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침공시에, 101과 82공수사단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기에 딱 알맞은 지도이다.
항상 그래왔지만, 82공수사단은 항상 서자 취급 비슷한 것을 당했다. 마켓가든에서도 훨씬 더 북쪽에서 많은 피해를 받았고, 나이메헨 도하작전을 상징적으로 대비하면 101의 임무에 비하여 고통스러운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서자 취급은 위의 그림에서도 보인다. 101공수사단이 유타의 상륙부대와 바로 만날수 있는 위치에 비하여, 82공수사단은 그 왼쪽(서쪽의) 방어선을 형성하는 형태의 임무를 맡았다. 특히나 반도 끝에 있는 독일군을 고립시키고 격리시키는 것이 2차적인 임무였으니 피해는 101에 비하여 더 높은 편이었다. 다시 말해서 반도를 자르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그러므로 101에 비하여 초기 단독작전의 기간도 82공수사단이 더 길었다.
(나이메헨 도하작전이란, 영화 '머나먼 다리'에서 로버트 레드포드가 존나 노를 저으면서 "oh, merry! oh, merry!" 중얼거리면서 도강하던 장면이다. oh, merry!(철자 맞나?)란 오 마리아님! 이라는 뜻이 되겠땅)
현대도 이러한 개념은 남아 있다. 82공수사단은 어쩌면 세계유일의 완전공수사단인지도 모른다. 완전공수라는 것은 충분한 지원제대까지를 의미한다. 교리상으로도 82공수사단장은 전시에 2진 정도에 속하여 낙하산으로 같이 투입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러 곳에서 101에 비하여 점프 대기중인 사단장의 사진을 많이 볼수 있는 부대이다. 똥씹은 표정으로 '내가 시파 이 나이에....' 101공수사단은 이후에도 미 육군의 최첨단화된 장비와 전술이 투입된 반면, 82공수사단은 노가다 분위기가 나는 사단으로 존재해 왔었다. 본인이 보는 전투적인 상징은 101보다 82가 훨씬 강하다. 거기다가 101에 비하여 잘 알아주지도 않는다. 마크도 좀 구리구리하고 101은 때깔난다.
그리고 노르망디 공수작전에서도 82공수사단은 훨씬 피해와 고통이 컸다. 첫날의 가장큰 고통은 생 메르 에글리제 공방전과 Merderet강안 양쪽의 공방전이다.
82공수사단
사단장- 리지웨이 소장
부사단장- 제임스 가빈 준장
505연대-윌리엄 에크맨 대령
507연대-조지 V. 밀러 주니어 대령
508연대-로이 린퀴스트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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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공수연대의 노르망디 공수작전-82공수사단 개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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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공수사단 서쪽에는 82공수사단이 Merderet 강의 제방쪽에 있었고 생 메레 에글리제(Ste. Mere-Eglise)에 근접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첫날의 상황은 원래 사단임무에는 다소 거리가 있는 환경에 처했다. 82공수사단의 임무중 가장 큰 것은 Pont l'Abbe와 Beuzeville-la Bastille에 있는 교량은 확보하고, 더 나아가서는 Merderet 강으로 향하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 후에 82공수사단은 상륙군단의 남서쪽 측면의 두브(Douve)강 라인을 방어하게 되어 있었다. 101이 연결하여 같이 진출하는 반면, 82공수사단은 캐런탱이 점령되는 시점까지도 좆도 혼자서 계속 막아야 했다.
작전의 할당은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 발음가지고 딴지 걸어도 무방. 복잡한 지명은 대충 넘어가라. 아래 지도가 있음)
505공수연대는 Merderet 강 동쪽에 점프하여 생 메레 에글리제를 점거하고 la Fiere(라 피에르)와 Chef-du-Pont(체 두 퐁) 사이의 도하장소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진출하여 Bandienville이나 Beuzeville-au-Plain근처에서 101사단과 만나는 것이었다.
507과 508연대는 강의 서쪽에 점프하여 연합한 후 교두보를 서쪽 제방에 두 개 확보하는 것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507연대는 505연대와 조력하여 라 피에르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Gurbesville과 Renouf 사이에 방어선을 만드는 것이었다. 508연대는 Beuzeville-la Bastille와 Pont l'Abbe사이의 강변을 확보하고 507연대의 방어선을 연장선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505에 비하여 507-508은 더 개털, 보다 서쪽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두브(Douve)강 서쪽으로 상륙군을 엄호할 일시적인 방어선을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점프후에 82공수사단의 부사단장인 제임스 가빈의 지휘권에 하나로 합류하도록 되어 있었다. 82공수사단장인 리지웨이 장군은 상륙시간과 동일한 해가 뜰 무렵 글라이더로 날아올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모든 공수포병과 추가 보병이 글라이더를 이용해서 36시간 안에 모두 날아올 예정이었다. 이들의 임무중에는 가장 중요한 목표인 Douve bridge를 점거하거나 파괴할 508공수연대에 대한 지원이 있었다. 이들과 가장 빠르게 만날 상륙부대는 리스 하웰 장군이 지휘하는 포병과 대-전차부대로 이루어진 상륙군의 기보특수제대였다.
(가빈 준장-마켓가든에서는 사단장이 된다. 정확하게 82공수사단장 리지웨이로부터 지휘권을 받은 것은 1944년 8월이다. 그의 별명은 JUMPING GENERAL이었다. 대부분으 고급지휘관과 달리 그는 노르망디에서도 직접 병사들과 낙하산으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82공수사단의 점프는 성공과 아주 멀었다. 이들의 점프존은 Merderet강의 서쪽이었는데 전체 공수작전에서 가장 안좋았다. 507연대의 Drop Zone T는 암프레빌(Amfreville)의 북쪽이었는데 대부분 흩어져서 광범위하게 점프했다. 암프레빌의 남서쪽-피코빌(Picauville)의 북쪽에 점프한 508연대는 그나마 507보다는 조금 나았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수송기가 병력을 Merderet의
'서쪽이 아닌 동쪽에'
떨어트림으로써, 이 병력들은 결국 가까운 곳에서 규합하던 101공수사단병력들과 같이 싸우게 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생 메르 에글리제의 북서쪽 철도와 주도로 사이에 내린 505연대는 노르망디 공수작전 중에서 가장 안정적이었고 연대 2천 2백명 중에서 1천명이 거의 같은 드롭존에 점프했다. 나머지도 북쪽과 동쪽에 흩어졌으나 빠르게 규합했다. 점프후에 정식으로 제대를 갖춘 것은 82공수사단 505연대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거기다가 그 지역에는 독일군의 수가 적었다.
생 메르 에글리제를 점거하고 방어선을 만드는 것은 82공수사단 점프 후의 가장 중요한 목표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이후 나머지는 Merderet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강을 건너서 확보를 못하면 독일군의 우회로가 생긱고 캐런탱의 서쪽이 독일군에게 노출된다. 그러나 당일 전술적으로 더 중요했던 것은 오히려 생 메레 에글리제의 점거였다. 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의 마을이었다. 그리고 독일군의 거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에 대한 점거와 공방은 82공수사단의 노르망디 공수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작전이 된다. 규합에 성공한 505연대 3대대의 첫 목표는 이 마을의 남쪽에서 동쪽으로 도로를 점거하는 것이었다. 2대대는 좀 더 북쪽인 Neuville-au-Plain과 Bandienville 사이를 점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101공수사단 502연대와 연결토록 되어 있었다. 1대대는 라 피에르와 체프 두 퐁 사이를 점거하여 이후 날아올 글라이더를 유도하고 연대 지휘부를 맞이하는 것이 임무였다.
비행기가 콘탱팅 반도에 도착하자, 먼저 505연대가 안개와 독일군의 대공사격권으로 들어갔다. 비행기는 조금 흩어졌지만 다행히도 30분전에 먼저 점프한 패스파인더 병력의 유도는 아주 정확했다(당시 1급비밀인 레이더 비콘을 사용했다). 일부 비행기는 대공포화로 흩어지다가 수송기끼리의 충돌위험이 보이자 바로 그린라이트를 넣어서 병력을 점프시켰다. 그럼에도 505연대의 점프는 성공적이었다. 505연대 1대대장 프레드릭 켈렘 중령은 대부분의 대대원을 규합하고 la Fiere의 교량으로 향했다. 3대대장 에드워드 크라우스 중령은 대대원의 1/4을 규합한 후 2개 중대로 재편성하여 생 메레 에글리제로 향했다.
프랑스 농부의 증언으로 독일군이 당시 마을의 외곽 도로를 따라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크라우스 중령은 알았다. 중령은 날이 새기 전에 외곽도로를 점령하고 마을을 포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병력들에게 마을로 들어가더라도 날이 새기전에 가택수색을 하지 말고 일체의 발포를 자제하여 독일군을 만나면 대검을 쓰도록하고 급하면 수류탄을 쓰라고 명령했다. 미군의 소화기 소리가 독일군에게 식별을 줄수 있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소화기 사격음은 산발적인 것 외에 없었다.
새벽 4시 30분이 되자 크라우스 중령의 3대대는 마을을 거의 점령하고 성조기를 게양했다. 게양한 깃발은 82공수사단이 나폴리를 해방시킬 때 게양했던 동일한 깃발이었다. 날이 밝자 크라우스 중령은 마을 주변의 통신선(Cherbourg communication)을 절단하고 도로를 봉쇄했다. 이때 세곳에서 독일군의 수류탄을 이용한 공격이 있었다. 그러나 오전 9시30분, 마을은 완전점령되었다. 당시 3대대는 독일군 10명을 사살하고 30명의 포로를 잡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후에 노르망디 당일 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가 지속된다) 당시 505-3대대장 Krause중령은 휘하에 360명을 데리고 있었고 거의 전상이 없었다.
