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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읽기

47장 5절 분익소작과 소농민적 분할지 소유

작성자홍승용|작성시간20.11.09|조회수328 목록 댓글 0

제5절 분익소작과 소농민적 분할지 소유

 

이상의 모든 지대형태−노동지대⋅생산물지대⋅화폐지대[단순히 생산물지대가 전환된 형태로서의]−에서는 지대지불자는 언제나 토지의 현실적 경작자⋅점유자이며 그의 부불잉여노동은 직접적으로 토지소유자의 수중으로 들어간다고 전제되고 있다. 최후의 형태인 화폐지대에서도, 그것이 순수한 한, 즉 그것이 단순히 생산물지대의 전환된 형태인 한, 이 전제는 가능할 뿐 아니라 사실상 타당하다.(자본3,1016)

 

시초의 지대형태에서 자본주의적 지대로 이행하는 형태로서 분익소작^제(system of share-cropping)를 들 수 있는데, 이 경우 경영자(차지농업가)는 노동[자기 자신의 노동 또는 타인의 노동] 이외에 경영자본의 일부를 제공하며 토지소유자는 토지뿐 아니라 경영자본의 다른 일부(예: 가축)를 제공하고, 생산물은 차지인과 토지소유자 사이에 일정한 비율[이것은 나라에 따라 다르다]로 분할된다. 이 경우 차지인은 완전한 자본주의적 경영에 필요한 자본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 토지소유자가 얻는 분배몫은 순수한 지대형태가 아니다. 이 분배몫은 그의 투하자본에 대한 이자와 초과이윤적인 지대를 포함할 수도 있다. 또한 이 분배몫은 차이인의 잉여노동 전체를 흡수할 수도 있고 또는 차지인에게 이 잉여노동의 다소 일부를 남길 수도 있다.(자본3,1016-1017)

 

그러나 본질적인 점은 이 경우 지대는 이미 잉여가치의 정상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차지인은 [자기 자신의 노동만을 사용하든 타인의 노동을 사용하든] 노동자로서의 자격에서가 아니라 일부 노동도구의 소유자로서의 자격[자본가로서의 자격]에서 생산물의 일부에 대한 청구권을 가진다. 다른 한편으로 토지소유자는 전적으로 토지소유에 입각하여 자기의 몫을 청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대부자로서도 그 몫을 청구한다.(자본3,1017)

 

독립적인 농민경영으로 이행한 뒤에도 예컨대 폴란드와 루마니아에서는 옛날의 토지공유제도의 잔재가 유지되고 있었는데, 이 잔재는 더 낮은 지대형태로 역행하는 구실로 기능하였다. 토지의 일부는 개개의 농민들에게 속하며 그들에 의해 독립적으로 경작된다. 토지의 다른 일부는 공동으로 경작되어 잉여생산물을 형성하고, 이 잉여생산물의 일부는 공동경비를 충당하는 데 사용되고 또 일부는 흉작 등에 대한 예비로서 기능한다. 잉여생산물의 이 두 부분, 그리고 마침내는 잉여생산물 전체가^[그것을 낳는 토지와 함께] 국가관료와 사적 개인에 의해 점차로 횡령되고, 그리하여 본래는 자유롭던 농민적 토지소유자[공유지의 공동경작에 참가할 의무는 지고 있었지만]가 부역의무자 또는 생산물지대의 지불자로 전환되고, 공유지의 횡령자는 횡령한 공유지뿐 아니라 농민소유지까지도 소유하는 토지소유자로 전환한다.(자본3,1017-1018)

 

여기에서 노예경영(이것도 주로 가사용의 가부장적 노예제에서 세계시장을 위해 일하는 식민지농장제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단계를 통과한다)이나 지주경영(Gutsherrschaft)(여기에서는 토지소유자가 자기 자신의 계산으로 경작하고 모든 생산도구를 소유하며 현물급여 또는 현금급여에 의해 노동−자유롭든 자유롭지 않든−을 착취한다)에 관해서는 상세히 논의할 필요가 없다.(자본3,1018)

 

