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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고전읽기

부르주아지와 반혁명

작성자홍승용|작성시간19.03.04|조회수461 목록 댓글 0

맑스주의 고전 읽기 자료입니다.


첨부파일 m선집1-08.hwp



K. 맑스: 부르주아지와 반혁명, 최인호 역

 

우리는 그것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우리의 지반이 법적 지반이 아니라 혁명적 지반이라는 것을. 이제는 정부쪽도 법적 지반이라는 위선을 포기하였다. 정부도 혁명적 지반 위에 섰다; 왜냐하면 반혁명적 지반 역시 혁명적인 것이므로.(선집1,480)

 

법적 지반을 구출하기 위해, 즉 무엇보다도 먼저, 혁명에 당연히 귀속되는 명예를 혁명으로부터 사취하기 위해 협정 이론을 발명한 이 캄프하우젠은 그와 동시에, 후에 이 법적 지반을 협정 이론과 함께 공중으로 날려 버릴 지뢰를 발명하였던 것이다.(선집1,480-481)

 

그는 정치적 범죄에 대한 과거의 프로이센의 입법과 과거의 재판소들의 효력이 계속해서 발생하도록 놓아두었다. 과거의 관료와 과거의 군대는 캄프하우젠 치하에서,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원기를 되찾고 스스로를 완전히 복원시킬 수 있는 시기를 다시 맞이하였다. 구체제의 모든 지도자들은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은 채 그들의 지위를 지켰다.(선집1,481)

 

캄프하우젠 치하에서 그리고 캄프하우젠에 의해서 반혁명은 모든 결정적인 거점들을 장악하였으며, 협정의회가 토론하고 있는 동안 반혁명은 전투 능력이 있는 군대를 준비하였다. 행동 장관 한제만-핀토 밑에서 과거의 경찰은 장비를 새로이 갖추었고, 인민에 맞서는 부르주아지의 작은 전쟁, 그러나 그만큼 격렬한 전쟁을 수행하였다.(선집1,48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 캄프하우젠이나 한제만 같은 극히 하찮은 인물들에게 세계사의 주도권을 넘길 수는 없다. 그들은 한 계급의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언어, 그들의 행동들은 그들을 전면으로 내세운 한 계급의 공식적 메아리였을 뿐이다. 그들은 전면에 내세워진대부르주아지였을 뿐이다.(선집1,482)

 

편안히 영면하였다가 일순간 캄프하우젠에 의해 다시 소생한 연합 지방의회들에서 이 계급의 대표들은 자유주의적 반정부파를 형성하였다. 사람들은 이 자유주의적 반정부파 신사들이 3월 혁명 후 그들의 원칙들에 충실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고 비난하였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연합 지방의회들에서 배타적 대표권을 가졌던 대토지 소유자들과 자본가들, 한마디로 돈주머니들은 돈과 교양을 증대시켰다. 한편, 프로이센에서의 부르주아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공업상업농업의 발전과 더불어과거의 신분적 차별들은 그 물질적 기초를 상실하였다.(선집1,482)

 

귀족 자체가 본질적으로 부르주아화하였다. 귀족은 이제 성실, 사랑, 신앙 대신에 무엇보다도 사탕무, 화주, 양모를 취급하게 되었다. 그들이 서로 힘을 다투는 주요한 시합장은 양모 시장으로 되었다. 다른 한편, 발전이 진행됨에 따라 마치 마법에 의한 것처럼 발밑의 낡은 사회적 기초를 상실해 버린 절대주의 국가는 [이제] 변화된 생산 양식과 변화된 욕구들을 지닌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를 속박하는 족쇄로 되어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그들의 물질적 이해 때문에라도 정치적 지배권에 대한 그들의 몫을 청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상업적 및 산업적 욕구들을 법률적으로 유효하게 만들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가장 신성한 이익에 대한 관리권을 시대에 뒤떨어지고, 건방지고, 무지한 관료의 손에서 빼앗아야만 했다. 그들은 국가 재산의 창조자가 자신들이라고 생각한바, 그러한 국가 재산의 관리권을 요구해야만 했다. 그들은, 관료로부터 소위 교양의 독점권을 가로챈 이후,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의 욕구들에 대한 실제적 지식에 있어서 자신들이 [관료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자각한 이후에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정치적 지위를 빼앗고자 하는 야심을 또한 갖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이해, 의도 및 정부의 행동 등을 자유로이 토론할 수 있어야만 했다. 이것을 그들은 출판 자유의 권리라고 명명하였다. 그들은 방해받음이 없이 결사할 수 있어야만 했다. 이것을 그들은 자유로운 결사의 권리라고 명명하였다. 종교의 자유 등등도 마찬가지로, 자유 경쟁의 필연적 결과로서 그들에 의해 요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프로이센의 부르주아지는 18483월 직전에, 그들의 모든 소원들이 실현될 것처럼 보이는 최상의 도정 위에 서 있었다.(선집1,485)

 

