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代醫齒原論(1)
이 글은 “中原 泉. 現代醫齒原論 - 齒科醫師への アプローチー. 書林. 1979”의 머리말, 제1장-제3장을 번역한 것이다. 일본에서 명치유신이후 齒科醫學과 醫學간의 대립, 갈등관계를 중심으로, 치과의학의 正体性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저자의 자세를 담고 있다 저자 나까하라 센(中原 泉)은 1941년 일본 鎌倉출생, 1965년 일본치과대학 졸, 1979년 일본치과대학 교수, 현재 일본치과대학 新渴치학부장. 저서로는 新齒科槪論, 新常用齒科辭典(감수저), 標準齒科用語集(감수), Dental Panel 全 8卷(감저), 浮世繪로 보는 齒科風俗史 (감저) 등이 있다(편집자 註).
머릿글
저자가 치과의사 면허를 받은 지 십 수년이 지나는 동안 늘, “치과의사란 무엇인가?”라고 自問하여 왔다. 스스로 치과의사이면서도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해 부끄러운 느낌을 禁하지 못해 각종 專門書籍을 찾아보았으나, ‘치과의사’에 대해 논한 서적이 보이지 않아 장벽에 부딛히곤 했다. 이러한 모색 중 해답을 얻을 끈을 어디에서 구하면 좋을지 스스로 밝혀냈다. 그것은 지나간 곳, 우리 생각이 닿지 않는 먼 明治初期로 소급하여야만 하였는데, 그곳에 齒科의 原點이 있고 齒科醫師의 原型이 있었다. 醫科와 齒科가 분리되었던 그 시대는 그동안 터부시되어 언급되지 않았던 과거였다. 말하자면 묻혀져 있던 치과의 根源(root)을 探索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잊혀져 있던 原點과 原型을 복구하고자 하는 작업은 바로 지금의 齒科와 齒科醫師를 말하는 것이 된다고 본다. 현재란 과거가 쌓여 온 결과이므로,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알게 됨으로써 지금의 치과의사가 이렇게 된 것이라는 해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時代錯誤的이라는 비난을 각오하면서, 醫科齒科問題의 근본이 되는 소위 “醫科 齒科 一元論 二元論”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현대 치과의사를 향한 과감한 接近(approach)을 試圖했다. 이로서 치과의사의 實像을 비추어보고 현대의 시점에서 본 ‘齒科醫師論’이라고 할만한 것을 부각할 수 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 나름의 信條와 持論을 숨김없이 투영하여 치과의사가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독자에게 호소하고 치과의사의 意識革命을 촉구하고자 하는 기대도 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독자의 감성과 판단에 속하는 문제로 저자의 追窮으로 가능하지 않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第 1 章. 왜 “齒科醫師”인가?
1. 醫齒一二元論의 追跡
왜 “치과의사”라고 부르는가? 內科를 표방하거나 眼科를 개업한다고 굳이 內科醫師나 眼科醫師라고 부르지 않는데, 왜 齒科는 齒科醫師인가? 이러한 소박한 의문을 제기하면 안 될까? 우선, ‘醫學部를 나왔으니 의사이고, 齒學部 일본의 교육체계상 ‘OO치과대학’과는 달리 ‘OO大學 齒學部’로 되어 있는 곳이 많음(역자 註). 를 졸업하고 치과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면허자격을 얻었으니 치과의사’라는 답변이 있을 수 있다. 이에 충분히 납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남는다.
의사는 흔히 通稱으로 內科醫, 眼科醫라고 하지만 法規상으로는 ‘醫師’로 總稱하는데, 치과의사의 公式 명칭은 ‘치과의사’이다. 의사나 치과의사나 똑같이 인체에서 발생하는 질병을 고치는 醫者 우리말로 의료인에 해당(역자 註). 인데 어째서 치과의사만 “치과”의사인가 하는 의문을 벗어 던질 수 없다. 저자는 이 책를 통해 이러한 의문을 품고 있는 독자에게 그 답을 제시하고, 또한 전혀 의문을 느끼지 않던 독자에게는 自問해 보도록 하려 한다. 일견 愚直해 보이는 이 질문 속에 치과의사에 관계된 모든 문제가 凝縮되어 있다. 비록 意識하지 않는다 해도 여기에는 우리나라 의학계 현안의 과제이고 치과의 근본체계를 規定하는 기둥이 되는 중요한 주제가 내포되어 있다. 그 주제는 바로 “醫科 齒科 一元論 二元論”이라는 2대 基本論을 분석, 해명하는 것이다.
2. 時代錯誤라는 非難에도
‘醫齒 一二元論’ 문제라고 하면, “무엇을 이제 다시...” 하고 失笑하는 경향도 있을지 모르겠다. 확실히 어떤 면에서는 時代錯誤(anachronism)적인 냄새가 푹푹 나는 古色蒼然한 인상이 없지 않다. 또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며 아득히 먼 明治시대에 벌써 결정되어 버렸던 일로 지금 다시 云云할만한 일이 아니’라고 하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어떻게’ 결정이 되었던 것인가? 醫齒二元化로 결정되었다는 結論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경위로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顚末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眞相을 이해할 때 비로소 이 문제가 완전히 終熄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 현재의 제도상 醫學部와 齒學部가, 또 의사와 치과의사가 각각 整然하게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終熄宣言이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는 견해에도 一理가 있다. 그러나 이 확연해진 체제의 根底에 깔린 亡靈같은 문제가 아직 숨쉬고 있음을 우리는 종종 느끼지 않는가. 보통 事象의 피상적인 면에만 注意하면 根本의 原發 病巢를 놓치게 된다. 그 점을 깨달을 때, 一見 散發적인 사건들도 실은 一二元論이라는 같은 뿌리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形而下學的인 制度論에 執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의학과 의료영역에서도 이 굴절된 기본문제에 대한 再認識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直視하여야 한다. 단적인 예로 口腔外科에 관계된 境界領域(grenzgebiet)의 문제를 들어보자.
3. 境界領域(grenzgebiet), 醫科 對 齒科
이는 臨床開業醫보다 대학병원 수준의 口腔外科 專門齒科醫師에게 더 절실한 문제이다. 그들은 소위 의과에 대한 最前方의 베테랑(veteran) 戰士로서 口腔外科영역을 지키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 영역에 연결되는 것이 顎顔面外科영역으로 지금은 여기가 醫齒의 隣接地帶인 것이다. 여기에는 이비인후과, 성형외과, 齒科口腔外科 등 각 방면에서 적극적인 侵攻이 이루어지며, 여기에 발생하는 질환의 치료범위의 정도를 醫齒의 공통업무로 볼 수 있다. 四方에서 이 한정된 영역에 몇 개의 메스(mess)가 교차하는 것이다. 여기에 빠듯한 경계선을 둘러싸고 싸움이 전개되고 있다. 같은 의사인 이비인후과, 성형외과는 서로간의 力關係 정도에 그치지만, 齒科口腔外科의 경우에는 서로 면허자격이 다른 것에서 業務權과 업무범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론상으로 齒科醫療行爲란 “齒科醫師의 齒科醫學的 判斷과 技術이 없으면 人體에 危害를 끼치거나 또 危害를 끼칠 우려가 있는 一體의 行爲”로 해석하며, 위 문장에서 ‘齒科’ 자구를 빼면 醫療行爲가 된다. 이 두 행위가 중복되는 영역은 치과의사가 행하든 의사가 행하든 각자의 판단과 기술에 의해 危害를 끼치지 않고 危害를 끼칠 우려가 없다면 兩側 모두 손을 대어도 된다. 그 경우 진료부위가 같거나 또는 진료내용에 아무 차이가 없어도, 법적으로 치과의사가 행하는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치과의료행위이고, 의사가 행하는 경우는 의료행위라고 판단된다. 즉 동일부위, 동일진료이어도 시술자에 따라 별개의 행위로 보며 免許자격에 따라 행위의 종류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醫, 齒 雙方의 중복진료에도 상호 業務獨占과 無資格者 禁止規定에 저촉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4. 口腔外科醫師와 우리의 業權
그러나 이 定議는 극히 추상적인 표현에 그치고 있다. 실제 ‘의료행위와 치과의료행위의 범위는 무엇인가? 두 행위가 중복되는 영역은 어디인가? 구체적으로 어디까지가 치과의료행위이고 어떤 질환이 치과구강외과 담당인가?’ 등에 대한 것은 규정이나 정의만으로 명확히 되는 것은 아니다. 의료행위는 複雜多岐하고 의학의술의 進步와 時代에 따라 그 내용이나 범위가 변해 왔기 때문에, 구체적 개념을 확정하여 정의하기가 극히 어렵고 타당성이 缺如되어 明文化할 수 없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그 때마다 구체적 사례에 따라 그 시대의 사회적 通念 등에 비추어 判定하게 된다.
