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의 정변 [康兆─政變]
요약
1009년(고려 목종 12)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일으킨 정변.
본문
고려 제7대 왕 목종이 18세에 즉위하였으므로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섭정을 하게 되자, 귀양보냈던 천추태후의 정부(情夫) 김치양(金致陽)을 다시 불러들였다. 목종은 20세가 넘도록 후사를 얻지 못하였는데, 1003년(목종 6)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이 때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그들 사이에서 난 자식으로 목종의 뒤를 잇게 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 음모를 안 목종은 욱(郁)의 아들 당숙 대량군(大良君)에게 자기의 뒤를 잇게 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에게 왕궁을 호위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나라 안에는 온갖 뜬 소문이 유포되었는데, 임금은 병환이 몹시 위중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고, 김치양 일파는 임금이 병중에 있음을 기화(奇貨)로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고 하였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목종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나돌게 되었으며, 이렇게 되자 강조는 김치양 일파를 몰아내고 목종의 뜻대로 대량군을 임금의 자리에 앉히려고 하였다. 강조가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개경으로 오던 도중에 목종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강조는 어차피 목종으로서는 나라를 흥하게 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하여, 부하 제장(諸將)과 의논한 후 별장(別將)으로 하여금 대량군을 맞이하게 하고 자신은 개경으로 들어가 목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였다. 목종으로서는 스스로 불러서 화를 당한 셈이다.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킨 후 대량군을 내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와 동시에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천추태후와 그 일당을 모두 귀양보냈으며, 1009년에는 폐위시킨 목종을 시해하였다. 강조가 오랫동안 고려 조정을 어지럽혔던 천추태후 ·김치양 일파를 숙청한 일에 대해서는 백성의 지지를 받았으나, 그를 믿고 불러들인 죄 없는 목종을 시해한 일과 또 스스로 정권을 잡은 일에 대해서는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정변은 거란에게 고려침입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주었다. 당시 거란에는 성종(聖宗)이 있었는데, 그는 강조의 이신벌군(以臣伐君)을 문책한다는 표면적인 명분을 내걸고 내심으로는 앞서 서희(徐熙)의 외교수완에 말려들어 양보한 강동6주를 회복할 셈이었다. 그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하여 1010년(현종 1) 11월 통주(通州:평북 선천 서북쪽)에서 강조의 군사를 대파하고 강조를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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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헌애왕후 [獻哀王后, 964~1029]
요약
고려 경종의 비. 태조의 아들 대종(戴宗:추존왕)의 딸. 목종의 어머니. 헌정왕후와 친자매로 함께 경종을 받들었다. 외척인 김치양과 음탕한 생활을 공공연히 하며, 그 사이의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왕실의 유일한 후계자 대량원군 순(詢:헌정왕후의 소생으로 뒤에 현종)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실패, 유배되었다.
본문
태조의 아들 대종(戴宗:추존왕)의 딸. 목종의 어머니. 헌정왕후(獻貞王后)와 친자매로 함께 경종을 받들었으며, 외가의 성을 따라 황보(皇甫)라 하였다. 경종이 죽고 천추궁(千秋宮)에 있을 때, 외척인 김치양(金致陽)의 출입이 잦아 추문이 퍼지자 성종이 김치양을 유배시켰다.
997년(성종 16) 성종이 죽고 어린 아들 목종이 즉위하자, 천추궁에서 섭정하여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불렸다. 김치양을 유배지에서 불러 우복야 겸 삼사사(右僕射兼三司事)에 임명하여 음탕한 생활을 공공연히 하였으며, 그 사이에서 생긴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기 위하여 왕실의 유일한 후계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헌정왕후의 소생으로 뒤에 현종)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때 병든 목종이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임명하자 김치양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 대역을 감행하려 했으나, 서북면도순문사 강조(康兆)가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대량원군을 즉위시키고 김치양을 죽여 난을 평정하였다. 태후는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황주(黃州)에 내려가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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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애왕후(獻哀王后 964년-1029년)는 태조 왕건의 손녀이자 경종(景宗 고려의 5대 왕)의 비이고 성종(成宗 고려의 6대 왕)의 누이 동생이며 목종(穆宗 고려의 7대 왕)의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불리우기도 .
동생인 헌정왕후(獻貞王后) 역시 헌애왕후와 함께 경종의 비.