프로이센 국가는 재정난에 처해 있었다. 국가의 신용은 고갈되어 있었다. 이것이 연합 지방의회 소집의 비밀이었다. 정부가 자신의 운명을 거역하여 연합 지방의회를 무자비하게 해산시켜 버리기는 했지만, 재정난과 신용 상실 상태 때문에 정부는 틀림없이 차츰 부르주아지의 품안에 안기게 될 것이다. 신의 은총을 받은 국왕 역시 봉건 영주들과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자신들의 특권을 현금과 교환하곤 하였다. 모든 기독교적게르만적 국가들에서 농노해방은 이 세계사적 거래의 최초의 위대한 행위였고, ^헌 군주제가 이 거래의 제2의 위대한 행위였다. ‘돈에는 주인이 따로 없다고 하지만, 주인이 돈을 잃게 되자마자 주인은 주인이기를 그만두게 된다.(선집1,485-486)

 

따라서 연합 지방의회의 자유주의적 반정부파는, 부르주아지의 이해와 욕구들에 더 이상 조응하지 않게 된 정부 형태에 맞선 부르주아지의 반항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부르주아지는 궁정에 반대하기 위하여 인민에게 아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선집1,486)

 

아마도 그들은 실제로 인민을 위해 반대하고 있다고 상상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얻고자 애썼던 권리들과 자유들을 당연하게도 인민의 권리들 및 인민의 자유들이라는 상호(商號) 아래에서만 정부에 대해 요구할 수 있었다. 이 반정부파는 2월의 폭풍이 불어 닥쳤을 때 이미 말한 거처럼 최상의 노정 위에 서 있었다.(선집1,486)

 

프로이센의 부르주아지는 국가의 높이에까지 이르렀으나, 이는 그들이 원했었던 것처럼 왕권과의 평화적 협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혁명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왕권에 대항해서, 즉 자기 자신에 대항해서 그들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에게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은 인민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가 볼 때 왕권은 그 뒤에 부르주아지 자신의 세속적 이해를 숨기고 있는 막, 신의 은총을 쐰 막이었을 뿐이다.(선집1,486-487)

 

[프랑스의] 2월 혁명이 독일에서의 그 여파와 함께 프로이센 부르주아지에게 환영받는 까닭은 그것이 정권을 프로이센 부르주아지의 손아귀에 쥐어 주었기 때문이고, 마찬가지로 그것이 그들의 계획을 망쳐 놓게 된 까닭은 그들의 지배라는 것이 결코 그들이 채우고 싶어 하지도 않고 채울 수도 없는 조건들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선집1,487)

 

부르주아지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민이 그들을 위해서 싸우도록 윤허하였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에게 인도된 지배권은 적을 정복한 장군의 지배권이 아니라 승리한 인민으로부터 이 인민 자신의 이익의 보호를 위탁받은 치안 위원회의 지배권이었다.(선집1,487)

 

캄프하우젠 역시 이러한 입장의 불편함을 완전히 느끼고 있었으며, 그의 내각의 일체의 허약함은 이러한 느낌과 이 느낌을 있게 하는 상황에 연원한다. 그러므로 그의 정부의 가장 후안무치한 행동들에서도 일종의 부끄러워하는 기미가 엿보이는 것이다. 노골적인 후안무치함과 파렴치함은 한제만의 특권이었다.(선집1,487)

 

프로이센의 3월 혁명은 1648년의 영국 혁명과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과도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 두 혁명들에서 실제로 운동의 선두에 서 있던 계급은 바로 부르주아지였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에 속하지 않았던 시민층은 아직 부르주아지와 구별되는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았거나 혹은 아직 독자적 발전을 이루지 못한 계급 또는 계급 부분들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1791년부터 1794년까지 프랑스에서 보여지듯이, 그들이 부르주아지에 대립했을 때에도, 그들은 비록 부르주아지의 방식으로는 아닐지라도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의 테러리즘 전체는 부르주아지의 적들인 절대주의, 봉건주의, 속물적 시민층을 끝장내기 위한 평민적 방식과 다름없었다.(선집1,488)

 

1648년과 1789년의 혁명은 결코 영국의 혁명, 프랑스의 혁명이 아니었다. 그 혁명들은 유럽적 규모의 혁명들이었다. 그 혁명은 낡은 정치 질서에 대한 사회의 특정한 한 계급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 혁명들은 새로운 유럽 사회를 위한 정치 질서의 선언들이었다. 이 혁명들에서 승리한 것은 부르주아지였다; 그러나 그 당시 부르주아지의 승리는 새로운 사회 질서의 승리, 봉건적 소유에 대한 부르주아적 소유의 승리, 지방주의에 대한 국민주의의 승리, 춘프트에 대한 경쟁의 승리, 장자 상속제에 대한 분할 상속제의 승리, 토지가 토지 소유자를 지배하는 것에 대한 토지 소유자의 지배의 승리, 미신에 대한 계몽의 승리, 가문의 이름에 대한 가족의 승리, 영웅의 나태에 대한 근면의 승리, 중세적 특권에 대한 부르주아 법의 승리였다. 1648년 혁명은 16세기에 대한 17세기의 승리였고, 1789년의 혁명은 17세기에 대한 18세기의 승리였다. 이 혁명들은 그것들이 일어난 당시의 세계의 부분들, 즉 영국과 프랑스의 욕구를 표현했다기보다는 그 당시의 세계의 욕구를 표현하였다.(선집1,488)

