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란(契丹)제국의 군사제도
거란의 통수기구는 거란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군정을 담당한 북면관(北面官)의 북추밀원에서 담당했습니다(남추밀원도 존재하였으며 남추밀워은 민정을 담당하였습니다.). 북추밀원에서는 군사적 전략 목표의 결정, 작전 계획, 군대의 부서 및 이무 결정 등을 맡았습니다. 물론 국군 최고 통수권은 황제가 장악하지만, 군대를 지휘할 최고 통수 기관으로서 천하병마원수부가 설치되고 황위 계승자가 천하병마원수에 임명되었습니다. 또 각 지역별로 군을 지휘하는 원수부가 설치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북대왕원(北大王院)과 남대왕원은 병역, 군마, 군민을 관리하였으며 어장관(御帳官)은 황제의 신변 경호를 담당했습니다.
거란의 군사제도는 병민일치(兵民一致)를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15세~50세에 이르는 모든 백성을 병적에 의해 관리했습니다. 전투를 담당하는 정군(正軍) 1명과 보급을 담당하는 타초곡가정(打草穀家丁) 1명 그리고 물품 관리와 운반을 담당하는 수영포가정(守營鋪家丁) 1명으로 구성된 3명이 1개 조를 이루어 3필의 말과 함께 최소 단위 전력을 구성했습니다. 또한 전투에 임하면 즉각 싸울 수 있도록 사람마다 철갑 9벌, 말 고삐, 말의 철갑, 활 4개와 화살 400개 그리고 기타 창과 도끼 등 무기와 말먹이 등의 휴대 장비와 보급품을 평상시부터 스스로 준비했습니다.
거란군은 크게 금위제군과 부족군, 향병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위제군은 거란의 최정예군으로 어장친군(御帳親軍)과 궁위기군(宮衛騎軍)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어장친군(御帳親軍)은 황제의 친위 부대로써 가장 정예한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장친군은 다시 황제 직속의 피실군(皮室軍)과 황후 직속의 속산군(屬珊軍)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이 중 피실군은 남? ? 북 ? 좌 ? 우 황의 5개 부대로 나누어졌으며 총 병력은 30만에 이르렀습니다(하지만 3만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속산군은 거란의 태조인 아율아보기의 황후인 술율태후(述律太后)가 섭정하고 있었을 때, 번(蕃) ? 한(漢)의 정예 군사를 뽑아서 부대로 만든 것이 시초가 되었으며 총 병력은 20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하지만 2만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거란의 군사제도에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황제의 친위군과 황후의 친위군이라는 편제가 있었던 이유는 거란이 황제인 야율씨와 황후인 술율씨의 정치적 연합으로 건국된 나라였기 때문이었고 이런 것이 군제에도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궁위기군(宮衛騎軍)은 황제의 호위 부대로 황제가 궁궐에 있으면 궁을 수비하고, 황제가 외부로 나가면 호위하며, 장례 시에는 능을 지켰습니다. 이들 역시 어장친군과 함께 정예 부대로써 우대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각각 정정(正丁) ? 번한전정(蕃漢轉丁) ? 기군(騎軍)의 세 부류가 있었습니다. 병위지에 따르면 정정은 16만명, 번한전정은 24만 8천명, 기군은 10만 1천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궁위기군은 점차 확장되어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기병은 10만 1천명, 홍의(弘義. 6천명), 장녕(長寧. 5천명), 영흥(永興. 5천명), 적경(積慶. 8천명), 연창(延昌. 2천명), 장민( 愍. 1만명), 숭덕(崇德. 1만명), 흥성(興聖. 5천명), 연경(延慶. 1만명), 태화(太和. 1만 5천명), 영창(永昌. 1만명), 돈목(敦睦. 5천명)의 십이궁(十二宮)과 문충왕부(文忠王府. 1만명)가 설치되었습니다.
부족군은 대수령부족군(大首領部族軍)과 중부족군(衆部族軍)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이 중 대수령부족군은 왕족인 친왕들과 대신들이 거느린 사병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규모 역시 정해지지 않고 제각각이라 작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1천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의 명칭으로는 태자군(太子軍) ? 위왕군(偉王軍) ? 영강왕군(永康王軍) ? 월왕군(越王軍) ? 마답군(馬答軍) ? 오압군(五押軍)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국가에서 원정에서 병력을 요청할 때 대략 5천명의 병력을 지원하였습니다.
