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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강 영어판 역자 서문2(헤겔 철학의 영향과 단절)

작성자홍승용|작성시간26.06.17|조회수61 목록 댓글 0

3. 헤겔 철학의 영향과 단절

 

맑스는 자신이 쓴 노트 일곱 권 전체를 아우르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오늘날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라고 알려진 수고의 명칭은 1939년 ‘맑스-엥겔스-레닌 연구소’의 편집자가 선택한 것인데, 그것은 사실상 맑스가 쓴 여러 통의 편지에서 다양한 준거들을 찾아 섞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요강3,250)

 

라살에게 보낸 편지(1858년 2월 22일)에서 알 수 있듯이, 맑스는 내심 ‘경제학적 범주 비판’(Critique of the Economic Categories)이라는 다른 제목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편집자가 붙인 제목들이 조금은 시비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 제목은 대단히 적절하다. 오늘날 통용되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제목이 선호될 만한 훌륭한 근거가 확실히 있기 때문이다. 이 근거들 가운데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에서 입증된 연속성이다. 이 책은 주로 󰡔요강󰡕의 첫 장을 고쳐 쓴 초고인데, 이 제목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충분히 근거 있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목을 정확하게 확정짓는 일은 궁극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다. 왜냐하면 일단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어떤 책은 그 나름의 생명력을 얻기 마련이며, 그 책에 붙여진 특정한 제목은 그 책은 물론이고 다른 책에도 두루 쓰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점은 이 제목이냐 저 제목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본래 그 책에는 제목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는 것이다.(요강3,250-251)

 

처음에 제목이 없었다는 점은 완결되지 않은 수고의 특성을 알려 준다. 1939년 판의 편집자들이 ‘자신들이 붙인’ 제목에 대해 보충적인 설명을 다는 방식으로 신중을 기했던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초고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번역본을 읽는 독자는 이와 같은 초고의 특징을 즉시 발견하리라고 본다. 예컨대, 수고의 본문 문장들은 문법적 구성 요소들을 생략하고 있고, 대체로 어렵고 때로는 다루기 힘들고 모호한데다, 심지어 거기에는 전체적으로 부적절한 정신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문장과 단락들,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이탈과 중언부언 들이 나타나고 있다. 거의 모든 내용이 출판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의 장점과 설득력, 맑스의 저작들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명쾌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실제 상황은 이와는 반대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수고는 거칠고 어려운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읽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 텍스트이며, 인용하기에도 대단히 위험한 텍스트이다. 그 문맥과 문법 및 어휘만 놓고 보더라도, 독자는 주어진 단락에서 맑스가 ‘실제로’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용자는 물론 발췌자도 이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요강3,251-252)

 

그렇지만 이런 형태상의 결함은 텍스트에 강력한 보상물을 제공해 준다. 무릇 최초의 초고가 지닌 장점이란−특히 이 수고의 경우는 더욱 특징적인데−저자가 나중에 개성이 제거되고 완성도를 갖춘 인용 가능한 결론의 형태를 취하게 될 자신의 견해를 염두에 두면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업해 나가는가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요강3,252)

 

모든 과학에서 연구 방법과 그 결과를 제시하는 서술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실험실과 강의실간의 형태상의 차이와 동일하다. 예컨대 만약 연구 결과가 단지 어떤 필름이나 과학자의 연구를 보여주는 일지의 형태로 제시된다면, 물리적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는 점이 폭넓게 이해될 것이다. 거꾸로 연구 결과를 제시한 논문이 물리적 세계에 대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면, 과학적 연구 방법은 상대적으로 거의 이해되지 못할 것이다.(요강3,252)

 

이러한 측면에서 󰡔요강󰡕은 독창적이다. 맑스의 생애 중 이 시기에 출판된 그 어떤 텍스트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의 가장 중요한 업벅과 유산인 연구 방법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은 없다. 다시 말해 맑스의 수고는 예상 밖의 새로운 사실을 확증해 주는 것처럼 나타나며”, “우리에게 맑스의 경제학 실험실을 소개해 주고, 그의 방법론이 지닌 획기적인 성과와 그 이면의 구체적인 지침들을 보여주고 있다.”(로스돌스키) 이렇게 보면 󰡔요강󰡕은 근본적인 이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연구에 임하던 맑스의 마음가짐을 기록한 셈이다. 이 점이야말로 수고가 지닌 가장 유용하면서도 다른 그 어떤 것과도 구별되는 독창적인 면모라고 할 수 있다.(요강3,252)