그녀의 아버지는 태조의 아들인 추존왕 대종(戴宗 왕위는 잇지 못했으나 후에 왕으로 추존 됨).
그녀의 성은 할머니인 태조비 신정왕후(神靜王后)의 성을 따라서 황보씨(皇甫氏).
980년 아들(후의 목종)을 낳았으나 981년 경종이 죽자 헌애왕후의 오빠인 성종이 즉위하게 되었고 헌애왕후는 태후가 되어 천추궁에 머무르게 .
성종이 997년에 죽자 목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헌애왕후는 섭정을 하며 자신을 천추태후로 .
천추태후는 경종이 죽고 난 뒤 외가 쪽의 친척인 김치양(金致陽)과 통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알려지자 김치양은 귀양을 가기도 했으나 이후 목종이 즉위하여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자 그녀는 김치양을 다시 불러들여 권력을 주었고 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기까지.
원래 목종은 대량원군(大良院君 후의 현종)을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죽이고 자신들의 아들을 왕으로 세울 계획을.
이를 눈치 챈 목종은 1009년 서경 도순검사 강조에게 대량원군을 보호할 것을 명했으나 오히려 강조는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쳐들어가 목종을 폐위시키고 김치양 일당을 처형했으며 대량원군을 추대하여 현종으로 즉위.
이 와중에 천추태후는 유배를 가게 되었고 목종은 폐위되어 충주로 가던 도중에 강조의 부하들에게 살해를 당.
천추태후는 곧 유배에서 풀려나 황주에서 살다가 66세의 나이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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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
태후(太后) 선황(先皇)의 부인이며 현황(現皇)의 모(母)를 가리킨다. 그러나 태황태후(太皇太后)와 황태후(皇太后)를 아우르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며 황실내에서는 한국 왕조의 왕대비(王大妃)와 같은 위치이기도 하다.
황제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황제들의 집권기간에 대부분 존재해왔으며 대체적으로 황실의 권위와 안정을 도모하였으나 태후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권력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중종의 모후인 측천무후와 광서제의 모후인 서태후(西太后)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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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 大妃
선왕(先王)의 후비(后妃). ≒상왕비.’
상왕 上王
자리를 물려주고 들어앉은 임금을 이르는 말.
요약
1009년(고려 목종 12)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일으킨 정변.
본문
고려 제7대 왕 목종이 18세에 즉위하였으므로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섭정을 하게 되자, 귀양보냈던 천추태후의 정부(情夫) 김치양(金致陽)을 다시 불러들였다. 목종은 20세가 넘도록 후사를 얻지 못하였는데, 1003년(목종 6)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이 때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그들 사이에서 난 자식으로 목종의 뒤를 잇게 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 음모를 안 목종은 욱(郁)의 아들 당숙 대량군(大良君)에게 자기의 뒤를 잇게 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에게 왕궁을 호위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나라 안에는 온갖 뜬 소문이 유포되었는데, 임금은 병환이 몹시 위중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고, 김치양 일파는 임금이 병중에 있음을 기화(奇貨)로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고 하였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목종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나돌게 되었으며, 이렇게 되자 강조는 김치양 일파를 몰아내고 목종의 뜻대로 대량군을 임금의 자리에 앉히려고 하였다. 강조가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개경으로 오던 도중에 목종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강조는 어차피 목종으로서는 나라를 흥하게 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하여, 부하 제장(諸將)과 의논한 후 별장(別將)으로 하여금 대량군을 맞이하게 하고 자신은 개경으로 들어가 목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였다. 목종으로서는 스스로 불러서 화를 당한 셈이다.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킨 후 대량군을 내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와 동시에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천추태후와 그 일당을 모두 귀양보냈으며, 1009년에는 폐위시킨 목종을 시해하였다. 강조가 오랫동안 고려 조정을 어지럽혔던 천추태후 ·김치양 일파를 숙청한 일에 대해서는 백성의 지지를 받았으나, 그를 믿고 불러들인 죄 없는 목종을 시해한 일과 또 스스로 정권을 잡은 일에 대해서는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정변은 거란에게 고려침입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주었다. 당시 거란에는 성종(聖宗)이 있었는데, 그는 강조의 이신벌군(以臣伐君)을 문책한다는 표면적인 명분을 내걸고 내심으로는 앞서 서희(徐熙)의 외교수완에 말려들어 양보한 강동6주를 회복할 셈이었다. 그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하여 1010년(현종 1) 11월 통주(通州:평북 선천 서북쪽)에서 강조의 군사를 대파하고 강조를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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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헌애왕후 [獻哀王后, 964~1029]
요약
고려 경종의 비. 태조의 아들 대종(戴宗:추존왕)의 딸. 목종의 어머니. 헌정왕후와 친자매로 함께 경종을 받들었다. 외척인 김치양과 음탕한 생활을 공공연히 하며, 그 사이의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왕실의 유일한 후계자 대량원군 순(詢:헌정왕후의 소생으로 뒤에 현종)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실패, 유배되었다.
