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 게시판

元史, 明史를 통해서 본 명씨의 역사 이야기

작성자재단 사무총장|작성시간14.10.10|조회수278 목록 댓글 0

명씨라면 시간내서 꼭 한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황손으로서 우리의 뿌리는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대종회 사무국장 명순식 삼가 아룀  

 

 

<元史> 기록

元史 卷 208 外夷傳 第 95편에 보면 고려에 대한 위치가 나타납니다. 그 원문을 보기로 합니다.


高麗本箕子所封之地. 扶餘別種嘗居之其地,
東至新羅南至百濟皆誇大海西北渡遼水接營州 而靺鞨在共北.
其國都曰平讓城卽漢樂浪郡水有出靺鞨之白山者號鴨綠江...


고려는 본래 기자가 봉토를 받은땅이다. 부여와 다른 종족으로 그 땅에 살고 있었다. 동쪽에 신라,남쪽에 백제가 있으며 큰 바다(황하)서북을 건너 遼水에 접한 瀛州에 말갈과 북쪽에 같이 있다. 그 나라의 수도는 평양성 즉 漢의 낙랑군이 있는데 말갈의 백산(천산)으로 흐르는 물이 있어 압록강이라 하는데...    

益廣倂古新羅百濟高句麗三國而爲一,
其主姓高氏自初入國至唐乾封初以國 ? 垂拱以來
子孫復封其地後稱能自立至五代時代主.
其國遷都松岳者姓王氏名建自建至燾凡二十七王,歷四百餘年.

옛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통일한 후 땅이 넓어졌다. 그 나라의 주성은 고씨인데 당나라 건봉 초(AD666) 나라를 세워 같이 손을 맞잡은 이래 자손들은 그 땅에서 다시 봉토를 받은 후 五代時代에 主人으로 일어섰다. 그 나라는 왕건으로서 송악으로 수도를 옮기고 모두 27왕을 세웠으며 사백년이 넘었다.  

원사에서 고려(고구려를 칭함)의 위치를 표시한 글귀를 보면 ,고려의 동쪽에 신라가 있다 했으며 남으로는 백제가  있고 큰바다 (여기서 큰 바다라 함은 황하를 일컫는 것) 서북을 건너 요수에 접한 營州 에 말갈과 같이 있다 하므로 지금 식민역사서에 기록된 바 라면 경상도와 백제의 윗 부분인 충청,경기도 부근에 고려가 있었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게된다. 즉 신라, 백제는 적어도 말기 고려를 중심으로 할때 하북성 영주를 중심으로 남과 동에 위치한 것이 되는것이다. 고구려가 백제의 북에 위치 하였으므로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신라를 아우르는 지역을 포함하는 고려는 고려사에 나타나 있는 만리지국이라는 문구가 틀림이 없을것이다.  

위의 송나라 추리도를 보면 영주는 바로 황하이북 하북성의 갈석산과 같은 지역위치로서 고려는 한반도 고려가 될수가 없는것 이다. 또한 고려를 오대시대에 흥기하여 주인으로 일어섰다라는 글귀로 보아 대륙의 상당한 지역을 점거하였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明史>
明史 - 列傳第十一 陳友諒/ 張士誠 /方國珍 / 明玉珍 (홍건적의 난 기록들 )

아래글중 명사원본에 보면
원말 <명옥진>의 무리가 고려로 도망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주)  지금같은 한반도의 고려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內陸 사천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그와 그의 아들<명승사>가 배를 타고 반도고려로 간다?  넌센스이지요.  분명히 徒라고 돼있군요. 

