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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미학

루카치 후기미학의 인식론적 기초

작성자홍승용|작성시간16.07.18|조회수87 목록 댓글 0

루카치 후기미학의 인식론적 기초

―[미의 고유성]에서의 주체-객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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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는 객관적 현실에 충실할 것을 부단히 강조한다. 작가의 정치적 입장이나 주관적 이상에 의지하는 경향성에 맞서 객관적당파성을 내세울 때에도, 현실을 정태적도식적으로 파악하는 자연주의류의 르포르타주를 비판하고 살아 있는 전형의 형상화를 작가들에게 강요할 때에도, 부단한 반성과 실천으로써 자신의 계급적 조건에 따른 한계를 넘어서라고 충고할 때에도, ‘리얼리즘의 승리개념으로 발자크 문학의 위대성을 논증할 때에도, 가장 중요한 논거는 늘 현실에 대한 충실성이다. 이때 루카치는 종종 의식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레닌식의 표현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이는 곧잘 수동적 정관적 반영론의 혐의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루카치는 자타가 공인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자이다. 또 변증법적 유물론은 주체의 적극적 역할을 부각시킴으로써 기계적 유물론과 질적으로 구분된다고 자부해 왔다. 따라서 루카치에게는, 객관적 현실에 대한 충실성과 주체의 적극적 역할을 어떻게 묶어낼 것인지, 인식의 차원과 예술의 영역에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지, 나아가 현실에 충실한 실천적 예술론을 어떻게 구상할 것인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미의 고유성]에는 그 나름의 해답이 담겨 있다. 현시점에서 그 의미를 검토하려는 본고의 밑바탕에는 포스트모던류의 성급한 주체사망 선고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이 불신은, 주체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역사적 산물로서의 주체 혹은 객체로서의 주체에 관심을 모았을 뿐, 주체라는 이름에 걸맞은 운동의 결과인 동시에 운동의 출발점으로서의 주체에 대한 조명에는 매우 인색했다는 판단에 뿌리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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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고유성]의 중심과제는 반영 개념을 근거 삼아 예술 고유의 영역을 구상하는 것이다. 󰡔미의 고유성󰡕에서 루카치는 예술이 과학 및 일상적 사유와 구분되지만, 객관적 현실을 반영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주장한다.(EÄI. 22 참조) 반영은 의식과 존재의 관계를 나타내는 뿌리깊은 용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플라톤은 경험적 현실을 이데아의 반영이라고 보았다. 이 경우에는 관념이 원판이고 물질이 복사판인 것이다. 그러니까 관념론에서도 인식이나 예술활동을 지칭하기 위해 반영 개념이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반영 개념은 유물론의 독점물이 아니었던 셈이다. 루카치는 반영 개념이 강단철학에서 금기시되기에 이른 것은 유물론의 현실적 위협이 증대하게 된 데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유물론에서는 의식과 물질의 관계가 역전된다. 의식은 물질의 산물임이 폭로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과 무관하게, 인간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또 인간 의식의 산물일 뿐인 신의 출현 이전부터 물질은 존재해 왔다고 선언되었다. 이는 유물론적 반영론의 거점으로 활용된다. 그로부터 다음 주장으로 넘어가는 데에는 큰 장애가 없어 보인다. “사물은 우리의 의식과 독립하여, 우리의 감각과 독립하여 우리의 외부에 존재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루카치의 입장도 별로 다르지 않다. 의식과 독립하여 실존한다는 것이 객관적 현실의 본질에 속한다. 따라서 주체 없이 객체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 존재의 공리이기도 하다.”(EÄI. 557) “실제로 실존하는 주체는 언제나 그와 독립하여 실존하는 객관적 세계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EÄII. 226 f.) 루카치는 객관적 세계를 합당하게 반영함으로써만 주체가 환경 속에서 말살되지 않고 활동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주체 자신의 표상 속에 존재하는 것과 자신의 의식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구분하는”(EÄI. 701 참조)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객관적 현실은 외연적으로도 내포적으로도 무궁무진하므로, 반영은 그것에 접근해 가는 무한한 과정으로서만 가능하다. 루카치는 레닌과 마찬가지로 인식의 이러한 점근성 혹은 과정적 성격을 누누히 강조한다.(EÄI. 30, EÄII. 290 등 참조) 이와 반대로 틀릴 수도 있는 것, 조금이라도 불완전한 것을 모두 진리의 영토에서 몰아냄으로써 확고한 인식의 토대를 만들고자 할 경우 경험을 천대하고 선험에 귀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재현불가능성에 대한 신앙고백도 따지고 보면 흠집 없는 진리를 암암리에 전제하는 선험론의 재탕일 뿐이다. 여기서는 무궁무진한 현실과의 긴장관계를 견디지 못하는 인식주체의 무능력 내지 조급증이 전지적 신의 지위를 슬쩍 차지한다. 오류 가능성, 역사적 인식의 상대성불완전성 등을 받아들이고 오류의 수정이 불가피함을 인정하면서, 부단히 실상에 접근코자 노력할 경우 경험적 현실에 대한 인식들은 진리의 공화국에 들어서 그 진리치를 놓고 서로 당당히 겨루고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점근성이라는 개념은 고정적 대상을 상정하고 그것에 인식주체가 접근한다는 이미지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인식대상은 변화한다. 즉 역사적 산물이다. 고정불변의 실체로 간주되는 사물들에서 인간관계를 읽어냄으로써 현실을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일, 곧 의식의 사물화를 극복하는 일은 [역사와 계급의식] 이래 루카치의 일관된 관심사였다. 물론 현실의 모든 것이 변화의 측면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인식대상은 변화하는 가운데 쉽게 변하지 않는 부분을 지니며, 따라서 합당한 현실인식을 위해서는 변화와 지속의 통일체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변화의 절대화 역시 다양다종의 신자를 거느린 현대판 미신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의 인식활동에는 불가피하게 주관적 장애요인들이, 예컨대 인간적 감각기관이나 사유의 매체 등에 따르는 한계 따위가 개입한다. 루카치는 이러한 장애요인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극복하려는 반영을 탈인간형태화하는반영이라고 칭하며, 이를 과학적 반영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본다. 그는 근대과학의 발전에 앞서 멀리는 이미 크세노파네스의 종교비판,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르스의 원자론 등으로부터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베이컨의 우상비판, 홉스와 스피노자의 기하학 등이 이미 그러한 반영방식의 발전선 상에 위치한다고 본다.(EÄII. 278 참조) 이때 루카치는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세계에 가능한 한 엄밀히 접근하는 것과 반영의 사진적 성격은 동일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사진적 성격을 논박하는 단적인 예로 그는 이 탈인간형태화하는 반영에서 수학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지적한다.(EÄII. 289 이하 참조) 또 대상의 본질이 반영될수록 직접적인 의미에서의 유사성은 문제시되기 어려워짐을 지적하기도 한다.(EÄII. 348 참조) 이러한 반영과정을 통해 세계의 즉자 상태(An sich)가 우리에 대한 것(Für uns)으로 변화함으로써, 의식은 세계 정복의 실천을 위한, 또 인간의 생산적 활동영역 속으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본래의 실재적 공간을 만들어낸다.”(EÄI. 615) 이처럼 루카치는 올바른 실천의 전제조건으로서 과학 차원에서의 엄격한 주체 객체 분리를 구상한다. 이에 근거한 반영의 성과들은 부단히 일상생활로, 일상적 실천 속으로 다시 흘러들어가며, 이를 풍부하게 하고 심화시킨다.”(EÄI. 615) 또 이러한 반영방식은 도덕적 세계관적 태도와 관련해 모든 초월적 속박이나 연관성들을 거부한다는 의미를 지닌다.”(EÄI. 176) 한편 지배계급이 진정한 현실 모상을 견딜 수 없을수록 이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반영을 비인간적인 것이라고 비방하게 된다. 루카치는 그 예로서 베르그송에서 하이데거에까지 이르는 시간의 주관화, 쉘러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에까지 이르는 공간의 주관화를 지적한다.(EÄI. 167 이하 참조)


