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서양 치과의료의 상업화와 제도화
조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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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 치과의사의 뿌리 - 발치사와 외과치과의 3. 전문직업성과 상업화 - Painless Parker 4. 전문직업성과 제도화 – General Dental Council 5. 마무리 |
1. 머리말
“... 현재 양측은 업무방해, 명예훼손 등 여러 건의 고소·고발을 서로 주고받아 ‘치아전쟁’은 점입가경의 단계로 들어섰다. 치과계의 치부를 드러낸 진흙탕 싸움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환자다. 대외적으로는 국민 건강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밥그릇 싸움’이요, 환자들의 불신과 혼란만 키웠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이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 싸우고 있는 걸까... ‘치과 가기가 겁나.... 믿음이 안 가. 치과의사들, 다 똑같잖아’.
1990년대 한약분쟁과 2000년대 초 의약분업 당시 의사파업은 국가의 특정 보건정책에 대한 전문직종간의 이해관계 충돌에서 야기된 사건들이었다. 당시 수돗물 불소화사업을 둘러싼 찬반 논쟁도 있었는데, 치과계의 찬성 입장에는 직업적 이득보다 국민의 구강건강을 우선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2011년 내내 치과계를 뒤흔들었던 갈등과 대립은 뚜렷한 명분이 부각되지 못한 채 언론을 통해 증폭되면서 치과의사의 사회적 위상은 크게 추락하였다. 국민들의 시선은 따갑고 치과의사들의 자존감은 무너진다. 무엇이 문제의 근원인가? 법제도적 개혁과 본원적 성찰이 필요하다.
역사라는 거울 앞에 서면 과거와 미래가 서로에게 말을 건다. 중세의 이발외과의(barber surgeon)가 파리의 외과치과의(surgeon dentise) 피에르 포샤르를 낳았다면, 길거리 발치사(tooth-puller)는 20세기 초 미국 치과계의 이단아 ‘Painless Parker’의 원형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윤리와 영리가 교차했던 ‘아말감 전쟁’은 작금의 치과계 갈등을 예언했던 듯 하고, 19세기 말 미국 치과의사들의 해외 진출은 세계화 시대 의료시장 개방에 맥이 닿는다.
서양 치과의료의 역사에서 20세기 초는 그 이전 시기의 모든 문제가 집약적으로 펼쳐져 혼재된 상태에서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진 시기였다. 치아가 신체의 일부임이 비로소 인정된 것도, 치과와 의과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제출되고 실천되었던 것도, 개별 환자가 아닌 군대․ 학교․ 공장에서 집단을 대상으로 치과 프로그램이 실행된 것도 모두 이 시기에 비롯되었다. 특히, 치과의료의 노골적인 상업화(commercialization)가 절정에 이르렀고 그 폐해에 대해 국가와 사회가 개입하는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가 가동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2. 치과의사의 뿌리 - 발치사와 외과치과의
‘Dentist'는 서양에서 연원한 직업이다. 21세기 남한에서는 ’치과의사‘라고 부르지만 20세기 일본과 그 식민지에서는 흔히 ’사‘(師)를 빼고 ’치과의‘로 불렸고, 중국과 대만은 ’아의‘(牙醫)라고 부르는데 그 교육과정, 진료범위, 법적 지위는 서로 다르다. 19세기 중후반 동아시아에 전래된 서양 근대치과의료를 수용하는 언어와 제도가 나라마다 달랐던 탓이다.
유럽 12세기 후반, 교황이 수도승들의 관혈적 시술을 금지시키자 사혈(瀉血, blood-letting), 발치 등의 영역이 이발사들에게 넘어갔다. 14세기 이후 이발외과의는 길드로 조직화를 거쳐 외과의로 발전하면서 일부는 치과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었다. 그들이 주로 귀족 등 사회 상류층을 상대하였다면, 하층 서민들은 길거리 발치사나 돌팔이(charlatan, quackery)에 의존하여 치통을 해결하였다. 시골 장터에서 피에로 복장과 치아 목걸이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이를 빼고 약을 파는 떠돌이 야바위꾼(mountebank)이나 돌팔이는 당시 회화의 단골 메뉴였다. 화가들이 귀족의 초상화나 종교화를 벗어나 서민들의 일상에 주목하기 시작하던 계몽주의 시대의 소산이었다. 장터가 아닌 실내에서는 대개 이발외과의가 발치를 했다. 발치 후 빈 공간을 채워 넣으려면 정교한 도구와 손재주를 겸비한 이들이 제격이었다. 금세공업자(goldsmith), 대장장이(blacksmith), 시계제조업자(watchmaker)들이 인공치아를 제작, 공급하거나 직접 시술하기도 했다. 17세기 말 영국에서 등장한 'Operator for the Teeth'는 발치와 인공치아 수복을 모두 다루는 직종이었다.