 

프로이센의 3월 혁명에는 이 모든 것들 중 아무것도 없었다. 2월 혁명은 현실적으로는 입헌 왕정을, 이념적으로는 부르주아 지배를 폐지하였다. 프로이센의 3월 혁명은 이념적으로는 입헌 왕정을, 현실적으로는 부르주아 지배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프로이센의 3월 혁명은 유럽적 혁명이기는커녕 혁명이 소진되어 가면서 한 후진국에 미친 여파에 불과했다. 그 혁명은 자신의 세기를 앞지르기는커녕, 약 반세기 이상이나 자신^의 세기에 뒤처져 있었다. 그 혁명은 애시당초 이차적이었는데, 알다시피 이차적인 병은 본래의 병보다 치유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신체도 더 파괴한다. [3월 혁명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새로운 사회를 건립하는 것이 아니라 파리에서 죽어 버린 사회를 베를린에서 재생시키는 것이었다. 프로이센의 3월 혁명은 결코 국민적, 독일적인 혁명이 아니었으며, 애시당초 지방적프로이센적 혁명이었다. 빈의, 카셀의, 뮌헨의, 모든 종류의 지방적 봉기들이 프로이센의 3월 혁명과 나란히 진행하여, 그것과 순위를 다투었다.(선집1,489)

 

독일의 부르주아지는 너무도 굼뜨고, 무르고, 느리게 발전했기 때문에 그 결과, 그들이 봉건주의와 절대주의에 대해 위협적으로 대립한 순간에 프롤레타리아트 및, 그 이해와 이념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유사한 시민층의 모든 분파들이 부르주아지 자신에게 위협적으로 대립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뒤의 한 계급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가 그들 앞에서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프로이센의 부르주아지는 1789년의 프랑스 부르주아지와는 달리 낡은 사회의 대표자들인 왕권, 귀족에 대항해 현대 사회 전체를 대변한 계급이 아니었다.(선집1,489)

 

그들은 왕권에 대해서도 인민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대립하는 일종의 신분으로 전락하였는데, 이 신분은 왕권과 인민 양자에 대해서 적의를 품고 있었지만, 항상 앞뒤에 이 양자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적들 중 어느 하나에 대해서도 단호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스스로가 이미 낡은 사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인민을 배신하는 성향, 낡은 사회의 대표자, 왕관을 쓴 대표자와 타협하려는 성향을 애초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낡은 사회에 대항해서 새로운 사회의 이익을 대표한 것이 아니라 노쇠한 사회의 내부에서, 갱신된 이익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들이 혁명의 조타수였던 것은, 그들 뒤에 인민이 서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민이 그들을 자신을 앞에 억지로 끼워 넣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두에 섰던 것은, 그들이 새로운 사회적 시기의 창의를 대표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과거의 사회적 시기의 원한을 대표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습으로 말하면] 지표를 [스스로] 돌파하고 나오지 못한 낡은 국가의 지층이 지진에 의해서 새로운 국가의 표면으로 내튕겨진 것과 같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도 없고, 인민에 대한 믿음도 없으며, 위쪽에 대해서는 투덜거리고, 아래쪽에 대해서는 벌벌 떨며, 양쪽에 대해서 이기적이고, 그러한 자신의 이기주의를 의식하고 있으며, 보수주의자들에 대해서는 혁명적이고, 혁명가들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며, 그들 자신의 표어를 신뢰하지 않고, 이념 대신 공문구를 외치며, 세계의 폭풍에 겁을 먹으면서도 그 폭풍을 이용한다어떤 방향으로도 정력을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방향으로 표절하며, 독창적이지 않기 때문에 비천하고, 비천함에 있어서 독창적이다. 자기 자신의 소망들과 거래하고, 창의도 없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도 없고, 인민에 대한 믿음도 없으며, 세계사적 소명도 없다건강하기 이를 데 없는 인민의 최초의 청춘의 격류를 자신의 노쇠한 이해관계 속에서 유도하고 이끄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고 생각하는 저주스런 늙은이눈도 없는! 귀도 없는! 이빨 빠진, 아무것도 없는 저주스런 늙은이!이것이 3월 혁명 이후 프로이센 국가의 키를 잡은 프로이센 부르주아지의 모습이었다.(선집1,490)

 

캄프하우젠 내각의 형태로 정권을 잡은 부르주아지가 곧바로, 프로이센 사회계약의 가장 광범한기초라고 선언한 협정이론은 결코 공허한 이론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황금빛생명의 나무에서 자라난 것이었다.(선집1,490)

 

3월 혁명은 결코 신의 은총을 입은 주권자를 인민 주권자에 굴복시키지 않았다. 3월 혁명은 단지 왕권, 즉 절대주의 국가로 하여금 부르주아지와 화해하도록, 자신의 과거의 경쟁자와 협정을 맺도록 강제했을 뿐이다. 왕권은 부르주아지에게 귀족을, 부르주아지는 왕권에게 인민을 제물로 바칠 것이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왕정은 부르주아적으로 되고 부르주아지는 근왕(勤王)적으로 된다.^ 3월 이후에는 이 두 세력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들은 혁명의 피뢰침으로서 서로 봉사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지극히 광범한 민주주의적 기초위에서 행해진다. 이것이 협정이론의 비밀이었다.(선집1,490-491)