생 메르(메레) 에그리제 공방전 작전도
그 사이 505-2대대장 벤자민 밴더루트 중령은 충분한 자신의 대대원을 모아서 작전대로 Neuville-au-Plain과 Bandienville 사이의 북쪽으로 진출했다. 거의 저항 없이 진출하던 중 밴더루트 중령은 오전 6시 14분, 연대장 윌리엄 에크맨 대령의 정지명령을 받았다. 당시 크라우스 중령의 3대대가 생 메르 에글리제(Ste. Mere-Eglise)를 일부 점령했다는 전령을 보냈으나 도착하지 않아 인접 2대대장인 그는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오전 8시 10분, 3대대의 상황을 여전히 모르던 2대대장 밴더루트 중령은 방향을 거꾸로 돌려 전략상 중요한 생 메르 에글리제를 점거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이후 3대대의 점거소식을 듣고 2대대는 다시 목표로 향했는데, 그때 3대대가 있는 마을에 독일군이 남쪽에서 반격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독일군은 자주포와 탱크를 앞세운 보병2개 중대 규모였다. 반격은 남쪽 도로거점에 기관총과 박격포로 포문을 열였다. 3대대는 이 강력한 공격으로 분산했다. 마침 밴더루트의 2대대가 지원을 하기위해 도착하자 크라우스 중령은 산재된 G와 H중대를 규합하여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독일군의 증원이 예상되는 주도로의 방향이었다. 지원나온 2대대는 마을의 북쪽과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 두 대대장은 토의 끝에 마을을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서로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 두 대대장은 이미 부상중이었다. 크라우스 중령은 다리에 포탄 파편을 맞았고 밴더루트 중령은 다리가 부러져서 수레에 탄 채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 생 메레 에글리제에서의 전투가 진행되자 밴더루트 중령은 D중대 3소대장 터너 턴불 중위에게 Neuville-au-Plain의 적이 미약하니 그곳으로 진출하라고 명령했다. 남북으로 독일군이 연결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지도 참조). 이 임시변통의 지혜로운 진출로 독일군은 두 곳으로 병력을 분산하는 약점을 보였다. 그러므로 마을에 대한 독일군의 효과적인 압력은 줄어들었다. 터너 텀불 중위는 완편의 42명 소대원과 공용화기 그리고 57밀리 대전차 바주카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소대를 Neuville-au-Plain의 보다 높은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오전 10시 30분에 독일군이 3소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맹공이었고 혈투였다.
독일군의 화력은 텀블 중위 소대보다 강했지만, 텀블 중위는 여기서 독일군을 고착시키라는 명령을 받은대로 8시간 동안 전투를 질질 끌게 된다. 독일군은 텀블 중위의 병력이 소대의 규모임을 모르고 포격을 점차 강화했다. 포탄과 박격포가 난무했다. 결국 텀블 중위는 밴더루트 중령으로부터 8시간만에 퇴각명령을 받았고 퇴각을 엄호하라고 대대장은 E중대를 급파했다.
격전을 치룬 이 텀불 중위의 소대가 퇴각했을때는 42명의 병력이 16명으로 줄어 있었다. 이 3소대의 강인한 항전으로 독일군도 전력을 누수시켰고 에글리제 마을에 있는 2개 대대를 격파하기 힘들다고 생각해서 남쪽으로 후퇴했다. 사실상 이들 공수부대원들에게 가장 심각한 적은 탱크와 기갑이었다. 당시 방어의 전면에는 G와 H중대가 주력했고 나머지 중대는 예비대로 마을안에 있었다. 그러나 G-H중대의 총 합은 1개 소대 규모가 약간 넘었다. 그들은 마을의 남족끝을 끈질기게 방어했다. 독일군은 생 메레 에글리제의 천오백야드 남쪽 높은 곳에 포상을 설치하고 보병의 증강을 기다렸다.
독일군의 첫 번째 마을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크라우스 중령은 I중대와 8명에게 과감하게 명령해서 독일군 포상의 서쪽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일종의 반격이었다(그림에 화살표로 I중대의 우회로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예상외로 이 소규모 반격의 효과는 엄청났다. I중대는 지그재그로 기동해서 관목지대로 들어갔고 이어서 도로로 진입하자 바로 독일군이 급조한 진지를 만났다. 이것은 I중대가 진출방향을 착각해서 생각지않게 바로 독일군 진지를 만난 것이었고, 물론 이 순간적인 조우는 일종의 작전상 착오였다. 그러나 어쩔수 없었다. 독일군은 이미 눈앞에 있었다.
I중대원들이 먼저 도로상에서 독일군의 차량들을 Gammon grenades로 세대 파괴하자 독일군은 보다 남쪽으로 후퇴했고 마을의 미군의 병력을 보다 크 규모로 오판했다. I중대는 후퇴하는 독일군을 다시 측면에서 서너번 공격하고 다시 마을의 방어선으로 돌아왔다. 마을에서는 몇 명의 독일군 저격수가 사살되고 일부 지휘관을 잃은 병력이 미군의 공격을 받아 도주했다. 밤이 되자 미군의 점거는 공고화되었고 전령이 편하게 명령을 전하고 보급품을 나누어줄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57밀리 바주카포탄과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다행히도 그때 병력들이 일부 추락한 글라이더를 찾아내어 일부 통신장비와 함께 탄약을 보충했다. 글라이더의 조종수와 승무원은 모두 전사해 있었다. 다음날의 독일군 공격은 전날에 비해 약화되었고 격퇴되었다. 다시 해가지자 독일군은 보이지 않았다.
(이 당시 공수사단의 부대들은, 마을이 있다면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개활지에서는 상대의 기갑과 포격에 더 취약했다. 의미가 거꾸로 들릴수도 있지만, 적어도 기갑에 대한 방어는 마을이나 시가지가 더 편했다. 마을은 일종의 방어벽이었다. 개활지에서 1킬로 정도에서 독일군의 기갑과 맞선다면 그냥 대전차포 쏴보지도 못하고 전멸할수도 있었다.)
Along the Merderet(서쪽으로의 Merderet강으로의 진출)
이 생 메르 에글리제(Ste. Mere-Eglise)의 점거성공은 불안하던 505연대의 상황을 업그레이드 시키어 Merderet의 진출을 가능케했다. 101공수사단이 주변을 제압하고 캐런탱으로의 진출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82 공수사단은 보다 서쪽으로 더 나아가서 독일군을 바도 서쪽에 고립시키고 유타해안 상륙부대의 적어도 2-4일후까지 서쪽을 안전케하는 것이 목표였다. 결국 상륙부대는 101공수사단이 더 가깝고 82는 지리상으로 더 멀었다. 이것도 전통인가 마켓가든에서도 두 사단을 비교해보면, 82가 혼자 다 뒤집어썼다.
당시 진격하던 82공수사단 병력들은 실수로 가져간 2파운드짜리 플라스틱 폭약을 도로에 부비트랩으로 걸거나 혹은 대전차무기로 활용하는 특이한 사례들을 보이기도 했다. 하여간 라 피에르를 점거하고 체프 두 퐁의 교량을 장악하는 것은 당시 505연대 2대대의 급선무 임무였다. 그러나 에그리제에서 고착되는 바람에 체프 두 퐁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505-1대대 A중대가 대신 라 피에르를 바로 고착시켰다. 근접한 것이다. (라 피에르와 체프 두 퐁은 서쪽으로 도강하는 중요한 포인트였다. 폭이 가장 좁은 두드러진 마을이었다.)
이는 1대대 모두가 점프후에 병력의 규합이 빨라서 목표로 금방 향했던 까닭이다. 강의 서쪽 제방을 장악하는 임무를 띈 507과 508연대도 이러한 규합이 빨리 이루어졌다면 속도가 빨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개 연대는 적은 인원으로 인해서 다른 부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규합에 문제가 컸던 것이다. 특히나 그림에 보면 착륙장 표시 검은 점인 507연대는 도강해야하는 북쪽 늪지에 상당수 떨어진 것을 볼수 있다. 대신 508연대가 그나마 체프 두 퐁 건너편으로 많이 떨어져서 작전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림에서 알수 있지만, 그 중요한 체프 두 퐁 근처에는 507연대 소속에 단 한 대의 비행기만이 그곳에서 점프가 되었다)
원래는 506연대가 강의 동쪽에서 에글리제를 점령하고, 507-8연대가 서쪽에서 교두보를 만들고 강을 건너 연대가 만나는 것이 시나리오였다.
<비운의 507-508연대>
507과 508연대가 노르망디에 계획된 점프시각은 새벽 2시30분에서 3시였다. 이때 먼저 날아온 패스파인더 병력이 암프레빌(Amfreville)의 북쪽과 피코빌(Picauville)에 레이더와 지상패널 마킹을 해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505연대에 비하여 그러지 못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 지역에 독일군이 정확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수송기 조종사는 지상의 횃불이나 Eureka 비콘의 전파를 잡아야 했다. 그러나 이 두 개 모두 찾지 못했고 수송기는 드롭존은 지나쳤다. 많은 공수부대원들이 Merderet을 따라서 있는 풀이 우거진 늪지에 떨어졌다. 그러나 항공정찰사진으로는 그 지역이 완전한 늪지로 보이지는 않았었다.
507-508연대의 점프 착륙지점과 Merderet강 공방전
특히나 la Barquette에 있는 수문지역은 그러했다. 풀들이 물에서 길게 자라나 정찰사진은 그곳이 초목지대로 보인 것이다. 점프를 한 무거운 군장의 공수부대원들은 자신들이 3-4피트 깊이의 물에 떨어진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병사들에게는 익사의 아비규환이었고 병력의 규합은 물론 힘들었으며 장비의 유실도 만만치 않았다. 이 두 개 연대는 완전히 분산되었다. 그나마 508의 일부가 피코빌 근처에 떨어진 것은 다행일 뿐이었다. 508연대의 일부 병력은 Merderet 동쪽에 떨어져서 결국 한동안 101공수사단과 같이 싸웠다. 507연대는 일반적으로 정해진 곳의 (늪지 혹은 강의)서쪽이 아닌 동쪽에 떨어졌다. 결국 이 두 개 연대는 반도 전체에 어디에나 떨어진 셈이 되었다. 일부 병력은 사단과 분리된 채 독일군의 공격으로 2-3일을 고착상태로 있어야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에 띄는 사건은 라 피에르(la Fiere)의 교량지역에 내린 325글라이더연대였다. 이 글라이더연대는 사단의 4개 연대 중에서 마지막으로 투입되는 제대로 교두보 확보후에 투입되는 증원제대였다. 이 노르망디에서 이 글라이더연대가 다 글라이더로 오지도 못했고, 일부는 배를 타고 왔지만, 글라이더를 타고 내린 병력들도 전투력의 결집은 상당히 어려울 정도로 와해되었고, 특히나 부상자 전사자가 랜딩중에 많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글라이더연대의 자체 전투력이기 보다는 각 공수연대의 작전에 필요한대로 합력하여 싸워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영화 '롱거스트 데이'에서 글라이더들이 착륙을 하려는데 논과 같이 물들이 반짝이는 늪지가 조종사 창 앞에 나오는 것을 기억하시는가? 그것이 바로 라 피에르 근처의 늪지에 목숨을 걸고 착륙한 글라이더연대였다)
여하간 82공수사단의 507-8연대원들은 자신들이 라 피에르와 체프 두 퐁 건너편에 도강하여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개념일 숙지하고 있었으므로, 늪지가 보이면 동과 서로 판단하여 공격방향을 잡을 101에 비하여 참고점은 큰 편이었다. 다만 안모여져서 문제였지. 하여간 병력들은 점차 규합되어 그룹별로 철도를 기점으로 모이고 있었다. 철도를 위해서 쌓여진 제방은 당시 병력들의 두드러진 독도법의 참고점이었다. 병력들은 그 지역의 유일한 철도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가이드였다. 아마도 첫 번째 규합그룹은 F. V. 슈와츠발터 대위가 이끄는 병력들이었다. 이들은 507연대 병력으로 Merderet 동쪽의 늪지대에 떨어졌다가 철도제방을 통해서 만났다. 그들은 모이는대로 이동하면서 la Fiere의 교량에 해가 뜰 무렵 도착했다. 그리고 교량 옆의 가옥을 소총과 박격포격으로 점거했다. 이 병력도 혼성이었고 이날 동안 3개의 연대병력은 여기저기서 뒤엉킨 혼란스러운 하루였다. 당시 505연대 1대대 A중대는 이날 생 메르 에글리제(Ste. Mere-Eglise) 근처의 떨어진 곳에서 규합되어 슈왈츠왈터 대위의 병력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위 지도에 병력그룹의 지휘관 명으로 위치와 이동로를 표시하고 있다)
Roy Lindquist 대령(508연대장)이 이끄는 508연대와 일부 507연대원들은 다른 장면을 또 연출하고 있었다. 이들은 암프레빌의 남동쪽 늪지대에 점프를 한 후 바로 철도제방으로 진출했다. 약 100명 정도의 대원이 규합되었다. 제방에 도착하자 이들은 연대보급장교인 존 와이즈너 중위가 이끄는 30명의 507연대 병력이 합류하였다. 와이즈너 중위는 연대 집결지인 암프레빌로 가기를 원했다. 당시 508연대장 린드퀴스트의 목표는 Pont l'Abbe였다. 그러나 중위는 린드퀘스트 중령의 의견에 동의하여 철도제방을 따라가다가 다리가 파괴되었거나 점령되었을 경우 la Fiere 근처에서 물을 건너기로 했다.