약 30년 전에 다음과 같이 厚生省 醫務局長의 回信이 있었는데, 이것이 두 행위의 범위에 대하여 언급했던 거의 유일한 公的規範이라고 할 수 있다. 후 厚生省醫務局長回信(1949年 1月 21日, 醫發 제61호) 拔齒, 齲蝕治療(充塡技術에 속하는 행위는 제외), 치주질환 原文은 齒肉疾患으로 치주질환(periodontal diseases)에 해당한다(역자 註) 치료, 齒髓炎치료 등, 소위 口腔外科에 속하는 행위는 齒科醫療行爲인 동시에 醫療行爲이다. 이는 齲蝕, 치주질환 및 치수염치료를 구강외과행위로 보는 등 치과의학적으로는 珍奇하고 粗惡한 내용이지만, 要는 소위 구강외과에 속하는 행위는 重複行爲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해석은 死文化된 과거의 것으로, 시대가 변한 지금 구강외과의 치료범위는 치아 및 그 주위조직과 연관이 없더라도 顎顔面에 생기는 질환에까지 미치고 있다. 치과의학이 발전하면서 이처럼 구강외과에서 악안면외과로 이행하였고 의료기술의 향상으로 치료범위도 확대되었다. 인체에 경계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구강에서 악안면영역까지 침범한 질환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의료인의 메스(mess)가 중도에서 정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방향 醫師측(역자 註) 으로부터의 접근도 마찬가지여서, 서로 경계침범의 두려움을 품고 있어 상대방에 대해 敬意와 良識을 가지고 처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경계영역을 하나의 科에 占有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상호간에 미묘한 해석의 차이를 가진 채 앞으로도 이 중복지대에서 더욱더 치열한 攻防이 진행되면서 進退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의사와의 경쟁문제는 임상개업치과의에게도 관심이 적은 문제는 아니지만 구강외과의사에게는 守備範圍에 관계되는 중요한 문제이고, 마치 漁民의 200海里 문제처럼 生存權을 둘러싼 싸움이다. 이는 치과의사의 業權을 규제하는 문제에 연결되고 나아가 전체 치과의사像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이 하고 있는 진료범위에만 눈을 두는 것이 아니라, 齒科專門醫에 의한 진료를 자신의 문제로서 고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對의과의 ‘業界 代表’격인 口腔外科에 무관심한 것은 하늘에 침을 뱉는 것과 같은 행위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치과의사 全體의 지원이 없는 고독한 싸움을 구강외과의사에게 지우지 않아야 한다.
5. 하나의 몸에 두 종류의 醫療人
醫, 齒의 경계영역(grenzgebiet)에 대해 너무 장황하게 언급한 것은, 이 문제가 우리나라 醫齒제도의 문제점을 선명하게 象徵하는 구체적 사례인 때문이다. 인체에 베르린(Berlin)장벽과 같이 線을 긋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法的으로는 두 종류의 의료인에게 진료를 허용한 것에 이 문제의 根源이 있다. 두 종류의 의료인이 있는 것, 이것이 바로 ‘醫科 齒科 一元論 二元論’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서 兩論의 뜻을 설명해 보자. ‘醫齒一元論’이란 의학에는 2종류가 없으며 치과는 의과에 屬하여 한 몸(一本化)일 뿐이라는 견해로 ‘合流說’이라고도 한다. ‘醫齒二元論’은 치과는 그 특수성 때문에 의과와는 어디까지나 분리, 독립해야 한다는 견해로 ‘獨立分科說’이라고도 한다. 즉, 의과-치과의 본연의 자세에 관계되는 2개의 對立하는 입장을 의미한다. 현재 우리나라 제도는 後者인 二元論에 의거하고 있다. 이러한 原論문제는 결코 終熄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우리는 현재의 제도가 치과의사의 心象에 갖가지 영향을 미침으로써, 정신구조에 미묘한 陰影을 초래하고 있음을 自覺해야 한다. 의사 측은, ‘齒牙따위는 齒醫者 치과의료인(역자 註) 에게 시켜도 좋다’는 우월감과 더불어 全身을 領有하고 있으면서 一部인 치아나 구강영역을 讓渡하는 것에 초조감을 느끼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치과의사 쪽은 심각하다. 즉, 엄연히 顎骨에 植立되어 있고 주위조직을 통해 전신의 대사를 뒷받침하고 있는 人體器官임에도 불구하고, ‘입안에 낚시바늘처럼’ 엉뚱한 異物같은 치아 - 이런 잘못된 이미지(image) 때문에, 輕視되고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 인체의 한정된 일부분만 담당할 수밖에 없다는 자격지심,
한편 裏面에는 치아와 구강이라는 “聖域”을 占有하고 있다는 自負心 등 상당히 굴절된 심정을 보이고 있다. 이는 二元制度의 근본적인 無理와 矛盾이 만들어 내는 歪曲이라고 할 수 있기에 이 제도가 계속되는 한 영원히 終熄되지 않을 문제인지도 모른다. 바로 여기에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현대 치과의사의 苦悶이 있다.
6. 消失되었던 屈辱時代
여기서 저자는 마치 돈키호테처럼 치과의사의 고민이라는 커다란 風車에 挑戰하였다. 우선 현대 치과의사의 精神構造가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밝혀내고자 치과의 歷史를 더듬게 되었다. 그러자 문제의 明治 30年代 明治維新(1868년)을 기준으로 1898년-1907년(역자 註) 가 마치 못이 빠진 듯 漏落되어 있음을 느꼈다. 본래 齒科醫學史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하는데 거의 空白이었다. ‘역사가의 怠慢이 아닌가’ 하고 분노를 느꼈으나 너무 부자연스러웠기에 혹시 意圖的인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옛 선배들(先人)이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이 원론문제를 무시하였다면 과연 당시의 기억이나 기록을 그대로 둘 수 있었을까? 故意로 은폐, 抹消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생생한 상처를 언급하는 것보다 시간이 조용히 흐르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 때문인지 요즘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없고 젊은 치과의사중에도 一元論, 二元論의 단어조차 알지 못하는 자가 적지 않다. 왜 그처럼 忌避하였던 것일까?
나중에 서술하겠지만 醫齒分離에 얽힌 사연은 당시의 치과의사에게 受難과 힘겨운 鬪爭의 역사였다. 그들은 그 세월을 迫害와 屈辱의 시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과연 생각하고 싶지 않은 過去인까? 저자는 여기에 현대 치과의사의 정신의 底流에 괴어있는 의식 - 醫師콤플렉스(complex)의 根源을 들여다 볼 수 있다.
7. 齒科의 터부에 접하다
입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의사에 대한 없애버릴 수 없는 劣等感은, 지금도 많은 치과의사의 마음에 어렴풋이 그림자를 짙게 하고 있다. 이것은 어디에서 起因하는 것인가 - 저자가 진작 품어왔던 의문의 실타래가 여기에서 풀린다고 본다. 초창기에 全身에 젖어 있던 劣等意識은 그 후 치과의사의 신분이 상승하면서 차차 없어져 왔으나, 일부는 細菌처럼 깊이 沈潛한 채 본의 아니게 오늘날까지 棲息하여 왔던 것이다. 말하자면 ‘歷史에서 由來하는 先天性 醫師콤플렉스’라고 할만한 病이었다. ‘이것은 치과의사의 터부이니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할 수는 없다. 스스로 부끄러운 부분을 파헤치는 태도가 꼭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병의 深部에 빛을 비추지 않으면 치과의사의 올바른 全體象을 파악할 수 없다. 우리는 虛僞虛飾없이 있는 그대로의 과거를 이해하여 정확한 판단과 평가를 내려야만 한다. 그것이 오늘 치과계 형성의 기초가 되는 轉機(epoch)가 되면 더욱 좋겠다.