 

3월 혁명 이후에 최초의 내각을 구성했던 기름 상인들과 양모 상인들은 발가벗겨진 채로 있는 왕권에 그들의 평민적 옷을 덮어 주는 역할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궁정에 출입할 자격을 얻게 된 것에 따른, 그리고 순수한 아량으로 자신들의 난폭한 로마적 근성을 마지못해 버리면서연합 지방의회의 로마적 근성을 버리면서왕권을 삼켜 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간격을 자신의 이전의 인기라는 시체로써 메꾸는 것에 따른, 지고의 쾌락에 탐닉하였다. 캄프하우젠 장관이 입헌적 왕권의 산파로서 얼마나 거드름을 피웠던가.(선집1,491)

 

반쯤은 해체된 군대, 지위와 봉급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관료, 자신들의 지도자를 입헌 제도의 견학 여행을 보내 놓고 있던 자존심 상한 봉건 신분 등은 약간의 달콤한 말과 큰 절로 어렵지 않게 부르주아 귀족을 속여 넘겼다.(선집1,491)

 

프로이센 부르주아지는 지배권의 명목상의 소유자였다. 낡은 국가의 세력들이 딴 마음 없이 그들의 명령을 따르게 되었고, 그 세력들이 부르주아지 자신의 전능한 권력의 헌신적 분자들로 바뀌어졌을 것이라고 프로이센 부르주아지는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내각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이 군주제 전체에 걸쳐서 부르주아지는 이러한 착각에 취해 있었다.(선집1,491)

 

3월 이후에 프로이센의 부르주아지가 행한 유일한 영웅적 행위, 비무장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시민 방위군의 종종 피를 부르는 잔학 행위들은 군대 속에서, 관료 속에서, 그리고 심지어 봉건 영주들 속에서 기꺼이 부르주아지를 위한 견마지로를 다하는 조력자들을 발견하지 않았던가?(선집1,492)

 

프로이센 부르주아지에게는 단지 하나의 과제, 즉 자신들의 지배를 안락한 것으로 만들고, 성가신 무정부주의자들을 제거하며, ‘평온과 질서를 회복시키고, 3월의 폭풍의 와중에 상실되었던 이자를 다시 거둬들이는 과제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의 지배 및 그 지배를 조건짓는 3월 혁명의 생산 비용들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만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프로이센 부르주아지가 봉건 사회 및 봉건 사회의 왕권에 대항한 그들의 투쟁 속에서 인민의 이름으로 요청하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무기들, 즉 결사권, 출판 자유 등등의 무기들은 우롱당한 이민의 손에서, 더 이상 부르주아지를 위해 그것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그것을 사용하려는 예사롭지 않은 욕망을 보이고 있는 인민의 손에서 파괴되어야만 하지 않을까?(선집1,492)

 

부르주아지가 확신한 바대로, 부르주아지와 왕권과의 협정, 자신의 운명을 감수하고 있는 낡은 국가와 부르주아지의 거래의 도상에는 명백히 오직 하나의 방해물이 아직 놓여 있었으니, 그 유일한 방해물이란 인민홉스가 말한 것처럼 강건하지만 성질 고약한 놈들이었다. 인민과 혁명!(선집1,492)

 

혁명은 인민의 권원(權原)이었다; 인민은 혁명을 기반으로 해서 그들의 맹렬한 요구들을 내세웠다. 혁명은 인민이 부르주아지 앞으로 발행한 어음이었다. 혁명에 의해서 부르주아지는 지배권을 얻었다. 그들이 지배권을 얻은 그날 이 어음은 만기가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그 어음에 대해서 항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선집1,492)

 

혁명인민이 그것을 입에 올릴 적에, 그것은 다음을 의미했다: 너희 부르주아들은 공안 위원회이다. 우리가 이 공안 위원회에 지배권을 준 것은 너희들이 너희들의 이익에 관해서 왕권과 타협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왕권에 대항해서 우리의 이익, 인민의 이익을 관철시키라고 준 것이다.(선집1,493)

 

혁명은, 부르주아지의 왕권과의 협정에 대한 인민의 항의였다. 왕권과 협정을 맺은 부르주아지는 따라서 항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즉 혁명에 대항해.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위대한 캄프하우젠 치하에서 일어났다. 3월 혁명은 승인받지 못했다. 베를린의 국민 대표 기관은 3월 혁명의 승인 동의를 부결시킴으로써 자신들을 프로이센 부르주아지의 대표 기관으로서, 협정의회로서 구성하였다.(선집1,493)

 