이때 철도와 생 메레 에글리제로 가는 도로와의 교차점에 이들이 도착하자, 이들은 멀리서 교량으로 향하고 있는 505연대 A중대 병력을 목격한다. 늪지 반대편에서 서로 라 피에르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린드퀘스트는 라 피에르 교량을 점거하기 위해 건너편에서 돌아들어왔고, 505 A중대는 그냥 서쪽으로 오던 중이었다.(그림) 린드퀘스트 중령은 서로 인식은 못하지만 이들과 같이 교량쪽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이동한다. 당시 와이즈너 중위가 이끌던 병력이 선두에 서서 가고 있었는데 교량 300야드 직전에서 독일군의 기관총사격이 시작되었다. 505연대 A중대도 마찬가지로 기관총으로 안해 진출이 정지되었다. 와이즈너 중위는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독일군 기관총진지를 파괴하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한다.
당시 와이즈너 중위는 북쪽을 잠시 정찰하였는데 다른 또하나의 병력그룹이 la Fiere로 향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들또한 507연대병력과 다른 제대가 혼성으로 규합된 300명 정도의 병력이었다. 이들은 사단장 가빈 준장에게 규합되어 지휘를 받고 있는 병력들이었다. 이들은 아서 말로니 중령과 에드윈 오스트버그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가빈 준장은 일단 이들 병력으로 둑길을 향하여 진격하려고 했으나 지프와 대전차무기가 글라이더로 합류하지 못하는 바람에 최초의 의도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이 착륙한 글라이더 파트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 병력들은 서쪽 제방에 독일군의 진지가 보여서 처음의 시도를 버리고 그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병력이 la Fiere에 도착하자 미군은 협력하여 최초로 교량에 대한 진출을 모색한다(원래 1개 연대급이 해야할 일이었다). 그러나 교량의 독일군은 아주 강했다. 그리고 507과 508이 가빈 준장이 볼 때는 분실상태였다. 부사단장 가빈이 모은 것은 600명 정도였다. 가빈 준장은 먼저 말로니 중령에게 75명을 주어 교량말고 건널수 있는 곳을 찾아보라고 명령했고, 조금 후에 오스트버그 중령에게 다시 75명을 주어 Merderet의 체프 두 퐁(Chef-du-Pont) 교량을 건널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다행히 이 교량은 독일군이 없다고 보고됐다.
린드퀘스트는 지휘부 병력의 경우 la Fiere에 잔류시켰다. 당시 당시 규합된 전투제대는 총 400명 정도로, Company B/508, G/507th, A/505th, 등 혼합이었 스왈츠왈터 대위가 지휘하는 병력은 이 주병력의 좌측(도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독일군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병력의 규합을 참고 기다리던 린드퀴스트 중령은 이날 정오에 병력에 대한 총공격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으로 508의 A중대가 도로 북쪽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린트퀴스트는 다시 병력을 총동원하여 A중대 지역을 아침까지 마지막 독일군을 사살하면서 점령했다.
슈왈츠발터 대위의 병력은 수로둑길을 서쪽으로 건너서 티머스 중령이 지휘하는 507연대 2대대의 정찰대를 만났다. 티머스 중령은 암프레빌 동쪽 1천야드 지점에서 50명의 병력을 규합하고 있었고 그곳이 원래 대대의 드롭존이었다. 최초의 규합이 끝나자 티머스 중령은 D중대 출신의 루이스 레비 중위에게 la Fiere를 정찰하라고(이것은 각기 다른 제대의 라 피에르에 대한 4번째 정찰이었다) 명령하고 둑길의 점령가능성을 알고자 했다. 이때 이들은 507연대 일부를 도중에 만나 합류했다.
레비 중위가 가까이 가서 정찰해 본 결과 독일군은 남에서 동으로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찰 결과 당시 80명의 병력으로는 공격해서 교두보를 확보하기가 힘들다고 판단되었다. 그러자 레비 중위는 부지런히 낙오자들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런 과정에서 505연대 1대대가 교량을 점거하기 위해서 서쪽으로 진출중이라는 첩보를 듣게 된다. (이 첩보가 즐거운 것은 그나마 제대로 된 제대구성의 대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505-1대대는 교량을 점령하기는 하나 결국 한시간 후에 다시 후퇴하고 만다. 교량을 점령당하자 독일군은 포병의 포격을 시작으로 소화기와 기관총을 앞세워서 다시 반격했으나 서쪽으로부터 독일군의 탱크까지 등장하였다.
슈왈츠왈터 중위도 강력한 전투가 임박했음을 느끼고 그의 고정임무였던 Amfreo로 진출하여 2대대와 연결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진출 도중 독일군의 포격을 받아 후퇴를 하게되며 이 과정에서 508연대 몇 명을 다시 수습했다. 결국 이들 병력들은 동쪽에서의 공격지원없이 독일군에게 돌격한다. 그리고 507-2대대 티머스 명령권의 레비를 포함한 4명의 장교들이 이 공격에 가담했다. 총 82명으로 그냥 공격한 것이다. 이들이 휴대한 기관총은 한 대였고 수류탄과 소총으로 돌격했다. 여기서는 백병전도 일어났고 또한 82공수부대원들은 Gammon grenades를 이용해서 두 대의 독일군 탱크를 격파한다. 그러나 오래 점거를 할 수는 없었고 북쪽으로 후퇴하여 507 2대대와의 연결을 시도한다.
이 동안 508연대 B중대가 조금 늦게 둑길을 넘어 진출했다. 서쪽 제방에 도착하자 바로 독일군의 공격이 포문을 열었다. 독일군의 공격은 강력했고, 이 사격하에 508-B중대 병력들은 결집하여 전투를 할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후퇴를 시작했고 생존자들은 독일군의 사격을 받으면서 강을 수영으로 건너서 돌아오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공격에 필요한 수의 병력이 모자랐다는 것이고, 또한 지역적으로 관목줄기가 너무 무성해서 공격하는 제대들이 서로간에 신호연락이 불가능해서 흩어지기 일수였다는 것이다. 또한 독일군의 반격으로 507-2대대장 티머스 중령과 슈왈츠왈터 대위의 병력이 la Fiere안에서 격리되는 상황까지 발생하게 된다.
티머스 중령은 암프레빌의 과수원에서 방어진을 바로 구성한다. 그리고 이후 다시 이들은 교두보로의 반격을 야간에 준비했으나 결국 실시하지 못한다. 티머스 병력은 당시 120명 정도였는데 너무도 지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리고 먹을 것 쏠 것이 모두 부족했다. 결국 이날 티머스는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한다. 라 피에르에서 후퇴한 508연대 B중대는 동쪽의 제방에서 병력 재편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505연대 1대대는 독일군의 포격과 박격포에 노출된 상태로 의지와 의지를 가지고 작전하여 서쪽 제방을 점거했다. 이 505연대 1대대는 비범한 전투를 벌였다. 두 대의 독일군 탱크가 이들을 분쇄하려고 시도했으나 도로봉쇄를 맡고 있던 A중대의 바주카포 반이 두 대 모두 파괴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격의도는 계속 보였다.
가빈 준장은 체프 두 퐁에서 라 피에르로 오후 늦게 도착했다. 가빈이 도착해보니 가장 절실한 것은 의무장비와 탄약이었다. 가빈 82공수사단 부사단장은 말로니 대령에게 체프 두 퐁(Chef-du-Pont)에서 라 피에르로 가진 병력을 모두 데리고 즉각 올 것을 명령했다. 말로니 대령이 도착하기전에 독일군은 적지 않은 병력으로 505연대 1대대가 있는 동쪽 제방을 다시 공격했다. 저녁 8시가 되자 말로니 대령이 이끄는 200명의 병력이 라 피에르로 도착했고 어두워지자 병력은 방어태세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직도 생 메르 에글리제 서쪽의 82공수사단 사단본부로 추가 제대의 연락은 없었다. 곧 상륙군이 도달할 것인데도 말이다. 리지웨이 장군도 사단의 총 병력을 생 메르 에글리제에 집결하여 그곳을 방어하고 병력을 재편성할 계획이었다. 린드퀴스트의 250명도 에글리제로 이동을 명령받았으나 다음날까지 도착하지는 못했다.
결국 이날 Merderet River는 건너지 못했으나 의외로 아래쪽인 체프 두 퐁에서는 일부 병력이 안전하게 도강을 했다. 체프 두 퐁으로 눈을 돌려 보면, 체프 두 퐁에 대한 최초의 공격은 75명을 데리고 있던 오스트버그 대령이었다. 이들은 가빈 준장의 명령권에서 공격명령을 받고 체프 두 퐁으로 이동해 온 병력이다. 이 75명의 공격으로 독일군은 일시 후퇴하여 둑길 서쪽에 참호를 파고 미군을 기다렸다. 독일군의 수는 적었으나 항전은 견고한 부대였다. 결국 오스트버그 대령의 대원들이 거꾸로 막다른 골목에 몰렸으나 말로니 대령의 75명에 증원군으로 위기를 피할수 있었다.