그러면 여기서, 선배들의 마음에서조차 削除되었던 시대를 發掘하여 당시 치과의사를 둘러싼 환경과 정신풍토를 분석하고 어떻게 하여 치과의사가 탄생하였는가를 앎으로써, 현대 치과의사가 살아남는 所以를 규명해 보자. 이것은 歷史的 觀點에서 현대를 돌아보고 또 현대의 시각에서 과거를 再評價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당시 선배들의 노력을 오늘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 당시의 사정을 접하지 못했던 우리로서는, 이 문제를 직접 다루었던 선배들의 苦難을 헤아리기 어렵다. 또한, ‘지금 우리가 과거 선배들의 꿈이었던 齒科醫師像에 맞게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불안감도 있다. 선배들이 오늘의 우리를 보면서, ‘이런 치과계가 아니’라고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는다고 斷言할 수 없다. 그것 때문에라도 선배들이 후세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었고 무엇을 남겼는지 探索해야 한다. 선배가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 후배에게 책임을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후배에게도 돌아가신 선배에 대한 責任이 있다. 그 책임을 달성하기 위해, 특히 齒科大學 學生과 젊은 치과의사들이 과거와 현재의 치과의사의 構圖를 踏査하여 앞으로 치과의사가 해야 할 자세를 진지하게 追求하기를 기대한다.
저자의 작업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적은 양의 資料에 매달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나마 당시 치과계의 基礎를 쌓아올렸던 사람들의 喜怒哀樂은 悠久한 歷史의 파도 속에 사라져 버렸고, 사건의 結末만 形骸처럼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저자의 글은 어쩔 수 없이 結果論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선배들의 辛酸을 가벼이 云云하는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批評은 하되 非難은 하지 않는 자세를 堅持하려고 한다.
第 2 章. 醫齒分水嶺 前時代 (1868년-1874년)
1. 西洋醫術許可의 布告!
의과와 치과는 어느날 갑자기 분리된 것이 아니다. 明治元年(1868년)부터 약 40년에 걸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도중에 갖가지 曲折을 거치면서, 드디어 분리되는 상황이 무르익으면서 눈에 보이는 龜裂이 擴大되었던 것이다. 그 균열이 明治 30年代에 이르러 일거에 표면화하였는데, 그때까지 20년간 1875년-1897년(역자 註) 을 저자는 醫齒分水嶺時代로 부르고자 한다. 소위 떨어지는 비를 좌우로 가르는 산마루와 같은 시기라는 의미이다. 이 분수령시대에 들어서기 전에, 먼저 그 시대(1875년이후)에 이르기까지의 의학계의 시대배경을 살펴보자.
黑船來航 페리(Perry)제독이 이끄는 미국함대가 1854년 일본의 開國을 요구한 사건(역자 註) 에 의해 太平聖代가 동전을 뒤집는 것처럼 돌변하게 되고 불과 십여 년만에 시대는 一變했다. 명치유신은 鎖國政策에 따라 해 오던 모든 것을 부정했다. 당시의 新政府는 구미 先進外國을 따라가기 위해 富國强兵정책을 내걸고 西洋文化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을 국가의 방침으로 하였는데 醫學, 醫療領域은 그 先頭였다.
“醫는 西洋流가 아니면 안 돼!”, 시볼드(Siebold)와 緖方洪庵의 제자였던 軍醫監 大村益次郞은 이렇게 말했다. 世變의 動亂이 진동하던 당시, 특히 軍病院에서부터 ‘漢方으로는 안된다’는 그의 강한 주장이 명치정부에서 主流를 차지했다. 明治元年(1868년) 2월에는 萬民保全에서 富國强兵의 한 방책으로 西洋醫術의 장점을 채용할 것을 進言하는 建白書가 제출되고, 이에 따라 3월 西洋醫術許可의 布告가 있었다.
西洋醫術의 長點을 採擇하다(1868年 3月 8日. 第141) : 西洋醫術之儀是 被止置候得共, 自今其所長に於ては 御採用可有之抑出候事.
이는 의학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嘉永 2년이래 쇄국의 禁令을 푼 획기적인 事件이었다.
2. 西洋醫學 振興에 着手
이에 따라 단순히 서양의술을 치료법으로서 채택하였던 것이 아니라 醫療制度 및 醫學敎育에도 一擧에 西洋流를 전면적으로 채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바로 둑을 가르듯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흘러들어 올 수 있었다. 같은 해 12월에 ‘本邦의 醫道를 마땅히 西洋醫方에 의한다’는 太政官布告가 發效되어 장래 醫師試驗免許制度를 확립하는 방침을 명확히 하는 동시에, 국가시책으로 서양의술의 채용을 결정하였다. 정부가 大帝의 포고까지 하면서 솔선하여 의학을 장려하고 서양의술의 보급을 추진했던 것은 국민의 보건위생향상이 최우선의 急先務였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서민이 살아가기가 급급한 세상으로, 痘瘡, 赤痢, 페스트, 콜레라, 癩病, 狂犬病, 鼠毒症, 猩紅熱, 肺結核, 脚氣 등 지금은 보기 어려운 질병이 전국에 만연하여 의료분야에 있어서도 慘憺한 시대였다. 醫師라고는 에도(江戶)시대에서 이어져 온 2萬여명의 韓方醫에 불과했다. 大帝布告에서 “醫師는 人命에 관계되는 容易하지 않은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無學無術의 무리가 감히 方藥을 弄해 生命을 그르친다”고 지적하였듯이, 그들은 경력이나 신분도 雜多하고 學識이나 技術수준도 대체로 낮았다. 또 의사가 되기 위한 制度나 의사를 取締하는 規則도 없고 父子傳承의 형태로 療治에 임하는 자유방임상태였던 것이다.
정부는 醫師身分資格의 확립을 위해 우선 敎育制度의 개혁에 착수했다. 1868년 6월, 幕府의 의학교육기관이었던 ‘醫學所’를 부흥하고 橫濱에 있던 仮軍事病院을 東京에 옮겨 ‘大病院’으로 하였으며, 1869년 2월에 兩者를 合倂하여 ‘醫學校 兼 病院’으로 하였다가 나중에 ‘大學東校’로 개칭하고, 이를 根幹으로 西洋醫學敎育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기 시작했다. 또한 大阪醫學校, 長崎醫學校를 정비하고 정부 스스로 적극적인 의학진흥에 盡力했다. 이에 호응하여 佐賀, 福井, 京都, 金澤, 新瀉, 岡山, 名古屋 등 지방도시에서도 병원이나 의학교가 연달아 설립되어 서양의술 硏鑽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높아졌다. 처음에는 서양의학 중 英國醫學이 주류였으나, 1870년에 “世界를 制覇한 獨逸醫學”의 輸入이 建議되면서 이윽고 독일의학이 大勢를 점하게 되어 우리나라 의학과 의료의 성격이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
3. 漢方 口中醫와 香具師들
치과영역에서는 오직 口中科만 전문으로 하는 漢方醫가 있었다. 에도시대에는 朝廷에 代를 이어왔던 ‘丹波’家의 口中醫師, 幕府에 등용되었던 6氏 家系의 御齒醫師를 필두로 각 藩에도 本道(內科)나 外科와 같이 醫學所에서 전수받은 口中醫가 있고, 市井에는 口中之業으로 療治所를 개업하는 町(마을)의 口中醫들이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齒痛治療 爲主로, 藥物, 灸法, 刺針, 洛鐵, 符呪, 拔齒 등의 한방치료를 행하고 있었다. 치료법은 門外不出의 秘法으로 하고 口中秘傳으로 칭하는 家傳書의 형태로 자신의 子孫에게만 대대로 전하면서 御殿醫로서의 지위와 가계를 유지해 나갔다. 또한 町醫(동네의사)도 “元祖一流”, “新工夫秘傳”이라는 간판을 걸고 자신만의 秘術을 파는 식이었다. 한편, 巷間에는 香具師(野師)가 길거리나 빈터에서 獨樂回로 손님을 모아 齒磨粉이나 膏藥을 팔면서 拔齒나 入齒, 齒牙固定術 등 간단한 치료를 행했다. 入齒를 주로 하는 자를 ‘入齒師’, 拔齒를 주로 하는 자를 ‘齒拔’이라고 불렀고, 그 외에도 ‘入齒渡世者, 口中醫師, 口中醫, 牙齒, 齒醫, 齒醫師, 하이샤(はいしや, 齒醫者), 齒藥師’ 등 갖가지 명칭을 붙이고 있었다. 木床의 入齒제작에 전념하는 入齒師중에서는 入眼, 入鼻를 兼業하는 자도 있었다.