유럽에서 ’dentist‘가 생겨난 과정을 주도한 것은 프랑스였다. 18세기 초 프랑스의 사회적, 정치적, 기술적 토양 속에서 파리를 중심으로 ’외과치과의‘(surgeon dentist)라는 새로운 호칭이 등장하였다. '외과치과의'는 피에르 포샤르가 개업 초부터 자기 자신에게 붙인 새로운 직업명이자, 그가 마흔 다섯에 탈고(脫稿)했던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외과학을 기반으로 치과 영역을 다루는 새로운 직역(職域)으로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려 하였다. 젊은 시절 도제(徒弟)로 쌓은 외과학 지식, 근 30년의 임상 경험, 뛰어난 손재주, 꼼꼼하고 치밀한 성품 등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녹여낸 이 책의 출간 자체가 아무도 자신민의 비법(秘法)을 공개하지 않던 당시 관행을 무너뜨린 획기적 사건이었다.
“…이론도 경험도 없는 자들이 발흥(勃興)하여 원칙 없이 함부로 시술함으로써 이 분야의 지위를 하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그들은 (충전재인) 주석이나 납 표면에 금박을 입혀 진짜 금(金)처럼 돈을 받았다…그동안 유능했던 선배들의 지식이 공개되지 않고 다 사라져 버린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내가 끊임없는 시술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쌓고... 고통과 밤샘의 열매를 모두 공개하는 것은, ‘외과치과의’가 되려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자신의 치아를 잘 보존하려는 사람들…무엇보다도 공중(public)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려는 소망에서이다...”
이처럼 그는 당대의 지식과 치료법을 ‘과학적으로’ 집대성하였고 동업자들의 비윤리적 행태를 비판하였다. 서구의 치과계가 전문직화(professionalization)에 매진하며 사회적 지위 확립을 열망하던 20세기 초, 포샤르의 원고(原稿)가 발굴, 공개된 것을 계기로 재발견된 그의 존재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과학적 지식, 직업윤리, 소명의식 등을 추구했던 그를 ‘근대 치의학의 개척자’로 옹립함으로써 치과 전문직의 시원(始原)은 200년을 더 거슬러 오를 수 있었다.
3. 전문직업성과 상업화 - Painless Parker
서양에서 산업혁명 이후 설탕이 싸게 공급되면서 서민층과 농촌에 ‘충치’가 늘어나고 치과의사도 많아졌다. 법․제도적 규제도 직업윤리도 없이 부당 시술로 고수익을 올리는 돌팔이와, 도제(apprentice) 등을 거친 유자격자를 구별할 기준조차 없는 혼돈의 시대였다. 혼탁한 경쟁과 무질서를 바로 잡고 동업자들의 자격 기준을 정하며 정부와 사회의 인정을 받고자 치과의사들은 조직을 만들었다.
이 시기 미국 치과의료는 과학적 기반이 취약하고 ‘기예(art)’, 즉 기계적 정교함에 치중하여 ‘mechanical dentistry’라고 불리웠다. 미국 치과의사들은 전문화의 발걸음이 빨랐다. 1839~40년 시기 볼티모어에서 전국조직(American Society of Dental Surgeons), 학술지(American Journal of Dental Science), 교육기관(Baltimore College of Dental Surgery)이 모두 만들어졌다. 그러나 볼티모어치과대학 설립의 전사(前史)에 잘 드러나듯이 ‘의과’에게 ‘치과’는 아직 과학(science)이 아니었다. 첫 출발은 메릴랜드 의과대학에 치과학 교실 설치를 청원하였으나 “장인(匠人)의 분야인 치과시술은 의학교육이 필요 없으며, 치아의 질병이 전신 질병과 관계 있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되어 차선책으로 치과대학을 만든 것이었다. 이에 대한 평가는 둘로 갈린다. 대부분의 치의학사(齒醫學史)는, 결과적으로 ‘치과’가 독자적 자치적 분야로 발전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이 사건을 ‘역사적 거부’(historic rebuff)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1920년대 구강과 운동 측에서는 의학의 전문과가 되는 길을 원천봉쇄하는 결과를 초래한 1840년의 독자적 치대 설립을 ‘범죄(crime)'라고 혹평하였다.