노예경영과 지주경영에서는 토지소유자는 생산도구의 소유자 그리고 노동자들[이들은 생산요소에 속한다]의 직접적 착취자와 일치한다. 그리고 지대와 이윤은 일치하며 잉여가치의 각종 형태들은 분리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잉여노동 전체[이것은 여기에서는 잉여생산물로 나타난다]는 모든 생산도구[이 중에는 토지도 있고 노예제의 최초의 형태에서는 직접적 생산자도 있다]의 소유자에 의해 직접적으로 착취된다. 아메리카의 식민지농장에서처럼 자본주의적 관념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이 잉여가치 전체는 이윤으로 간주되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그것이 존재하지 않고 그것에 대응하는 관념도 자본주의 나라로부터 이식되지 않은 곳에서는 이 잉여가치 전체가 지대로 나타난다. 어느 경우든 이 형태는 어떤 곤란도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경우 토지소유자의 수입[그가 취득하는 잉여생산물]은 −어떤 명칭으로 불리든−부불 잉여노동 전체를 직접적으로 취득하는 정상적이고 지배적인 형태이며, 토지소유는 이 취득의 토대를 이루기 때문이다.(자본3,1018)

 

소농민적 분할지 소유. 이 경우 농민은 그의 토지의 자유로운 소유자인데, 토지는 그의 주요한 생산도구로 나타나며 그의 노동과 자본의 불가^결한 투하장소로 나타난다. 이 경우 어떤 차지료도 지불하지 않으며 따라서 잉여가치의 분화된 형태로서의 지대는 나타나지 않는다. 비록 기타의 생산분야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기타의 생산분야와 비교한 초과이윤이 지대로 여겨지긴 하지만, 이 초과이윤은 [그의 노동생산물 전체와 마찬가지로] 농민에게 속한다.(자본3,1018-1019)

 

토지소유의 이 형태는 이전의 낡은 형태들과 마찬가지로 다음의 것−즉 농촌인구가 도시인구에 비해 수적으로 훨씬 우세하다는 것,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한다 하더라도 그것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미약하여 기타의 생산분야에서도 자본의 집적은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고 자본의 분열이 지배적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경우에는 농산물의 압도적인 부분이 그 생산자들[농민들]에 의해 직접적인 생활수단으로 소비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을 넘는 초과분만이 상품으로서 도시와의 상업에 들어간다.(자본3,1019)

 

농산물의 평균시장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든 우등지 또는 위치가 더 나은 토지에서는 차액지대[상품가격의 초과 부분]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처럼 생기는 것은 틀림없다. 이 차액지대는 일반적인 시장가격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사회상황에서도 존재하는데, 이 경우 차액지대는 초과적인 잉여생산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차액지대는 [더 유리한 자연조건에서 노동하는] 농민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간다.(자본3,1019)

 

이 소농민적 분할지 소유 형태에서는 토지가격이 농민의 현실적 생산비의 한 요소를 이룬다. 왜냐하면 이 형태가 더욱 발전하는 과정에서 상속재산을 분할할 때 토지가 일정한 화폐가치로 평가되기 때문이며, 또는 소유지 전체나 그 구성부분들의 소유주가 끊임없이 변경될 때 농민 자신이 주로 저당으로 빌린 화폐로 토지를 구매하기 때문이다.(자본3,1019)

 

이 토지소유 형태에서는 [자본화된 지대에 불과한] 토지가격이 하나의 전제된 요소이고 따라서 지대는 토지의 비옥도와 위치의 차이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이 형태에서는 절대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즉 최열등지는 어떤 지대도 지불하지 않는다고] 일반적으로 가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절대지대는 생산물의 생산가격을 넘는 가치의 초과분이 실현되거나 생산물의 가치를 넘는 초과적인 독점가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농촌경제가 주로 직접적인 생존을 위한 농업이고 토지는 대다수 인구의 노동과 자본의 불가결한 투하장소이기 때문에, 생산물의 지배적인 시장가격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그 가치수준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 가치는 살아 있는 노동이라는 요소가 우세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생산가격보다 높을 것이다. 비록 이 초과분은 소규모 토지소유농민이 지배적인 나라에서는 비농업자본의 구성도 낮기 때문에 제한된다 하더라도.(자본3,1019-1020)

 