이러한 漢方 口中醫나 香具師들은 明治시대에도 粗惡한 그들만의 療法으로 당당히 口中治療를 계속하고 있었다. 東京府만 해도 500-600명이라고 전해지는데, 당시로서는 아직 그들의 橫行을 放任하고 치료를 依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4. 慘憺했던 入齒師觀
특히 에도시대 香具師의 존재가 그후 오랫동안 치과의사를 괴롭히고 치과의 動向에 의외의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시는 치과치료를 받을만한 곳이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간단한 염가의 “鎭痛醫療”로서 크게 이용하던 곳이었다. 게다가 似而非 大道藝人의 商法은 娛樂이 적었던 民衆에게는 분명히 즐거운 친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屋外에서 香具師에 의한 似而非 醫術業者의 치료가 시술되는 광경이 보였던 것은 치과뿐이었다. 다른 질병에 대해서는 漢方醫가 療治所나 養生所에서 시술하였다. 서양에도 橋上(다리위) 香具師나 理髮齒科醫의 시대가 있었다. 결국, ‘치과는 餘他 의료와는 別個’라는 意識을 만들어 大衆의 마음에 口中療治者에 대한 輕蔑感과 치과질환에 대한 安易한 態度가 은연중에 먹물처럼 번져가게 된 것이다. 대중의 마음속에 한번 심어진 이미지(image)를 없애기는 대단히 어렵다. 이렇게 이어져 온 入齒師觀이 그들의 後繼者로 보이는 齒科醫師 위에 바로 重疊(overlap)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치과사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入齒師=齒科醫師’라는 일반인들의 관념을 忘却할 수 없다. 이처럼 치과의사에 대한 잘못된 先入觀은 명치시대에 치과의사의 志向하는 바를 妨害했던 潛在的 背景의 第一의 要因으로 내세울 수 있다. 4. 美國式 齒科醫術 이런 중에서도 서양치과의술의 도입은 착실히 진행되었다. 幕府말 万延元年(1860년)에 橫濱에 入國하여 개업했던 미국인 W. C. Eastlake를 시작으로, Winn, Elliott, Perkins, Alexandre, Gulick등 외국인 치과의사가 속속 來日하여 미국치과의술을 소개했다. 그들의 문하생이 되어 열심히 서양치과의술을 模倣, 消化한 일본인도 있었고, 한편 자기 뜻으로 歐美에 단신 유학하여 그곳에서 배운 현지 치과의술을 母國에 逆輸入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이 체득하였던 美國式 齒科醫術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明治초기에 실제로 행해지고 있었던 치료술식 몇 가지를 보자.
우선 齒髓炎 환자는 齒石을 제거한 후, 요오드포름(iodoform)을 塗布하고 含 劑를 투여한다. 齒髓充血에는 크레오센트를 貼用하고 鎭痛이 시작되면 護謨充塡을 시행하고, 수개월동안 경과를 관찰한 후 永久充塡을 시행한다. 2-3회의 貼藥으로 진통이 되지 않으면 綿球(면봉)을 크레오센트에 적시고 亞砒酸을 붙여서 齒髓를 失活했다. 또, 桂皮油, 丁香油, 또는 크레오센트를 貼布한 후 가타파챠를 裏裝하고 세멘(cement), 아말감(amalgam), 또는 金으로 充塡했다. 齒根膜炎은 齒髓腔을 개방하여 腐敗한 치수를 제거하고 1주일동안 방치한 후, 한번 내지 여러번 크레오센트를 貼布하고 가타파차로 임시충전하고 나중에 영구충전을 시행했다. 이러한 術式이 齒痛에 대한 일반적인 鎭痛根治療法이었다. 당시 漢方治療로는 잇몸의 化膿이나 口腔내 疼痛에 대해 昆布, 南天葉, 梅干 등을 梅干열매로 다져서 면주머니에 넣어 입에 물고 있게 하는 정도였다. 兩者를 비교하여 보면 서양의술과 한방의술의 差異가 歷然하다.
이처럼, 齒內療法, 保存療法, 齒周療法을 主로 하면서, 기타 고무床義齒製作 등 補綴技工이 통상 시행되었다. 최종적인 처치는 拔齒였다. 이 경우 藥品을 이용하지 않고 齒齦刀로 齒齦을 절개하고 바로 鉗子를 適合하여 拔去하고, 殘根에는 엘리베이터(elevator)를 사용했다. 또 영구치는 현저히 이완하는 것만 齒頸部를 낚시줄로 묶어 잡아당겼다. 局所痲醉는 하지 않았으나 外國人에게는 종종 클로로포름(chloroform)으로 전신마취를 시행했다. 이 경우는 外科醫師에게 입회를 구하는 일이 많았다. 당시 術者는 치아에만 주의를 쏟아 患者보다는 技工이라는 手作業에 몰두했다. 그로 인해 學問보다 技術중심이고, 醫者(醫療人)라기보다 오히려 숙련 기술자(technician)에 가까운 면이 多分히 있었다. 환자 쪽도 극히 幼稚한 口腔衛生思想밖에 없어, 齒科醫術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않고 裝飾的 技術 정도로 보는 등 眞面目의 치과의사를 憤慨하게 만드는 일이 왕왕 있었다고 본다.
5. 다른 醫師에게 넘긴 口腔外科
당시 치과진료에서 주의를 要하는 것은 구강외과 질환에 대한 취급으로, 대부분 “外科醫師에 부탁하여 손을 대지 않았다”거나 “外科醫師에 委任”하였다는 점이다. 구강외과는 외과의사의 일로 생각했던 것인지, 혹은 마음속으로는 치과의 업무로 생각했으나 감당할 수 없어 외과의사에게 依存했던 것인지? 아마도 前者의 경우가 더 맞을 것이다. 치과의 전문영역질환이면서도, 敬遠하는 다른 의사에게 넘겼다는 것은 당시 치과의사의 결정적 약점을 속속들이 드러내었던 것이다. 이는 의료인으로서의 학식과 능력을 의심받게 하는 요인이 되고, ‘같은 의료인이면서...’라고 외과의사들의 輕視感을 깊게 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일반외과와 인접한 영역을 회피한 것은 그들이 미국식 치과의술의 洗禮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는 치과는 소위 ‘齒科外科’에 국한하고, 그 범위를 넘는 구강외과는 일반외과가 담당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렇게 맹목적인 모방과 踏襲으로 경계영역(grenzgebiet)을 설정하게 되었다고 본다. 미국식 치과의학은 당시 독일의학에 심취해 있던 의사에게는 奇妙한 異質感을 주어, 兩者간에 개념적, 실질적 差異를 생기게 하는 根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補綴技工, 즉 別室에서의 人工物 제작이 그 차이를 더욱 크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치과진료 중 일부를 의사에게 치료를 맡겼던 것은 큰 부분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은 짓이었다. 당초부터 치과의사가 口腔外科術을 驅使하였으면 치과의사에 대한 평판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후에 베르린(Berlin)대학의 코흐(Koch)로부터 세균학을 배워 소독법을 보급했던 伊澤信平의 제창으로 1909년에 醫術開業試驗의 치과시험과목에 구강외과학이 포함될 때까지, 대부분의 치과의사는 이 방면에 손을 대지 못했다. 이처럼 ‘美國式 齒科醫術의 實踐과 口腔外科로부터의 逃避’를 明治시대 잠재적인 배경의 第二의 要因으로 내세울 수 있다.