 

물론 󰡔요강󰡕에서 드러난 맑스의 방법론적 ‘성과’와 ‘이면의 구체적인 지침들’을 추적한다는 것은, 이 서문의 범위에서는 불가능한 과제이다. 그렇지만 주요한 연구 방법들 가운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대략적으로나마 가늠해 보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요강3,253)

 

1858년 1월 16일, 맑스는 네 번째 노트(이 책, I권 390-427쪽과 II권 11-106쪽) 중 어딘가를 작성하던 도중에 맨체스터에 머물고 있던 엥겔스에게 연구 작업의 진행 과정을 알려 주었다. “어느 정도 상쾌하게 논의를 진전시키고 있네. 나는 전에 생각했던 바대로 이윤에 대한 전체적인 공식을 뒤엎어 버렸네. 연구 방법에서, 그저 우연히…헤겔의 󰡔논리학󰡕을 다시 한 번 쭉 훑어 본 것이 내게 매우 도움이 되었다네.”(MEW29, 260).(요강3,253)

 

󰡔요강󰡕에서는 새로운 이윤 이론이 만들어진다(이 책, I권 390-409쪽, III권 11-36쪽). 이는 향후 󰡔자본론󰡕에도 그대로 이어져 맑스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정치적 성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맑스는 이 이론에 기초하여 노동자가 착취당하는 정도를 측정하는 것은 보통 이해되는 것처럼 이윤율이 아니라, 이와는 아주 상이할 뿐만 아니라 경향적으로 이윤율의 하락을 저지하는 잉여가치율이라는 점을 입증할 수 있었다. 맑스는 이윤율이 실제로 착취율을 왜곡하며,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그것을 더욱 고도로 왜곡시킨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이 책, III33). 이러한 논의는 맑스에게 그의 임금론은 물론, 노동조합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많은 것들을 위한 전략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다.(요강3,253)

 

여기서 우리는 헤겔 철학의 우연한 재발견이 맑스에게 준 도움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헤겔의 󰡔논리학󰡕이 준 ‘도움’은 결코 이윤율이라는 특정한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요강󰡕 전체가 헤겔 철학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요강󰡕이 씌어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론󰡕 1권을 다시 연구하면서 맑스의 정치경제학 전체에 헤겔이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의 󰡔철학노트󰡕에서 “헤겔의 󰡔논리학󰡕 전체를 철저히 연구하지 않고서는…맑스의 󰡔자본론󰡕…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요강3,253-254)

 

요컨대 헤겔 철학의 영향이라는 문제는 󰡔요강󰡕을 연구할 때 거의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헤겔 철학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또한 맑스의 연구 방법에 대하여 헤겔의 󰡔논리학󰡕이 지닌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들은 󰡔요강󰡕을 읽는 진지한 독자라면 모두가 마주치게 되고, 적어도 해답의 실마리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요강3,254)

 

헤겔(Hegel, G. W. F. 1770~1831)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학자였다. 그는 수학, 자연과학, 역사, 법학, 정치이론, 철학, 미학, 신학 분야에 뛰어났으며, 이 여러 분야에서 당대의 일류 전문가들과 대등한 사람으로서 대화를 나누었다. 동시에 그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극히 모순적인 인물이기도 했다.(요강3,254)

 

극작가 브레히트는 자신이 쓴 희곡의 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헤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비슷한 방법을 써먹은 소크라테스처럼 철학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해학가가 될 물건이라네. 하지만 프러시아의 공복이 될 것만 같은 액운을 타고났어. 그래서 마침내 자기 자신을 국가에 팔아치워 버렸지.”(브레히트: 󰡔망명자의 대화󰡕, 108쪽). 헤겔의 철학은 소크라테스의 그것처럼 당장에는 변증법적이고 전복적이지만, 결국 신부의 철학처럼 관념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이었다는 말이다.(요강3,254)

 

