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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판

강형철 선배의 시작노트를 읽고

작성자철학81 최진섭|작성시간05.03.30|조회수156 목록 댓글 4

정말로 오랫만에 큰맘 먹고 오늘 시집을 한 권 샀다.
<2005 오늘의 시>라는 작품집이다.
그런데 맨 앞에 실린 시 <훔쳐온 돌>이 강형철 선배 시였다.
시도 좋았지만 시작노트가 인상적이었다.

시작노트를 읽은 것은
홍대 전철역 입구에서 윤여연 선배를 기다리면서였다.
저녁 6시에 만나서 9시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전철안에서
다시 "관계를 떠나면 무의한 실체만 남는다"로 시작하는
시작노트를 훒어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금요일 저녁때
이순웅(철학81), 최진섭, 카페대표 세 명이 만납니다.
시적인 모임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훔쳐온 돌

강형철

테렐지였던가 하여튼 몽골의 한 관광지에서

간밤에 잡았다는 노루를 구워먹었지

조그만 불구덩이를 파고 가져간 장작을 숯불로 만들어

징기스칸 보드카에 맘껏 먹고 마셨지

취하더군 정말 취했어

그렇지만 사실 나는 늘 그렇듯이

그 사람들에게 반한 게 아니라 그 술에 취한 게 아니라

해지기 전 그 개울가에 반해 있었어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개울가에서 주운 돌멩이에 반했었어

나는 그 돌들을 주머니에 몰래 숨겨두었지

술에 취해 어둠 속에 별이 떴을 때도

나는 조끼 안주머니에 넣어둔 돌을 매만지고 있었어

탁 트인 초원 어쩌구저쩌구 했지만

나는 그것보다 숲이 있고 물이 흐르는

해의 실체가 강림한 개울가에서

해의 실체를 만지작거린

그, 참으로 오랜만의 소풍이 즐거웠던 거야

그때 빛나던 돌이 정말로 좋았던 거야

짜잔, 나는 일하는 사무실로 가져와

그 돌을 전시해두었지 흐뭇했어

몽골이 바로 내 옆에 있으니

그런데 누가 훔쳐갔느냐고?

그렇지 않으면 그 골에 금이라도 박혔냐고?

아야, 그럼 왜 시까지 쓰냐고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로부터 일년이 지났는데

그 돌들은 돌처럼 꿈쩍도 안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냥 평범한 돌일 따름이라는 것이지

그냥 대학로나 종로에서 볼 수 있는,

돌들도 사람처럼 지가 어울려

빛나는 자리를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서

훔쳐온 돌만 남는 것 같아서

(문학동네 여름호)

시작노트-
관계를 떠나면 무의미한 실체만 남는다. 그때 실체는 존재론에서 말하는 무가 아닐까.

나는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사람들과 내가 만나는 모든 인연들을 가꾸려고 노력한

다. 우정도 옛날 텃밭에서 가꾸던 과꽃이며 내가 가진 유일한 재산도 그날 초가집에서 하얗게 뒹

굴던 박이다.

그날 함께 말라비틀어져 있던 박꽃처럼 나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없다. 관계의 망에서만 진

실이란 것도 명멸하는 것은 아닐지....

강형철 1955년 전북군산 출생. 시집<해망동일기> <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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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영문87배문철 | 작성시간 05.03.31 역시 선배님들이 이곳에 오시니 카페가 업그레이드 된 듯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참 숭실인들은 멋있습니다.
  • 작성자영문85성표 | 작성시간 05.03.31 진섭형이 했던 말 중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을 달라]라는 말이 생각나요. 어느 술자리였는데. 그 말이 생각나네요. 좋은 글 읽고 갑니다.
  • 작성자정외90임준우-쭈누 | 작성시간 05.03.31 참 멋진 시네요. 관계를 가져야 의미가 있는 것이겠죠. 참 멋진 시입니다.
  • 작성자사학89김병규 | 작성시간 05.04.01 "돌들도 사람처럼 지가 어울려 빛나는 자리를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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