6. 近代的인 醫制 반포
新정부의 기초를 세우는 과정에서 1872년 學制頒布에 따른 교육제도의 확립에 이어, 의학교육과 의사자격의 확립을 지향하는 醫制가 1874년 8월에 東京府, 이어서 京都府, 大阪府에 내려졌다. 이는 앞의 太政官布告를 文部省 직할로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歐美제도를 모범으로 위생행정전반에 걸쳐 규정함으로써 우리나라 근대적 위생행정제도의 기초를 세운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여건상 그 모두를 즉각 시행하는 것은 어려워서 긴급을 요하는 사항이나 조건이 정비된 사항부터 순차 실시하는 것이었기에, 요즈음과 같은 법령이라기보다는 위생행정의 방침을 내리는 訓令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76개조에 걸친 醫制는 의사제도에 관해 2가지의 기둥을 세우고 있다. 첫째, 의사를 일정 수준에 두기 위해 醫學校에 대한 사항을 정하였다. 그것은 學制에 정해진 각 大學區에 附屬醫學校를 설치하는 것으로, 기존의 東京, 大阪, 長崎에 이어 점차 설립을 꾀할 것, 의학교는 예과 3년 본과 5년을 학과의 滿期로 할 것, 입학자격은 14세 이상 18세 이하의 小學校 졸업자로 할 것, 졸업생은 의학졸업증서와 醫學士의 칭호를 주는 것 등이 明記되어 있다.
7. 醫師試驗免許制 確立
둘째, 醫術開業을 전면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의사에 관한 사항을 다루고 있다. 이는 의사의 개업을 免許제로 하여 면허를 갖지 않은 자의 醫業을 금지하는 한편, 의학을 졸업하고 내과, 외과, 안과, 産科등 전문과목을 2년 이상 실습한 자에 시험을 실시, 합격하면 의사개업면허를 주는 것 등을 明記했다. 즉, 受驗요건에 醫學卒業후 소정의 임상경험을 가질 것을 추가하였을 뿐 아니라, 종래 자유방임 상태였던 의술개업을 규제하고 시험을 치러 면허를 받아야만 하는 시험면허제를 명확히 한 것이다. 기존 開業者에게는 시험을 필요로 하지 않고 假免許를 주어 잠정조치를 주었는데, 당시로서는 극히 대대적인 개혁이었다. 이처럼 醫制에 의해 의학교의 증설, 교육과정의 설치, 개업시험 면허제의 채용이라는 今後의 具體的 方策이 명시되었던 것이다.
醫 制 (明治7년 8월 18일, 文部省) 제37조 의사는 의학졸업증서 및 내과, 외과, 안과, 산과등 전문과목 2년이상의 실험증서(기존 근무지의 원장 혹은 의사가 발급) 소지자를 검사, 면허를 주어 개업을 허가한다. (當分) 기존개업의사는 학술시험을 요하지 않고 그 履歷과 治績을 감안, 2등급으로 나누어 假면허를 준다. (醫制발행후 10년 동안)에 개업을 청하는 자는 아래 시험을 거쳐 면허를 부여한다 (1) 해부학 大意 (2) 생리학 大意 (3) 병리학 大意 (4) 약리학 大意 (5) 내외과 大意 (6) 병상처방 및 수술 개업假면허를 얻은 자와 30세 이하의 자는 3년마다 반드시 시험을 거쳐 면허를 수여한다. 産科, 안과, 整骨科 및 口中科 등 전문 1과를 수학한 자는 각 해당 부위의 해부, 생리, 병리 및 수술을 검사하여 면허를 부여한다.
8. 專門科로서의 口中科
醫制에서 치과는 어떻게 취급되고 있었을까? 치과는 위에 인용한 것처럼 口中科라고 불렀고 産科, 안과, 整骨科와 나란히 하나의 專門科로서 개업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구중부위의 해부, 생리, 병리, 수술 시험을 치르게 하여, 똑같이 의사개업면허를 얻을 것을 요구하였다. 즉 법적으로는 口中科專門“醫師”로 취급받았다는 의미에서, 의제는 醫齒一元制度를 채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단, 같은 의사라 하여도 실제로는 결코 동등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인용한 조문과 같이, 제37조의 앞부분에서 과목명에 ‘내과, 외과, 안과, 産科 ...’ 라는 표현이 있고 구중과는 뒷부분에서 정골과와 같이 추가로 다루고 있는데 불과하다. 같은 전문과라도 산과, 안과는 앞뒤 양쪽에 명기되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정골과와 구중과의 地位를 추정할 수 있다. 실제 산과, 안과를 포함하여 4개 전문과의 시험은 각 해당부위에 한정하여 출제하였다. 이것은 전문과는 해당부위 담당이므로 全身에 대한 학과는 필요하지 않다는 시각에 의거한 조치였겠고 그 출제범위에서도 內外科에 비교하여 쉽게 수험하기 쉬운 과목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의사 지망자 중 全身학과에 자신이 없는 자는 專門과목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시험의 難易度가 자연스레 내외과와 전문과의 수준에 우열의 격차를 만들고, 나아가서는 양쪽 의사의 평가에 크게 반영되는 것으로 보인다. 의사로서의 자격은 동일하다 하여도 역시 내외과의 全科醫와 專門科醫는 비유컨대 大醫와 少醫와 같은 위치관계에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第 3 章. 醫齒分水嶺時代(1) (1875年-1883年)
1. 小幡英之助
醫制반포 다음 해인 1875년 3월부터 文部省은 3부에서 제37조에 정한 의사개업시험을 실시하기 시작했는데, 그해 봄 이 시험에 齒科專門으로 受驗을 요구한 인물이 있었다. 그 인물의 출현이 醫齒分水嶺時代의 막을 열었던 것이다. 지금 보아도 그의 치과전문시험 수험은 醫齒分離라는 방향으로 향하는 최초의 分岐點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미국치과의사 S. J. Elliott의 愛제자였던 小幡英之助였다. 中津藩의 士族으로 태어나 당시 25세로 Elliott 門下에서 서양치과의술을 專修하였다. 당초 外科學을 배우고 있던 그는, 평생의 道로 스스로 치과에 뜻을 두고 “士人의 業으로 하기에 足하다”고 先輩知己로부터 연마했다고 한다. 후에 성격이 완고하고 直言直行하며 두려워함이 없고 奇行이 많다고 평가받던 그는, 당시 東京醫學校(東京大學醫學部의 前身)에서 의사개업시험을 신청했다. 문제는 그가 醫制에 정해져 있지 않은 전문과목명 “齒科”로 수험할 것을 요망했던 점이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서 ‘치과’라는 명칭이 公式的으로 쓰인 적이 없었다. 치과라는 명칭은 大化改新 말기 大寶律令의 醫疾令에서 耳目口齒科라고 불리운 이래, 平安 말기에 口齒科로 되고 安土桃山 시대에 口中科로 변하여 1868년까지 全的으로 口中科가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醫制에도 명기되어 있는 구중과를 그는 왜 사양했는가? 내무성으로부터 專門科 의사로서 대우받는 것이 일부 지방청에서는 入齒師들과 동일시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당시 조마縣, 판목縣에서는 종래 개업의 口中療治者를 구중과로서 보고 있었다. 이를 보아도 구중과라는 명칭은 일부 비천하고 저급한 직업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입치사와 동열의 구중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그의 프라이드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서양치과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표시하는데 어울리는 명칭으로서 치과를 쓴 것이 아니었을까?