위의 논의에서 주관적 요인은, 객관적 현실과 결코 뒤섞여서도 안 되거니와, 합당한 현실반영을 위해서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가능한 한 제거되어 가야 할 장애물이나 오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때 루카치는 의식과 존재, 주관과 객관의 엄격한 구분을 순수한 인식론의 차원에 국한시킨다. 그 이유는 현실의 실제 과정에서는 이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부단히 상호전도되며, 현실이 그것들 사이에 늘 확고하고 명확한 경계선들을 긋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EÄII. 286) 루카치는 이 주관과 객관의 상호전도에 대한 변증법적 파악을 통해, 의식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객관적 현실의 즉자상태를 인식론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경직성에 빠지지 않고 독단과 물신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EÄII. 287 참조) 같은 맥락에서 루카치는 주체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해 존재하는객관적 현실이 인간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 세계는 개인의 의식에 대해서는 즉자로 존재하는 현실, 그로부터 독립해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러한 객관성과 불가분으로 또한 모든 인간들과 인류의 공동활동 산물이다.”(EÄII. 297) 그러나 루카치는 과학적 반영에서는 여기에 존재하는 객관성이 주도적 계기를 이루어야 한다”(EÄII. 297)고 단언한다. “사회과학들에서는 이 인간의 세계가 순수한 객체로 된다”.(EÄII. 297) 따라서 루카치는 개인의 의식에 대해서만 아니라 과학적 반영과 관련해서도 객관적 현실을 의식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객체로서 파악하는 셈이다.