중부족군(衆部族軍)은 대수령부족군에 속하지 않은 나머지 부족 단위의 군대였습니다. 대수령부족군보다는 그 단계가 낮았습니다. 거란의 전성기에 이들은 남부(南部)에 16개 부와 북부(北部)에 28개 부에 분속되어 거란 제국의 국경 방어를 담당하였습니다. 하지만 병력 규모는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향병은 오경향정(五京鄕丁)이라고 불리며 거란 제국의 오경(五京: 상경 임황부, 중경 대정부, 동경 요양부, 남경 석진부, 서경 대동부)의 방어를 담당했습니다. 이 오경 중 당(唐) 이래로 거란이 영유하고 있었던 상경과 중경 그리고 동경의 정수(丁數)는 22만 6천 1백명으로 번한호(蕃漢戶)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란 제국이 들어선 이후 차지하게 된 남경과 서경의 정수는 80만 6천 7백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장친군, 궁위기군, 중부족군 그리고 나머지 번한호정(蕃漢戶丁 : 蕃漢轉丁)으로 분속된 자들은 여기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위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 향정(鄕丁)으로 분류되었습니다. 향정의 대부분은 한족(漢族)과 해인(奚人) 그리고 발해인(渤海人)이 주를 이루었으며, 총 병력은 1백 1십만 7천 3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위의 병제 이외에 속국군(屬國軍)이 있었습니다. 속국군이란 이름 그대로 거란에 사대를 하는 속국들이 유사시에 거란 제국에 보내는 병력을 의미했습니다. 거란측 목록에는 무려 59개 국에 이르는 속국들이 나타났지만 그건 거란의 입장이고 실제로 속국군은 이름만 거창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거란 제국의 부대편제를 보면 거란군의 기초단위는 대(隊)로 500~70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10대가 1개 도(道)를 이루고 다시 10도가 1로(路)를 이루었습니다. 1로는 5만~7만에 이르렀습니다.
거란은 행군시 호가군(護駕軍) ? 선봉군(先鋒軍)으로 구성되었으며, 호가군은 다시 원탐난자군(遠探欄子軍)과 연락 부대로 구성되었습니다.
호가군은 어가를 호위하는 부대라는 의미로, 정예 병력 3만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선봉군은 호가군 앞에서 선봉 역할을 담당하는 군대로 용맹스러운 병사 3천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원탐난자군은 정찰 부대로 선봉군이 진군하기 위한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원탐난자군은 빠르고 용맹한 자들로 10여 명 정도를 선발했습니다. 연락 부대는 이름 그대로 행군시의 선봉군과 호가군을 연락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연락 부대는 각 부대에서 5~10명을 차출했으며 공무를 연락하고 병마를 연락했습니다.
거란의 원정형태는 황제의 친정과 도통을 임명하는 원정 그리고 도통을 임명하지 않고 특정 지방관이 하는 원정이 있었습니다. 유목제국인 국가 최고통수권자의 친정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역시 거란에서도 황제의 친정은 정치 ? 외교적 명분을 세워 정복 대상국을 속국으로 만들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친정 시에는 황제가 출진하는 만큼 전국적인 동원 체제를 가동하여 대규모 병력을 편성했습니다. 거란의 친정은 거란 태조의 발해 원정(926), 태종의 후진 원정(946), 성종의 2차 고려 원정(1010)이 있었습니다.
도통을 임명하는 원정은 훈척대신(勳戚大臣)을 도통으로 임명하여 분쟁 지역에 투입하는 형태였습니다. 부대규모는 15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도통을 임명하지 않고 특정 지방관에게 명하여 원정을 실시할 때는 기병 6만 명 정도를 보냈습니다. 이 때의 원정군은 성을 빼앗거나 영토를 빼앗는 것이 아닌 단순히 적국의 300리 이내에서 약탈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출처: 환상의 전사들(The history of Warriors. 이치카와 사다하루 지음), 고려 거란 전쟁(안주섭 지음), 전쟁과 역사2 -거란 ? 여진과의 전쟁- (임용한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