본문
태조의 아들 대종(戴宗:추존왕)의 딸. 목종의 어머니. 헌정왕후(獻貞王后)와 친자매로 함께 경종을 받들었으며, 외가의 성을 따라 황보(皇甫)라 하였다. 경종이 죽고 천추궁(千秋宮)에 있을 때, 외척인 김치양(金致陽)의 출입이 잦아 추문이 퍼지자 성종이 김치양을 유배시켰다.
997년(성종 16) 성종이 죽고 어린 아들 목종이 즉위하자, 천추궁에서 섭정하여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불렸다. 김치양을 유배지에서 불러 우복야 겸 삼사사(右僕射兼三司事)에 임명하여 음탕한 생활을 공공연히 하였으며, 그 사이에서 생긴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기 위하여 왕실의 유일한 후계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헌정왕후의 소생으로 뒤에 현종)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때 병든 목종이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임명하자 김치양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 대역을 감행하려 했으나, 서북면도순문사 강조(康兆)가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대량원군을 즉위시키고 김치양을 죽여 난을 평정하였다. 태후는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황주(黃州)에 내려가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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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애왕후(獻哀王后 964년-1029년)는 태조 왕건의 손녀이자 경종(景宗 고려의 5대 왕)의 비이고 성종(成宗 고려의 6대 왕)의 누이 동생이며 목종(穆宗 고려의 7대 왕)의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불리우기도 .
동생인 헌정왕후(獻貞王后) 역시 헌애왕후와 함께 경종의 비.
그녀의 아버지는 태조의 아들인 추존왕 대종(戴宗 왕위는 잇지 못했으나 후에 왕으로 추존 됨).
그녀의 성은 할머니인 태조비 신정왕후(神靜王后)의 성을 따라서 황보씨(皇甫氏).
980년 아들(후의 목종)을 낳았으나 981년 경종이 죽자 헌애왕후의 오빠인 성종이 즉위하게 되었고 헌애왕후는 태후가 되어 천추궁에 머무르게 .
성종이 997년에 죽자 목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헌애왕후는 섭정을 하며 자신을 천추태후로 .
천추태후는 경종이 죽고 난 뒤 외가 쪽의 친척인 김치양(金致陽)과 통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알려지자 김치양은 귀양을 가기도 했으나 이후 목종이 즉위하여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자 그녀는 김치양을 다시 불러들여 권력을 주었고 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기까지.
원래 목종은 대량원군(大良院君 후의 현종)을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죽이고 자신들의 아들을 왕으로 세울 계획을.
이를 눈치 챈 목종은 1009년 서경 도순검사 강조에게 대량원군을 보호할 것을 명했으나 오히려 강조는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쳐들어가 목종을 폐위시키고 김치양 일당을 처형했으며 대량원군을 추대하여 현종으로 즉위.
이 와중에 천추태후는 유배를 가게 되었고 목종은 폐위되어 충주로 가던 도중에 강조의 부하들에게 살해를 당.
천추태후는 곧 유배에서 풀려나 황주에서 살다가 66세의 나이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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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
태후(太后) 선황(先皇)의 부인이며 현황(現皇)의 모(母)를 가리킨다. 그러나 태황태후(太皇太后)와 황태후(皇太后)를 아우르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며 황실내에서는 한국 왕조의 왕대비(王大妃)와 같은 위치이기도 하다.
황제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황제들의 집권기간에 대부분 존재해왔으며 대체적으로 황실의 권위와 안정을 도모하였으나 태후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권력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중종의 모후인 측천무후와 광서제의 모후인 서태후(西太后)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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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 大妃
선왕(先王)의 후비(后妃). ≒상왕비.’
상왕 上王
자리를 물려주고 들어앉은 임금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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