진우량 [陳友諒, 1316~1363]
후베이성[湖北省]의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현의 하급관리가 되었다. 서수휘(徐壽輝)가 반란을 일으키
자 그 휘하에 들어갔고, 곧 부장(部將) 예문준(倪文俊)의 서기가 되어 점차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길러나갔다. 1357년 예문준을 죽이고 그 병력을 모은 다음, 이듬해 양쯔강[揚子江]을 따라 내려가 안후이성[安徽省] 남부에 기반을 굳혔다.
이어 1359년에는 황제 서수휘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라 부르며 국호를 '대한(大漢)'이라고 하였다. 장저우
[江州:江西省 九江]에 도읍하고 한때 장시[江西]·후난[湖南]·후베이[湖北]를 세력 아래 두고 주원장(朱元璋: 明의 태조)과 빈번히 싸웠으나, 1363년 포양호[鄱陽湖]의 결전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  

장사성 [張士誠, 1321~1367]
본래 태주(泰州:江蘇省 泰縣)의 염전인 백구장(白駒場)에 적을 둔 소금 중개인이었다. 1353년 염장(鹽場)
관리와 염정(鹽丁) 사이의 분쟁이 일어난 것을 틈타 염정을 모아 난을 일으켰다. 태주와 고우(高郵)를 점령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성왕(誠王)'이라 칭하고 국호를 '대주(大周)'로 정하였다.
한때 원나라 군사에게 패한 적도 있었으나, 1356년 양쯔강[揚子江] 하류 삼각주지대의 중심지인 장쑤성
[江蘇省] 쑤저우[蘇州]를 함락시키고 '오국(吳國)'이라 칭하였다. 한때 세력이 장쑤성에서 저장성[浙江省] 일대에 미쳤으나, 난징[南京]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주원장(朱元璋)과의 오랜 항쟁 끝에 1367년 서달(徐達) 등이 이끄는 명(明)나라 군의 총공격에 대패, 포로가 되자 자살하였다.  

방국진 [方國珍, 1319~1374]
황옌[黃巖: 浙江省黃岩縣] 출생. 원래 소금 행상이었으나, 1348년 해적(海賊)의 난(亂)에 편승, 형제와
더불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켜 운조선(運漕船)을 약탈하였다. 어떤 때는 원나라에 반항하고 어떤 때는 귀순(歸順)하는 등 변덕을 부렸으나, 식량의 해상수송에 종사한 일도 있어 원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얻어 세력을 유지하였다. 그뒤 명나라의 태조에게도 반항과 귀순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1367년 명나라 원정군에게 쫓겨 해상으로 피하였으나, 곧 항복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도 벼슬을 얻고, 그의 아들도 벼슬에 올랐다.  

명옥진 [明玉珍, 1331~1366]
후베이성 쑤이저우[隨州] 출생. 처음에 서수휘(徐壽輝)의 무장(武將)이 되어 원군(元軍)과 싸웠으며,
충칭[重慶]을 함락시켜 그 곳을 근거로 쓰촨[四川] 지방을 평정하였다. 1360년 서수휘가 부하에게 살해되자, 1362년에 자립하여 ‘촉왕(蜀王)’이라 칭하고 대하(大夏)를 세웠다. 나라를 8도(道)로 나누고, 주제(周制)를 본받아 관제(官制)를 두었으며, 세금을 경감하고 과거를 시행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려고
애썼으나, 재위 5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아들 명승(明昇)이 그 뒤를 이었으나, 부장(部將)들 사이에 분쟁이 그치지 않아 국력이 기울어지다가, 명나라 태조(太祖)가 된 주원장(朱元璋)에게 항복하였다.   

명씨 시조의 휘(諱)는 옥자 진자(玉字 珍字)이시고, 기사년(己巳年, 1329년) 9월 9일에 지금의 중국 호북성 수주시 수현 유림진에서 탄생(誕生)하셨다.
신체가 장대하셨고 천성이 영특하셨스며 말위에서 활을 잘 쏘시는 등 훌륭한 무예를 갖추셨고 아홉 살 때부터 경학(經學)과 병서(兵書)에 능하셨으며, 당시 몽고족의 원(元)나라에 의하여 지배되고있던 중국을 되찾겠다는 큰 뜻을 품으시고 주색이나 재물을 밝히지 않으셨다.