디 데이 오후 5시에 일부 라 피에르가 미군 수중에 점거되었으나 라피에를 점거한 부대는 소대규모였고 인원은 45명, 그리고 로이 크릭 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때 75-100명의 독일군이 크릭 대위가 있던 장소에서 목격되었고 독일군이 있던 장소는 동쪽 제방의 일부 건물 주위였다. 크릭 대위는 증원을 요청하였다. 이 증원군이 도착하기전에 뜻밖의 선물을 부대는 하늘로부터 받았다. 글라이더 한 대가 57밀리 대전차포와 탄약을 싣고 근처에 착륙한 것이다. 57밀리 대전차포로 미군은 바로 독일군의 포진지에 대하여 포격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독일군의 포격이 잠잠해졌다. 100여명의 독일군이 라 피에르에서 나오는 것이 목격되었고 독일군은 일단 후퇴했다. 미군의 추후 병력이 방어선에 가담하자 독일군의 부담은 점점 높아져갔다. 이들이 동쪽 제방을 점거하자 바로 다리를 건넜고 큰 저항없이 이 소대규모의 부대는 그 양편에 참호를 팠다. 교량을 장악한 것이다.
이 1) 생 메르 에글리제 장악 2) 라 피에르에서의 Merderet 강 도하 3) 체프 두 퐁에서의 도하는 D-데이 당일 82공수사단의 중요 전공이 되었다. 그러나 심한 경우 이 성과 이후 4-5일이 지나도록 강 서쪽에 규합하지 못한 병력의 그룹들은 고립되어 독립적으로 전투를 치루어야 했다. 그리고 이들 분리되고 고립된 부대들도 개별적인 전투를 통해서 82공수사단의 임무를 일부 성취하기도 했다.
조지 V. 밀러 주니어 대령은 507연대장이었다. 그는 점프 당일 75명을 규합하여 암프레빌 북서쪽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티머스 중령이 지휘하는 자신의 2대대가 있었고, 그 근처를 1천야드나 근접하여 통과했지만 서로 만나지 못했다. 507연대장 밀러 대령은 어처구니 없게도 D plus 4일까지 다른 제대를 만나지 못했다. 좀 더 남쪽의 508연대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하나의 병력그룹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제랄드 길로트 중위가 지휘하다가 이후 조나단 아담스 대위가 지휘한 그룹이었다. 이들은 소규모의 독일군과 계속교전을 벌이다가 D plus 5일이 되어 연대본진과 만나게 된다.
보다 많은 숫자의 병력규합이 508연대에서는 있었다. 장소는 Merderet 서쪽이었고 구심점은 508연대 2대대장 토마스 J. B. Shanley였다. 션리 중령은 피코빌(Picauville) 근처에 떨어졌다. 그는 병력을 모으기는 했으나 작전을 하기에는 부족한 병력이었다. 그러나 그는 Pont l'Abbe에 있는 다우강에서 임무를 수행하고자 원했다. 점심때가 되자 션리 중령은 무전기로 다른 병력그룹인 노만 맥바이카 중위와 교신이 이루어졌다. 그는 1마일 거리에서 60명을 데리고 있었다. 중령은 그들과 조우하기 위해서 이동을 시작했고 그 중간에 쉘즈 워렌 주니어 소령이 지휘하는 그룹의 대원을 우연히 만났다.
이들 세 그룹은 남쪽 독일군의 공격으로 인해 바로 만나지 못하다가 오후가 되어 규합한 후에 제대를 재편성하고 방어를 구성했다. 이때 근처의 독일군도 이들의 규모가 대대규모라고 판단하여 쉽게 공격하지 못했다. 당시 독일군은 Pont l'Abbe에서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자 션리 중령은 다우강쪽으로 진격해서 연대 본진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목표로 한 장소는 체프 두 퐁의 둑길을 감제할수 있는 Hill 30이란 고지였다. 밤 11시가 되자 병력은 션리 중령의 지휘아래 두 개중대로 편성하고 사주경계를 하면서 출발했다. 이들은 단독으로 작전을 하다가 한참후에야 사단 명령권으로 들어갔다.
(당시 82공수사단의 325 글라이더 연대는 공수자격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노르망디에서는 그 첫날이 중요했으므로 가용 글라이더로 날아갔다. 이 325연대는 1917년에 만들어진 오래된 연대였다. 이들은 시실리 살레르모와 마리오리에 글라이더 착륙의 경험이 있었으며, 다비의 레인저에 배속되어 싸우기도 했고, 이들과 함께 세인트 안젤로 디 카바의 고지대 독일군 포병진지를 공격한 유명한 전과가 있었다. 이 노르망디에서는 찰스 디글로퍼 일병이 라 피에르 근처의 소대 진지에 혼자서 남아 방어하는 놀라운 수훈으로 최고훈장을(6.9일) 타기도 했다. 마켓가든에서는 포위된 82공수사단의 중간에 강습하여 부대 수훈장을 받았고 벌지 전투에 참가후에, 전쟁이 끝난 1946년에 본토로 돌아왔다가 1947년 부대임무해제되었다가, 1948년에 다시 82공수사단과 함께 재배치되었고 1965년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내전에, 1983년에는 그라나다 살리나스 공항에 강습하기도 했다. 1989년에는 4대대가 파나마의 오마 토리오스 공항 점거에 참가했다. 1990년에는 걸프전에 참가했고, 현재 325연대는 포트 브레그의 82공수사단 근거지에 3개 대대를 보유한채 남아 있다. 이들은 82공수사단의 전투제2여단의 소속으로 되어 있다)
부사단장 가빈 준장은 1944년 8월 28일, 리지웨이로부터 82공수사단직을 인수받는다.
The Airborne Divisions at the End of D Day
D Day에 82와 101공수사단 모두는 작전계획과 전혀 다른 장소와 제대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이날의 희생자는 아주 컸고 공수작전 자체에서 전사한 사람도 많았다. 작전계획이 아닌 15-20곳의 장소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산재되어 점프한 것은 두 사단 모두 똑같았다. 노르망디의 지형은 병력 분산에 공신이었다.
지역의 관목들은 상공식별에 오점을 선사했고 기동에 문제가 많았다. 어떤 그룹들은 불과 수백 야드 근처에서 서로를 모르고 지나쳤다. 병력들은 다른 제대 사람과 처음보는 장교의 지휘로 싸웠다. 자신의 목표가 아닌 곳에서 싸운 병력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공수공습작전으로는 낮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소기의 목적은 충분한 희생속에 달성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에게 가장 큰 적은 미군 공수사단에 대한 혼동과 제대 파악의 분란이었다.
D Day에 101공수사단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목표한 대부분의 중요한 목표를 획득했다. 101 부사단장은 이러한 총제적인 작전 에러를 그 다음날 정오쯤에 완전히 인식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상륙군의 교두보 확보와 그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Foucarville 북쪽의 섹터는 502연대가 장악하여 상륙군단의 남쪽을 엄호한 결과를 나았다. 그리고 상륙군단이 커랜탱으로 향하는 남쪽의 엄호에서 독일군의 저항은 예상보다 강하지 않았다. le Port의 교량은 점거 되었고 일부 지역은 독일군이 포기했다. la Barquette의 수문도 장악하였다. 작전에서 가장 힘든 고비는 탄약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가장 독일군의 저항이 강했더 곳은 501연대가 작전했던 생 콤 두 퐁(St. Come-du-Mont)이었다. 501연대가 고전한 이유는 그것이 광범위한 늪지인 까닭도 있다. 첫 지도로 보면 알지면 이 작전지역 전체가 저지대였다. Addeville만은 예외로 규합이 잘 되어 두브강의 둑길에 금장 도달했다. 그러나 이곳의 독일군은 강했고 결국 독일군은 남서쪽으로 후퇴한다. 노르망디에서 공수사단에게 가장 위협을 한 것은 독일군 포병과 박격포탄이었다. 공수사단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통신의 두절이었다. 디데이 당일의 모든 대대가 이 통신두절로 애를 먹었다. 당시 공수사단은 정규독일군 사단이 공격했을 경우 전멸시키기 딱 좋은 형태였다.
101사단에 비하면 82공수사단이 좀 더 심각했다. 큰 목표인 Merderet에 제대로 떨어진 병력이 없었다. 서쪽으로 떨어진 대부분의 82공수사단 병력이 Merderet 서쪽에 고립되었다. 사단의 목표에 가기가 힘들었다. la Fiere에 대한 장악은 임시방편으로 이루어졌으나 희생이 너무 컸다. 이후 3일간의 예정된 82공수사단의 작전은 지장이 컸다.
거기다가 디데이의 다음날 만나기로 한 상륙군과 82공수사단 자체를 증강하기로 되어 있었던 글라이더들이 제대로 오지도 않았고 추락한 것과 찾을수 없는 글라이더들이 많아 보급은 거의 없는 것과 같았다.
사단장 리지웨이 장군은 Merderet에서 사단을 지휘하고 있었지만 사단의 제대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작전대로 제대를 규합하여 생 메르 에글리제에서 방어와 병력구성을 할수 없었다. 그리고 디데이 전의 공수사단 지휘관들은 낙천적인 경향이 있었다. 워낙 대규모이고 상륙군의 규모라 상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디데이에 점프한 101공수사단의 점프병력 6천 6백명 중에서 그날 정확히 욺직이면서 작전한 병력은 2천5백명에 불과했다. 모든 공수부대에 대한 증원군은 없었다.
그리고 모든 제대가 증강과 보급을 원했다. 죽은 전우의 몸에서 탄약을 꺼내야 했다. 그들이 만난 증원군은 글라이더연대가 아니라 상륙한 보병사단이었다. 그러나 유타 해안의 상륙군은 오히려 독일군의 저항이 적었다. 결과적으로 유타에 상륙한 미제4보병사단은 두 개의 공수사단을 구한 셈이었다. 만약 독일군이 1-2일 안에 제대로된 상황판단속에 공수사단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로 나섰을 경우 공수사단은 지극히 위험했다. 일단 실탄이 없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콩탱팅 반도에 힘을 쓸 여력이 없었다. 유타해안은 연합군 침공의 (방어자 측) 왼쪽 끝의 지역이었고 전체적인 노르망디 침공은 연합군에게 일종의 shock였다.
*ps-번역이 이상해도 잘 봐주세요.. 제가 영어거 딸리네요...
