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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청지(华清池) 이야기 - 중국 고대 황실의 온천탕 편

작성자중국 시안 티티 레지던스|작성시간24.11.21|조회수12 목록 댓글 0

비상전(飞霜殿)

 

구룡호(九龙湖)를 중심으로 한 화청지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가장 사로잡는 웅장한 모조 고대건축물이 바로 비상전(飞霜殿)입니다. 당라나시기의 비상전은 당현종과 양귀비가 려산(骊山)을 유람하면서 사용하는 침전(寝殿)입니다.

 

전하는데 의하면 이 전각이 완공될 때 마침 겨울철이였는데 눈송이가 하늘에 흩날리다가 지면에 이르기도 전에 대전(大殿.전각) 주위 온천의 열기로 공중 증발해 낙설이 서리가 되었다고 하여 '비상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상전은 현재 화청지의 귀빈접대실이 되었습니다.

 

 

어탕유적박물관(御汤遗址博物馆)

 

당나라 어탕유적(御汤遗址)은 1982년 4월에 발견되었고 고고학자들의 8년간 발굴과 고증을 거쳐 4000여 ㎡의 유적내에서 '해당탕(海棠汤)', '연화탕(莲花汤)', 성신탕(星辰汤), 상식탕(尚食汤), 태자탕(太子汤) 등 5조의 탕지유적(汤池遗址.목욕탕 유적)을 정리해냈으며 사학계의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90년 9월에 중국 최초의 탕지유적박물관(汤池遗址博物馆)이 준공되었고 1996년 11월에 국무원은 화청궁 어탕유적지를 전국 제4차 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第四批重点文物保护单位)로 정식 공포하였습니다.

 

 

해당탕(海棠汤)

 

해당탕을 '부용탕(芙蓉汤)'이라고도 부르고 속칭 '귀비탕(贵妃汤)'이라고도 합니다. 747년에 건설되었고 욕탕의 평면이 만개한 해당화(海棠花)와 같아서 해당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였습니다. 해당화의 화려함으로 귀비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한편 양귀비의 풍만한 몸매를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욕탕의 벽은 24개의 묵옥(墨玉.검게 다듬은 청석青石)으로 붙여 만들었습니다. 욕탕의 동서 길이는 3.6m, 남북 너비는 2.9m이고 동서 양쪽에 각각 계단이 설치되어있습니다.

 

욕탕의 급수 시스템이 매우 과학적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욕탕 한가운데에는 직경이 10cm인 급수구가 있고 급수구위에는 해당화의 꽃술을 의미하는 분사기가 있으며 아래에는 온천의 수원지와 이어진 도자기로 만든 수도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온천수는 자연압력에 의해 '꽃술'에서 저절로 뿜어져 나오게 되는데 분출하는 형태가 분수대와 비슷합니다.

 

양귀비는 8년 가까이 해당탕을 찾았습니다. 목욕시의 정취를 돋우기 위해 욕조에 생화의 꽃잎과 미용효과가 있는 중약재 및 값비싼 향료(자단 紫檀, 침향 沉香, 정향 丁香, 사향 麝香 등)를 뿌려 향탕(香汤)으로 목욕을 즐겼다고 합니다.

 

 

연화탕(莲花汤)

 

연화탕은 당현종 이융기(唐玄宗.李隆基)의 전용 욕탕으로 당나라 화청궁의 어탕유적 중 가장 기세 있고 대표적인 곳이며 '어탕구룡전(御汤九龙殿)'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전각의 건축면적이 400여 ㎡에 달하고 내.외전(殿)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욕탕에는 약 100㎥의 물을 저장할수 있는데 마치 하나의 거대한 실내수영장과 같습니다.

 

연화탕의 상.하 두 층 계단의 모양이 다릅니다. 윗층 평면의 네 귀퉁이는 일정한 곡선의 변화가 있고 연꽃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아랫층 평면은 규칙적인 팔각형입니다. '8변(边)'은 대지의 8개 방위를 대표하고 '천하가 모두 왕의 땅'을 뜻하며 대지 팔극(八极) 위에 연꽃이 자라는 설계는 대지 토양에 뿌리를 두고 수면에 꽃이 뜨는 특수한 생장 법칙에 완전히 부합하였습니다.열광적인 도교 신자로 이융기는 목욕을 통해 하늘과 연결되어 맑은 샘물과 연꽃의 보우 아래 일종의 해탈과 승화를 추구하여 불로장생의 목적에 이르기를 원했습니다.

 

 

성신탕(星辰汤)

 

성신탕은 644년에 건설되었고 당태종 이세민(唐太宗.李世民)이 사용한 것으로 원래의 이름은 '어탕(御汤)'이고 부지면적이 100여 ㎡로 지금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큰 어용탕지(御用汤池.황제용 욕탕)입니다.

