등을 습격했습니다.
무장대의 규모와 전력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군경 등을 괴롭히며 제주도민들에게는 5.10 총선거를 거부할 것과 공산주의 등을 선동하는데 힘썼습니다.
물론 군경은 5.10 총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무장폭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통행금지령이 내려졌고 제주도민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도민들을 진압하는데 투입되었던 서북청년단원들은 4.3사건 발발 이전에 이미 500~700명이 제주에 들어와 도민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었고, 그들의 과도한 행동이 4.3 사건 발발의 한 요인으로까지 거론되었습니다.
서북청년단의 제주 파견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이 후원했음을 입증하는 문헌과 증언이 있다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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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은 30여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2만 5천~3만 명의 학살 피해자를 냈습니다.
3만 명이라는 숫자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었는데요.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조사가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1999년 12월 26일 국회 본회의를 통하여 제주도민들이 고대하던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어 2000년 1월 12일, 드디어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2003년 10월 31일 故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시작으로 ‘제주 4.3 사건’은 2018년에 제7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그 혹독했던 시절을 견뎌낸 사람들이 있고 또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참담해 외면하고 싶을지라도 우리는 진실을 바로 알고 또다시 그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따뜻한 봄의 시작을 알리는 4월, 제주도에도 따뜻한 봄이 오기를 바라며 뉴스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