항상 그래왔지만, 82공수사단은 항상 서자 취급 비슷한 것을 당했다. 마켓가든에서도 훨씬 더 북쪽에서 많은 피해를 받았고, 나이메헨 도하작전을 상징적으로 대비하면 101의 임무에 비하여 고통스러운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서자 취급은 위의 그림에서도 보인다. 101공수사단이 유타의 상륙부대와 바로 만날수 있는 위치에 비하여, 82공수사단은 그 왼쪽(서쪽의) 방어선을 형성하는 형태의 임무를 맡았다. 특히나 반도 끝에 있는 독일군을 고립시키고 격리시키는 것이 2차적인 임무였으니 피해는 101에 비하여 더 높은 편이었다. 다시 말해서 반도를 자르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그러므로 101에 비하여 초기 단독작전의 기간도 82공수사단이 더 길었다.
(나이메헨 도하작전이란, 영화 '머나먼 다리'에서 로버트 레드포드가 존나 노를 저으면서 "oh, merry! oh, merry!" 중얼거리면서 도강하던 장면이다. oh, merry!(철자 맞나?)란 오 마리아님! 이라는 뜻이 되겠땅)
현대도 이러한 개념은 남아 있다. 82공수사단은 어쩌면 세계유일의 완전공수사단인지도 모른다. 완전공수라는 것은 충분한 지원제대까지를 의미한다. 교리상으로도 82공수사단장은 전시에 2진 정도에 속하여 낙하산으로 같이 투입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러 곳에서 101에 비하여 점프 대기중인 사단장의 사진을 많이 볼수 있는 부대이다. 똥씹은 표정으로 '내가 시파 이 나이에....' 101공수사단은 이후에도 미 육군의 최첨단화된 장비와 전술이 투입된 반면, 82공수사단은 노가다 분위기가 나는 사단으로 존재해 왔었다. 본인이 보는 전투적인 상징은 101보다 82가 훨씬 강하다. 거기다가 101에 비하여 잘 알아주지도 않는다. 마크도 좀 구리구리하고 101은 때깔난다.
그리고 노르망디 공수작전에서도 82공수사단은 훨씬 피해와 고통이 컸다. 첫날의 가장큰 고통은 생 메르 에글리제 공방전과 Merderet강안 양쪽의 공방전이다.
82공수사단
사단장- 리지웨이 소장
부사단장- 제임스 가빈 준장
505연대-윌리엄 에크맨 대령
507연대-조지 V. 밀러 주니어 대령
508연대-로이 린퀴스트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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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공수연대의 노르망디 공수작전-82공수사단 개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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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공수사단 서쪽에는 82공수사단이 Merderet 강의 제방쪽에 있었고 생 메레 에글리제(Ste. Mere-Eglise)에 근접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첫날의 상황은 원래 사단임무에는 다소 거리가 있는 환경에 처했다. 82공수사단의 임무중 가장 큰 것은 Pont l'Abbe와 Beuzeville-la Bastille에 있는 교량은 확보하고, 더 나아가서는 Merderet 강으로 향하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 후에 82공수사단은 상륙군단의 남서쪽 측면의 두브(Douve)강 라인을 방어하게 되어 있었다. 101이 연결하여 같이 진출하는 반면, 82공수사단은 캐런탱이 점령되는 시점까지도 좆도 혼자서 계속 막아야 했다.
작전의 할당은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 발음가지고 딴지 걸어도 무방. 복잡한 지명은 대충 넘어가라. 아래 지도가 있음)
505공수연대는 Merderet 강 동쪽에 점프하여 생 메레 에글리제를 점거하고 la Fiere(라 피에르)와 Chef-du-Pont(체 두 퐁) 사이의 도하장소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진출하여 Bandienville이나 Beuzeville-au-Plain근처에서 101사단과 만나는 것이었다.
507과 508연대는 강의 서쪽에 점프하여 연합한 후 교두보를 서쪽 제방에 두 개 확보하는 것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507연대는 505연대와 조력하여 라 피에르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Gurbesville과 Renouf 사이에 방어선을 만드는 것이었다. 508연대는 Beuzeville-la Bastille와 Pont l'Abbe사이의 강변을 확보하고 507연대의 방어선을 연장선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505에 비하여 507-508은 더 개털, 보다 서쪽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두브(Douve)강 서쪽으로 상륙군을 엄호할 일시적인 방어선을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점프후에 82공수사단의 부사단장인 제임스 가빈의 지휘권에 하나로 합류하도록 되어 있었다. 82공수사단장인 리지웨이 장군은 상륙시간과 동일한 해가 뜰 무렵 글라이더로 날아올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모든 공수포병과 추가 보병이 글라이더를 이용해서 36시간 안에 모두 날아올 예정이었다. 이들의 임무중에는 가장 중요한 목표인 Douve bridge를 점거하거나 파괴할 508공수연대에 대한 지원이 있었다. 이들과 가장 빠르게 만날 상륙부대는 리스 하웰 장군이 지휘하는 포병과 대-전차부대로 이루어진 상륙군의 기보특수제대였다.
(가빈 준장-마켓가든에서는 사단장이 된다. 정확하게 82공수사단장 리지웨이로부터 지휘권을 받은 것은 1944년 8월이다. 그의 별명은 JUMPING GENERAL이었다. 대부분으 고급지휘관과 달리 그는 노르망디에서도 직접 병사들과 낙하산으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82공수사단의 점프는 성공과 아주 멀었다. 이들의 점프존은 Merderet강의 서쪽이었는데 전체 공수작전에서 가장 안좋았다. 507연대의 Drop Zone T는 암프레빌(Amfreville)의 북쪽이었는데 대부분 흩어져서 광범위하게 점프했다. 암프레빌의 남서쪽-피코빌(Picauville)의 북쪽에 점프한 508연대는 그나마 507보다는 조금 나았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수송기가 병력을 Merderet의
'서쪽이 아닌 동쪽에'
떨어트림으로써, 이 병력들은 결국 가까운 곳에서 규합하던 101공수사단병력들과 같이 싸우게 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생 메르 에글리제의 북서쪽 철도와 주도로 사이에 내린 505연대는 노르망디 공수작전 중에서 가장 안정적이었고 연대 2천 2백명 중에서 1천명이 거의 같은 드롭존에 점프했다. 나머지도 북쪽과 동쪽에 흩어졌으나 빠르게 규합했다. 점프후에 정식으로 제대를 갖춘 것은 82공수사단 505연대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거기다가 그 지역에는 독일군의 수가 적었다.
생 메르 에글리제를 점거하고 방어선을 만드는 것은 82공수사단 점프 후의 가장 중요한 목표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이후 나머지는 Merderet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강을 건너서 확보를 못하면 독일군의 우회로가 생긱고 캐런탱의 서쪽이 독일군에게 노출된다. 그러나 당일 전술적으로 더 중요했던 것은 오히려 생 메레 에글리제의 점거였다. 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의 마을이었다. 그리고 독일군의 거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에 대한 점거와 공방은 82공수사단의 노르망디 공수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작전이 된다. 규합에 성공한 505연대 3대대의 첫 목표는 이 마을의 남쪽에서 동쪽으로 도로를 점거하는 것이었다. 2대대는 좀 더 북쪽인 Neuville-au-Plain과 Bandienville 사이를 점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101공수사단 502연대와 연결토록 되어 있었다. 1대대는 라 피에르와 체프 두 퐁 사이를 점거하여 이후 날아올 글라이더를 유도하고 연대 지휘부를 맞이하는 것이 임무였다.
비행기가 콘탱팅 반도에 도착하자, 먼저 505연대가 안개와 독일군의 대공사격권으로 들어갔다. 비행기는 조금 흩어졌지만 다행히도 30분전에 먼저 점프한 패스파인더 병력의 유도는 아주 정확했다(당시 1급비밀인 레이더 비콘을 사용했다). 일부 비행기는 대공포화로 흩어지다가 수송기끼리의 충돌위험이 보이자 바로 그린라이트를 넣어서 병력을 점프시켰다. 그럼에도 505연대의 점프는 성공적이었다. 505연대 1대대장 프레드릭 켈렘 중령은 대부분의 대대원을 규합하고 la Fiere의 교량으로 향했다. 3대대장 에드워드 크라우스 중령은 대대원의 1/4을 규합한 후 2개 중대로 재편성하여 생 메레 에글리제로 향했다.
프랑스 농부의 증언으로 독일군이 당시 마을의 외곽 도로를 따라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크라우스 중령은 알았다. 중령은 날이 새기 전에 외곽도로를 점령하고 마을을 포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병력들에게 마을로 들어가더라도 날이 새기전에 가택수색을 하지 말고 일체의 발포를 자제하여 독일군을 만나면 대검을 쓰도록하고 급하면 수류탄을 쓰라고 명령했다. 미군의 소화기 소리가 독일군에게 식별을 줄수 있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소화기 사격음은 산발적인 것 외에 없었다.
새벽 4시 30분이 되자 크라우스 중령의 3대대는 마을을 거의 점령하고 성조기를 게양했다. 게양한 깃발은 82공수사단이 나폴리를 해방시킬 때 게양했던 동일한 깃발이었다. 날이 밝자 크라우스 중령은 마을 주변의 통신선(Cherbourg communication)을 절단하고 도로를 봉쇄했다. 이때 세곳에서 독일군의 수류탄을 이용한 공격이 있었다. 그러나 오전 9시30분, 마을은 완전점령되었다. 당시 3대대는 독일군 10명을 사살하고 30명의 포로를 잡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후에 노르망디 당일 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가 지속된다) 당시 505-3대대장 Krause중령은 휘하에 360명을 데리고 있었고 거의 전상이 없었다.