이 경우 주체의 의식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현실이라는 표현은 개인적 주관적 자의에 빠지지 말라는 평범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또 타인의 현실관을 주관적인 것 내지 관념론으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데에 유효한 구호로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것은 반영물들을 늘 현실 자체와 대조하여 파악할 필요성을 무언 중 강제하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오늘날에는 객관적 현실의 실재성에 대한 시비가 레닌의 시대 이상으로 광범하게 퍼져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중요한 것들은 현실이 아니라 가상현실이라는 주장이 그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가상현실에도, 루카치가 말하는 탈인간형태화하는반영방식의 산물들로부터(이는 객관적 현실에 최대한 접근하는 것을 생명으로 한다), 역사적 현실에 대한 주체의 인식과 의지 형성에 기여하는 예술작품들을 거쳐, 진위에 대한 물음을 무색하게 만드는 광고 이미지들에 이르기까지 질적으로 상이한 여러 가지가 있다. 그 다양한 가상현실들의 질적 차이와, 그것들의 물질적 실재성에 주목하고, 또 그것들이 반영물의 반영물 혹은 다중의 반영물일 경우에도 반영대상과 그것들의 관계를 검토하는 일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의 주요 과제이기도 하다.가상현실이 현실을 대체하게 되었고 따라서 진위에 대한 물음이 무의미해졌다는 주장은 별로 색다를 것 없는 관념론의 변종일 뿐이며, 그것만으로는 반영론도 리얼리즘론도 논박되지 않는다.


그렇기는 하나 인식주체는 객체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 의식이 육체에 의존하고 육체가 물질대사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넘어서, 의식의 본질적 구성요소인 언어가 이미 역사적 사회적 산물로서, 곧 객체로서 주체에 의해 전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객체는 실천주체이기도 한 인식주체를 포함한다. 의식활동의 산물들만 아니라 의식활동 자체도 엄연히 현실의 구성요소이다. 그래서 인식주체의 의식 자체도 의식의 대상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식론적으로도 주관과 객관의 엄격한 구분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주관과 객관의 인식론적 구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판단하기 전에, ‘의식에 대한 존재의 선차성이라는 유물론적 인식론의 원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인간의 출현에 앞서, 따라서 모든 의식에 앞서 이미 물질이 존재했다는 물질의 의식에 대한 역사적 선차성은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의식이 없더라도 물질은 존재할 수 있다고 상정해도 논리적으로 아무 무리가 없다. 물론 이는 가정법일 뿐이다. 현재, 인간 의식의 출현 이후, 의식을 객관적 현실의 구성요소로서 고려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의식의 객관적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 의식과 여타 물질의 질적 차이에 대한 망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 특정 사물에 대한 의식을 그 사물 자체와 혼동하자는 것도 아니다. 의식에 대한 존재의 인식론적 선차성은 의식 자체의 객관적 실재성과 힘을 부인하는 것도, 의식 일반에 대한 존재 일반의 독립성 내지 분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인식론적으로 그것은 인식대상이 그것에 대한 현실적 인식과정에 앞서 이미 존재한다는 점, 또 인식대상의 성질들은 의식의 투사나 정립의 산물들이 아니라 대상 자체의 객관적 성질이며, 인식은 이를 파악해 가는 과정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 경우 특정한 사물들 혹은 그 연관관계들을 반영의 대상으로 선정하는 데에는 이미 의식이 작용하고 있으며, 또 대상에 접근하는 과정에는 의식의 적극적 활동이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이 점에서 반영 개념을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수동적 현상과 관련지을 수는 없다. 반영 개념은 늘 반영의 산물을 반영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즉 인식이 주체의 산물이라는 점에만 시선을 고착시켜서는 안 되고 부단히 객체에 주목해야 한다는 무언의 요구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현재 작동중인 개인의 의식은 실질적으로 자신을 포함하고 있는 객관적 현실을 자신과 독립해 있는 현실로서 직면하며, 동시에 자신이 객체로부터 독립해 있는 혹은 객체를 초월해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데, 이는 결코 어리석은 개인의 자의가 아니라 인식과정 상의 구조적 필연성을 띠는 현상이다. 그 뿌리는 개인의 육체적 존재방식과 이에 따른 지각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이 존재에 의해 규정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아와 주체가 의미 있는 통일체로서 파악될 수 있는 일차적 근거도 에너지대사의 단위인 개인적 육체의 일정한 지속성과 통일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선험적 주체의 구성에는 그와 같은 필연적 착각의 절대화가 작용한다고 여겨진다. 반면에 유물론은 의식구성의 현실적 조건들을 추적함으로써 그러한 착각의 절대화를 부단히 깨뜨린다. 이때 인식주체는 자신을 주체로부터 독립해 존재하는 객관적 현실에 하나의 요소로서 포함시켜야 한다. 또 이 경우 인식주체만이 적극성을 띠며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객체인, 그 자신을 포함한 객관적 현실도 다른 타 주체들과 더불어 적극성을 띠며 동시적으로 작동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루카치가 그려내는 과학적 반영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비교적 단순하다. 인류의 발전과정 역시, 그 속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에게조차, 그들의 의식과 독립하여 진행되는 객관적 과정”(EÄII. 303 f.)인 것이다. 또한 객관적으로 볼 때 이 과정에 참가한 개인들의 의식과 관련된 모든 것이 단지 원동력이나 재료일 뿐이며, 이로써 전체에 대한 인식이 필연적으로 과학의 과제로 된다.”(EÄII. 304) 말하자면 실천주체들은 인식주체로부터 독립해 있는 객관적 현실 영역의 주인공일 때에도 엄연히 인식주체의 객체일 뿐이다. 그리고 인식주체는 탈인간형태화를 통해 가능한 한 투명인간으로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루카치가 이 노력의 어떤 종착점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또한 객관적 현실 속에서 인식 주체 자신이 차지할 자리를 분명히 드러내 주지도 않고 있다. 이 점에서는 그의 인식주체가 객관적 현실 밖의 초월적 위치를 암암리에 전제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미적 반영의 영역에서 루카치는 과학적 반영에서와 본질적으로 다른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모색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주체를 다름 아닌 인식인 주체-객체-관계로부터 내팽개친 후 이제 필연적으로 주체가 그 권한을 다시 얻게 되는 인식의 대용품이 필요해진 것이다