元나라의 국운이 기울어 도처에서 영웅들이 떨쳐 일어나던 상황에 경인년(庚寅年, 1350년) 서수휘(徐壽諱)가 기양(蘄陽)에 송(宋)을 세우자, 시조께서는 다음해 서수휘 휘하에 들어가셔서 촉(蜀, 사천성)지방을 중심으로 많은 전공(戰功)을 쌓으시고, 여러 관직을 거쳐 10년이 지나서는 표기위상장군롱촉생성좌승상(驃騎衛上將軍隴蜀行省左丞相)을 제수받으셨다.
서수휘가 진우량(陳友諒)에 의해 살해됨에 중지(衆志)에 따라 시조께서 신축년(辛丑年, 1361년) 10월 15일 중경(重慶)에서 국왕으로 즉위하시고 송의 국호와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시다가 계묘년(癸卯年, 1363년)정월 초하루 황제로 등극하시어 국호를 대하(大夏)로,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책력을 선천(先天)으로 하시고, 예악(禮樂), 형정(刑政), 기강법도(紀綱法度)를 완비하셨다.
마음이 어지시고 자애로우셔서 세금을 대폭 줄이시고,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시는 등 백성들을 위한 시책을 많이 펴심에 인심이 시조에게로 모여 나라를 세우신지 4년이 지나 중국 서쪽은 모두 평정되었다.
애석하게도 병오년(丙午年 , 1366년) 2월 6일 신하들이 있는 자리에서 병으로 갑자기 붕어(崩御)하시게 되어 황제의 자리를 그 때 10세인 황태자(皇太子) 승자(昇字) 2세조(二世祖)에게 물려주시고, 팽황후(彭皇后)에게 후사를 부탁하는 조서(詔書)를 내리셨으니, 천수(天壽) 38세요, 재위(在位) 6년이었다. 시조의 시호(諡號)를 흠문소무황제(欽文昭武皇帝)로,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로 하고, 같은 해 9월 6일 보개산(寶蓋山)에 장례를 모시고 예릉(叡陵)이라 하였다.
2세조께서 황제를 계승, 연호를 개희(開熙)로 바꾸시고, 원 나라를 멸망케 한 명(明)나라와 여러 차례 전쟁을 하다가 신해년(辛亥年, 1371년) 팽황후(彭皇后)꼐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릴 것을 염려하시어 나라를 내어 주자고 하시니 황제가 이에 따르셨다 명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 2세조를 귀의후(歸義侯)로 봉하고 고려에 보내면서 고려 왕에게 군인(軍人)으로도 삼지 말고, 백성(百姓)으로도 삼지 말라(不做軍, 不做民)하고, 저택과 노비를 두게 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임자년(壬子年, 1372년, 공민왕 21년) 2세조께서 모후(母后)이신 팽황후와 함께 고려에 오시게 되었다.

공민왕은 2세조와 모후를 개성 흥국사(興國寺)에 사시게 하고, 연안, 백천 양현(兩懸)의 공물(供物)로 공봉(供奉)하였다.
팽황후(彭皇后)께서는 부덕(婦德)을 고루 갖추시고, 자수(刺繡)에 능하신 어른으로 이태조(李太祖)에게 용포(龍袍)등 궁중 관복(宮中 官服)을 지어 올리셨고, 부인들의 당의(唐衣)와 수식(首飾)도 처음으로 보급하셨다. 이태조는 2세조를 화촉군(華蜀君)으로 봉하였고, 태종(太宗)은 충훈세록(忠勳世祿)을 내렸으며, 팽황후(彭皇后)의 묘를 숙릉(肅陵)이라 하여 국빈(國賓)으로서의 예(禮)를 베풀었다.
2세조께서는 군부인(郡夫人) 파평 윤씨(波平 尹氏)를 배위(配位)로 맞이하여 아들 네 분을 두셨으니 의자(儀字) 자헌대부 자헌공(資憲大夫 資憲公), 현자(俔字) 가정대부 총랑공(嘉靖大夫 摠郞公), 준자(俊字) 가정대부 부사공(嘉靖大夫 副使公), 신자(信字) 통훈대부 시랑공(通訓大夫 侍郞公)이시고, 이때부터 명씨가 번연(蕃衍)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조정으로부터 예우를 받으며 여러 대에 걸쳐 평안한 생활을 해 오다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경향 각지로 분산되게 되었다. 자헌공파는 연안, 개성, 강진, 창원 등지로, 총랑공파는 청양, 서천 태안, 해남, 고흥 등지로, 부사공파는 서울, 영변 등지로, 시랑공파는 연안, 고흥 등지로 이거하여 살다가 산업화 이후 많은 사람이 도시로 이동하여 살고 있다.