생 메르(메레) 에그리제 공방전 작전도
그 사이 505-2대대장 벤자민 밴더루트 중령은 충분한 자신의 대대원을 모아서 작전대로 Neuville-au-Plain과 Bandienville 사이의 북쪽으로 진출했다. 거의 저항 없이 진출하던 중 밴더루트 중령은 오전 6시 14분, 연대장 윌리엄 에크맨 대령의 정지명령을 받았다. 당시 크라우스 중령의 3대대가 생 메르 에글리제(Ste. Mere-Eglise)를 일부 점령했다는 전령을 보냈으나 도착하지 않아 인접 2대대장인 그는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오전 8시 10분, 3대대의 상황을 여전히 모르던 2대대장 밴더루트 중령은 방향을 거꾸로 돌려 전략상 중요한 생 메르 에글리제를 점거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이후 3대대의 점거소식을 듣고 2대대는 다시 목표로 향했는데, 그때 3대대가 있는 마을에 독일군이 남쪽에서 반격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독일군은 자주포와 탱크를 앞세운 보병2개 중대 규모였다. 반격은 남쪽 도로거점에 기관총과 박격포로 포문을 열였다. 3대대는 이 강력한 공격으로 분산했다. 마침 밴더루트의 2대대가 지원을 하기위해 도착하자 크라우스 중령은 산재된 G와 H중대를 규합하여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독일군의 증원이 예상되는 주도로의 방향이었다. 지원나온 2대대는 마을의 북쪽과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 두 대대장은 토의 끝에 마을을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서로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 두 대대장은 이미 부상중이었다. 크라우스 중령은 다리에 포탄 파편을 맞았고 밴더루트 중령은 다리가 부러져서 수레에 탄 채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 생 메레 에글리제에서의 전투가 진행되자 밴더루트 중령은 D중대 3소대장 터너 턴불 중위에게 Neuville-au-Plain의 적이 미약하니 그곳으로 진출하라고 명령했다. 남북으로 독일군이 연결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지도 참조). 이 임시변통의 지혜로운 진출로 독일군은 두 곳으로 병력을 분산하는 약점을 보였다. 그러므로 마을에 대한 독일군의 효과적인 압력은 줄어들었다. 터너 텀불 중위는 완편의 42명 소대원과 공용화기 그리고 57밀리 대전차 바주카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소대를 Neuville-au-Plain의 보다 높은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오전 10시 30분에 독일군이 3소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맹공이었고 혈투였다.
독일군의 화력은 텀블 중위 소대보다 강했지만, 텀블 중위는 여기서 독일군을 고착시키라는 명령을 받은대로 8시간 동안 전투를 질질 끌게 된다. 독일군은 텀블 중위의 병력이 소대의 규모임을 모르고 포격을 점차 강화했다. 포탄과 박격포가 난무했다. 결국 텀블 중위는 밴더루트 중령으로부터 8시간만에 퇴각명령을 받았고 퇴각을 엄호하라고 대대장은 E중대를 급파했다.
격전을 치룬 이 텀불 중위의 소대가 퇴각했을때는 42명의 병력이 16명으로 줄어 있었다. 이 3소대의 강인한 항전으로 독일군도 전력을 누수시켰고 에글리제 마을에 있는 2개 대대를 격파하기 힘들다고 생각해서 남쪽으로 후퇴했다. 사실상 이들 공수부대원들에게 가장 심각한 적은 탱크와 기갑이었다. 당시 방어의 전면에는 G와 H중대가 주력했고 나머지 중대는 예비대로 마을안에 있었다. 그러나 G-H중대의 총 합은 1개 소대 규모가 약간 넘었다. 그들은 마을의 남족끝을 끈질기게 방어했다. 독일군은 생 메레 에글리제의 천오백야드 남쪽 높은 곳에 포상을 설치하고 보병의 증강을 기다렸다.
독일군의 첫 번째 마을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크라우스 중령은 I중대와 8명에게 과감하게 명령해서 독일군 포상의 서쪽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일종의 반격이었다(그림에 화살표로 I중대의 우회로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예상외로 이 소규모 반격의 효과는 엄청났다. I중대는 지그재그로 기동해서 관목지대로 들어갔고 이어서 도로로 진입하자 바로 독일군이 급조한 진지를 만났다. 이것은 I중대가 진출방향을 착각해서 생각지않게 바로 독일군 진지를 만난 것이었고, 물론 이 순간적인 조우는 일종의 작전상 착오였다. 그러나 어쩔수 없었다. 독일군은 이미 눈앞에 있었다.
I중대원들이 먼저 도로상에서 독일군의 차량들을 Gammon grenades로 세대 파괴하자 독일군은 보다 남쪽으로 후퇴했고 마을의 미군의 병력을 보다 크 규모로 오판했다. I중대는 후퇴하는 독일군을 다시 측면에서 서너번 공격하고 다시 마을의 방어선으로 돌아왔다. 마을에서는 몇 명의 독일군 저격수가 사살되고 일부 지휘관을 잃은 병력이 미군의 공격을 받아 도주했다. 밤이 되자 미군의 점거는 공고화되었고 전령이 편하게 명령을 전하고 보급품을 나누어줄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57밀리 바주카포탄과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다행히도 그때 병력들이 일부 추락한 글라이더를 찾아내어 일부 통신장비와 함께 탄약을 보충했다. 글라이더의 조종수와 승무원은 모두 전사해 있었다. 다음날의 독일군 공격은 전날에 비해 약화되었고 격퇴되었다. 다시 해가지자 독일군은 보이지 않았다.
(이 당시 공수사단의 부대들은, 마을이 있다면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개활지에서는 상대의 기갑과 포격에 더 취약했다. 의미가 거꾸로 들릴수도 있지만, 적어도 기갑에 대한 방어는 마을이나 시가지가 더 편했다. 마을은 일종의 방어벽이었다. 개활지에서 1킬로 정도에서 독일군의 기갑과 맞선다면 그냥 대전차포 쏴보지도 못하고 전멸할수도 있었다.)
Along the Merderet(서쪽으로의 Merderet강으로의 진출)
이 생 메르 에글리제(Ste. Mere-Eglise)의 점거성공은 불안하던 505연대의 상황을 업그레이드 시키어 Merderet의 진출을 가능케했다. 101공수사단이 주변을 제압하고 캐런탱으로의 진출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82 공수사단은 보다 서쪽으로 더 나아가서 독일군을 바도 서쪽에 고립시키고 유타해안 상륙부대의 적어도 2-4일후까지 서쪽을 안전케하는 것이 목표였다. 결국 상륙부대는 101공수사단이 더 가깝고 82는 지리상으로 더 멀었다. 이것도 전통인가 마켓가든에서도 두 사단을 비교해보면, 82가 혼자 다 뒤집어썼다.
당시 진격하던 82공수사단 병력들은 실수로 가져간 2파운드짜리 플라스틱 폭약을 도로에 부비트랩으로 걸거나 혹은 대전차무기로 활용하는 특이한 사례들을 보이기도 했다. 하여간 라 피에르를 점거하고 체프 두 퐁의 교량을 장악하는 것은 당시 505연대 2대대의 급선무 임무였다. 그러나 에그리제에서 고착되는 바람에 체프 두 퐁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505-1대대 A중대가 대신 라 피에르를 바로 고착시켰다. 근접한 것이다. (라 피에르와 체프 두 퐁은 서쪽으로 도강하는 중요한 포인트였다. 폭이 가장 좁은 두드러진 마을이었다.)
이는 1대대 모두가 점프후에 병력의 규합이 빨라서 목표로 금방 향했던 까닭이다. 강의 서쪽 제방을 장악하는 임무를 띈 507과 508연대도 이러한 규합이 빨리 이루어졌다면 속도가 빨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개 연대는 적은 인원으로 인해서 다른 부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규합에 문제가 컸던 것이다. 특히나 그림에 보면 착륙장 표시 검은 점인 507연대는 도강해야하는 북쪽 늪지에 상당수 떨어진 것을 볼수 있다. 대신 508연대가 그나마 체프 두 퐁 건너편으로 많이 떨어져서 작전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림에서 알수 있지만, 그 중요한 체프 두 퐁 근처에는 507연대 소속에 단 한 대의 비행기만이 그곳에서 점프가 되었다)
원래는 506연대가 강의 동쪽에서 에글리제를 점령하고, 507-8연대가 서쪽에서 교두보를 만들고 강을 건너 연대가 만나는 것이 시나리오였다.
<비운의 507-508연대>
507과 508연대가 노르망디에 계획된 점프시각은 새벽 2시30분에서 3시였다. 이때 먼저 날아온 패스파인더 병력이 암프레빌(Amfreville)의 북쪽과 피코빌(Picauville)에 레이더와 지상패널 마킹을 해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505연대에 비하여 그러지 못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 지역에 독일군이 정확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수송기 조종사는 지상의 횃불이나 Eureka 비콘의 전파를 잡아야 했다. 그러나 이 두 개 모두 찾지 못했고 수송기는 드롭존은 지나쳤다. 많은 공수부대원들이 Merderet을 따라서 있는 풀이 우거진 늪지에 떨어졌다. 그러나 항공정찰사진으로는 그 지역이 완전한 늪지로 보이지는 않았었다.
507-508연대의 점프 착륙지점과 Merderet강 공방전
특히나 la Barquette에 있는 수문지역은 그러했다. 풀들이 물에서 길게 자라나 정찰사진은 그곳이 초목지대로 보인 것이다. 점프를 한 무거운 군장의 공수부대원들은 자신들이 3-4피트 깊이의 물에 떨어진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병사들에게는 익사의 아비규환이었고 병력의 규합은 물론 힘들었으며 장비의 유실도 만만치 않았다. 이 두 개 연대는 완전히 분산되었다. 그나마 508의 일부가 피코빌 근처에 떨어진 것은 다행일 뿐이었다. 508연대의 일부 병력은 Merderet 동쪽에 떨어져서 결국 한동안 101공수사단과 같이 싸웠다. 507연대는 일반적으로 정해진 곳의 (늪지 혹은 강의)서쪽이 아닌 동쪽에 떨어졌다. 결국 이 두 개 연대는 반도 전체에 어디에나 떨어진 셈이 되었다. 일부 병력은 사단과 분리된 채 독일군의 공격으로 2-3일을 고착상태로 있어야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에 띄는 사건은 라 피에르(la Fiere)의 교량지역에 내린 325글라이더연대였다. 이 글라이더연대는 사단의 4개 연대 중에서 마지막으로 투입되는 제대로 교두보 확보후에 투입되는 증원제대였다. 이 노르망디에서 이 글라이더연대가 다 글라이더로 오지도 못했고, 일부는 배를 타고 왔지만, 글라이더를 타고 내린 병력들도 전투력의 결집은 상당히 어려울 정도로 와해되었고, 특히나 부상자 전사자가 랜딩중에 많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글라이더연대의 자체 전투력이기 보다는 각 공수연대의 작전에 필요한대로 합력하여 싸워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영화 '롱거스트 데이'에서 글라이더들이 착륙을 하려는데 논과 같이 물들이 반짝이는 늪지가 조종사 창 앞에 나오는 것을 기억하시는가? 그것이 바로 라 피에르 근처의 늪지에 목숨을 걸고 착륙한 글라이더연대였다)
여하간 82공수사단의 507-8연대원들은 자신들이 라 피에르와 체프 두 퐁 건너편에 도강하여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개념일 숙지하고 있었으므로, 늪지가 보이면 동과 서로 판단하여 공격방향을 잡을 101에 비하여 참고점은 큰 편이었다. 다만 안모여져서 문제였지. 하여간 병력들은 점차 규합되어 그룹별로 철도를 기점으로 모이고 있었다. 철도를 위해서 쌓여진 제방은 당시 병력들의 두드러진 독도법의 참고점이었다. 병력들은 그 지역의 유일한 철도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가이드였다. 아마도 첫 번째 규합그룹은 F. V. 슈와츠발터 대위가 이끄는 병력들이었다. 이들은 507연대 병력으로 Merderet 동쪽의 늪지대에 떨어졌다가 철도제방을 통해서 만났다. 그들은 모이는대로 이동하면서 la Fiere의 교량에 해가 뜰 무렵 도착했다. 그리고 교량 옆의 가옥을 소총과 박격포격으로 점거했다. 이 병력도 혼성이었고 이날 동안 3개의 연대병력은 여기저기서 뒤엉킨 혼란스러운 하루였다. 당시 505연대 1대대 A중대는 이날 생 메르 에글리제(Ste. Mere-Eglise) 근처의 떨어진 곳에서 규합되어 슈왈츠왈터 대위의 병력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위 지도에 병력그룹의 지휘관 명으로 위치와 이동로를 표시하고 있다)
Roy Lindquist 대령(508연대장)이 이끄는 508연대와 일부 507연대원들은 다른 장면을 또 연출하고 있었다. 이들은 암프레빌의 남동쪽 늪지대에 점프를 한 후 바로 철도제방으로 진출했다. 약 100명 정도의 대원이 규합되었다. 제방에 도착하자 이들은 연대보급장교인 존 와이즈너 중위가 이끄는 30명의 507연대 병력이 합류하였다. 와이즈너 중위는 연대 집결지인 암프레빌로 가기를 원했다. 당시 508연대장 린드퀴스트의 목표는 Pont l'Abbe였다. 그러나 중위는 린드퀘스트 중령의 의견에 동의하여 철도제방을 따라가다가 다리가 파괴되었거나 점령되었을 경우 la Fiere 근처에서 물을 건너기로 했다.