그 의회는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그 의회는 프로이센 인민들에게 큼 소리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왕권에 대항해 혁명하기 위해 인민이 부르주아지와 협정한 것이 아니라 인민이 혁명을 일으켰고, 따라서 인민 그 자신에 대항하여 왕권이 부르주아지와 협정을 맺은 것이라고! 그리하여 혁명적 인민의 권원은 파괴되었고 보수적 부르주아지의 법적 지반이 획득되었다.(선집1,493)

 

법적 지반은 단순히, 혁명이 자신의 지반을 획득하지 못했고 낡은 사회가 자신의 지반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사실, 3월 혁명은 다만 낡은 프로이센 국가의 내부에서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온 왕권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양해’, 왕권조차도 이전의 칙령 속에서 이미 그 필요성을 표명했으며 단지 3월 이전에는 절박하지는 않은 것으로 간주됐던 양해자극을 제공한 하나의 사건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법적 지반은, 마치 혁명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연합 지방의회가 혁명 없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라도 한 것처럼, 3월 이후에도 3월 이전과 마찬가지의 입장에서 부르주아지가 왕권과 교섭하려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법적 지반은 인민의 권원인 혁명이 정부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사회계약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르주아지는 인민으로 하여금 새로운 프로이센의 혁명으로부터 어떠한 요구도 끌어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낡은 프로이센의 입법으로부터 그들의 요구들을 끌어내고 있다.(선집1,494)

 

캄프하우젠 내각은 자신의 과제, 즉 중재와 이행이라는 과제를 해결하였다. 요컨대 캄프하우젠 내각은 인민의 어깨 위에 올라 탄 부르주아지와 인민의 어깨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부르주아지 사이에; 외관상 왕권에 대항해 인민을 대표했던 부르주아지와 실제로 인민에 대항해 왕권을 대표했던 부르주아지 사이에; 혁명의 껍질을 벗은 부르주아지와 혁명의 핵으로서^ 드러난 부르주아지 사이에 중재 업무를 개설했던 것이다.(선집1,494-495)

 

그러는 동안 부르주아지는 소극적 저항으로부터 적극적 공세로 옮아가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고 믿게 되었다. 캄프하우젠 내각은 자신이 이런저런 실책을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3월 혁명 이후 최초의 내각이었다는, 자신이 3월 혁명의 내각이었다는, 그 기원에 걸맞게 부르주아지의 대표[라는 정체]를 아직 인민의 독재자[라는 가면] 아래에 숨겨야만 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퇴진하였다. 이러한 양면적 기원과 이중적 의미의 성격 때문에 그 내각은 주권자인 인민에 대해 아직 어느 정도의 예의와 겸양과 경의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들이 부르주아지에게는 번거로운 것으로 되었으며, 협정의회로부터 직접 생겨난 제2의 내각은 더 이상 그것에 유의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선집1,495)

 

행동내각인 한제만 내각이 그 뒤를 이었는데, 이는 부르주아지가 인민을 왕권에 소극적으로 팔아넘기는 시기로부터 인민을 왕권과 협정한 자신의 지배 아래로 적극적으로 복속시키는 시기로 옮아갈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행동내각은 3월 혁명 이후 두 번째의 내각이었다. 이것이 그 내각의 비밀의 전부였다.(선집1,495)

 

여러분! 금전 문제에 인정은 금물입니다!” 한제만은 이 여섯 단어로 연합지방의회[]자유주의 전체를 요약했다. 이 사람은 협정의회 자체로부터 생겨난 내각, 인민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인민에 대한 능동적 공세로 전환시켜야 할 내각, 즉 행동 내각의 필연적인 우두^머리였다.(선집1,495-496)

 

독일의 속물들은 그 근시안적 편협함 속에서 자신을 프랑스 부르주아지와 혼동하였다. 그들은 어떤 왕권도 거꾸러뜨리지 못했고, 봉건 사회를 제거하지도 못했으며, 더욱이 그 최후의 잔재를 근절하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자신들 스스로가 만들어 내어 지켜야 할 만한 사회를 갖고 있지 못하였다. 그들은 6월 이후에도 2월 이후처럼, 16세기 초 이래처럼, 18세기에서처럼 조상 전래의 교활한 방식, 이윤에 열광하는 방식으로 타인의 노동으로부터 3/4의 이윤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선집1,496-497)

 

그들은 프랑스의 6월 뒤에 오스트리아의 11월이, 오스트리아의 11월 뒤에 프로이센의 12월이 매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프랑스에서는 왕권을 분쇄한 부르주아지가 자신 앞에 있는 유일한 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보게 되었을 뿐이라면왕권과 쟁투하고 있는 프로이센 부르주아지는 오직 유일한 맹우인민을 갖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들 양자가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이해들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이들 양자를 똑같이 억누르는 제3의 세력에 대항한다는 동일한 이해가 아직 양자를 묶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선집1,497)

       