현재 서울, 인천, 경기에 13,700명, 충남, 대전에 4,200명, 부산, 경남, 울산에 4,100명, 전남, 광주에 3,800명 등 전국에 26,000명의 명씨가 살고 있고, 인구가 많은 성씨순서로 보면 80위를 차지하고 있다. 호적 편제시 본관을 연안(延安), 서촉(西蜀), 해주(海州), 성도(成都) 등으로 신고하여 본관이 다르게 되어있지만 모두 같은 자손이다.서촉 명씨에 대해서는 하단에 자세히 추가해 둔다.

서수휘 [徐壽輝, ?~1360]
별명 정일(貞一). 호 홍건(紅巾). 원래는 면포판매를 업으로 하였으나, 원말에 요승(妖僧)인 팽형옥
(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홍건(紅巾)을 호(號)로 삼고, 1351년에 후베이성[湖北省]을 함락시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치평(治平)이라 건원(建元)하였다. 후난[湖南]·후베이·장시[江西]의 각지를 함락시켜 한때는 그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후에 부장(部將)인 진우량(陳友諒)에게 피살되었다.  

 

대하(大夏)정권의 흥망(興亡)과 명승(明昇)의 고려 귀화

 

한국 명씨(明氏)의 본관은 중국 쓰촨(四川) 서촉에서 연원


1982년 3월 30일, 충칭시내(重慶市 江北區 上橫街)에서 방직공장 확장 공사를 하던 중에 한 고분이 발견되어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4월 18일까지 계속된 발굴 작업 끝에 그것이 바로 쓰촨(四川)에서 대하국(大夏國)을 세운 명옥진(明玉珍)의 능묘(예릉, 睿陵)임이 판명되었던 것이다. 능묘에서는 향비목(香榧木)으로 만들어진 목곽과 잣나무(柏木)로 된 목관, 그리고 귀중한 현궁비(玄宮碑)가 발견되었다.‘

 

현궁(玄宮)' 이란 제황의 지하궁궐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내부에서 발견된 현궁지비는 엷은 푸른색을 띤 동석(茼石)으로, 그 높이는 145cm, 폭 57cm, 두께 23.5cm의 규모로 명옥진황제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금잔, 은기, 비단 명정, 도포, 곤룡포 등 여러 의복 및 옷감 등이 발견되어 복식사 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명옥진의 아들 명승(明昇)이 고려로 귀화하여 정착함으로써 명씨(明氏)를 개창하게 되었다는 것은 보학(譜學)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잘 알려진 사실이다.『서촉(연안)명씨대동보(1986, 卷1, p.3)』에 “우리 명씨는 중국 대하의 황제이신 명옥진(明玉珍) 시조의 후손으로서 서기 1372년(壬子)에 2세 되시는 명승황제께서 모후 팽씨(彭氏)를 모시고 고려 송도에 정착하시면서 국빈으로 충훈세록의 예우를 받으셨다." 고 하여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성씨 유래를 다룬『한국성씨보감』에도 명씨의 시조 및 본관 유래를 "시조 명옥진은 원말(元末) 촉(蜀)에 웅거하여 1361년 개국 왕이 되고 , 1363년 충칭에서 황제가 되고, 국호를 대하라 하여 선정을 베풀다가 1366년에 죽고 아들 명승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당시 새로이 건국한 명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1372년(공민왕 21년)에 고려에 귀화하였다. 공민왕은 명승에게 양현을 주고 송도(개성)에서 살게 하였으므로 우리나라 명씨의 연원이 이뤄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명씨 후손들은 명옥진을 시조로 삼고 그가 통치하던 쓰촨을 본관으로 삼아 ‘서촉(연안)명씨'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원말(元末) 농민반란과 명옥진의 쓰촨성 입성