1876년 하버드대학교 연 4개월 과정으로 치과대학이 설립되었다. 기존 치과대학의 기술(practice) 교육과 차별화하여 학술(academy)을 강조하고, 교수는 의대 출신으로 국한하였다. 자격증의 약어(略語)를 기존의‘D.D.S. (Chirurgiae Dentium Doctoris)’와 동일하게 ‘D.D.S. (Scientiae Dentium Doctoris)'으로 하려 했으나 본부에서 ‘치과’를 과학(science)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 명칭을 승인하지 않아 결국 ‘D.M.D. (Dentariae Medicinae Doctoris)’가 되었다.
상업화는 당시 치과계의 키워드였다. 치과대학은 입학이 쉽고 기간도 짧으며(2년), 시설이나 교수진은 빈약하지만 대학의 주요 수입원인 임상실습(pay clinics)을 통해 훈련이 가능했다. 1890년 이후 상업적(commercial) 치과대학이 급증, 졸업장을 헐값에 해외에까지 판매하기도 하여 ‘분주한 학위 제조창(busy diploma mills)’이라고 불리웠다.
아말감 전쟁(amalgam war)
유럽에서‘Royal Mineral Succedaneum’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들어온 아말감은 싸고 다루기 쉬워 무자격자들에게 대인기였다. 미국치과의사회(American Society of Dental Surgeon)는 금박(金箔, gold foil) 충전의 아성을 위협하는 아말감 시술을 ‘malpractice’로 규정하고 이를 사용하는 회원을 강제로 탈퇴시키려 하였으나, 압도적 다수가 아말감을 애용하게 되자 결국 조직 자체가 해산되고 말았다(1856). 이 무렵 경화고무를 denture base로 쓰려는 치과의사들은 특허를 가진 ’Goodyear Dental Vulcanite Company'와 계약을 맺고 건(件)마다 로얄티를 지급해야 했다. 일부 치과의사들은 야외에서 판을 벌여 군중을 끌어 모아 무료 발치 시술을 연출하거나 쿠폰을 나누어 주었다. 범람하는 의료광고, 저수가 경쟁, 환자 유인 등이 횡행하는 것은 오늘날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아말감 전쟁으로 미국치과의사회 해산 3년 후인 1859년에 미국치과의사협회(ADA)가 창립하면서 주요 과제는 회원 관리였다. ADA는 윤리강령을 제정(1866)을 제정하여 회원들의 광고 및 환자유인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 원칙은 1977년에 대법원 판례로 무력화되기까지 111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 당시 치과대학은 “꽃이 향기로 벌을 끌어들이듯 성심껏 치료하면 고객은 자연스레 찾아온다. 치과의사가 고객(환자)를 찾아가는 것은 비윤리적(unethical)”이라고 가르쳤다. 20세기 치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G.V. Black은‘치과 광고는 전문가주의 결핍의 증거이다. 전문가는 판매자가 아니라 봉사자’라고 하였다. 20세기 들어 미국 각 주는‘dental practice laws’를 채택하여 광고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치과의사회에 가입하지 않는 한 윤리강령은 무용지물이었다. 수많은 치과의사들이 법을 어기고 요란하게 광고를 하여도 주(州) 정부의 통제는 허술하였다. 사립 치대들의 교육과정이나 학위는 표준화되지 않았고 영리 목적의 잡지들까지 가세하여 상업화가 만연하였다.
Painless Parker
캐나다 태생의 파커(Edgar R.R. Parker, 1871~1951)는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지금의 템플치과대학) 1892년 졸업생 4명 중 1명이었다. 고향에서 개업하면서 한 화가에게 틀니를 해 주고 간판을 그려 받아 달았는데 누군가가 그 날로 떼어가 버렸다. 다시 뉴욕에서 개업하였으나 찾아오는 환자가 전혀 없는 채 여러 달 버티다가 결국 작심하고 25분짜리 대중 연설을 연습한 후 길거리로 진출하였다. 이후 50년 이상 확장일로를 걷게 되는 Painless Parker‘s Dental System의 첫걸음이었다.