한제만은 626일에 그의 개원식 칙어에서 캄프하우젠의 신비스럽고도 모호한 지극히 광범한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의 군주제를 간단하게 정리해 버렸다. ‘양원제적 기초 위에서의 입헌 군주제 및 국왕과 양원에 의한 입법권의 공동 행사한제만은 감격스러워하던 자신의 전임자의 불길한 예감이 드는 금언을 이러한 무미건조한 정식으로 환원시켰다. “새로운 국가 체제에 조응하지 않는 가장 필요한 관계들을 변경하는 것, 왕국의 거대한 부분에서 재산의 유리한 이용을 방해하고 있는 속박으로부터 재산을 해방시키는 것, 재판 제도를 개조하는 것, 조세 입법을 개혁하는 것, 특히 먼저 특권을 폐지하는 것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시민에 의해) “획득된 자유를 반동”(자유를 봉건 영주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과 무정부 상태”(자유를 인민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로부터 보호하고, 실추된 신뢰를 회복시키는 데 필요한 국가 권력의 강화를 행하는 것(선집1,497)

 

이것이 내각의 정강이었다. 이것이 내각을 손에 넣은 프로이센 부르주아지, 한제만을 그 전형적 대표자로 하는 프로이센 부르주아지의 정강이^었다. 연합 지방의회에서 한제만은 신뢰에 대한 가장 격렬하고도 가장 냉소적인 반대자였다. 왜냐하면여러분! 금정 문제에 인정은 금물입니다!” 내각에 자리잡은 한제만은 실추된 신뢰의 회복이 가장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왜냐하면당시에는 왕권을 향하여 말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인민을 향하여, “여러분! 금전 문제에 인정은 금물입니다!”(선집1,497-498)

 

그 당시에는 돈을 내주는 신뢰가 문제였다. 이번에는 돈을 만드는 신뢰가 문제였다. 거기서는 봉건적 신뢰, , , 조국에 충성을 바치는 신뢰가 문제였다. 여기서는 부르주아적 신뢰, 상거래에 대한, 자본의 이자 지불에 대한, 거래자들의 지불 능력에 대한 신뢰, 즉 상업상의 신뢰가 문제였다. 믿음, 사랑, 희망이 문제가 아니라 신용이 문제이다.(선집1,498)

 

실추된 신뢰의 회복!” 이 말 속에선 한제만은 프로이센 부르주아지의 고정 관념을 진술하였다. 신용은 자본이 임금 노동을,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대부르주아지가 소부르주아지를 착취하는 것이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지속된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에 근거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정치적 움직임은 그것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직접 지휘받는 것이 아닌 한 어떤 것이라도 신뢰, 신용을 교란한다. 그러므로 한제만이 말할 때의 실추된 신뢰의 회복!”이란 다음을 의미했다. 프롤레타리아트 및, 자신의 이해가 국정의 조타수라고 자임하는 계급[부르주아지]과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모든 사회 계층의 모든 정치적 움직임에 대한 탄압.(선집1,498)

 

그런 까닭에 한제만은 실추된 신뢰의 회복바로 옆에 국가 권력의 강화를 기입했던 것이다. 다만 그는 이러한 국가 권력의 본성을 오인했다. 그는 신용, 즉 부르주아적 신뢰에 봉사하는 국가 권력을 강화한다고 믿었으나, 그가 강화했던 것은 다만, 어떠한 신용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뢰를 요구하는, 필요한 경우에는 산탄을 써서라도 그것을 손에 넣는 그러한 국^가 권력일 뿐이다. 그는 부르주아 지배의 생산비를 아끼려 했으나, 프로이센의 봉건적 지배의 복고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부르주아지에게 부담시키고 말았다.(선집1,498-499)

 

노동자들을 향해서는 한제만은 아주 간결하게 설명했다: 나는 노동자들을 위한 위대한 약제를 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 약제를 주머니 속에서 끄집어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실추된 신뢰가 회복되어야만 한다. 신뢰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노동자 계급은 정치 활동 및 군사 간섭에 종지부를 찍고 과거의 관례로 돌아가야만 한다. 노동자들이 나의 충고를 따른다면 그리하여 신뢰가 회복된다면 이 비밀에 가득 찬 위대한 약제는 분명 언제라도 효능을 발휘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는 부르주아적 질서의 교란이라는 병이 확실히 제거되므로 그 약제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고 더 이상 사용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병이 없는데 약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인민이 자신의 생각을 고집한다면그러면 좋다. 나는 국가 권력을 강화할 것이고, 경찰군대재판소관료를 강화할 것이며, 나의 곰들로 하여금 인민의 목을 조르도록 부추길 것이다. 왜냐하면 신뢰금전 문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냐하면 여러분! 금전 문제에 인정은 금물입니다!”(선집1,499)

 

그는 무정부 상태, 즉 인민에 대행해서만 국가 권력을 강화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반동, 즉 왕권 및 봉건적 이해들에 대항해서도 그것들이 부르주아지의 지갑과 부르주아지의 가장 필요한’, 즉 가장 겸손한 요구들을 정면으로 무시하려고 기도하는 한에서는국가 권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행동내각은 그 전체 구성을 볼 때 이미 이러한 반동에 대한 항의였다.(선집1,499)

 