13세기 초 몽골족 칭기즈칸은 몽골고원을 통일한 후 남하하여 1234년에 금(金)을 멸망시켰다. 이후 몽골은 계속된 원정을 통해 사상 최대의 영토를 소유하여 유라시아 전역을 지배하였다. 쿠빌라이는 수도를 몽골고원의 카라쿤룬(喀喇崑崙)에서 대도(大都, 지금의 北京)로 천도한 후, 1271년에는 국호를 원(元)이라 칭하고 중국식 정통 왕조임을 자처하였다. 이후 1279년에는 화이허(淮河) 이남의 남송(南宋)을 멸망시킴으로써 중국 전역을 차지하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약 100여 년 간 번영을 누려오던 원 왕조는 말기에 정치가 문란해지고 경제가 피폐해졌다. 특히 마지막 왕인 순치시대(1333~1368)에는 정치권이 부패하고, 경제가 혼란하여 왕조에 대한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원말 국가권력의 이완과 지배층 간의 권력투쟁으로 특정의 세력이 정국을 전횡하고, 조정의 가혹한 경제수탈과 토지의 황폐화로 농민은 고통을 받으며, 곳곳에 유랑민이 속출하여 사회는 극도로 불안한 가운데 있었다. 게다가 1351년 황허(黃河) 범람 및 재해 등으로 생활에 위협을 받고 있던 농민들은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백련교(白蓮敎)를 신봉하면서 원조전복(元祖顚覆)을 부르짖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송(宋)의 화덕(火德)을 부흥시킨다는 뜻에서 머리에 붉은색의 두건을 둘러 동료의식을 나타내었기에 이들을 흔히 ‘홍건군' 또는 '홍군'이라 불렀다. 홍건군의 중심인물인 유복통(劉福通)은 잉저우를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산시켜 나갔다. 처음에는 3,000여 명에 불과 하였으나 4개월 후에는 무려 10여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허난(河南), 산둥(山东), 허베이(河北)성 일대를 근거지로 세력을 펴나갔으며, 1355년 유복통은 보저우(亳州)를 공략하고 그곳에서 한산동(韓山童)의 아들 한림아(韓林兒)를 추대하여 '소명왕(小明王)'이라 하고, 국호를 '송(宋)', 연호를 '용봉(龍鳳)'이라 하여 몽고족을 몰아내고 한민족 국가를 재건한다는 의지를 굳건히 하였다.

한림아·유복통 집단의 홍건군이 반원(反元)을 부르짖고 일어나자, 각 지방에서 원조타도를 부르짖는 농민반란군이 일어났다. 이들 세력 중 명옥진은 쓰촨을 중심으로 반원운동(反元運動)을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명옥진의 원래 성은 ‘민(旻)'씨였다. 명교(마니교)를 신봉하였기에 성을 '명'씨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소수설에 불과하고 다수설은 명씨였다고 결론-중국 호북성 명씨연구회에서 입증) 