치과라는 용어는 영어의 Dentistry, 혹은 Odontology에서 온 것이다. 각각 라틴어와 그리이스어로 치(齒)를 의미하는 ‘Dens' 및 ’Odont'에서 유래하는 것이어서 ‘齒科醫學’으로 번역되었던 것이다. 아마 그것이 서양에 물든 小幡이 평소 마음에 들어 했던 번역어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수험에 그 명칭을 쓰겠다는 대단한 시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小幡다운 ‘butter'적인 발상이었다.
2. 치과전문의사 제1호
無名의 수험자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과목명이 제창된 것에 관계자는 필시 놀랐을 것이다. 出願을 받은 동경의학교에서는 전례가 없는 케이스인 만큼 취급에 고심하였다. 스스로 서양의학에 입각한 최신, 최고의 치과의술을 수학하였다는 강한 자부심에 차 있던 小幡은 동경부 및 東京醫學校에 강경하게 교섭했다. 그 결과 그해 여름 그를 위해 최초로 치과전문의 의사개업시험이 시행되었다. 시험위원 6명 중에는 당연히 齒科의 교수는 없었기 때문에 치과가 외과학의 일부라는 점에서 외과학 교수가 문제를 냈다.
제1문 齒健을 표하고 그 용법을 묻다.
제2문 발거할 대구치를 表하고 그 명칭, 좌우구별 및 그 발거법을 묻다
제3문 파킨슨씨 치에 관한 것을 묻다.
그는 이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치루어 10월 2일자로 醫籍 제4호에 등록되고 개업면허를 받았다. 東京府내에서는 제1호의 의사에 해당한다. 그 면허장에는 “齒科醫術開業免許御事“라고 하여 치과전문으로서 최초였다. 수험자의 요망에 따라 醫制에도 규정되지 않은 과목명을 허가하였던 융통성있는 행정조치 덕분이었다. 이처럼 변칙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면허가 발부된 것은, 문부성과 내무성에서는 醫制에 의거하여 사무취급수속이 제시되었던 정도이고 각 지방청에 의한 시험이나 면허의 사무처리에 꽤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법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면허의 사무적인 서식내용에 ‘치과’라는 명칭이 기재되었던데 불과한 것이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공식서류에 등장한 “齒科”는 그때부터 후에 혼자서 첫 발걸음을 시작하였던 것이 된다. 이 ‘치과’라는 과목 명칭은 당시에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이상한 자의 奇行으로 보였을까? 참신한 평판을 받았을까? 혹은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 글자였을까? 그 후 기록을 조사해 보아도 ‘口中科’로 醫籍에 등록한 것은 1876년에 Elliott 문하로 小幡과 같이 제자였던 佐治職 1명만 보이지만 ‘치과’의 경우는 1877년에 2명, 1878년에 2명, 1879년에 3명으로 수가 많다. 이를 보아도 치과 지망자에게는 그 명칭이 신선한 감각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된다. 치과 제1호의 영광을 배경으로 일본인 서양치과의 효시로서 경고區에 개업했던 小幡의 명성도 그들의 꿈을 북돋웠을 것이다. 과목명에 구애받지 않고, 당시 이미 서양치과의술의 제1인자로서 자타가 인정하였던 그의 밑에 개업 전부터 入門을 구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3. 齒科의 科名 公式名稱이 되다
口中科에 대신하는 새로운 명칭은 치과 관계자이외에도 일찍이 영향력을 가지고 침투하였던 듯하다. 그것은 아마 小幡자신도 예기하지 못했던 현상이었을 것으로 1879년 행정상에 그 효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내무성은 지방청의 사무적인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2월에 의사시험규칙을 전국에 고시하고 시험내용과 방법의 통일을 도모했다. 이에 따라 의사개업시험제가 더 한층 강화되었던 것인데, 그 제2조에 의술과목으로서 ‘내외과, 전문내과, 전문외과 및 産科, 안과, 치과’ 등이 올라 있다. 즉 내과, 외과의 전문과가 설치되는 한편 醫制에 명문화되어 있는 전문과의 범위에 산과와 안과가 그대로 남고, 이미 1876년 고시에서 의술과목에서 제외되어 있던 整骨科가 삭제되고 口中科는 齒科로 명칭이 변경되었던 것이다. 小幡의 치과면허취득 후 불과 3년반만에 사생아처럼 취급받던 치과의 명칭이 인정되어 공식규칙에 명기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 “치과”의 시작이었고 이에 따라 치과는 법적근거를 가진 공식 명칭으로서 걸음을 내디뎠다. 저자는 이를 小幡치과에 이어지는 醫齒분리로 가는 두번째 분기점으로 보고자 한다.
의사시험규칙 (명치12년 2월 24일, 내무성 고시 갑제3호) 제1조 시험과목 1) 理學 2) 화학 3) 해부학 4) 생리학 5) 병리학 6) 약물학 7) 내과학 8) 외과학 -- 혹은 전문각과
제2조 의술을 개업하고자 하는 자는 의술과목(내외과, 전문내과, 전문외과 및 산과, 안과, 치과 등), 개업장소를 기록한 원서, 수학이력서 및 교사의 증서를 첨부하여 관할청에 출원하여 시험을 신청해야 한다. 단 시험 신청은 연령 만 20세이상의 자이어야 한다.
구중과에서 치과로 명칭을 바꾼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 우선 일반적으로는 齒切과 같은 짧은 어구가 곧바로 어필했다는 점은 틀림없다. 물론 小幡의 뒤를 따른 齒科 指向의 움직임도 이유 없이 놓치지 못할 현상이겠다. 西洋流 盲信의 시대였기에 dentistry를 直譯하는 것이 대환영을 받았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 중에서도 행정사이드(side)를 움직였던 것은 치아만에 한정하였던 당시의 진료내용이나 담당부위를 표시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용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4. 齒牙만 聯想되는 名稱公害
독자들은 이미 짐작하겠지만 저자가 이렇게 명칭에 집착하는 것은 小幡이 발의했던 ‘齒科’를 시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명칭은 우리의 담당범위를 표현하는 데에는 극히 부적절하고 타당성이 없다. 대상으로 하는 부위를 科名으로 하는 科目은 안과, 이비인후과, 비뇨기과, 항문과 등 많이 있으나 그것들은 각기 대상영역을 적확히 표현하고 있다. 본래 과목명은 단순히 구별을 위한 부호가 아니라 그 내용과 성격, 나아가서는 主義主張까지 전하는 호칭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齒科’는 齒牙이외에는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 그것도 인체내 기관으로서 치아라기보다 齒冠에서 齒根까지의 작은 경조직만 연상시키는 용어이다. 때문에 그것은 마치 異物처럼 고정화되고 국한된 偏狹한 대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벗기 어려운 착각을 만드는 결과가 되었다. 치과의사 자신조차 자칫하면 치아에 몰두한 나머지 구강이나 전신을 쉬이 잊게 하는 것이니, 일반사람들은 치과라고 하면 곧바로 치아밖에 떠올리지 않는 것을 어떻게 책망할 것인가. 保存修復療法이나 齒內療法은 대개 치아에 그치지만 치은, 치주질환, 근단치주질환 등은 통상의 치과질병으로서 구강내의 연조직이나 악골부분에 발생한다. 따라서 본래, 우리영역의 표시는 齒牙, 顎, 口腔을 총괄하는 명칭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齒醫者선생은 치아에만’, ‘치아에 癌 발생이 가능한가?’, ‘치과에 입원이 가능한가?’ 정말로 한탄할 일이나 지금도 치과에 대한 일반국민의 이미지는 명치시대 당시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그 원인이 바로 명칭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업계가 사회에 향해 왔던 간판은 치과대학, 치과의사, 치과의원, 모두 “齒”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니 말하자면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치과의사는 100년동안에 걸쳐 그 명칭에 대해 고뇌하기를 계속하여 현재도 그 고뇌에서 해방되지 않았다. 스스로 만들어 내고 세간의 오해를 탓하면서 지금도 바꾸지 않은 간판과 더불어 安住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숙명적이라고도 할만한 “명칭공해”에 端緖을 만들었던 것이 小幡英之助였던 것이다. 그가 치과의 선각자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나 저자는 功過가 있는 인물로 본다. 당시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던 치과세계를 선택했던 용기, 未知未踏의 치과의학에 대한 탐구심과 열정, 그 진취적 기상은 敬賀할 만하지만 치아구강조직이라는 기본적 인식을 결여하였던 점, 小幡의 독선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가 만약 醫制에 있는 그대로 口中科로 수험하였거나 혹은 口科, 口齒科, 口腔科를 신청하였다면 오늘날 우리 영역은 어떻게 호칭되고 있을까. 이런 고민이 저자의 가슴을 지나간다.