무희(show girls)들의 노래와 춤, 악단(band) 연주에 군중들이 모인다. 말이 끄는 마차(wagon) 중앙에는 치과치료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흰색 프록코트에 값비싼 모자를 쓴 파커가 등단하여 치아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연설(dental sermon)을 한 후, 아프지 않게 (painless) 이를 빼 주는 비용이 50센트인데 만일 아프면 5달러를 준다고 장담한다. 그 자신이 'hydrocaine'이라고 이름 붙인, 코카인을 섞은 용액을 환자에게 제공한다. 사람들을 유인했던 요란한 나팔소리는 환자의 신음소리를 가려주고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는 역할도 겸한다. 파커r의 발 밑 양동이에는 그동안 발거한 치아가 가득하다. 그는 357개의 치아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하고 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어느 하루 동안 발거했다는 치아의 총수였다. 목걸이와 양동이는 지금도 템플치과대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0세기 초 캘리포니아로 이전한 그는 매물로 나온 서커스단을 통째로 사들였다. 순회 서커스와 치과치료를 결합한‘Painless Parker's Dental Circus/System"은 승승장구하였다. 비행선을 이용한 대형 광고, 유명한 권투선수의 앞니에 다이아몬드 부착, 군중 앞에서 하마와 사자의 이빨을 치료하는 이벤트도 벌린다. 그리하여 서부 해안을 따라 치과의원 38곳, 고용 치과의사 70명, 자기 브랜드의 치약 판매 등을 포함하여 연매출 3백만 달러의 기업형 치과 체인을 운영하게 된다. 고용 치과의사 중에는 알콜 중독으로 폐인이 된 동료들을 재활시켜 채용한 사례도 많았다.
그에게 치과계의 격분이 집중되었다.‘전문직의 존엄에 대한 위협’, 상도의와 진료윤리를 파괴하는 돌팔이, 야바위꾼, 사기꾼‘으로 공격받고 고소와 고발이 난무하였다. 급기야 캘리포니아 주정부 Dental Board는, 그가 내세우는 ‘painless’가 허위광고로 위법이라는 이유로 면허를 취소하였다. 이에 그는 재판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법적으로 'Painless'로 개명하였다. 치과의사회는 물론 그 누구도 자신의 본명(本名)을 알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에 면허는 다시 발급되었다. 그를 소재로 한 영화(Pale Face, 1948, Bob Hope 주연)가 제작되고 1952년 그의 부고(訃告)와 호의적인 기사가 타임(Time)지에 실릴 정도로 유명 인사였던 그에 대해 치과계와는 다른 평가도 공존한다. “노골적 광고로 품위유지나 법의 경계선을 넘나들긴 하였으나 서민층에게 치아위생교육과 저렴한 비용으로 치과진료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고, 환자 편(patient advocacy)에 선 치과의사, 대중에게 치과를 가져간 십자군, 치과계의 헨리 포드, 경쟁과 group practice 개념을 도입한 최고의 사업가...”
ADA의 광고 금지 원칙은 1977년 Federal Antitrust Laws에 반하는 것이 되어 개정되었다. 이후 오히려 파커가 시대를 앞선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미국 치과의료는 급속히 상업화되었으며, 그 이면에는 치과보험에 가입할 수 없는 저소득층, 이민자 사회에 무면허 치과, 길거리 치과(street dentistry)가 되살아나고 있다.
시설과 내용이 부실한 상업적 의과대학이 수십군데 퇴출되고 기초의학교육과 연구가 심화되었다. 그러나 의대에서는 여전히 구강병이 전신건강에 직접 관련됨을 인정하지 않고 치과는 기계적 기술일 뿐 의학의 한 분과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다루지 않고 있었다.
4. 전문직업성과 제도화 – General Dental Council
산업화가 앞섰던 영국에서는 인구의 증가, 설탕 소비 증가, 치과시장의 확대, 노동자계층의 치과진료 수요 급증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더 두드러졌다.