소농으로 하여금 경작을 중단하도록 하는 한계는, 그를 소규모 자본가로 보는 한에서는 평균이윤이 아니며, 그를 토지소유자로 보는 한에서는 지대의 필요가 아니다. 소규모 자본가로서 그에게 절대적인 한계로 나타나는 것은 현실적인 비용을 뺀 뒤 자기 자신에게 지불하는 임금이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물의 가격이 그에게 이 임금을 보상하는 한 그는 토지를 경작하며, 때때로 생산물의 가격이 육체적 최저수준의 임금만을 보상하는 경우에도 토지를 경작한다. 그리고 토지소유자로서 그에게는 토지소유가 부과하는 장벽은 없다. 왜냐하면 이 장벽은 토지소유와 분리된 자본(노동도 포함)이 토지에 투자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자본3,1020)

 

그러나 토지가격에 대한 이자는 하나의 장벽을 이룬다. 왜냐하면 이 이자는 일반적으로 제3자인 저당권자에게 지불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자는 잉여노동 중 자본주의적 조건에서는 이윤을 형성할 부분에서 지불될 수 있다. 그러므로 [토지가격이나 이것에 대해 지불되는 이자로 기대되는] 지대는 농민의 생존에 불가결한 노동을 넘는 잉여노동이 자본화된 것의 일부에 불과할 수밖에 없지만, 이 잉여노동은 [평균이윤 전체와 동등한] 상품가치부분으로 실현될 필요도 없으며, 또한 평균이윤으로 실현되는^ 잉여노동을 넘는 초과분[즉 초과이윤]으로 실현될 필요는 더더욱 없다.(자본3,1020-1021)

 

지대는 평균이윤의 공제분일 수도 있고 또는 평균이윤 중 실현되는 유일한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소규모 토지소유농민이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경작할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처럼] 농산물의 시장가격이 그에게 평균이윤을 가져다 줄 수 있을 만큼 등귀할 필요도 없고, 이 평균이윤을 넘는 초과분[이것이 지대 형태로 고정된다]을 가져다 줄 수 있을 만큼 등귀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즉 시장가격이 생산물의 가치까지 등귀하거나 그 생산가격까지 등귀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소농이 지배적인 나라의 곡물가격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나라의 곡물가격보다 낮은 이유의 하나다. 가장 불리한 조건에서 일하는 농민들이 수행하는 잉여노동의 일부는 공짜로 사회에 증여되며 생산가격의 규제나 가치일반의 형성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같은 낮은 가격은 생산자들의 빈곤의 결과이고 결코 그들의 노동생산성의 결과는 아니다.(자본3,1021)

 

자영농민의 소규모 토지소유라는 이 형태가 지배적이고 정상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고전적 고대의 최성기에서는 사회의 경제적 토대이며, 근대적 국민들 사이에서는 봉건적 토지소유의 해체에서 생기는 형태들 중의 하나다. 예컨대 영국의 요먼리(yeomanry), 스웨덴의 소농계급, 프랑스와 서부독일의 농민이 그러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식민지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서 독립농민은 다른 조건에서 발달하지 때문이다.(자본3,1021)

 

자영농민의 자유로운 소유는 분명히 소규모 경영−이 생산방식에서는 토지의 점유가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을 소유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며 경작자는 자유로운 소유자이든 예속농민이든 언제나 자기 자신의 생활수단을 고립된 노동자로서 가족과 함께 독립적으로 생산해야만 한다−을 위한 가장 정상적인 토지소유 형태다. 토지의 소유가^ 이 경영방식의 완전한 발달을 위해 필요한 것은, 마치 노동도구의 소유가 수공업경영의 자유로운 발달을 위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토지소유는 여기에서 인격적 자립성의 발달을 위한 토대를 이룬다. 이런 토지소유는 농업 자체의 발달에서 하나의 필연적인 통과점이다.(자본3,1021-1022)

 

그러나 이 토지소유를 몰락시키는 원인들은 이 토지소유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 원인들은 다음과 같다. 대공업의 발달에 의해 농촌가내공업[이 토지소유의 정상적인 보완물]이 파괴되는 것. 이런 경작형태에 있는 토지들이 점차로 피폐하게 되는 것. 대규모 토지소유자가 공유지[이것은 항상 소규모 경영의 제2의 보완물이며 가축의 사육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다]를 횡령하는 것. 대규모 경작[식민지농장의 형태든 자본주의적 형태든]으로부터의 경쟁 따위다. 또한 이 몰락에 기여하는 것은 농업상의 개량인데, 이 개량들은 농산물의 가격을 인하할 뿐 아니라 더 큰 투자와 더 풍부한 객체적인 생산조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18세기 전반기의 영국에서 볼 수 있었다.(자본3,1022)