 

3

 

루카치는 미(das Ästhetische)를 헤겔처럼 인식의 예비형태로 보거나, 그 역으로 쉘링처럼 인식을 미의 저급한 형태로 보는 데에 반대하여 미의 자립성에 주목한다.(EÄI. 532 참조) 그러나 루카치는 미의 자립성을 근거로 미를 사회적 역사적 현실과 단절시키려는 입장에도 엄격히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미적 형상물들은 객관적 현실의 반영들이며, 그 가치의미진리는 객관적 현실을 얼마나 올바르게 파악하고 재생하고 그것들의 기초가 되는 현실상을 수용자들에게 환기시킬 수 있느냐에 의존한다. 따라서 그것의 자립성은 현실에 대한 폐쇄성을 의미할 수 없다.(EÄI. 383 참조) 미적 반영은 수용과정을 통해 일상 현실에 합류되는 것이다. 이처럼 수용에 대한 고려와 기능의 차원은 루카치 미학의 한 가지 중심축을 이룬다. 이 점에서 루카치 미학의 무게중심은 사회 속의 예술의 내재성이 아니라 작품 속의 사회의 내재성이 예술과 사회의 본질적 관계라고 보는 아도르노의 미학과 다른 곳에 놓인다. 루카치의 미학은 예술의 실천적 의미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고하도록 고무하는 것이다.


그러나 루카치는 예술에 직접적인 정치적 실천적 효용의 과부하를 거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적 반영은 직접적인 실천 목표를 유예하는 점에서 일상적 반영과 질적으로 구분된다는 것이다.(EÄI. 650 참조) 또한 일상 속의 인간 곧 전인(der ganze Mensch)은 여러 종류의 자극에 전면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지만, 미적 반영물은 특정한 감각에 집중적으로 호소하는 동질매체(das homogene Medium)로 이루어지며, 이 동질매체는 일상적 전인에게 몰입을 유발한다. 이처럼 동질매체에 몰입하는 인간을 루카치는 전문인(der Mensch ganz)이라고 칭한다. 그에 따르면 동질매체의 유도적-환기적 힘은 수용자의 영적 생활 속에 침투하며, 세계를 고찰하는 그의 익숙해진 방식을 억누르고, 그에게 어떤 새로운 세계내지 새로 인식된 내용들을 강요한다. 바로 그럼으로써 그는 이 세계를 새로워지고 젊어진 감각기관 및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일상의 전인이 전문인으로 변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은 내용적형식적으로, 또 사실적잠재적으로 확대되고 풍부해진다. “새로운 내용들이 그에게 밀려들며, 이는 그의 체험 영역을 확대해 준다. 그는 작품의 동질매체에 의해 그것들을 받아들이며, 그것들에서 내용적으로 새로운 것을 전유하도록 유도된다. 또한 이와 동시에 새로운 대상성 형식들과 관계들 등 자체를 인식하고 향유하는 그의 지각능력도 발전한다.”(EÄI. 807)


