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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미학

미학이론64

작성자홍승용|작성시간18.12.27|조회수153 목록 댓글 0

문예미학 세미나(12. 27.) 자료입니다.



첨부파일 미학이론64.hwp


수용과 생산

 

예술의 객관화는 외부사회에 기반을 두고 말할 때 예술의 물신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분업의 산물로서 나름으로 사회적이다. 그 때문에 사회에 대한 예술의 관계는 주로 수용 영역에서 추적할 수가 없다. 그러한 관계는 수용 이전에 생산 속에 있다.

 

예술의 사회적 해독에 대한 관심은 예술을 지향해야지 영향 조사나 분류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영향 조사나 분류는 사회적 근거로 인해 여러 모로 예술작품들 및 그 객관적인 사회적 사상내용과 전적으로 다르게 된다.(338)

 

예술작품들에 대한 인간의 반응들은 태곳적부터 극히 매개되어 있으며 직접 작품과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 오늘날에는 사회 전체와 연루되어 있다. 영향 조사는 사회적인 것으로서의 예술에 미치지 못한다. 또 실증주의적 정신에서 억지를 부린 것처럼 그것이 예술에 규범들을 부과해서도 안 될 것이다. 수용현상들을 규범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예술에 요구하게 될 타율성은 이데올로기적 속박으로서, 예술의 물신화에 내재할 수 있는 모든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능가할 것이다.

 

예술과 사회는 예술작품에 외적인 어떤 것이 아닌 사상내용 속에서 합치한다. 이는 예술의 역사와도 관련된다. 개인의 집단화는 사회적 생산력을 대가로 이루어진다. 예술의 역사 속에는 현실적 역사로부터 유래하지만 그와는 유리된 생산력의 독자적 생명을 통해 현실적인 역사가 되풀이된다. 소멸해 가는 것들을 예술을 통해 기억하는 일은 그에 기반을 둔다. 예술은 이처럼 소멸해 가는 요인들을 변형시킴으로써 보존하고 현재화한다. 예술의 시간적 핵은 이상과 같이 사회적으로 설명된다.

 

예술은 실천과 거리를 두면서 사회적 실천의 도식이 된다. 즉 모든 진정한 예술작품은 자체 내에서 전복적이다. 그러나 사회가 생산력만 아니라 생산관계의 동일성을 통해 예술 속에 이르게 되고 그 속에서 사라지는 데에 반해 예술은, 그때그때 가장 진보적인 경우에도, 자체 내에 사회화하고 사회적으로 통합되려는 경향을 지닌다. 다만 그러한 경향은 상투적인 진보예찬에서 보는 것처럼 사후 확인을 통해 정당성의 축복을 예술에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예술이 사회에 대한 특정한 부정이었던 경우에도 대개 수용은 그러한 면을 매끄럽게 다듬어 놓고 만다. 작품들이 처음 나타나는 시기에는 종종 비판적 영향을 끼치곤 한다. 그 후에는, 특히 생산관계로 인해, 중화되고 만다. 중화(Neutralisierung)는 미적 자율성의 사회적 대가다. 그러나 예술작품들이 일단 교양재들의 만신전(Pantheon) 속에 매장되어 있을 경우, 예술작품들 자체도, 그 진리내용도 손상을 입게 된다.

 

관리되는 세계에서는 중화가 보편적이다. 한때 초현실주의는 예술을 어떤 특수 영역으로서 물신화하는 데에 저항했지만, 그것도 예술이었기 때문에, 저항의 순수한 형태를 넘어설 수밖에 없었다. 화가들의 경우, 앙드레 마송(André Masson)에게서 보듯이, 그림의 질이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사회적 수용과 파문 사이에 일종의 타협을 이루어냈다. 결국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는 강력한 사회 화가가 되었지만, 수십 년 간 고착된 위기상태에 대한 모호한 감정 속에서 현학적이라는 데에 만족하는 라스즐로(Laszlo) 또는 반 동엔(Van Dongen) 등과 같은 세대였다. 이로써 초현실주의는 거짓으로 잔존하게 된다.

 

현대예술의 여러 조류들에서는 충격적으로 끼어드는 내용으로 인해 형식법칙이 뒤흔들리게 되지만, 자극이 멀어지기만 하면 곧 승화되지 않은 소재들을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세계와 타협하도록 미리 정해져 있다. 총체적 중화가 이루어지는 시대에는 물론 극단적 추상화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거짓된 화해가 이루어진다. 즉 비대상적인 작품이 새로운 복지사회의 벽장식으로 된다.

 

이로써 내재적 질까지도 축소되느냐 하는 문제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반동적인 사람들이 그러한 위험을 극히 열광적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실제로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단지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인 사회적 구조 문제들 속에만 설정한다면 이는 관념론적일 것이다. 예술의 양면성 즉 자율성과 사회적 사실이라는 성격은 그 두 영역의 확고부동한 상호의존성과 갈등들 속에서 항상 나타나고 있다.

 

종종 예술적 생산에는 사회적-경제적 간섭이 직접 파고들곤 한다. 오늘날에는 예컨대 공예적인 관점에서(kunstgewerblich) 자신의 필치(eigene Note)라고 부르는 것, 혹은 뻔뻔하게 잔꾀(Masche)라고 부르는 것을 고무하는 예술상인들과 화가들의 장기 계약에 의한 간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난날 독일 표현주의가 그렇게 쉽게 사라지게 된 데에는 표현주의가 추구한 작품의 이념과 절대적인 외침이라는 특수한 이념 사이의 갈등에 그 예술적 근거가 있을 것이다. 표현주의 작품이 아무런 결함도 없이 전적으로 성공한 적은 없다. 이에는 또한 표현주의의 혁명적 격정이 실현되지 않았고 또 소련이 극단적 예술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그러한 장르가 정치적으로 낡아 버리게 되었다는 점도 함께 작용했다. 그러나 그 당시 수용되지 않았던 운동의 작가들도 그것은 사오십 년 후에야 비로소 수용되었다살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미국에서 흔히 말하는 바와 같이 상업적으로 되는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일차대전을 겪은 대부분의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에게서는 그와 같은 점을 명백히 볼 수 있을 것이다.(340)

 

사회학적으로도 표현주의자들의 운명에서 비록 순진하고 희석된 상태로나마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던 순수한 표현 욕구에 대한 시민적 직업 개념의 우선성을 확인할 수 있다.

 

시민사회에서는 정신적으로 생산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술가들도 일단 예술가로서 사업을 시작하면 계속해서 그 일을 하게끔 되어 있다. 이미 시대에 뒤진 표현주의자들은 전도유망하고 잘 팔리는 주제들을 기꺼이 선정했다. 경제적으로는 그러한 일을 계속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것을 생산할 내재적 필요성은 없었는데, 이런 점은 작품이 객관적으로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된다는 사실로서 작품 자체에도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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