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 입문] 다음 시간 자료입니다.
제 14강
1958. 7. 10.
요소분석만으로 인식을 얻을 수는 없다·239 | 보편은 특수를 통해 구체화된다·240 | 발전 개념에 대한 변증법의 입장·243 | 가족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다·246 | 사회는 유기체가 아니라 적대적이다·247 | 인식의 연속적인 진전·248 | 사회의 통일은 불연속성을 통해 본질구성된다·249 | 전제된 연속성은 긍정적이다·250 | 열성은 인식의 필수 계기다·252 | 연속성의 긍정적 측면·253
어떤 전체라는 것을 일반적으로 제어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이 총체성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개념적으로 규정하는 한, 이미 어떤 분석적 성격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적 규정들은 필연적으로 아무튼 전체와 직접 같은 수 없으며 그 가운데 어떤 계기들을 부각시키게 됩니다. 이 점을 말함으로써 또한 나는 아마 요소분석에 대한 비판으로 본래 뜻한 바를 여러분에게 더 잘 이해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실제로 요소 물신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아무튼 어떤 특정한 관점에서 변증법적 작업들은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할 때 실제로 수행하는 사유과정의 변화들보다는 오^히려 이때 우리가 수행하는 해석의 변화들을 뜻합니다.(200)(입문239-240)
우리의 인식은 우리에게 어떤 전체를 직접 제시하지 않고 단지 개념적 조작을 통해 매개된 상태로 제시하며, 또 이로써 그때그때 개념에 의해 특징단위들로 부각되는 계기들로 필연적으로 분해된 상태로만 제시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난관이 이미 사태 자체를 실제로 규정한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 점이 우리의 현실적 인식과정을 위해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다름 아니라 오늘날 행정적 사유 혹은 관리되는 사유의 요구들−정신의 가장 섬세한 움직임들 속에 이르기까지 관철되는 요구들−로 인해, 우리가 꾀하는 인식의 분해과정을 실제로 인식 자체와 동일시하려는 유혹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식의 이 분업적 계기들은 인식되어야 할 사태 자체의 규정들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입문240)
인식론적으로 아무튼 훈련을 못 받지도 않은 만하임 같은 인물의 경우는 물론이고, 심지어 맑스의 경우에도 이미 보편적인 요인들과 특수한 요인들은 서로 구분되어 있으며, 그래서 마치 보편적인 것이 작동하게 되고 그 밖에 또 어떤 특수한 작용력들 혹은 특수한 작용법칙들이라는 것이 여기에 부가될 것 같습니다.(201) (…) 이 경우 의문의 여지없이 아주 손쉽게 우리의 추상메커니즘 및 개념질서의 산물들을 실체화하려는, 즉 마치 그것이 본래 사태 자체인 것처럼 다루려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입문240-241)
예컨대 −여기서 나는 맑스 이론에서 한 예를 선택합니다− 사회적 과정들에 대한 설명을 위해 일단 계급관계 일반과 같은 무엇인가가 있고, 그 다음 이에 부가하여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자유로운 임금노동과 노동력 상품의 교환으로부터 생겨나는 특유한 조건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경우, 개념적 도식에 근거해 −첫째 오늘까지의 세계가 계급투쟁의 세계였고, 둘째 우리는 특정한 시기에,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도식에 근거해− 말하자면 보편적 요소들과 특별한 요인들이라는 두 계열의 요소들을 추론할 수 있고, 그 다음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단지 결합시키기[만] 하면 되는 듯해 보입니다.(입문241)(202)
예를 들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운동법칙들은 a) 보편적인 계급 법칙들과 b) 오늘날 지배적인 계급관계의 특수한 형식의 부가적 법칙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까지 사회가 분열되어 있고, 자체와 동일하지 않다는 기본사실은 자체 내적으로 어떤 역동성을, 전적으로 특정한 성격을 띠는 역동성을 지니며, 이는 다름 아니라 역사적으로 표현됩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 즉 자유로운 임노동과 보편적으로 확산된 교환원칙을 수반하는 사회에서 지배적인 계급관계들을 통해 역사적으로 구체화됩니다. 이러한 규정 이외에, 현상들을 지배하는 또 다른 보편적 법칙성을 찾으려 하면 이는 완전히 잘못일 것입니다. 오히려 이 보편적인 것 자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특수한 상황에 의해 매개되어 있으며 그러한 형식 속에서만 드러납니다.(입문242)
우리는 여기서도 세분화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컨대 착취나 타인 노동의 전유와 같은 것, 혹은 교환과 아울러 교환에서 약자가 손해를 보는 계기 등이 늘 존재했다고 전적으로 의미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늘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이 불변요인이 단순한 논리적 특수화에 어떤 부가적인 것으로서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렇게 특수화되며 전개된 것입니다. 즉 우리가 들어온 바에 따르면 모든 변증법적 사유에 대해 하나의 필수적 계율인 사태 자체의 운동법칙이라는 개념을 아무튼 진지하게 받아들일 경우, 그러한 불변요인이 전개되어 나타나는 구체화들로부터 독립해 있는 불변요인을 상정하는 것은 그 의미를 잃게 됩니다.(203) 따라서 우리는 이 모두가 계급들과 착취가 있는 세계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때 그것을 위한 일반적 법칙들이 있고, 그 다음에 또한 현재 상황을 위한 특수한 법칙들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이 법칙들 자체의 본질은 그것들이 현재 상황에서 타당성을 지니는 법칙들로 전개된다는 것입니다.(입문242)