이 전문인은 다시 일상의 전인으로 돌아가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술은 실천적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루카치는 전문인으로서 예술에 몰입하기 이전을 지칭하는 사전상태(Vorher)와 다시 전인으로 돌아간 다음을 지칭하는 사후상태(Nachher)라는 개념쌍으로 그 과정 전체의 틀을 그려낸다. 그리고 이 변화과정의 핵심을 카타르시스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는 비극에 적용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개념을 확대해 보편적 효과범주로 사용한다.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인간이 정상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을 미적 반영물에 힘입어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어떤 종교적 초월성 등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 인간적 가능성들의 극단적 실현이 관건으로 된다. “카타르시스는 바로 인간이 그를 뒤흔들어 놓고, 위대성을 통해 그에게 수치심을 주는 거울 속에서, 그에게 자신의 정상적 실존이 파편적이고 불완전하며 자기완성을 해낼 수 없다는 점 등을 보여주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봄으로써 자기 삶의 본질적 성격을 긍정하는 데에 있다. 카타르시스는 인간 삶의 본래적 현실의 체험으로서, 작품의 효과 속에서 그러한 체험을 일상의 체험과 비교하게 되면 감정의 정화가 야기되며, 그 효과의 사후상태에서는 윤리적인 것으로의 전도가 이루어진다.”(EÄII. 396) 그 결과 카타르시스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일상과의 그릇된 친숙성을 폐기토록 한다”. 이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루카치는 소격효과를 카타르시스의 일종으로 해석한다. 소격효과는 단순히 직접적이고 체험적인 카타르시스를 배제하고, 일상적 전인의 이성적 충격을 통해 그가 현실적으로 바뀌도록 강요하는 카타르시스의 가능성을 만들고자 한다”(EÄI. 825)는 것이다. 루카치는 이처럼 삶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바꿈으로써만 진지한 사회변화와 실제적 사회진보가 가능해진다고 본다.(EÄI. 848 참조)


한편 과학적 반영 역시 궁극적으로 일상 현실에 합류되면서도 일상적 사유로써 파악할 수 없는 현실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직접적 실천목표를 유예하는 점에서 미적 반영과 일치한다. 직접적 실천의 유예라는 이 공통점을 염두에 두면서 루카치는 미적 반영과 과학적 반영의 본질적 차이점에 주목한다. 과학적 반영과 구분되는 미적 반영의 본질을 루카치는 인간형태화하는 반영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그것은 자연과 역사를 그 속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재생산하는”(EÄI. 608) 것이다. 이때에도 물론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미적으로 반영되고 형상화된다. 그러나 이 즉자존재는 지양불가능하게 인간과 관련되며, 사회적으로 생겨나고 사회적으로 발전하는 인간의 유적 욕구들과 관련된다.”(EÄI. 305)


또한 루카치는 예술작품들이 각각 고유의 세계를 환기시키는 내포적 총체성을 이룬다는 점에서도 과학적 반영과 구분된다고 본다. 루카치에 따르면 특정한 과학적 반영물은 다른 반영물을 통해 수정보완되고 부정될 수도 있으며, 궁극적으로 상호연관 속에서 통일과학을 지향한다. 그러나 예술작품들의 경우에는 각각 고유한 가치를 지니며, 그래서 한 작품이 다른 작품에 의해 부정되거나 보완될 수 없다.(EÄI. 624 ff. 참조) 이 점에서 그는 예술작품을 단자라고 지칭한다. 물론 루카치도 특정 예술이나 장르의 전체적 특성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통일성 있는 예술의 통일된 발생이 있고 이것이 나중에 분화된 것은 아니며, 다양한 예술들과 예술 장르들이 서로 역사적으로 독립적으로 그것들을 유발하는 구체적인 사회적 역사적 욕구들에 의해 규정된 채 발생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일단 구성되면 엄청난 완고성과 잔류자기와 그 기본원칙 상의 발전능력을 보인다.”(EÄI. 625) 이런 현상을 루카치는 미적 영역에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생생한 변증법”(EÄI. 626)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또 이때 각 예술분야가 이루는 체계는 인간의 인간학적 본질로부터 추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발전으로부터 추론되며”(EÄI. 628), 따라서 그것은 역사적-체계적 성격을 지닌다”(EÄI. 628)고 한다.


인간형태화하는 반영은 미적 반영만의 특징이 아니다. 미적 반영과 아울러 일상적 사유, 종교, 마술 등이 모두 본질적으로 인간형태화하는 반영방식이다. 그러나 예술이 현실의 반영물을 반영물로서 파악하는 데에 반해, 마술과 종교는 그 반영들의 체계에 일종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하고 이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며 그 근거를 초월적인 것에서 찾는다. 반면에 미적 반영의 산물인 예술작품은 자체로서 완결된 체계 내지 내포적 총체성을 이루는데, 이러한 내포적 총체성은 무엇보다 인간의 세계를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을 위해 반영하는 것이다.”(EÄI. 232 f.) “예술은 인간 자신에게서 시작하고 끝난다. 물론 그로써 정립되는 인간적 내재성이 인간을 불변상태로 방치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 내포적 관점에서 인간을 그의 평범한 평균수준을 훨씬 넘어서도록 고양시킨다.”(EÄI. 529)


루카치는 예술이 마술과 종교의 지배로부터, 또 일상적 직접성으로부터, 오랜 기간의 투쟁을 통해 해방되어 왔음을 상기시킨다. 이런 점에서 루카치는 미의 영역이 자립성을 얻게 된 것은 인류의 오랜 발전과정의 산물이지 선험적 능력의 발현 따위는 아님을 분명히 한다. 또한 현대사회가 현세적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한에서 초월성을 추구하는 종교적 욕구는 사라지지 않으며, 이러한 욕구가 예술에서는 알레고리 형식으로 표출된다고 설명한다. 특히 그는 현대예술에서 알레고리가 가리키는 초월성이 종종 공허한 것으로 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에 대립하는 현세적 예술의 형식으로 루카치는, 괴테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본질과 현상의 통일체인 상징을 제시한다.