5. 치과시험만 독립되다
그로부터 4년반이 지난 1883년에 치과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내무성에서 10월에 의술개업시험규칙과 의사면허규칙을 고시한 것이다. 이는 醫制반포 이래 각지에 세워졌던 의학교의 취업자수가 증가하면서 의사시험수험자가 해마다 늘어 전국에 수천명에 달하게 되자 시험과 면허의 방법을 개선할 필요를 절감한 것이었다. 첫째, 醫術開業試驗規則은 종래의 의사시험규칙에 의술개업시험에 대한 사항을 통합한 법령이다. 그 요점은 시험을 의술개업시험과 치과의술개업시험의 2종류로 나누고 아울러 시험과목에도 치과시험과목을 정했던 것이다. 즉 종래, 의술의 과목으로 했던 내외과, 전문내과, 전문외과, 산과, 안과에 대하여 내과학, 외과학, 산과학, 안과학의 시험과목을 만들어서 의술개업시험이라는 동일시험으로 통일시켰다. 전문과 단위의 부위에 대한 시험은 없어졌으나 단 치과만은 치과의술개업시험으로 독립하여 독자의 시험과목이 설정되었다. 이는 단적으로 말하면 여타의 전문과는 소위 의과로 합병통합하고 치과 하나만 제외시킨 것이다. 이는 그때까지의 산과, 안과의 전문면허는 폐지하고 치과만 종래와 같이 1과의 전문면허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치과가 의술개업시험에서 독립된 것은 小幡치과에서 시작되어 치과공식명칭을 구분하고 난 후 醫齒분리로 가는 세번째의, 더구나 最大의 분기점이었다. 저자는 그 당시가 醫齒의 사실상 분수령이었다고 본다. 실제로 醫齒가 결별한 것은 그때부터 20수년 후에 이루어진 일이었으나 그 해의 고시에서 이미 분리의 길이 결정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는 꼬불꼬불한 길을 반복하면서 거부도 응답도 없이 좌우로 산마루를 굴러 떨어져 왔을 뿐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의술개업시험규칙 (명치 16년 10월 23일, 태정관 고시 제34호)
제1조 의술을 개업하려는 자는 이 규칙에 정한 시험을 보아야 한다.
제2조 내무경은 매년 2회 의술개업시험을 거행하여야 한다. 단 시험을 거행하는 지방 및 시험기일은 6개월 전에 내무경에 의해 고시해야 한다.
제3조 내무경은 의술개업시험을 거행하는 때에 관립 및 현립의학교 병원에 종사하는 자, 또는 지방에 있어서 학술이 유망한 의사, 이화학자 등을 선발, 시험위원에 임명하여야 한다. 단, 치과의술개업시험에 있어서는 치과의 1명을 시험위원에 추가하여야 한다.
제4조 내무경은 주무자를 파견하여 시험 일체의 일을 감독, 정리시켜야 한다.
제5조 의술개업시험은 이를 2회로 나누어 전기시험, 후기시험으로 한다. 전후 2기의 시험을 동시에 받는 것도 가능하다.
제6조 시험과목은 아래와 같이 정한다, 전기시험과목 1) 약리학 2) 화학 3) 해부학 4) 생리학 후기시험과목 1) 외과학 2) 내과학 3) 약물학 4) 안과학 5) 산과학 6) 임상실험
제7조 치과시험과목은 다음과 같이 정한다. 1) 치과해부 및 생리 2) 치과병리 및 治術 3) 치과용 약품 4) 치과용 기계 5) 實地시험
제8조 전기시험은 1년반이상, 후기시험은 다시 1년반이상 수학한 자에 준하면 이를 받을 수 있다. (추가) 단 치과의술개업시험은 2년이상의 수학한 자에 준하면 이를 받을 수 있다.
제9조 전기시험을 받는 자는 그 원서에 수학의 이력서를 붙이고 후기시험을 받으려는 자는 그 원서에 이력서 및 전기시험 및 제 증서를 붙여, 매년 6월, 12월 중 지방청에 제출하여야 한다. 지방청은 다음 달 5일에 그 서류를 취합하여 내무성에 송달한다. 단 이력서에는 스승 또는 다른 개업의사 2명 이상의 보증을 요한다.
이 4년반 동안 어떠한 경위가 있었던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규칙 작성에서 각종의 심의가 시행되어 꽤 수정이 가해졌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상세한 것은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종래 局所부위로 낮은 위치였던 産科와 안과를 끌어 올려 형식상 내외과와 나란히 하고 내과학 지망자도 산과나 안과의 지망자도 내과학, 외과학, 산과학, 안과학 등 동일한 시험과목을 받아, 의술개업의 소위 전과의 면허를 주는 시스템(system)으로 변했던 것이다. 이는 내외과전공의 경우에도 반드시 산과학과 안과학을 배울 필요가 있고 안과 전공의 경우도 내외과학이나 산과학을 배워야 하는 것으로 바꿈으로써, 종래의 全科醫와 專門科醫간의 격차를 없애려는 의도의 근본적인 개혁이었다. 이에 따라 산과와 안과는 국소부위이면서도 전문과에서 벗어나 의과 중에 존속하는 것이 되었다(그 후 편의상, 치과를 뺀 모두 총괄하는 과를 醫科로 總稱하게 되었다).
이처럼 종래의 전문과의 취급방법에 있어서, 수년간의 전문시험을 거치면서 산과, 안과는 내외과에 근접하고 치과는 멀어지는 현상이 나타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당시, 치과시험위원에 치과의사가 들어가지 못했었기 때문에 실제로 치과의학에 종사하는 자가 없는 채, 외과의사가 적당히 아는 지식으로 출제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횟수를 되풀이하면서 시험문제 작성에 고민하게 되고 차차 치과에 대한 異質感을 느껴 우리 의학에 “似而非한 것”이라는 느낌이 깊어지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조건에서, 산과와 안과는 내외과에 倂合되어도 지장이 없다는 공감대가 자연스레 넓어지고 반대로 치과는 분리된 별개의 시험형식으로 두는 쪽이 좋다는 방침이 배태되기 시작했던 것이리라. 사실 양규칙작성의 단계에서 “齒科之業은 보통 외과술과 다른 점도 있어, 일반의사도 같은 시각이다. 별도로 1과의 전문영업으로 하고, 試驗法등을 別途로”라는 의견서가 나타났던 것이다. 이 의견서를 그대로 채택하여 成文化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이미 치과에 대해 심각한 공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던 것을 感知할 수 있다.
규칙작성의 단계에서 치과의사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1882년에 의사의 총수는 종래 한방의를 포함하여 41,612명이었고 그중 치과전문의사는 겨우 171명에 불과한 반면, 동일한 전문과였던 안과가 701명, 산과가 565명, 整骨科조차 387명이었다. 이 숫자만 보더라도 정부당국이나 의사에 대한 치과의 영향력은 참으로 미미했던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혹시 치과의사를 빼고 법령 제정이 진행된 것이 아니었을까?