행동내각은 요컨대 재무 장관이 그 내각의 실제적 수상이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모든 프로이센 내각들과 구별된다. 프로이센 국가는 군무, 내무, 외무, 교무, 학무가 그리고 심지어 황실 내각, 신앙, 사랑, 희망 등^도 세속적 재정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수백 년 동안 아주 조심스럽게 은폐시켜 왔다. [그런데] 행동내각은 한제만 씨, 즉 그 각료로서의 정강도 그 반정부당 시절의 정강과 마찬가지로: “여러분! 금전 문제에 인정은 금물입니다!”로 요약되는 남자를 그 정점에 세움으로써, 이 껄끄러운 부르주아적 진실을 그 정점에 세웠던 것이다.(선집1,499-500)

 

프로이센에서 군주제는 하나의 금전 문제로 되었다. 이제 행동내각의 정강에서 이 내각의 행동으로 넘어가 보자. ‘무정부 상태를 억누르기 위해서, 즉 노동자 계급 및 한제만 씨의 정강에 만족하지 않는 시민층의 모든 분파들을 억누르기 위해서 국가 권력을 강화하겠다는 위협은 진지하게 이루어졌다. 심지어 설탕세와 화주세의 인상을 제외한다면, 소위 무정부 상태, 즉 혁명 운동에 맞선 이러한 반동이 행동내각의 유일하게 진지한 행동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선집1,500)

 

행동내각 치하에서 구프로이센의 경찰, 검찰청, 관료, 군대가 강화되었다’. 그들은 부르주아지로부터 봉급을 받기 때문에 부르주아지에게 봉사할 것이라고 한제만은 공상하였다. 어쨌든 그들은 강화되었다.(선집1,500-501)

 

행동내각의 현실적이고 명료하며 인기 있는 활동은 따라서 순전히 경찰적인 활동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도시 민주주의파의 눈에는 이 내각, 그리고 이 내각을 통해 자신의 다수를 대표했던 협정의회, 그리고 그 다수파가 협정의회 내에서 다수를 형성하고 있던 프로이센 부르주아지 들은 새롭게 기운을 차린 과거의 경찰 및 관료 국가 이외의 어떤 것도 대표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분노가 이에 덧붙여졌는데, 왜냐하면 부르주아지가 지배하고 있었고 시민 방위군이라는 형태로 경찰의 구성 부분을 양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선집1,501)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 신사들이 또한경찰의 직무를 떠맡았다는 것, 이것이 인민의 눈에 비친 ‘3월의 성과였다. 즉 배가된 경찰! 구 국가의 최후의 표현인 경찰을 행동내각이 강화하고행동하도록 고무한 것이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서였다는 것은, 행동내각의 행동들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그 내각의 입법 제안들 속에서 비로소 드러난다.(선집1,501)

 

한제만 내각에 의해서 제출된 지방 조례, 배심 재판 및 시민 방위군 법에 관한 초안들에서 이 법들이 적용되는 주들과 적용되지 않는 주들의 경계가 되는 것은 항상 이러저러한 형태의 재산이다. 이 모든 입법 제안들 속에서 왕권에 대해서는 가장 굴욕적인 양보가 행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측면으로^ 봐서는 부르주아 내각은 자신에게 별로 해로울 것이 없게 된 동맹자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보상으로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는 더욱더 무자비하게 등장하고 있다.(선집1,501-502)

 

협정의회가 승인한 시민 방위군 법은 부르주아지 자신을 향해서 되돌려졌다. 그 법은 부르주아지를 무장해제하기 위한 법률상의 구실을 제공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선집1,502)

 

따라서 인민에게 있어서 한제만 내각은 실천적으로는 구 프로이센식의 경찰 폭압으로 요약되고, 이론적으로는 벨기에식의, 부르주아와 비부르주아의 모욕적인 차별들로 요약되었다.(선집1,502)

 

이 내각의 정강의 또 다른 부부분인 반동에 대한 무정부 상태로 넘어가자. 이 측면에서 보자면, 내각은 행동보다 더 천진난만한 소망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이러한 천진난만한 부르주아적 소망에 속하는 것으로는 황실 소유지를 개인 소유자에게 분할 매각하는 것, 금융기관을 자유경쟁에 내맡기는 것, 해외무역회사를 민간 기관으로 전환시키는 것 등등이 있다.(선집1,502)

 

행동내각은 봉건적 당파에 대한 그 내각의 경제적 공격이 모두 강제공채의 비호 아래 등장한다는 불행, 또한 일반적으로 내각의 개혁 기도들이 인민의 눈에는 강화된 국가 권력의 금고를 채우기 위한 단순히 재정적인 응급수단으로 비쳐진다는 불행을 안고 있었다. 이처럼 한제만은 한편의 미움을 사면서 다른 편의 승인은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봉건적 특권들에 대해서 진지한 공격을 감행했을 때는 재무장관에게 우선적으로 놓여 있는 문제인 금전 문제’, 즉 재무부적 의미에서의 금전 문제가 그를 짓누를 때뿐이었다는 사실은 부인될 수 없다.(선집1,502-503)

 