19세기 영국 치과계는 외과적 배경을 가진 소수의 상층부 치과의사(dental elite) 조직과, 아예 의과와는 별도의 독자적 자치(autonomy)를 지향하는 다수의 대중 조직으로 나뉘어 있었다. 1842년 런던에서 치과의사회 결성 시도가 있었으나, 상층부 치과의사들은 평판이 낮은 동업자들과 동석허기를 꺼려 무위에 그쳤다. 1856년 왕립외과학회(Royal College of Surgeons of England, RCS)의 후광을 업은 상층부 조직(Odontological Society of London)과 자치를 도모하는 조직(The College of Dentists)이 거의 동시에 결성되었다. 전자(前者)가 정치적인 주도권을 발휘하여 치과의사 자격증(License in Dental Surgery, LDS) 수여의 주체는 왕립외과학회(RCS)가 되었다. 이후 두 조직은 합병과 분열을 거쳐 영국치과의사회(BDA)로 이어졌고, 치과의사법 제정(1878)으로 치과의사를 관장하는 ‘Dental Register’가 General Medical Council(GMC) 에 설치(1879)되어 ‘의과’의 통제가 유지되었다.
왕립외과학회의 권위 위축과 GMC의 지위 상승, 대학의 부상(浮上) 등으로 LDS의 배출이 증가하였으나 압도적 다수의 무자격자, 즉 미등록 치과시술자들은 치과의사법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그들 중 최대 조직인 Incorporated Society of Extractors and Adaptors of Teeth(1893)는 기관지‘Mouth Mirror'를 발간(1906)하고 Incorporated Dental Society(1911)로 이름을 바꾸면서, 소위 ‘license dentist, theoretical dentist’에 대적하는 ‘practical dentist’로 강력하게 단결된 조직이었다. 그들은 치과의사법 개정(1921)에 따라 설치된 Dental Board(1921)에 구성원 전체가 통째로(en bloc) 등록하는 성과를 거두고 영국치과의사협회(BDA)의 주류가 되었다.
이후 General Dental Council(1956)이 구성되어 치과의사 및 치의학교육의 평가 ․ 관리가 체계화되고 비로소 사회제도적 자치를 확보하였다.
국가와 치과 전문직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과 더불어 공중보건사업(public health work)에의 참여 역시 치과의료 제도화의 중요한 측면을 구성한다. 20세기 들어 X-ray, 국소마취, 충전재(아말감), 전기 드릴의 도입으로 근대 이전‘발치와 틀니’(blood and rubber)에 국한된 영역을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상류층 개인 고객에 한정되지 않고, 저렴한 비용으로 노동계층에게 아말감 충전을 시술하고 학교치과서비스(school dental service) 제도를 도입, 실천하면서 영국 치과의사의 정체성은 확립되었다.
오랫동안 치과치료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계층에 한정된 영역이었다. 군, 산업체, 학교 등 인구집단의 구강건강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관심과 제도적 접근이 시작된 것은 백년 남짓에 불과하다. 지역과 나라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이 시기는 치과의사가 전문직(profession)으로 발전해 온 과정과 중첩된다.
20세기 초 서구에서 치아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던 계기는 식민지 전쟁이었다. 보어(Boer) 전쟁 시기 탄환을 장전하려면 탄약통(power cartridge)의 말단부를 치아로 물어 끊어야 했기에 구강병으로 인한 영국군의 병력 손실은 남아프리카 전장(戰場)의 핵심 문제였다. 1900년부터 본국에서 치과의사를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1921년 치과의사법 개정으로 Army Dental Corps가 창설되었다. 미국은 남북전쟁기에 모병(募兵) 대상 중 다수가 치아, 특히 앞니가 건강하지 않아 귀향되는 사례가 많았다. 남군(南軍)은 1864년, 북군은 1901년에 치과의사를 군에 배치하면서 육군치무병과가 설립되었다.
20세기 초, 강산(强酸)을 취급하는 폭탄 제조 노동자의 치아부식증(dental erosion), 조퇴와 결근으로 공장 근로자의 생산력을 떨어뜨리는 치통도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당시 영국의 한 회사 의무실에 근무하던 한 의사는 “차라리 나를 내 보내고 그 자리에 치과의사를 고용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할 정도였다.