6. 醫齒취급을 서로 다르게
당시 치과의사는 과연 이 새로운 규칙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아마 上部의 의향이니 순종하였을 것이다. 오히려 치과시험의 독립에 의해 시험과목이 치과전문과목에 한정된 것을 좋아하였던 것은 아닐까? 게다가 자기들의 대표 1명이 시험위원에 포함된 것을 더 없는 朗報로 대환영한 것이 아니었을까? 당시 사회에서 한 줌도 되지 않는 치과의사에 대해서 행정 일각에서 매달리는 것이 하챦은 일이고 장래의 전망에 대해서도 치과시험 독립이 가진 의미를 알 수 있는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행정측으로서도 이 시기에는 아직 장래구상으로서 명확히 醫齒분리를 上程하고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兩규칙의 목적이 의사시험면허제도 철저였기 때문에 의사나 치과의사의 신분자격에 대해 구체적인 검토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 틀림없다. 하여간 시험 시행에서 의과시험과 치과시험을 나누는 쪽이 실정上 편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치과는 여타의 의료와는 어딘지 다른 것이며 별도로 취급하는 방안이 좋다는 原則的 認識에 도달했던 것이 확실하다. 시험규칙을 통람하면 이 원칙적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쉽게 볼 수 있다. 그것은 의사시험에는 전기, 후기의 2기로 나누어 10과목을 수험하는 것에 반해 치과시험은 5과목을 1회에 수험한다. 시험과목은 前者에는 물리학, 화학이 포함되어 있지만 치과에는 없다. 의과는 전신의학의 과목이지만 後者는 국소부위의 과목이다. 또 전기시험과 후기시험은 각각 1년 반 이상, 총 3년이상 수학하는 것이 요건으로 되어있는 것에 비해 치과시험은 1885년의 조문추가에 의해 2년 이상을 요건으로 한다. 이렇게 양 시험은 시험과목, 수험요건, 시험방법에 꽤 차이가 보이고 있는 것이다. 종래의 전과의와 전문의의 위치관계가 일거에 大小輕重의 격차를 넓게 하여 의과 對 치과로 이행하였던 것이라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역시 이들 조문의 행간에는 치과와 의과를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는 기본적인 사상이 나타나 있는 것 같다. 그것을 멸시적인 차별의식이라고 나무라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별개의 시험이니 일부내용이 다른 것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고 지적할 수 있다. 실제 당시의 치과의사는 의사시험과의 차이를 성격상 당연한 것으로 아무 의심도 없이 是認하였을 것으로 본다. 치과수험의 수학증명도 의사가 보증인에 되어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같은 醫籍에 등록되는 동업자라는 것에서 의사와 치과의사의 의식의 격차가 아직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치과의사는 동료인 의사들의 마음속에 감돌기 시작한 異質感을 아직은 느끼지 못했다. 여기에 다시, 만약 이때 의과시험과목 중에 치과학이 추가되어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저자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7. “齒科”가 없는 면허규칙
둘째로, 의사면허규칙은 먼저 의술개업시험규칙과 연관되어 의술개업면허에 관한 사항을 통합하는 법령이다. 제1조에 “의사는 의술개업시험을 받고, 내무경으로부터 개업면허를 얻은 자로 한다”고 하여, 의술개업시험을 거쳐 개업면허를 취득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이에 의해 의사의 시험제도와 함께 철저한 면허제도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단, 이 면허제는 의술개업을 허가한다는 개업면허(말하자면 업무면허)이고 의사의 자격을 보증하는 신분면허는 아니다. 의사뿐만 아니라 1894년에 변호사법이 제정될 때까지 직업상 신분을 규정한 법률은 없었다. 때문에 명치 30년대에 들어와 醫齒의 신분법의 제정이 진척되었던 것이다. 의사면허규칙(명치16년 10월 23일, 태정관포고 제35호) 제1조 의사는 의술개업시험을 받고 내무경으로부터 개업면허를 얻은 자로 한다. 단 이 규칙시행 이전에 이미 받았던 의술개업의 증은 유효하다. 이 면허규칙에서 주의를 요하는 것은, 그 조문 중에 ‘치과’문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본래 시험규칙과 면허규칙은 양바퀴처럼 같이 움직이는 隨伴법령이고 兩者가 함께 갖추어지지 않으면 법수행상 지장을 초래하는 관계이다. 그러나 의술개업시험과 치과의술개업시험이 확연히 둘로 나뉜 것에도 불구하고 제1조에 보는바와 같이 시험규칙에 의거하여 치과의술개업시험합격자에게 면허를 주는 규정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8. 법령에 남은 禍根
이에 대해 내무성에서는 제1조에 명시한 의사에 당연히 치과전문의도 포함되고 있고 또한 의술개업시험은 치과의술개업시험도 포함하는 것으로, 치과시험합격자도 똑같이 면허(단지 치과의술개업면허)를 주어서 의사로서 醫籍에 등록했다. 이는 법령의 不備이고 법적으로는 단지 행정상 이와 같은 조치가 행해진 것에 불과한 것으로, 그것을 지적하는 자도 없이 禍根을 남겨둔 채 법률상 효력이 있는 관습법으로서 그대로 오랫동안 실시되었다. 사회의 골격이 되는 법제 자체가 시행착오의 시대였던 것이다. 1883,4년의 신분법 법제화 물결에 편승하여 이 중대한 결함이 치과의사 排斥의 절호의 재료가 되었다. 면허규칙 중에 치과시험 합격자는 치과의사로 칭할 것을 추가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의사측에서 예민하게 추궁하여 더더욱 혼란과 대립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미리 언급해 둘 것은, 법령의 不備는 있었어도 치과시험합격자는 어디까지나 醫籍에 등록된 의사이지 치과의사는 아닌 것이다. 이는 당시 아직 법적으로는 齒科醫師라는 공식 명칭이 없고 관용적인 통칭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의사측에서 치과의사는 공식 명칭으로 불려지지 않는다는 등 공격하게 되었다). 더구나 시험규칙 제3조에는 “단 치과의술개업시험에 있어서는 치과의 1명을 시험위원으로 추가한다”고 “齒科醫”라는 문구가 엄연히 자리하고 있어, 여기에도 법령의 한계를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주요조항이 아니기 때문에 눈을 감는 것으로 정확히는 醫師齒科專門, 혹은 齒科專門醫師라고 부르는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편의상 齒科醫師라는 용어를 쓰도록 한다. 9. 치과의 醫籍 분리됨 다음 해(1884년)에는 醫齒분리의 4번째 분기점에 부딛힌다. 그것은 행정상 자세한 개정이었으나 치과시험의 독립을 더욱더 어렵게 하는 것이었다. 면허규칙 제7조에서 개업면허취득자를 의적에 등록하는 취지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무성에서는 그 해 1월부터 그 작업에 들어갔다. 醫籍이라는 것은 의사의 공적인 등록부이다. 그때 醫籍과 따로 齒科醫籍이 만들어져 치과개업자는 여기에 등록하게 되었다. 결국 2종류의 시험과, 의과면허자용과 치과면허자용의 2종류의 등록부를 만들었던 것이다. 의사면허규칙(명치 16년 10월 23일. 태정관 포고 제35호) 제7조 개업면허를 얻은 자의 氏名本籍은 내무성의 醫籍에 등록하고 이를 공고한다. 전문의 학식능력을 査定하는 방법이 다르다면 받는 면허나 등록이 별도로 되는 것은 自明한 이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내무성당국의 사무처리상의 조작이고 아마 다른 뜻은 없었을 것이다. 양 시험은 기일도 장소도 다른데다가 의과시험은 전후기에 나누고 치과시험도 연2회 여러 도시에서 실시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사무처리가 번잡하였다고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시험이 2종류, 면허가 2종류라도 醫籍이 1종류라면 의사로서의 기초(base)는 동일하였던 것인데, 이에 의해 試驗-免許-籍으로 醫齒를 갈라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醫齒를 실무면에서 구별시키려는 暗黙의 意圖가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행정상의 실무조작이 법령의 근본정신을 내부에서 붕괴시키는 것임을 당국자 자신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一見 아무 것도 아닌 사무적 조치에서 생겨났던 2권의 등록부가 醫齒의 구별을 증명하는 근거로서 내무성당국이나 치과의사에게 사태를 파생하는 것이 되었던 것인데, 靑山天大次가 제1호로 등록하고 현재에도 계속되는 齒科醫籍제도가 의기양양하게 출범하게 된 동기였을 뿐이다. 치과의사에게는 돌아올 수 없는 傾斜面을 굴러 온 치과의 行方이 아직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