 

소규모 토지소유는 그 성질상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의 발달, 노동의 사회적 형태들, 자본의 사회적인 집중, 대규모의 목축, 과학의 누진적인 적용 등을 배제한다.(자본3,1022)

 

고리대와 조세는 항상 소규모 토지소유를 빈곤하게 만든다. 토지가격에 자본을 지출하기 때문에 이 자본이 경작에서 빠진다. 생산수단의 끊임없는 분산, 생산자 자신의 끊임없는 고립화, 인간노동의 거대한 낭비, 생산조건의 누진적인 악화, 생산수단의 가격 등귀 등은 소규모 토지소유의 필연적인 법칙이다. 이 생산방식에서는 풍작도 불행으로 된다.(자본3,1022)

 

소규모 농업이 자유로운 토지소유와 결부되는 경우의 독특한 결함의 하나는 경작자가 토지구입에 자본을 지출한다는 것에서 생긴다. (이것은^ 대규모 농장소유자가 처음에는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이 차지농업가로서 그 토지를 스스로 경영하기 위해 자본을 지출하는 과도적인 형태에도 타당하다.) 토지가 단순한 상품으로 유통함에 따라 소유의 변경이 증가하며, 이에 따라 새로운 세대마다 그리고 유산분할이 있을 때마다 토지는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자본지출을 요구하며 농민에 의해 구입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토지가격이 개별생산자에 대해 생산물의 비용가격[또는 비생산적 비용]의 주요한 요소의 하나를 이룬다.(자본3,1022-1023)

 

토지가격은 자본화된 지대, 따라서 선취한 지대에 지나지 않는다. 농업이 자본주의적으로 경영되어 토지소유자는 단순히 연간지대를 받으며 차지농업가는 이것 이외에는 토지에 대한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는다면, 토지의 구입에 토지소유자 자신이 지출한 자본은 [그에게는 이자낳는 자본투자이지만] 농업 그것에 투하된 자본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자본은 농업에서 기능하는 고정자본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도 아니며 유동자본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주47)(자본3,1023)

 

주47) 마론(1859)은 자기가 공격하고 있는 상대방의 그릇된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는 토지의 구입에 지출된 자본을 ‘투하자본’이라고 가정하고, 투하자본과 경영자본(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개념규정에 관해 논쟁하고 있다. 자본 일반에 관한 완전히 무미건조한 그의 관념 −독일 ‘국민경제학’의 일반상황에서 보면 비경제학자로서는 어찌할 수 없기는 하지만− 때문에 이 자본이 투하자본도 아니고 경영자본도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증권거래소에서 주식이나 국채의 매입에 지출하는 자본은 결코 어떤 생산분야에 현실적으로 ‘투하’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비록 그것이 구매자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투자로서 나타나지만].(자본3,1023)

 

이 자본은 토지의 구매자에게 연간지대를 수취하는 권리를 줄 뿐이며 지대의 생산과는 전적으로 아무런 상관도 없다. 토지의 구매자는 단순히 자본을 토지의^ 판매자에게 주고 판매자는 자기의 토지소유를 포기한다. 따라서 이 자본은 이미 구매자의 자본으로서 존재하지 않고 구매자는 이제 그 자본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자본은 결코 그가 토지 그것에 투하할 수 있는 자본의 일부는 아니다. 구매자가 토지를 비싸게 구입하였는가 싸게 구입하였는가 또는 공짜로 얻었는가는 차지농업가가 경영에 투하하는 자본에 대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으며 지대에 대해서도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이 지대가 토지구매자[토지소유자]에게 이자 정도는 될 것인가 아닌가 또는 높은 이자로 나타나는가 낮은 이자로 나타나는가에 영향을 미친다.(자본3,1023-1024)

 