빈민층 아동의 열악한 구강상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영국에서 1908년 케임브리지의 학생구강검진 등으로 시작되어 학교치과서비스(school dental service) 제도로 발전하였다. 치과의사는 집단의 ‘입’을 감시하는 ‘이상적인 감독관’ 역할을 하였다. 영국에서 1908년 케임브리지의 학생구강검진 등으로 시작된 학교치과서비스(school dental service)는 치과계에서 등록자와 미등록자간의 경쟁의 장(場)이 되었으며. ‘dental dresser’라는 새로운 직업군의 출현이 치과의사의 조직적인 반대로 무산되기도 하였다.
4. 마무리
근대 시기 서양의 치과의사들은 안팎의 다양한 도전에 대응하면서 부침을 거듭하였다. 체계화된 지식과 자격의 독점, 공인된 수련과정, 자율성(autonomy), 직업윤리, 공익에 대한 소명의식 등을 갖출 때 사회는 비로소 전문직으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사회적 권위와 경제적 안정을 보장한다.
“우리나라의 치과의사는 유럽이나 미국과는 달리 치과의사의 전문화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했던 경험이 일천하다…그들은 이미 전문직으로 인정받고 있는 치과의사를 직업으로 선택했을 뿐이며, 그러한 직업 정체성이 확립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었는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2011년 내내 한국의 치과계는 분망(奔忙)했다. 해방 이후 모든 언론이 치과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것은 아마 최초일 듯하다. 2011년 10월 18일 국내 치과대학장 및 치의학전문대학원장 협의회는‘치과진료 상업화 현상에 깊은 자괴감과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눈앞의 이익 추구, 시장 논리나 상업 논리에 매몰... 과잉진료, 불법진료 유혹’을 경고하였다.
150년 전 서양 치과의사들의 위기의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혼탁한 경쟁과 무질서를 바로 잡고 동업자들의 자격 기준을 정하며 정부와 사회의 인정을 받고자 하였다. 20세기 들어 서양에서 치과의 전문직화, 상업화, 제도화 과정은 서로 맞물리면서 전개되었다. 사회제도적 규제가 느슨했던 미국의 치과의료는 영리화와 양극화로 나아갔고, 영국의 치과의사들은 학교 등 공중보건사업에 참여하고 정부, 시민사회와 함께 치과의료의 질(質)을 평가·관리하는 시스템 - General Dental Council을 운용하면서 그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1980년대 영국 정부는 국민 건강의 보호(patient protection)를 위해 치과의 과잉진료 실태를 조사한 바 있다 우리나라 의료법 제1조는 ‘의료의 적정을 기하여 국민의 건강을 보호 증진함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과잉 진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것임에도 이를 숨기고 환자들의 이익이라고 호도하는 것은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법적 책임의 문제”이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희망적 대안은 아직 공론화되지 않았다. 인터넷에는 치과 과잉진료에 대한 네티즌의 불만과 경고가 난무한다. 한 개업 치과의사는 이렇게 단언한다.
“...우리나라 치과 환자들이 받는 치료는 불필요하거나 적절치 못한 시기에 받는 것들도 많다. 양심도 없는 것 같다. 요즘 과잉진단이 얼마나 많은지... 멀쩡한 치아에 레진치료를 아무리 싸고 잘해줬어도 책임을 물어야 하고, 살릴 수 있는 치아를 뽑고 임플란트를 하자는 무책임한 진단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치과의사들 스스로 정화되지 못한다면 이제는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 .
최근 한국치의학교육학회와 한국치의학교육협의회의 공동학술대회(2011.24)는 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서구 의료전문직의 자율규제 문화와 정교한 제도적 장치는 비록 우리 현실과 간극이 있으나 치의학교육 및 치과의료계의 ‘공적 영역’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진지한 공감대를 이루었다. 외부의 조언은 진작 있었다.‘(치과)의사의 질을 평가하는 제도를 만들어 환자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힘써야 한다’
국가, 국민 또는 치과의사 조직의 문화와 성격이 치과의료의 내용을 결정한다. 한국의 치과의사는 확산되는 상업화의 질곡을 극복하고 정체성과 전문직업성을 내면화하면서 국민의 구강건강을 위한 노력과 열정으로 공공의 가치를 회복하여야 한다. 사회에서 심화되고 있는 구강건강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한 조사, 연구, 교육, 실천, 정책개발, 제도화 등은 전적으로 치의학과 치과의사의 책임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