 

성신탕 설계는 염입덕(阎立德)이 당나라 예제(礼制) 규정에 따라 별자리와 24절기, 즉 천(天),지(地), 인(人)의 삼위일체 이념을 결합하여 설계했습니다. 고대인들은 하늘에는 천제(天帝)가 우주를 주재하고 땅에는 황제가 백성을 통치하며 별자리의 위치변경와 명암, 낙하 등은 황제 권력의 변화를 반영한다고 믿었습니다.

 

'천인합일(天人合一)' 설을 신봉했던 당현종은 북두칠성을 닮은 '어탕'을 '성신탕'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성신탕은 온천 수원지와 가장 가깝고 수질이 가장 좋으며 지리적 위치가 가장 우월하여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욕탕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1982년의 복원 과정에서 고고학자들은 성신탕 아래에서 진시황제의 '려산탕(骊山汤)'과 한무제 '한이궁(汉离宫)'의 문화유물을 발견하였고 또 문화층(유물이 있어 과거의 문화를 아는 데 도움이 되는 지층)에서 발견한 중국 역사상 가장 이른 황실 목욕 용품인 도옹(陶瓮), 도감(陶鉴)과 중국 고고학계에서 현재 발굴된 유일한 나무문짝은 진.한시기의 목욕문화를 연구하는데 증거자료를 제공하였습니다.

 

 

상식탕(尚食汤)

 

상식탕은 면적이 작고 구조가 간단하며 특이한 조형도 없습니다. "상식탕은 상식국(尚食局) 관원들의 전용 모욕탕"이라고 해석한 사람이 있지만 다년간 고고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상식국 관원 전용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상(尚)'자는 '하사, 주다'의 뜻도 포함되는데 당나라시대에는 상식국 외에 황제를 수행한 인원으로 상약(尚药), 상의(尚衣), 상사(尚社), 상승(尚乘), 상경(尚擎) 등 5개 국의 관원(官员.관리)도 있었습니다. 상식탕의 전체 구조를 분석해 보면 욕탕 가운데에는 돌 격벽(용도 추정: 계급 분리용, 낮은 계급의 관리는 격벽의 서쪽에서 합욕(合浴), 높은 계급자는 격벽 동쪽에서 독욕(独浴)이 설치되어 있고 동·남·북 3개면에는 계단이 있으며 욕탕에는 고정된 좌향(坐向) 위치가 없습니다. 이는 상식탕의 면적이 작지만 이곳에서 목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서 이용률이 비교적 높고 이용자들의 신분도 비교적 복잡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상식탕은 황제가 계급이 높은 수행내시관리들에게 하사했던 목욕장소로 해석될수 있습니다. 역사기록이 비교적 적어서 상식탕에 관한 많은 의문점(이를테면 계단아래의 백갱.百坑 및 돌 격벽의 용도)들은 고고학자의 추가적인 탐구와 논증이 필요합니다.

 

 

태자탕(太子汤)

 

태자탕의 목욕자는 욕탕 이름 그대로 바로 동궁(东宫)의 황태자들인데 기원 644년에 건설되여 80여년 동안 사용해왔습니다. 태자탕에서 목욕을 했던 황태자는 이승간(李承乾), 이치(李治), 이충(李忠), 이홍(李弘), 이현(李贤), 이헌(李宪), 이단(李旦), 이숭군(李崇君), 이융기(李隆基), 리영(李瑛) 등 10명으로 4명 만이 황권을 누렸고 나머지는 모두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당나라 궁정내부의 황위쟁탈이 얼마나 치열하고 잔혹했는 지를 알수있습니다.

 

태자탕은 '성신탕'의 배수로를 통해 온천수를 공급받는 데 이는 황제와 황태자 사이의 존비 관계를 바로 놓았고 예법 위반 문제를 해결했으며 또한 성신탕에서 온 온천수는 황태자가 늘 부황(父皇.아버지 황제)의 은택을 누릴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태자탕 사방의 벽과 밑바닥이 심하게 파괴되었고 당나라시기의 청석판(青石板)이 대부분 사라졌으며 또한 박물관의 전체적인 건축구조를 고려하여 태자탕을 노천형식으로 전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다섯개의 욕탕은 크기와 형태가 서로 다르며 각기 풍격과 특색을 지니고 있어서 중국 고대 목욕사, 당나라 궁정 건축사, 봉건사회의 등급제도, 중국 고대 지열자원 이용사 등을 연구하는데 상세하고 정확한 역사 자료 근거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화청지의 역사와 문화적 내성을 크게 풍부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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