본질과 현상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말은 30년대 리얼리즘론의 한 가지 핵심어이기도 하다. 그것은 전형의 형상화에 대한 요구로서 표현되기도 했는데, 이는 다양한 계보의 자연주의 및 도식주의적 문예운동론을 극복하고 효과적인 예술적 실천을 고무하려는 전략 개념이기도 했다. [미의 고유성]에서 루카치는 이 전형 개념을 특수성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그는 특수성을 미의 중심 범주라고 보며,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특수성은 한편으로 지양되면서 보존되어 있는 개별성으로서 삶과 접근해 있고 그래서 개별 인간과 직접적 관계를 지닐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특수성은 역시 지양되면서 보존된 보편성으로서 모든 개별성으로 하여금 그 단순한 부분적 성격을 넘어서도록 끌어올린다. 이를 통해 인류에게 중요한 계기들이 전개된다.(EÄII. 303 참조) 그래서 예술작품에서 수용자는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고 자의식을 일깨우며 인류의 발전과정을 자신과 직접 관련지을 수 있게 된다.(EÄII. 297 f. 참조) 이런 의미에서 루카치는 예술작품의 미적 효과가 인간의 내면에서 인류에 대한 자의식을 일깨우고 발전시킨다”(EÄI. 529)고 주장한다.


이때 루카치는 인류에 대한 자의식이 어떤 초시간적인 보편적 인간성과는 무관함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30년대 리얼리즘론에서와 달리 [미의 고유성]에서 계급은 흔히 민족과 나란히 언급될 뿐이며, 계급문제는 논할 필요도 없는 듯이 인류적 관점 속에 파묻히고 만다. 이에 따라 루카치는 당파성과 관련해서도 그 불가피성을 좀더 일반적으로 논증하는 측면에서 30년대 리얼리즘론을 한 걸음 넘어서지만, 구체적 작품 평가의 문제와 당파성을 결합시키는 일에는 소극적이다. 아울러 특수성으로 전형을 대신함으로써 예술이해의 폭을 넓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형의 형상화를 통해 현실의 본질적 지배관계와 역동에 주목케 하는 리얼리즘의 실천적 의의를 희석시키기도 한다. 특수성이라는 예술 일반의 (불확정적 영역을 포괄하는) 범주로는 자연주의를 리얼리즘과 구분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로써 현실의 본질에 대한 작가의 의무관계는 느슨해지며, 이것이 작가들에게나 수용자들에게 팔꿈치를 움직일 자유”(브레히트)를 확대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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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개괄한 바에서 드러나듯이, 루카치는 미적 반영에서의 주체-객체 관계를 과학적 반영에서와 외관 상 확연히 다르게 구상한다. 무엇보다 주관적 요인이 과학적 반영에서와 달리 본질적으로 중요해진다. 즉 과학적 반영은 객관적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통제하기 위해 필요하고 가능한 한에서 주관성을 배제하고 중립화하고 유예하는 경향을 띠는 반면에, 예술작품의 본질은 바로 주관성을 단순히 환기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에 삶에서 달리는 얻을 수 없는 넓이와 깊이와 밀도 등을 부여하는 데에 있다”.(EÄII. 326) 루카치는 미메시스적 환기의 측면에서 주체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기도 한다. 인식론적으로 순전히 관념론적 의미를 지니는 주체 없이는 객체도 없다는 명제가 미학에서의 주체-객체 관계에 대해서는 기본적이다. 물론 즉자적으로 모든 미적 객체는 주체와 독립하여 실존하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파악할 경우 그것은 단지 어떤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미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의 미적 정립이 타당성을 지니면 이와 동시에 그러한 주체도 정립된다. 왜냐하면 주체의 미적 본성은, 우리가 되풀이하여 설명했듯이, 바로 객관적 현실의 한 가지 특수한 반영방식인 미메시스를 통해 수용주체 속에 어떤 체험들을 환기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을 도외시하면 미적 형상물은 미적 형상물로서 존재하기를 그친다.”(EÄI. 558) 이러한 사태를 루카치는 즉자가 미적 반영에서는 우리에 대한 것(Für uns)의 요소들을 감추고 있다”(EÄII. 301 f.)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한편 반영대상의 성격과 관련해서도 루카치는 미적 반영과 과학적 반영을 엄격히 구분하면서 미적 반영대상에서의 인간적 주체적 요인을 강조한다. 미적 반영대상을 일반화하여 루카치는 자연과 사회의 물질대사라고 칭한다. 이는 인간을 만들어내고 개조하고 풍부하게 하고 고양시키고 심오하게 만드는 과정으로서 인간 세계의 모든 생활현상들, 인간들의 환경, 그들 실존의 자연적 기반 및 그 사회적 귀결들 등을 포괄한다.”(EÄI. 556) 자연이 다루어질 때에도 미적 반영에서는 모든 주관적 인상의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하고 건드릴 수 없는 자연의 즉자가 대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 주체와 부단히 상호관계를 지니는 자연이 대상으로 되는 것이다.”(EÄII. 305)말하자면 인간의 세계가 미적 모사의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대상으로 됨으로써 이미 예술이 도달할 수 있고 도달해야 할 객체 속에서는 주관성과 객관성이 불가분의 상태로 상호교류하며 공존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개인의 의식에 대해 즉자로 존재하며 그로부터 독립해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객관성과 불가분의 상태로 모든 인간, 인류의 공동활동의 산물이기도 하다.”(EÄII. 297)