물론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과거의 요소들이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것, 그러니까 예컨대 유럽에서, 또 독일이나 혁명 이전 러시아처럼 이른바 후발 국가들에서도 사실상 상당 규모로 그러했듯이, 온갖 가능한 봉건 잔재들이 부르주아 원칙 속에 끼어들고 또 그러한 것들을 통해 다름 아니라 계급관계의 특수한 형식들이 표현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며, 또 이는 실제 변증법에 대해, 변증법적 사유의 내용에 대해 매우 중요한 한 가지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러한 형식들은 오늘날 지배적인 특수한 계급관계에 대립하는 좀 더 보편적인 어떤 계급관계를 대변하는 것들이 아니라, 단순히 지나간 역사적 과정들의, 잔존하는 과정들의 한 단계일 뿐입니다.(입문242-243)
모순과 전도 속의 사유인 변증법적 사유는 그런 사유인 한 직선적 발전의 관념, 직접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발전의 관념과 필연적으로 대립합니다. 과정들이 −이 경우 무엇보다 역사적 과정들이 관건입니다− 자체 내적으로 모순에 찬 과정들이라는 점, 그것들이 다름 아니라 모순들의 전개로 이루어진다는 점, 이는 처음부터 직선적이고 굴절 없는 진보의 이념을 배제하며, 역으로 사회적 정태성과 불변성의 관념 또한 배제합니다.(204) 변증법적 사유가 비-동시적인 것, 뒤에 처져 있는 것 자체를 역사 진보의 매끄러운 과정상의 일종의 방해요소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이처럼 이른바 진보에 맞서는 것, 혹은 진보에 적합하지 않은 것을 나름으로 발전의 원칙 자체에 근거해 파악한다는 점이야말로 역사적 현실에 비춰볼 때 아마 변증법적 사유가 갖게 되는 가장 심오한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입문243)
예컨대 소시민계급 속에서 독일의 경우 다름 아닌 파시즘의 등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특정한 반동적 조류들을 관찰할 수 있을 경우, 이것들을 변증법적으로 본다면 그 후진적 요소들을 단순히 후진적인 것으로만, 말하자면 역사적 과정 속에 끼어든 것, 혹은 잔존물들 따위로만 보아서도 안 되고 볼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처럼 후진적인 요인을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진보 과정 자체로부터 추론해야 한다는 이른바 역설적 과제 혹은 확연한 의미에서 변증법적 과제에 직면하게 됩니다.(입문243-244)
그러니까 진보의 노정에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수반됩니다. 즉 어떤 집단들은 권력과 재산을 박탈당하는데, 그들은 다른 한편으로 그 기원과 이데올로기에 비춰볼 때 전적으로 시민사회 영역[에] 속하지만, 이제 갑자기 그들이 자신의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근거로 여기는 바로 이 시민적 삶의 물적 토대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에게 물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더 나았던 삶을 알고 있는, 혹은 그러한 삶을 가능성으로서 경험하고 사회변혁으로부터, 그것을 지난날에 비추어 평가하는 한, 정당하든 부당하든 자신에게 아무튼 아무것도 좋은 것을 기대하지 못하는 이 집단들은 역사 발전 과정 자체를 통해 지난 시대에 대한 예찬자(laudatores temporis acti), 즉 행복을 과거에서 찾고 의식상태에 비춰볼 때 과거 단계에 정체되어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205) 그리고 그들의 의식 속에 있는 이 퇴행적 경향은 다음의 이유에서 진보의 통상적 개념을 부정하는 가장 강력한 사회 세력들과 아주 쉽사리 융합됩니다. 즉 이 진보 개념은 본래 의미에서 시민적인 개념, 즉 자유주의적 성향(Liberalität) 및 시민적 자유와 결합되어 있는 데에 반해 그러한 세력들은 우리가 이 자리에서 분석할 수 없는 이유들로 인해 다름 아닌 권위주의적 지배형식들을 끌어들이려 하며, 이때 그들에게 의존하는 매우 방대한 집단들의 이 퇴행적 특징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변증법적 역사 이론의 과제는 실제로 언제나 함께 진행되지 않는 것, 뒤처져 있는 것을 이제 단순히 정태적으로 단순히 뒤처져 있는 것, 이제 운동과 맞서는 어떤 것으로만 보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입문244-245)(206)