그는 원의 명종 시대인 1329년 9월 9일에 후베이(湖北)성 쑤이저우(隨州)의 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농사일에 종사하였다. 그는 신장이 8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곧은 성격으로 의협심이 있어 마을에 쟁송(爭訟)이 있으면 모두 그에게 와서 해결할 정도로 신임을 얻고 있었다. 당시 곳곳에 군웅이 일어나자, 명옥진은 1351년에 중세(重稅)에 시달리고 있는 농민들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 반원운동을 전개하였다.(*수주시정부는 2012년 수주시 유림진 수현에 "明玉珍 古居"라는 기념관 건립) 

  1352년 정월, 큰 세력을 펴고 있던 서수휘(徐壽輝)는 명옥진의 세력에 공격을 가하며 항복을 요구했다. 명옥진은 향리를 보호할 생각으로 휘하(麾下)의 무리를 거느리고 서수휘 군대에 들어갔다. 1353년 서수휘는 명옥진을 원수(元帥)로 삼아 미엔양(沔陽)을 지키도록 하였다. 서기1357년, 명옥진은 군대를 이끌고 쓰촨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쿠이저우(夔州)를 거쳐 4월에 충칭에 이르렀다. 그는 충칭(重慶)을 공격하면서 병사들에게 파괴와 약탈을 금하여 성민들에게 안도감을 주었기에 인근 부대에서도 투항하는 병사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명옥진은 수년간 여러 곳에서 세운 공적이 인정되어 서수휘로부터 상장군통군도원수(上將軍統軍都元帥)에 임명되었고, 후에 광서양강도선위사(廣西兩江道宣慰使)를 거쳐 농촉사전행성참정(陇蜀四川行省參政)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명옥진의 쓰촨성 경략(經略)이 시작되었다.

 

대하정권의 수립

명옥진이 쓰촨지역의 원조 세력을 제거하면서 지방 정세를 안정시키고, 나아가 독자적으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천완국과의 관계이다. 명옥진은 쓰촨에서 자립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서수휘 휘하의 천완 정권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명옥진은 어떻게 해서든지 천완국의 지배를 벗어나야만 하였다.

마침 명옥진이 쓰촨성 여러 지역을 공략하고 있을 당시, 천완정권의 내부에 분열과 대립 갈등이 일어났다. 어부 출신으로 전투에 능한 예문준이 천완국의 승상이 되어 권력을 전횡하면서, 주군 서수휘를 암살하고자 기도하였다. 결국 사전에 발각되어 예문준의 계획은 실패하고 황저우(黃州)로 달아났는데, 이번에는 예문준의 부하인 진우량이 예문준을 살해하였다. 예문준을 살해한 진우량은 ‘평장(平章)'이라 자칭하고, 장저우(江州)로 도읍지를 옮겨 천완정권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마침내 1360년, 진우량은 차이스지(採石磯, 馬鞍山市에서 남으로 6km 떨어진 곳)의 강가에서 서수휘를 죽인 후,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한(大漢)'이라 하였다.

이처럼 천완 정권에 내분이 일어나자, 명옥진은 진우량을 증오하면서 그와 관계를 끊었다. 반면 살해된 서수휘에 대해서는 묘당을 세워주고 세시에 맞춰 그를 제사함으로써 의리를 지키며 민심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당장 진우량과 싸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쓰촨 지역의 원조 세력이 제거되어 정세가 안정되기는 하였지만, 진우량 토벌은 신중을 기할 일이었다. 만약 진우량을 토벌하기 위하여 대병력을 산샤에 출동시킨다면, 후방이 비게 되어, 산시와 윈난에 잔존한 원조 군대의 침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샤지역으로 군사를 출동시키는 일은 모험적인 일이었고, 쓰촨 백성들에게는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원조의 진사였던 유정(劉楨)은 명옥진에게 칭제하여 독립할 것을 건의하였다. 명옥진은 그의 건의에 따라 1361년에 ‘농촉왕(陇蜀王)'이라 칭한 후, 1363년 정월 초하루에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하(大夏)',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고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이때 선천력(先天曆)이라는 역법을 제정하여 공포하였다.원말에 각 지역의 군웅들도 모두 국명과 연호를 가지고 있었듯이 명옥진도 독자적인 국호와 연호를 구상하여 지배체제를 갖추어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대하정권의 중앙과 지방의 지배기구