이때 루카치는 미적 반영의 대상 역시 의식과 독립해 있는 즉자존재임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그 고유성을 탐색한다. 하지만 미적 반영의 대상은 단순히 세계의 즉자존재가 아니라, 물론 의식과 독립해 있는 그 객관성을 지니는, 인간 세계의 즉자존재이다. 즉 인간 활동의 발자취들이 객관화되고 객체로 되어 나타나지만 이 객체들의 객관성이 지양되지 않은 채로 인간에 다시 관련지어지는, 그런 세계의 즉자존재이다.”(EÄI. 653) 루카치는 다음과 같이 미적 반영대상의 고유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반영의 객체는 즉자적 객체의 상태로만 아니라 사회와 자연 간의, 사회 속의 그 근거 및 결과들 간의 상호작용의 계기로서도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대상들의 정립에는 그것들에 대한 인간적 관계, 그것들에 대한 인간적 반응 등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EÄI. 644)


반영과정에서도 주관적 요인은 결정적이다. 이와 관련해 루카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때그때의 구체적 대상의 선정이 그 대상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당파선택을 전제로 할 뿐만 아니라, 이 당파선택이 대상의 미적 실존의 본질을 바로 그 미적 객관성에서규정함으로써, 대상 자체가 반영되고 형식화되는 것이다.”(EÄI. 308)


루카치는 미적 반영에서 주체적 요인이 필수적임을 반영물인 작품 자체에서도 확인한다. 즉 작품에는 작가의 인격적 성격이 지울 수 없도록 각인되어 있으며, “따라서 창작 주체에 대한 물음은 예술작품의 가장 객관적인 분석으로부터도 제거할 수 없다”(EÄI. 790)는 것이다. 다음 인용문에서는 이러한 입장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증명했듯이 이처럼 극히 적극적인 주체의 역할이 주관주의적인 자의에 귀착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우면서도 충분히 근거 있는 객관성을 수립하는 데에 기여하려면, 한편으로 창조적 주관성이 단지 사후적으로만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될, 자신과 완전히 이질적인 세계와 대립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판단들은 이 경우 틀림없이 공허한 주관주의의 오점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주체는 모사된 세계의 내용과 형식의 실상(Geradesosein)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있어야 한다.”(EÄI. 644) 이제 반영주체의 적극적 가담은 객관적 반영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객관성 수립을 위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루카치는 미적 반영에서 반영주체의 역할이 과학적 반영에서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적 반영을 과학적 반영과 구분하려는 루카치의 논거는 중요한 대목에서 설득력 없어 보인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는 미적 반영의 본질을 한마디로 인간의 세계를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을 위해 반영하는 것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그런데 우선 인간의 세계라는 대상규정에서는 예술이 독점권을 주장할 수 없다. 예술이 도달해야 할 객체 속에서 주관성과 객관성이 불가분의 상태로 상호교류하며 공존한다고 해서, 또 그것이 인류 공동활동의 산물”(EÄII. 297)이라고 해서 과학적 반영의 대상과 다른 성격을 지니는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루카치는 주관과 객관의 불가분한 상호교류공존을 대상 영역에 가두어 놓고, 미적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서는 다시 개인의 의식에 대해 즉자로 존재하며 그로부터 독립해 있는 현실”(EÄII. 297)이라는 인식론적 원칙에 의지한다.


인간을 위한 반영이라는 목표설정을 통해 미적 반영을 과학적 반영과 구분하는 것 역시 신빙성 있어 보이지 않는다. 과학적 반영이 어떤 식으로든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루카치 자신도 탈인간형태화하는 반영 역시 더 풍부한 현실 발견의 결과로 인간 자신을 달리 가능한 것보다도 더 풍부히 하고 인간을 더 완전하게 하고, 더 인간답게 하는 우회로”(EÄI. 158)임을 인정한다. 실질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냐 아니냐는 과학적 반영만 아니라 미적 반영의 경우에도 개별 반영물에 따라 사회적 맥락 속에서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지 원칙적으로 어느 한 반영방식을 일괄해서 규정하는 특성은 아니다.