우리 사회 속에 잔존해 있는 가족의 이 태고적인 성격 혹은 시대착오적인 성격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우리 사회가 비록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비합리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점, 즉 우리 사회가 예나 지금이나 이익의 법칙에 지배받고 있으며 인간 욕구 충족의 법칙에 따르고 있지 않다는 점, 이 비합리성으로 인해 사회가 불가피하게 자체 내에도 비합리적인 부분들을 보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근거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민사회의 시민적 원칙이 실제로 완전히 순수하게 충족되는 순간, 그것이 완전히 순수하게 철저히 합리화되는 순간, 시민사회는 −거의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예 시민사회이기를 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208) 그럴 경우 바로 지금 이 사회의 경제적 행위의 동기를 유발하는 계기들이 더 이상 존재할 자리가 없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점진적인 합리적 사회가 아직도 여전히 타인의 노동을 자의적으로 처분하는 일에 묶여 있는 한에서 이 사회는 그로써 필연적으로 또한 다양한 방식의 비합리적 제도들의 잔존에 강제적으로 의존하며, 따라서 이 제도들은 시민사회 속에서 한편으로 어떤 시대착오지만, 다른 한편으로 또한 시민사회 자체에 의해 요구되는 것입니다.(입문247)
여러분이 예컨대 우리 사회를 요소들로, 대규모 경제 단위들, 그 다음 이에 부가^되는 작은 경제 단위들, 최소의 단위들, 또 가족처럼 순수하게 합리적이지 못한 결합체들 등으로 분해하고, 전체 사회는 이 모든 계기들이 짜맞춰짐으로써 나타나게 되는 일종의 지도라고 믿게 될 경우, 사회 현실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문자 그대로 틀린 관념일 것입니다. 즉 사회는 이러한 요소들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름으로 하나의 기능적이고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를 조건짓는 연관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 전체성을 띠는 연관관계 혹은 이른바 유기적 연관관계라기보다, 오히려 사회적 적대관계에 의해 매개되는 연관관계임 (…)(209) 그와 같은 관념과는 반대로 사회는 어떤 유기체라기보다 오히려 일종의 체계라고 하겠지만, 물론 그것은 통분되지 않는 것, 본질적으로 모순을 이루는 것의 체계입니다.(입문247-248)
이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데카르트의 다음 규칙은 연속성과 관련된 규칙입니다. 그러니까 셋째 규칙은 “질서에 따라 내 사고를 이끌어가는 것, 즉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인식하기 쉬운 대상들에서 시작하여 점차로, 즉 단계적으로 가장 복합적인 대상의 인식으로까지 상승하는 것이다. 이때 나 자신은 그러한 대상들 가운데에 자연적인 방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어떤 질서가 있다고 전제한다.” 마지막 문장은 중요한 의미에서 합리주의적인 모티프를, 즉 −일종의 작업가설로서− ‘나는 전제한다’는 표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과학적 질서와 같은 어떤 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인식 대상 자체 속에 비약 없고 연속적인 질서가 존재한다고 전제되는 것입니다.(입문248)(210)
그러한 연속성은 우리가 확인하려고 시도한 인식 대상 자체의 모순적인 성격을 전제하는 경우에 지배적이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 상세한 논증이 별로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즉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문제설정 아래서 변증법의 원칙은, −그런데 그것은 위대한 합리주의 철학들 가운데 하나, 즉 라이프니츠 철학의 근본문제들 가운데 하나를 형성합니다− 혹은 변증법의 문제는 단순히 불연속성의 계기에 머물지 않고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계기들을 서로 결합하는 일, 따라서 연속성과 불연속성 자체를 서로 매개된 것으로 파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입문249)
한편으로 전체, 총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변증법의 이론적 과제이며, 총체^성의 이념 없이는 인식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총체성 자체는 어떤 연속적 총체성, 단절 없는 연역적 연관의 총체성, 논리적 총체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단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자체 내적으로 불연속적입니다.(211) 이에 대한, 그 속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변증법적 응답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통일이란 본래 사회의 불연속성 자체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입문249-250)
또 이 불연속성의 계기로부터 인식이 선택해야 하는 출발지점, 그러니까 우리가 시작하는 지점은 변증법적 사유에 대해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절대적 제일원리로부터 이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조건적 연속성 속에서 발전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다룬 전체의 힘은, 마치 모든 개별 계기 속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들은 모두가 중심점에서 똑같은 거리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일관된 변증법적 사유는 이 경우 외견상 극히 덧없는 현상, 외견상 극히 비공식적인 현상에서 시작할 수 있고,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이 권장할 만한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유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허가된 범주들 가운데 우리에게 미리 주어진 것에 우리의 주제를 맞추는 경우보다, 바로 그처럼 공식적인 사유의 범주들에 의해 아직 점령되지 않은 것들이 전체의 감추어진 본질로 훨씬 더 잘 우리를 안내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입문250)