예컨대 노예경영의 경우를 보자. 노예의 대가로 지불되는 가격은 노예로부터 착취할 잉여가치 또는 이윤을 선취하여 자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노예의 구입에 지불한 자본은 노예로부터 이윤[잉여가치]을 착취하는 데 필요한 자본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 자본은 노예소유자가 주어버린 자본이며, 그가 현실적인 생산에서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자본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그 자본은 그에게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이것은 마치 토지의 구입에 지출된 자본이 농업을 위해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을 가장 잘 증명하여 주는 것은, 노예소유자 또는 토지소유자가 노예나 토지를 다시 판매할 때만 그 자본이 다시 그들에게 존재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동일한 관계가 구매자에게 생긴다. 그가 노예를 구입하였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직 그로 하여금 노예를 착취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노예경영 그것에 별도의 자본을 투하해야만 노예를 착취할 수 있다.(자본3,2024)

 

동일한 자본이 이중으로[즉 토지판매자의 수중에도 토지구매자의 수중에도]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본은 구매자로부터 판매자에게로 이전되고 그것으로 일은 끝난다. 구매자는 이제 자본을 가지지 않으며 그 대신 토지를 가지고 있다. 이 토지에 대한 현실적인 투자로부터 나오^는 지대를 이제 새로운 토지소유자가 [토지에 투하한 것이 아니라 토지의 획득을 위해 지출한] 자본의 이자로 여긴다는 사실은 토지라는 요인의 경제적 성질을 조금도 변경시키지 않는다.(자본3,1024-1025)

 

사실상 토지의 구입에 지출되는 화폐는 [국채의 구입에 지출되는 화폐와 마찬가지로] 즉자적으로만 자본인데, 이것은 어떤 가치액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토대 위에서는 즉자적 자본[잠재적 자본]인 것과 마찬가지다. 토지의 대가로 지불한 것은 [국채나 기타의 구입상품의 대가로 지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폐액이다. 이것은 잠재적 자본이다. 왜냐하면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토지의 판매자가 받는 화폐가 현실적으로 자본으로 전환되는가 않는가는 그가 그 화폐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구매자로서는 그 화폐는 이미 자본으로서 기능할 수 없는데, 이것은 그가 명백히 소비해버린 다른 모든 화폐와 마찬가지다. 물론 그 화폐는 그의 계산에서는 이자낳는 자본으로서 기능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수입−토지로부터의 지대나 정부로부터의 국채이자−을 [자기가 이 수입 청구권을 구입하는 데 지출한] 화폐의 이자로서 계산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 청구권을 자본으로 실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시 그것을 판매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다른 사람인 새로운 구매자는 이전의 구매자가 처하였던 것과 동일한 관게에 처하게 된다. 이렇게 지출된 화폐는 아무리 이 사람으로부터 저 사람에게도 전전하더라도 지출자를 위해 현실적인 자본으로 전환될 수는 없다.(자본3,1025)

 

소농민적 분할지 소유의 경우에는, 토지가 자기 자신의 가치를 가지며 따라서 [기계나 원료와 마찬가지로] 자본으로 생산물의 생산가격에 들어간다는 환상이 훨씬 더 강화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지^대 그리고 자본화된 지대인 토지가격이 농산물의 가격결정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 경우뿐이다. 첫째, 농업자본[이것은 토지구입에 지출된 자본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 않다]의 구성 때문에(유기적 구성이 낮기 때문에) 농산물의 가치가 그 생산가격보다 높고 시장상황이 토지소유자로 하여금 이 차액을 (절대지대로서) 실현할 수 있게 해주는 경우다. 둘째, 독점가격이 생기는 경우다.(자본3,1025-1026)

 

그런데 이런 경우들은 소규모 토지소유와 소규모 경영 아래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서 생산은 그 대부분이 생산자의 자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고 일반적 이윤율에 의해 규제되지 않은 채 진행되기 때문이다. 소규모 경영이 임차지에서 행해지는 경우에도 차지료는 [다른 어떤 관계에서보다 훨씬 더 높은 비율로] 이윤의 일부를 포함하며 심지어 임금의 공제분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차지료는 오직 명목상으로만 지대며 임금과 이윤에 대해 독립적인 범주로서의 지대는 아니다.(자본3,1026)

 