명옥진은 나라를 세운 뒤 먼저 중앙 지배기구를 마련하였다. 중앙기구는 주대(周代)의 제도를 모방하여 6경(六京)체제를 채택하였다. 주대에는 천(天), 지(地), 춘(春), 하(夏), 추(秋), 동(冬)의 6관을 두어 다스렸는데, 대하에서도 그것을 따라 육경을 두었다. 백관을 총리하는 직인 총재(?宰, 天官), 토지와 인민을 관할하는 사도(司徒, 地官), 종묘 제사 등 예악을 담당하는 종백(宗伯, 春官), 군정을 담당하는 사마(司馬, 夏官), 사법과 형옥 및 규찰을 관장하는 사구(司寇, 秋官), 토목ㆍ공작 등을 담당하는 사공(司空, 冬官) 등 육경제도를 채택하여 지배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실의 문서작성을 담당하는 한림원(翰林院),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 지방 학교인 제거사(提擧司)를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종묘를 세워 조상을 제사하고, 사직단을 두어 황제가 천지에 제사하였으며 아악(雅樂)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군사기구로는 중앙에 추밀원(樞密院), 지방에 만호부(萬戶府)를 두었다.

  지방 행정기구도 원대의 제도를 답습하여 쓰촨을 8도로 나누어 다스렸다. 부에는 자사, 주에는 태수, 현에는 현령을 두어 다스렸던 것이다. 8도의 영역은 지금의 쓰촨성의 대부분과 산시(陝西)성, 깐쑤(甘肃)성, 꾸이저우(貴州)성, 윈난(雲南)성, 후베이(湖北)성 등의 접경 지역을 지배하면서 원의 지배를 벗어나 독자적인 지방 정권을 수립하였는데, 가장 강성한 시기의 영역은 동쪽으로는 이릉(彝陵, 지금의 湖北 宜昌(후베이성 이창)), 서쪽으로는 윈난의 중칭(中慶, 지금의 昆明(쿤밍)), 남쪽으로는 보저우(播州, 지금의 貴州 遵義(꾸이저우 준이)), 북쪽으로는 싱웬(興元,지금의 陝西 漢中(산시 한중))에 이르고 있었다.

  1365년 이후로는 원의 제도를 따라 6경 제도를 폐지하고 중서성, 추밀원, 평장 등의 관직을 두었다. 곧 민정을 담당하는 최고기관으로 중서성, 군정을 담당하는 최고 기관으로 추밀원, 지방의 인민을 다스리는 평장을 두고, 종래 중앙부서에서 봉직하던 인물을 그대로 발탁하여 정사를 돌보도록 하였다. 대하국이 초기에 주나라의 제도를 본떠서 행정조직을 갖추었다가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는 원나라의 제도를 본떠 다시 정비한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명옥진이 초기에 중국 고대의 전통적인 주의 6경제도를 채택한 것은 그의 반원적인 태도의 표명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쓰촨성에서 원의 지배를 배격하기 위한 명분은 다름 아닌 민족주의에 호소한 것이었다. 이민족인 몽골족을 타도하고 한민족을 부흥시킨다는 것을 이념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정신이 명씨대동보에 잘 나타나 있다. 족보에서 시조 명옥진을 설명하는데 “1대 시조 명옥진은 송 상흥 기원후 54년 신미년에 수주에서 태어났다(一世 始祖 明玉珍, 宋祥興 紀元後 54年 辛未 誕降于隨州)."라 서술하고 있다. 이곳에서의 상흥(祥興)은 남송의 마지막 황제 조예(趙芮)의 연호로, 명옥진의 출생 기년을 원대에 대지 않고 남송 마지막 황제 조예에 대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하고 해석할 수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