따라서 남는 것은 인간의 시각에서 반영한다는 점뿐이다. 그런데 이 인간의 시각이라는 마지막 보루 역시 난공불락은 아닌 듯하다. 예컨대 기르누스는 루카치의 이분법에 맞서, 탈인간형태화하는 반영 역시 궁극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언어들(일상어메타언어상징어 따위)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이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떠한 반영이든 인간의 유적 주관적 조건에 의지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 점은 칸트의 현상개념이 주관적 관념론의 틀을 넘어서 지니는 현실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그러한 조건에서 인간 인식 상의 불변요인을 찾았다고 여기는 것은 칸트를 억눌렀던 플라톤적 이데아론의 유물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될 것이다. 유물변증법은 인식의 유적 조건 역시 역사적 사회적 산물이며, 따라서 가변적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가변성의 인정이 그 조건의 부재 내지 소멸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일 수는 없다. 이 점에서 인간형태주의와 탈인간형태주의라는 루카치의 이분법은 반영의 실제 속성들에 대한 설명으로서보다 반영의 지향성에 대한 설명으로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주체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과학적 반영과 미적 반영을 구분하려는 루카치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과학적 반영에서도 주체적 측면은 반영의 대상, 목적, 방법 등의 차원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반영 개념 자체가 주체와 객체의 합당한 관계로서만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루카치가 미적 반영에서의 주객관계에 실질적으로 더 큰 애정을 기울이고 이를 과학적 반영에서의 주객관계와 엄격히 구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주체로부터 독립해 있는 객체를 통해 밀려난 주체의 적극성을 미적 반영의 영역에서 복권시키려는 데에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루카치가 과학적 반영과 구분하여 미적 반영에 대해서만 독점적으로 인정하려 한 주객관계의 본질적 측면들은 과학적 반영에서도 간과해선 안 될 유물변증법적 현실반영의 기본속성들 가운데 일부이다. 이 점에서 주객관계에 대한 루카치의 해명은 충분하지 못하다.

 

5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 반영과 미적 반영의 차이에 대한 루카치의 논의가 모든 점에서 무의미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설득력 있는 유물론적 인식성과들과 아울러 논쟁적인 문제들을 상당수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파블로프의 심리학을 근거로 예술언어의 고유성을 규명하려는 노력, 신호체계 1에 대한 설명이나, 예술작품의 다층성에 대한 설명, 자연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 등에서는 문제적이지만 흥미롭고 유익한 인식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미의 고유성]은 청년기와 맑스-레닌주의 시절의 여러 이론적 단초들을 좀 더 발전시키고 체계화한 점에서 루카치 이론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리얼리즘론은 [미의 고유성]에서 제법 견고한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루카치 이론의 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리얼리즘의 문제 자체에서조차 그러한 연속성은 불연속성으로 이어진다. 이는 전형과 특수성, 계급적 관점과 유적 관점, 현대예술에 대한 평가 등에서 확인된다. 󰡔미의 고유성󰡕 뒤에는 스탈린체제의 관료주의에 대한 루카치의 뼈저린 체험과 헝가리 봉기의 좌절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과정에서 루카치의 문제의식은 30년대의 격동적 상황에서와는 다른 색조를 띨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30년대의 논쟁적인 글들에서 독자를 사로잡기도 하고 거부감을 유발하기도 했던 명쾌한 지향성과 힘찬 어조는 이제 계몽주의 내지 르네상스적 휴머니즘을 연상시키는 인류의 유적 본질에 대한 일반론과 반복적 설명체에 밀려난다. 무엇보다 이러한 특성이 [미의 고유성]을 읽어내기 어려운(혹은 싫은) 글로 만들기도 한다. 이 점에서 그의 이론체계가 완성되는 동안 작용하는 내적 필연성과 연속성만 아니라 그것의 성격을 규정하는 현실적 조건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50년 이상의 시차를 두고도, 또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루카치의 글들은 우리 사회의 역동에 직접 다가옴으로써 강렬한 현재성을 띠면서 이론적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맑스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모순 극복의 투쟁이 절실한 한에서 (특히 중기) 루카치의 이론은 현재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진단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서 나온 아도르노알튀세르푸코데리다 등의 이론들이 현실사회주의체제의 산물인 [미의 고유성] 이상으로 유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실천적 이론의 중심에 맑스와 더불어 (중기) 루카치를 설정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 있어 보인다. 그것은 이들이 우리 문제에 대한 모든 해답을 직접 손에 쥐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현란한 변화를 관통하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주체적 적극적 대응의 논리를 개발해내도록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응 과정에서 서구의 다양한 이론적 성과들과 더불어 󰡔미의 고유성󰡕의 여러 인식들도 중요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이론적 노동을 통해 합당한 대응논리를 산출해내고 실천적 성과를 거두는 것은 결코 어느 한 시점에서 온전히 마무리될 수도 평가될 수도 없는 우리 자신의 과제이다.

 

(문예미학, 4)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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