이처럼 봉건 영주들에 대항한 한제만의 적극적인 부르주아적 노력들조차 상업 활동의 활성화를 위한 그의 소극적인 방책들과 마찬가지로 경찰적 색채를 띠었다. 요컨대 경찰은 정치 경제학에서는 국고를 의미한다. 한제만이 국민의회에서 관철시켜 법률로 끌어올린 설탕세 및 화주세의 인상은 슐레지엔, () 마르크, 작센, 동 프로이센, 서 프로이센 등지의, 신의 가호 아래 국왕과 조국을 위하던 갑부들을 격분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방책은 구프로이센 지방들의 산업적 토지 소유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한편으로 라인 주의 부르주아 화주 제조업자들 사이에도 이에 못지않은 불만을 야기하였다. 이들 제조업자들은 이 방책 때문에 구 프로이센 지방들과의 경쟁에서 자신들이 더욱 불리한 조건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선집1,503)

 

그리고 급기야 이 방책은 구 지방들의 노동자 계급을 분노케 하였으니, 그들에게 있어서 이 방책은 다음과 같은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았고 의미할 수도 없었다: 필수 불가결한 생활수단의 가격 인상. 그리하여 이 방책에는 강화된 국가 권력의 금고 채우기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선집1,503)

 

봉건제와 맞서 싸우기 위해 이 내각이 일으켰던 십자군 원정 전체가 모든 계급들에게 한결같은 원성을 불러일으킨 세금 증액으로 귀착되어 버리고, 또한 내각의 재정적인 명민함 전체가 강제 공채 속에서 유산되어 버릴 만큼 이 부르주아 내각은 옹색하였다. 이 두 가지 방책들은 결국은 부르주아지 자신에 대한 반혁명의 출정에 군자금을 조달해 준 데 불과했다. 그러나 봉건 영주들은 부르주아 내각이 사악한의도들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였다.(선집1,504)

 

한제만 치하에서 파토브에 의해 제출된 봉건적 부담들의 폐지에 관한 법률 초안(이에 대해서는 이전에 우리가 행한 비판을 참조하라)새로운 국가 제도와 양립할 수 없는 관계들인 봉건적 특권들을 폐지하고자 하는 부르주아지의 무력하기 그지없는 욕망과 어떠한 종류의 소유이든 소유가 혁명적으로 손상되는 것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불안이 뒤섞인 한심하기 그지없는 졸작이었다. 이 한심한, 불안에 떠는, 편협한 이기주의는 프로이센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그들의 없으면 안 되는 동맹자농민계급를 뿌리쳐버릴 정도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선집1,504)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농민들의 해방과 더불어 시작했다. 농민들과 함께 그들은 유럽을 정복했다. 프로이센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눈앞에 놓여 있는 편협하기 그지없는 이해에 너무나 얽매여 있었던 까닭에 이러한 동맹자조차 놓쳐 버리고 말았으며 이들을 봉건적 반혁명의 수중에 있는 도구로 만들어 버렸다.(선집505)

 

정부와 소위 국민의회가, 이처럼 점점 위협적으로 되어 가고 있는 반혁명적 징후들에 대항하여 자신들이 모은 에네르기를 종이 쪽지상의 경고들로 발산하였던 것은 참으로 그들에게 어울리는 짓이었다. 이 부르주아 내각은 실추된 신뢰의 회복과 상업 활동의 활성화를 위하여오직 대 인민용으로만 총검과 탄환과 감옥과 간수를 가지고 있었다.(선집1,506)

 

브란데부르크 내각하에서 협정의회는 창피스러운 모습으로 쫓겨났으며 우롱당하고 모욕당하고 자존심 상하고 능욕당했으며, 또한 인민은 결정적인 순간에 냉담하였다. 협정의회의 패배는 프로이센 부르주아지, 즉 입헌파의 패배였고, 따라서 민주주의파의 승리였다. 비록 후자가 이 승리에 대해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하더라도.(선집1,507)

 

옛날에는 이렇게 말했다. 왕과 그의 인민 사이에 한 조각의 종이가 비집고 들어오는 일은 결코 있을 없다고. 이제는 이렇게 말한다: 왕과 그의 인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조각의 종이뿐이다. 프로이센의 진정한 헌법은계엄 상태이다. 프랑스의 흠정헌법은 단 하나의 제14조를 갖고 있었는데 이 제14조가 그 헌법을 정지시켰다. 프로이센의 흠정헌법은 모든 조항이 다 제14조이다. 왕권은 이 헌법을 통해 새로운 특권들을 흠정하고 있다.즉 자기 자신을. 왕권은 의회들[즉 상원과 하원 모두]을 무기한 해산할 권한을 제멋대로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고 있다. 왕권은 의회의 휴회 중 임의^의 법률들(소유권 등등에 관한)을 발표할 권한을 제멋대로 각료들에게 부여하고 있다.(선집1,507-508)

 

3월에서 12월까지의 프로이센 부르주아지, 일반적으로 독일 부르주아지의 역사는, 독일에서는 순수한 부르주아 혁명 및 입헌 군주제라는 형태하에서의 부르주아지 지배의 확립이란 불가능하다는 사실, 단지 봉건적절대주의적 반혁명만이 가능하거나 혹은 사회적공화주의적 혁명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선집1,508)

 

18481210, 15, 16, 31일자. [신 라인 신문] 165, 169, 170,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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