따라서 토지의 구입을 위한 화폐자본의 지출은 농업자본의 투하가 아니다. 이 지출은 소농민이 현실적인 생산영역에서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자본을 그만큼 감소시킨다. 이 지출은 생산수단의 규모를 그만큼 감소시키며 따라서 재생산의 경제적 토대를 그만큼 축소시킨다. 이 지출은 소농민을 고리대에 종속시킨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진정한 신용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지출은 대규모 농장의 구입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농업상의 장애요소다. 이런 사정은 사실상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모순되는데, 그 이유는 토지소유자의 채무[그가 토지를 상속받았든 구입하였든]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는 대체로 무관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토지소유자가 지대를 스스로 차지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저당권자에게 지불해야 하는가는 결코 임차지의 경영 그것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자본3,1026)

 

지대가 주어진 경우에는 토지가격은 이자율에 의^해 규제된다. 이자율이 낮으면 토지가격은 높고, 그 반대이면 그 반대로 된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높은 토지가격과 낮은 이자율은 병행한다. 따라서 이자율이 낮기 때문에 농민이 높은 토지가격을 지불해야만 한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자율이 낮기 때문에 그는 경영자본을 유리한 신용조건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자본3,1026-1027)

 

그러나 실제로는 소규모 토지소유가 지배적인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첫째, 신용의 일반법칙은 생산자가 자본가인 것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농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둘째, 소규모 토지소유가 지배하고 소규모 농민이 국민의 척추를 이루는 곳에서는(우리는 식민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자본의 형성과 사회적 재생산은 상대적으로 약하고 [앞에서 전개한 의미에서의] 대부가능 화폐자본의 형성은 더욱 약하다. 왜냐하면 대부가능 화폐자본의 형성은 자본의 집적과 부유한 놀고먹는 자본가들 계급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매시(1750)]. 셋째, 토지소유가 여기에서처럼 대부분의 생산자들에 대해 생활조건을 이루며, 그들의 자본의 불가결한 투하장소를 이루고 있는 곳에서는 토지가격은 이자율과 무관하게 때로는 이자율에 정비례하여(원문에는 ‘반비례’로 되어 있다) 상승한다. 왜냐하면 토지소유에 대한 수요가 그 공급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토지는 분할지(parcelled lots)로 판매되면 대규모 토지로 판매되는 경우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받는다. 왜냐하면 소규모 구매자의 수는 많고 대규모 구매자의 수는 적기 때문이다.[암흑단, 뤼비숑, F. W. 뉴먼(1851)].(자본3,1027)

 

이런 모든 이유 때문에 비교적 높은 이자율에서도 토지가격은 등귀한다. 토지의 구입에 투하된 자본으로부터 농민이 얻는 비교적 낮은 이자[무니에(1846)](농업경영에서 비교적 낮은 수익을 얻는다는 의미)는 그 자신이 저당권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높은^ 고리대적 이자와 대비된다. 아일랜드의 제도도 동일한 것을 보여주는데 다만 그 형태가 다를 뿐이다.(자본3,1027-1028)

 

그리하여 생산 그것과는 무관한 요소인 토지가격이 생산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수준으로까지 등귀할 수 있다[돔발(1824~1837)].(자본3,1028)

 

토지가격이 이와 같은 기능을 한다는 것, 토지의 매매와 상품으로서의 토지의 유통이 이 정도까지 발달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여기에서는 상품이 모든 생산물과 모든 생산도구의 일반적인 형태로 된다−의 발달의 결과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현상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제한적으로만 발전하여 그 모든 특성을 아직 전개하지 않고 있는 곳에서만 발생한다. 왜냐하면 이런 현상들은 농업이 더 이상−또는 아직−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종속하지 않고 이미 몰락한 사회형태로부터 물려받은 생산방식에 종속하고 있는 상황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불이익[즉 생산자가 자기 생산물의 화폐가격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 그 생산양식의 불완전한 발달로부터 생기는 불이익과 결합되어 있다. 농민은 자기의 생산물을 상품으로 생산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가지지 않으면서 상인으로 되고 산업가로 된 것이다.(자본3,1028)

 