객관에 대한 사고의 입장 문제는 연속성 혹은 불연속성에 대한 물음 앞에서 일종의 도덕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즉 인식 대상이 자체 내적으로 단절 없이 일관되고 연^관되어 있으며 남김없이 논리적이고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는 관념 속에는 이미 그처럼 의미 있고 조화를 이루며 조직되는 것이 본래 어떤 긍정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감추어져 있습니다.(212)하지만 우리가 기존상황에 대한 비판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즉 현실 자체의 적대적 성격에 대한 사고를 실제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다름 아니라 존재자의 규정 속에 담긴 불연속성을 보여주고 이로써 필연적으로 또한 우리 사유에 중단된 상태, 불연속성의 형식을 부여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불연속성을 통해, 그러니까 자체 내적으로 매개된 모순을 통해, 우리가 실제로 관여하는 것의 바로 그 연관관계 및 그 통일이 이루어지는 식으로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입문250-251)
오늘날 생산적인 사유는 아주 확실하게, 전혀 의문의 여지없이, 단절들 속의 사유입니다. 반면에 처음부터 단지 통일성⋅종합⋅조화만을 지향하는 사유는 바로 그로써, 사유가 본래 파고들어가야 하는 어떤 것을 애초부터 은폐하며, 지금 일단 존재하는 것의 표면을 사고 속에서 반복하고 어쩌면 또 다시 강화하는 데에 필연적으로 만족합니다.(입문251)
물론 정신적 규율과 같은 무엇인가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리에게 주입하려 하는 정신적 규율은 일반적으로 정신에 대한 적대상태로 귀결됩니다. 즉 그것은 사고가 특정한 규칙적 진행에 예속되게 하기 위해, 사고의 생산성이, 그러니까 대상에 대한 사고의 관계가 차단되고 거세되도록 하는 일로 귀결됩니다. 반면에 실제로 사고에는 헤겔이 칭한 바와 같이 대상에 다가갈 자유를 지닌다는 규칙 말고 어떤 다른 규칙도 결코 없습니다.(213) 사고의 규율은 사고가 사태에 적응한다는 것, 가능한 한 사태에 매우 합당해진다는 것일 뿐입니다. 결코 사고가 일종의 방법으로서 규칙을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그에 따라 처리하며, 또 이른바 방법에 대한 이 요구에 근거해 결국 사유를 금지하는 일만을 해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중요한 의미에서 사유할 경우 실제로 언제나 이미 방법론적이지 않게 사유하기 때문입니다.(입문251-252)
이로써 내가 단순한 착상의 자의나 우연성을 선전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로써 단지 자체의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사고, 대상에 다가갈 자유를 지니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유를 지니지 못하는 사고, 그러니까 자신을 자유로이 대상에 내맡기지 않고 부단히 어떤 속박들을 찾고 그러한 속박들 속에서만 실제로 편안함을 느끼는 사고, 그런 사고는 자신의 사태를 떠맡을 수 없다고 말하고자 할 뿐입니다. 사고의 옹졸함이란 실제로 다름 아니라 사람들이 일단 가지고 있는 것의 안전을 위해, 사적 개인의 사소한 안전을 위해, 사소한 개별자를 위해, 사고가 사태 자체에 대한 관계를 무시하는 것일 뿐입니다.(입문252)
따라서 여러분이 과학적으로 작업하고 규율을 익혀 과학적으로 작업하는 법을 배울 때 언제나 또한 그 옹졸함이라는 계기, 오직 한발한발씩만 진행하는 계기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고수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정신적 섭생법에 포함된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처럼 한발한발 이루어지는 진행 속에는 당연히 생산력의 마비도 직접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고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곳에서 사실 −나를 너무 감상적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사고는 날아가지 한발한발 진행되지 않습니다.(214) 더 이상 날아가지 못하는 사고는 물론 단지 날아갈 줄만 아는 사고와 꼭 마찬가지로 사고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열광이 인식과 진리 자체의 필수 계기라는 플라톤의 규정은 단순한 철학적 정서의 표현이나 단순한 사고스타일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태 자체의 한^ 가지 필연적 계기를 나타냅니다. 사유가 한발한발 아주 작은 단위들 속에서 수행될 경우 사유는 오직 실제로 그것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반복하는 것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름 아니라 사유는 그것에 단순히 주어지고 그렇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앞지름으로써, 이 우월성을 확보함으로써, 아무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을 넘어설 수 있고 또 단순히 존재하는 것에 대해 실제로 발언할 수 있습니다.(입문252-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