이때 철도와 생 메레 에글리제로 가는 도로와의 교차점에 이들이 도착하자, 이들은 멀리서 교량으로 향하고 있는 505연대 A중대 병력을 목격한다. 늪지 반대편에서 서로 라 피에르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린드퀘스트는 라 피에르 교량을 점거하기 위해 건너편에서 돌아들어왔고, 505 A중대는 그냥 서쪽으로 오던 중이었다.(그림) 린드퀘스트 중령은 서로 인식은 못하지만 이들과 같이 교량쪽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이동한다. 당시 와이즈너 중위가 이끌던 병력이 선두에 서서 가고 있었는데 교량 300야드 직전에서 독일군의 기관총사격이 시작되었다. 505연대 A중대도 마찬가지로 기관총으로 안해 진출이 정지되었다. 와이즈너 중위는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독일군 기관총진지를 파괴하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한다.
당시 와이즈너 중위는 북쪽을 잠시 정찰하였는데 다른 또하나의 병력그룹이 la Fiere로 향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들또한 507연대병력과 다른 제대가 혼성으로 규합된 300명 정도의 병력이었다. 이들은 사단장 가빈 준장에게 규합되어 지휘를 받고 있는 병력들이었다. 이들은 아서 말로니 중령과 에드윈 오스트버그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가빈 준장은 일단 이들 병력으로 둑길을 향하여 진격하려고 했으나 지프와 대전차무기가 글라이더로 합류하지 못하는 바람에 최초의 의도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이 착륙한 글라이더 파트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 병력들은 서쪽 제방에 독일군의 진지가 보여서 처음의 시도를 버리고 그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병력이 la Fiere에 도착하자 미군은 협력하여 최초로 교량에 대한 진출을 모색한다(원래 1개 연대급이 해야할 일이었다). 그러나 교량의 독일군은 아주 강했다. 그리고 507과 508이 가빈 준장이 볼 때는 분실상태였다. 부사단장 가빈이 모은 것은 600명 정도였다. 가빈 준장은 먼저 말로니 중령에게 75명을 주어 교량말고 건널수 있는 곳을 찾아보라고 명령했고, 조금 후에 오스트버그 중령에게 다시 75명을 주어 Merderet의 체프 두 퐁(Chef-du-Pont) 교량을 건널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다행히 이 교량은 독일군이 없다고 보고됐다.
린드퀘스트는 지휘부 병력의 경우 la Fiere에 잔류시켰다. 당시 당시 규합된 전투제대는 총 400명 정도로, Company B/508, G/507th, A/505th, 등 혼합이었 스왈츠왈터 대위가 지휘하는 병력은 이 주병력의 좌측(도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독일군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병력의 규합을 참고 기다리던 린드퀴스트 중령은 이날 정오에 병력에 대한 총공격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으로 508의 A중대가 도로 북쪽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린트퀴스트는 다시 병력을 총동원하여 A중대 지역을 아침까지 마지막 독일군을 사살하면서 점령했다.
슈왈츠발터 대위의 병력은 수로둑길을 서쪽으로 건너서 티머스 중령이 지휘하는 507연대 2대대의 정찰대를 만났다. 티머스 중령은 암프레빌 동쪽 1천야드 지점에서 50명의 병력을 규합하고 있었고 그곳이 원래 대대의 드롭존이었다. 최초의 규합이 끝나자 티머스 중령은 D중대 출신의 루이스 레비 중위에게 la Fiere를 정찰하라고(이것은 각기 다른 제대의 라 피에르에 대한 4번째 정찰이었다) 명령하고 둑길의 점령가능성을 알고자 했다. 이때 이들은 507연대 일부를 도중에 만나 합류했다.
레비 중위가 가까이 가서 정찰해 본 결과 독일군은 남에서 동으로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찰 결과 당시 80명의 병력으로는 공격해서 교두보를 확보하기가 힘들다고 판단되었다. 그러자 레비 중위는 부지런히 낙오자들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런 과정에서 505연대 1대대가 교량을 점거하기 위해서 서쪽으로 진출중이라는 첩보를 듣게 된다. (이 첩보가 즐거운 것은 그나마 제대로 된 제대구성의 대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505-1대대는 교량을 점령하기는 하나 결국 한시간 후에 다시 후퇴하고 만다. 교량을 점령당하자 독일군은 포병의 포격을 시작으로 소화기와 기관총을 앞세워서 다시 반격했으나 서쪽으로부터 독일군의 탱크까지 등장하였다.
슈왈츠왈터 중위도 강력한 전투가 임박했음을 느끼고 그의 고정임무였던 Amfreo로 진출하여 2대대와 연결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진출 도중 독일군의 포격을 받아 후퇴를 하게되며 이 과정에서 508연대 몇 명을 다시 수습했다. 결국 이들 병력들은 동쪽에서의 공격지원없이 독일군에게 돌격한다. 그리고 507-2대대 티머스 명령권의 레비를 포함한 4명의 장교들이 이 공격에 가담했다. 총 82명으로 그냥 공격한 것이다. 이들이 휴대한 기관총은 한 대였고 수류탄과 소총으로 돌격했다. 여기서는 백병전도 일어났고 또한 82공수부대원들은 Gammon grenades를 이용해서 두 대의 독일군 탱크를 격파한다. 그러나 오래 점거를 할 수는 없었고 북쪽으로 후퇴하여 507 2대대와의 연결을 시도한다.
이 동안 508연대 B중대가 조금 늦게 둑길을 넘어 진출했다. 서쪽 제방에 도착하자 바로 독일군의 공격이 포문을 열었다. 독일군의 공격은 강력했고, 이 사격하에 508-B중대 병력들은 결집하여 전투를 할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후퇴를 시작했고 생존자들은 독일군의 사격을 받으면서 강을 수영으로 건너서 돌아오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공격에 필요한 수의 병력이 모자랐다는 것이고, 또한 지역적으로 관목줄기가 너무 무성해서 공격하는 제대들이 서로간에 신호연락이 불가능해서 흩어지기 일수였다는 것이다. 또한 독일군의 반격으로 507-2대대장 티머스 중령과 슈왈츠왈터 대위의 병력이 la Fiere안에서 격리되는 상황까지 발생하게 된다.
티머스 중령은 암프레빌의 과수원에서 방어진을 바로 구성한다. 그리고 이후 다시 이들은 교두보로의 반격을 야간에 준비했으나 결국 실시하지 못한다. 티머스 병력은 당시 120명 정도였는데 너무도 지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리고 먹을 것 쏠 것이 모두 부족했다. 결국 이날 티머스는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한다. 라 피에르에서 후퇴한 508연대 B중대는 동쪽의 제방에서 병력 재편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505연대 1대대는 독일군의 포격과 박격포에 노출된 상태로 의지와 의지를 가지고 작전하여 서쪽 제방을 점거했다. 이 505연대 1대대는 비범한 전투를 벌였다. 두 대의 독일군 탱크가 이들을 분쇄하려고 시도했으나 도로봉쇄를 맡고 있던 A중대의 바주카포 반이 두 대 모두 파괴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격의도는 계속 보였다.
가빈 준장은 체프 두 퐁에서 라 피에르로 오후 늦게 도착했다. 가빈이 도착해보니 가장 절실한 것은 의무장비와 탄약이었다. 가빈 82공수사단 부사단장은 말로니 대령에게 체프 두 퐁(Chef-du-Pont)에서 라 피에르로 가진 병력을 모두 데리고 즉각 올 것을 명령했다. 말로니 대령이 도착하기전에 독일군은 적지 않은 병력으로 505연대 1대대가 있는 동쪽 제방을 다시 공격했다. 저녁 8시가 되자 말로니 대령이 이끄는 200명의 병력이 라 피에르로 도착했고 어두워지자 병력은 방어태세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직도 생 메르 에글리제 서쪽의 82공수사단 사단본부로 추가 제대의 연락은 없었다. 곧 상륙군이 도달할 것인데도 말이다. 리지웨이 장군도 사단의 총 병력을 생 메르 에글리제에 집결하여 그곳을 방어하고 병력을 재편성할 계획이었다. 린드퀴스트의 250명도 에글리제로 이동을 명령받았으나 다음날까지 도착하지는 못했다.
결국 이날 Merderet River는 건너지 못했으나 의외로 아래쪽인 체프 두 퐁에서는 일부 병력이 안전하게 도강을 했다. 체프 두 퐁으로 눈을 돌려 보면, 체프 두 퐁에 대한 최초의 공격은 75명을 데리고 있던 오스트버그 대령이었다. 이들은 가빈 준장의 명령권에서 공격명령을 받고 체프 두 퐁으로 이동해 온 병력이다. 이 75명의 공격으로 독일군은 일시 후퇴하여 둑길 서쪽에 참호를 파고 미군을 기다렸다. 독일군의 수는 적었으나 항전은 견고한 부대였다. 결국 오스트버그 대령의 대원들이 거꾸로 막다른 골목에 몰렸으나 말로니 대령의 75명에 증원군으로 위기를 피할수 있었다.