생산자에 대한 비용가격의 요소로서의 토지가격과, 생산물에 대한 생산가격의 비(非)요소로서의 토지가격(비록 지대가 농산물의 가격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하더라도, 20년 또는 그 이상 대부되는 자본화된 지대(토지가격)는 농산물의 가격결정에 결코 참여하지 않는다) 사이의 충돌은, 토지의 사적 소유와 합리적 농업[토지의 정상적인 사회적 이용] 사이의 모순을 표현하는 형태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토지의 사적 소유 그리고 직접적 생산자로부터의 토지수탈−한 쪽 사람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다른 쪽 사람들은 토지를 소유하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토대다.(자본3,1028)

 

소규모 경작에서는 [토지의 사적 소유의 형태이고 결과인] 토지가격은 생산 그것에 대한 장애물로서 나타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입각하고 있는 대규모 경작과 대규모 토지소유의 경우에도 소유는 장애물로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토지소유는 차지농업가에 의한 자본의 생산적 투자[궁극적으로 차지농업가의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토지소유자의 이익이 되는 생산적 투자]를 제한하기 때문이다.(자본3,1029)

 

어느 형태에서도 토지를 항구적인 공동소유로서, 양도할 수 없는 인류대대손손의 생존⋅재생산조건으로서 의식적으로 합리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지력의 착취와 탕진이 나타난다(이 착취를 사회의 발전이 도달한 수준에 의존시키지 않고 개별생산자들의 우연적이고 불균등한 사정에 의존시킨다는 사실을 무시하더라도). 소규모 소유의 경우에는 이것은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사용하기 위한 수단과 과학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며, 대규모 소유의 경우에는 차지농업가와 토지소유자의 가장 급속한 치부를 위해 이 수단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나 시장가격에 의존하기 때문에 생긴다.(자본3,1029)

 

소규모 토지소유에 대한 모든 비판은 결국 농업에 대한 장애물로서의 사적 소유에 대한 비판으로 돌아간다. 대규모 토지소유에 대한 모든 반대 비판도 그러하다. 여기에서는 부차적인 정치적 고려는 두 경우 모두에서 제외한다. 토지의 사적 소유가 농업생산과 토지 그것의 합리적인 취급⋅유지⋅개량에 대해 제기하는 이런 제한과 장애는 소규모 토지소유와 대규모 토지소유에서는 다른 형태로 전개될 뿐인데, 해악의 이런 특수형태들에 관해 논쟁하느라고 이 해악의 궁극적인 원인을 잊어버리고 있다.(자본3,1029)

 

소규모 토지소유는 인구의 압도적인 다수가 농촌인구이고 고립된 노동이 사회적 노동보다 지배적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런 사정에서는 부와 재생산의 발전, 그것의 물질적⋅정신적 조건들의 발전은 배제되고 있^으며 따라서 합리적인 경작을 위한 조건들도 배제되어 있다. 다른 한편 대규모 토지소유는 농업인구를 점점 감소시켜 최소한도로 축소시키고 점점 증대하는 공업인구를 대도시에 밀집시킨다. 이리하여 대규모 토지소유는 생명의 자연법칙이 명령하는 사회적 물질대사의 상호의존적 과정에 회복할 수 없는 균열이 생기도록 하여, 지력이 낭비되고, 이 낭비는 무역에 의해 한 나라의 국경을 넘어 타국에서도 생긴다.(리비히, 1862)(자본3,1029-1030)

 

소규모 토지소유가 거의 사회 밖에 사는 미개인계급[원시적 사회형태의 온갖 야만성과 문명국의 온갖 고뇌⋅불행을 결합하고 있다]을 만들고 있는 반면에, 대규모 토지소유는 노동력을 [그 자연발생적인 에너지가 안식하며 그리고 이것을 국민의 생명력을 갱신하기 위한 준비자원으로 저장하여 두는 최후의 보루인] 농촌 그곳에서 파괴하고 있다. 대공업과 대규모 기계화한 농업은 공동으로 작용한다. 원래 이 둘을 구별한 것이, 전자는 주로 노동력 따라서 인간의 자연발생적인 힘을 낭비하고 파멸시키고, 후자는 주로 토지의 자연발생적인 힘을 낭비하고 파멸시키는 점에 있었다면, 그 뒤의 발전과정에서는 그 둘이 서로 결합해버렸다. 이리하여 농촌에서도 공업제도는 농촌노동자들의 활력을 빼앗아 버리며, 반면에 공업과 상업은 농업에 대해 토지를 피폐시키는 수단을 제공하고 있다.(자본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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