디 데이 오후 5시에 일부 라 피에르가 미군 수중에 점거되었으나 라피에를 점거한 부대는 소대규모였고 인원은 45명, 그리고 로이 크릭 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때 75-100명의 독일군이 크릭 대위가 있던 장소에서 목격되었고 독일군이 있던 장소는 동쪽 제방의 일부 건물 주위였다. 크릭 대위는 증원을 요청하였다. 이 증원군이 도착하기전에 뜻밖의 선물을 부대는 하늘로부터 받았다. 글라이더 한 대가 57밀리 대전차포와 탄약을 싣고 근처에 착륙한 것이다. 57밀리 대전차포로 미군은 바로 독일군의 포진지에 대하여 포격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독일군의 포격이 잠잠해졌다. 100여명의 독일군이 라 피에르에서 나오는 것이 목격되었고 독일군은 일단 후퇴했다. 미군의 추후 병력이 방어선에 가담하자 독일군의 부담은 점점 높아져갔다. 이들이 동쪽 제방을 점거하자 바로 다리를 건넜고 큰 저항없이 이 소대규모의 부대는 그 양편에 참호를 팠다. 교량을 장악한 것이다.
이 1) 생 메르 에글리제 장악 2) 라 피에르에서의 Merderet 강 도하 3) 체프 두 퐁에서의 도하는 D-데이 당일 82공수사단의 중요 전공이 되었다. 그러나 심한 경우 이 성과 이후 4-5일이 지나도록 강 서쪽에 규합하지 못한 병력의 그룹들은 고립되어 독립적으로 전투를 치루어야 했다. 그리고 이들 분리되고 고립된 부대들도 개별적인 전투를 통해서 82공수사단의 임무를 일부 성취하기도 했다.
조지 V. 밀러 주니어 대령은 507연대장이었다. 그는 점프 당일 75명을 규합하여 암프레빌 북서쪽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티머스 중령이 지휘하는 자신의 2대대가 있었고, 그 근처를 1천야드나 근접하여 통과했지만 서로 만나지 못했다. 507연대장 밀러 대령은 어처구니 없게도 D plus 4일까지 다른 제대를 만나지 못했다. 좀 더 남쪽의 508연대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하나의 병력그룹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제랄드 길로트 중위가 지휘하다가 이후 조나단 아담스 대위가 지휘한 그룹이었다. 이들은 소규모의 독일군과 계속교전을 벌이다가 D plus 5일이 되어 연대본진과 만나게 된다.
보다 많은 숫자의 병력규합이 508연대에서는 있었다. 장소는 Merderet 서쪽이었고 구심점은 508연대 2대대장 토마스 J. B. Shanley였다. 션리 중령은 피코빌(Picauville) 근처에 떨어졌다. 그는 병력을 모으기는 했으나 작전을 하기에는 부족한 병력이었다. 그러나 그는 Pont l'Abbe에 있는 다우강에서 임무를 수행하고자 원했다. 점심때가 되자 션리 중령은 무전기로 다른 병력그룹인 노만 맥바이카 중위와 교신이 이루어졌다. 그는 1마일 거리에서 60명을 데리고 있었다. 중령은 그들과 조우하기 위해서 이동을 시작했고 그 중간에 쉘즈 워렌 주니어 소령이 지휘하는 그룹의 대원을 우연히 만났다.
이들 세 그룹은 남쪽 독일군의 공격으로 인해 바로 만나지 못하다가 오후가 되어 규합한 후에 제대를 재편성하고 방어를 구성했다. 이때 근처의 독일군도 이들의 규모가 대대규모라고 판단하여 쉽게 공격하지 못했다. 당시 독일군은 Pont l'Abbe에서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자 션리 중령은 다우강쪽으로 진격해서 연대 본진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목표로 한 장소는 체프 두 퐁의 둑길을 감제할수 있는 Hill 30이란 고지였다. 밤 11시가 되자 병력은 션리 중령의 지휘아래 두 개중대로 편성하고 사주경계를 하면서 출발했다. 이들은 단독으로 작전을 하다가 한참후에야 사단 명령권으로 들어갔다.
(당시 82공수사단의 325 글라이더 연대는 공수자격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노르망디에서는 그 첫날이 중요했으므로 가용 글라이더로 날아갔다. 이 325연대는 1917년에 만들어진 오래된 연대였다. 이들은 시실리 살레르모와 마리오리에 글라이더 착륙의 경험이 있었으며, 다비의 레인저에 배속되어 싸우기도 했고, 이들과 함께 세인트 안젤로 디 카바의 고지대 독일군 포병진지를 공격한 유명한 전과가 있었다. 이 노르망디에서는 찰스 디글로퍼 일병이 라 피에르 근처의 소대 진지에 혼자서 남아 방어하는 놀라운 수훈으로 최고훈장을(6.9일) 타기도 했다. 마켓가든에서는 포위된 82공수사단의 중간에 강습하여 부대 수훈장을 받았고 벌지 전투에 참가후에, 전쟁이 끝난 1946년에 본토로 돌아왔다가 1947년 부대임무해제되었다가, 1948년에 다시 82공수사단과 함께 재배치되었고 1965년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내전에, 1983년에는 그라나다 살리나스 공항에 강습하기도 했다. 1989년에는 4대대가 파나마의 오마 토리오스 공항 점거에 참가했다. 1990년에는 걸프전에 참가했고, 현재 325연대는 포트 브레그의 82공수사단 근거지에 3개 대대를 보유한채 남아 있다. 이들은 82공수사단의 전투제2여단의 소속으로 되어 있다)
부사단장 가빈 준장은 1944년 8월 28일, 리지웨이로부터 82공수사단직을 인수받는다.
The Airborne Divisions at the End of D Day
D Day에 82와 101공수사단 모두는 작전계획과 전혀 다른 장소와 제대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이날의 희생자는 아주 컸고 공수작전 자체에서 전사한 사람도 많았다. 작전계획이 아닌 15-20곳의 장소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산재되어 점프한 것은 두 사단 모두 똑같았다. 노르망디의 지형은 병력 분산에 공신이었다.
지역의 관목들은 상공식별에 오점을 선사했고 기동에 문제가 많았다. 어떤 그룹들은 불과 수백 야드 근처에서 서로를 모르고 지나쳤다. 병력들은 다른 제대 사람과 처음보는 장교의 지휘로 싸웠다. 자신의 목표가 아닌 곳에서 싸운 병력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공수공습작전으로는 낮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소기의 목적은 충분한 희생속에 달성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에게 가장 큰 적은 미군 공수사단에 대한 혼동과 제대 파악의 분란이었다.
D Day에 101공수사단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목표한 대부분의 중요한 목표를 획득했다. 101 부사단장은 이러한 총제적인 작전 에러를 그 다음날 정오쯤에 완전히 인식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상륙군의 교두보 확보와 그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Foucarville 북쪽의 섹터는 502연대가 장악하여 상륙군단의 남쪽을 엄호한 결과를 나았다. 그리고 상륙군단이 커랜탱으로 향하는 남쪽의 엄호에서 독일군의 저항은 예상보다 강하지 않았다. le Port의 교량은 점거 되었고 일부 지역은 독일군이 포기했다. la Barquette의 수문도 장악하였다. 작전에서 가장 힘든 고비는 탄약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가장 독일군의 저항이 강했더 곳은 501연대가 작전했던 생 콤 두 퐁(St. Come-du-Mont)이었다. 501연대가 고전한 이유는 그것이 광범위한 늪지인 까닭도 있다. 첫 지도로 보면 알지면 이 작전지역 전체가 저지대였다. Addeville만은 예외로 규합이 잘 되어 두브강의 둑길에 금장 도달했다. 그러나 이곳의 독일군은 강했고 결국 독일군은 남서쪽으로 후퇴한다. 노르망디에서 공수사단에게 가장 위협을 한 것은 독일군 포병과 박격포탄이었다. 공수사단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통신의 두절이었다. 디데이 당일의 모든 대대가 이 통신두절로 애를 먹었다. 당시 공수사단은 정규독일군 사단이 공격했을 경우 전멸시키기 딱 좋은 형태였다.
101사단에 비하면 82공수사단이 좀 더 심각했다. 큰 목표인 Merderet에 제대로 떨어진 병력이 없었다. 서쪽으로 떨어진 대부분의 82공수사단 병력이 Merderet 서쪽에 고립되었다. 사단의 목표에 가기가 힘들었다. la Fiere에 대한 장악은 임시방편으로 이루어졌으나 희생이 너무 컸다. 이후 3일간의 예정된 82공수사단의 작전은 지장이 컸다.
거기다가 디데이의 다음날 만나기로 한 상륙군과 82공수사단 자체를 증강하기로 되어 있었던 글라이더들이 제대로 오지도 않았고 추락한 것과 찾을수 없는 글라이더들이 많아 보급은 거의 없는 것과 같았다.
사단장 리지웨이 장군은 Merderet에서 사단을 지휘하고 있었지만 사단의 제대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작전대로 제대를 규합하여 생 메르 에글리제에서 방어와 병력구성을 할수 없었다. 그리고 디데이 전의 공수사단 지휘관들은 낙천적인 경향이 있었다. 워낙 대규모이고 상륙군의 규모라 상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디데이에 점프한 101공수사단의 점프병력 6천 6백명 중에서 그날 정확히 욺직이면서 작전한 병력은 2천5백명에 불과했다. 모든 공수부대에 대한 증원군은 없었다.
그리고 모든 제대가 증강과 보급을 원했다. 죽은 전우의 몸에서 탄약을 꺼내야 했다. 그들이 만난 증원군은 글라이더연대가 아니라 상륙한 보병사단이었다. 그러나 유타 해안의 상륙군은 오히려 독일군의 저항이 적었다. 결과적으로 유타에 상륙한 미제4보병사단은 두 개의 공수사단을 구한 셈이었다. 만약 독일군이 1-2일 안에 제대로된 상황판단속에 공수사단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로 나섰을 경우 공수사단은 지극히 위험했다. 일단 실탄이 없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콩탱팅 반도에 힘을 쓸 여력이 없었다. 유타해안은 연합군 침공의 (방어자 측) 왼쪽 끝의 지역이었고 전체적인 노르망디 침공은 연합군에게 일종의 shock였다.
*ps-번역이 이상해도 잘 봐주세요.. 제가 영어거 딸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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