헤겔 철학의 관념론적인 측면은 그가 감각(sense)이 지각하는 것의 실재성을 부정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그는 감각이 존재하며, 이것이 무엇인가를 지각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지각(perception) 그 자체만으로는 사물의 본성이 아닌 외양만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진리란 논리적 추론을 통해 감각과 지각을 비판하고 재구성함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러한 온당한 원칙으로부터 오직 논리적 개념들만이 어떤 실재성을 지닌 정신에 의해 차차 완성된다는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감각은 단지 외양만을 인식할 수 있고, 이 외양은 허위적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외양이란 비실재적인 것이라는 결론으로 비약했다. “진리만이 실재한다는 것은 헤겔의 가장 기본적인 명제이다(헤겔: 󰡔논리학󰡕 II, 󰡔헤겔 전집󰡕 6, 462-3, 8󰡔엔사이클로패디󰡕, 47쪽과 다른 곳들 참조). 그리고 그는 여기서 좀더 나아갔다. 헤겔은 자신의 개인적 의식 속에 있는 개념만이 실재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신체의 실험실에서 정신을 전적으로 축출한 후 어떤 사람의 두뇌 외부에 별개의 단독자로 존재하는 대문자로 시작되는정신’(The Mind)이야말로 절대적 진리의 요점이자 총체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따라서 두뇌의 외부에서 두뇌 속으로의 이동을 전달하는 감각-지각의 도정은, 그에게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분열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 지점에서 헤겔이 다음과 같은 명제로 나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여러 세기가 흐르는 동안 비물질적인 주체가 아닌 이 대상이 세계의 발전을 지배했고 또 항상 지배해 왔으며, 이에 따라 이 대상은 그 자신을 전개하고 드러내는 것에 만족해 왔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헤겔이 신으로 나아가는 것은 전혀 진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급기야 헤겔은 속세의 군주에게 은총을 베푸는 철학자-교황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또한 절대정신은 군사 관료제에 기반한 프러시아의 융커 전제정 속에서만 철학은 물론 감각에 대해서도 그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다. 헤겔은 자신의 경건한 종교적 신심에 대한 모든 의구심을 미리 거두어버리기 위해서, 자신의 성서에 가장 타락한 아첨의 악취를 풍기는 수많은 구절들을 집어넣었고, 마침내는 국가의 명예를 안은 채^ 땅 속에 매장되었다.(요강3,254-256)

 

헤겔다운 모순의 또 다른 극단은 변증법에 관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변증법의 역사는 실로 장구하다. (이 용어는 ‘둘로 분리된다’, ‘반대된다’, ‘부딪친다’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디아’(dia)와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logs)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변증법은 ‘둘로 분리됨으로써 논리적으로 판단함’을 뜻한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최초의 자연과학자이기도 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변화, 운동, 진행과 관련된 현상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예컨대 그들은 날아가는 화살이나 강을 건너는 새를 보면서, 이것을 통해 사물은 운동하면서 여기 존재하는 것에서 저기 존재하는 것으로 바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와 ‘저기’가 서로를 배제하기 때문에, 운동이란 사물의 어떤 상태가 다른 상태로 전환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운동은 시작과 시작의 반대인 끝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그 움직임은 이 반대되는 요소들의 통일체라고 보았다. 요약하면, 운동은 하나의 모순인 것이다. 만물은 운동이라고 주장하는 다른 철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변증법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철학 내에서 중요한 경향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는 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견해를 달리하는 학파들 사이에서의 끊임없는 논쟁과 사회적⋅과학적 발전의 후진성,(소크라테스의 철학에서 나타난 것처럼) 정치 체제가 변증법의 전복적 결론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두려움, 마지막으로 성취 가능한 것에 엄격한 한계를 두었던 궤변과 배리 등 변증법에 대한 상업적 왜곡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헤겔: 󰡔헤겔 전집󰡕 18권, 305, 325쪽; 레닌: 󰡔철학노트󰡕, 󰡔레닌전집󰡕 38권, 254-60쪽).(요강3,256)

 

헤겔의 커다란 매력 가운데 하나는 세계의 여러 문명−그리스와 그리스를 제외한 유럽의 나머지는 물론 아시아, 중동까지 포함하는−에서 변증법의 전사를 체계적인 형태로 모으고, 이것을 비^평했다는 것이다. 그는 변증법이 실제로 철학의 역사상 모든 위대한 인물들이 사고하는 데 있어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 본래의 활력을 잃기는 했지만 이러한 사실은 그의 전임자임면서 적대자였던 임마누엘 칸트(1724~1804)의 사고에서도 확인된다. 헤겔의 더욱 커다란 장점은 자신이 이해한 변증법을 변증법적 원리에 기반해 논리학 체계 전체를 세움으로써, 그것을 새롭고 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데 있다. 이런 논리학 방법은 ‘논리학’을 제목으로 단 그의 책에서 가장 포괄적으로 설명된다.(요강3,256-257)

 

헤겔은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사물의 개념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개념”(Begriff)을 안다는 것은, 우선 그 사물을 움켜쥐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집게처럼) 어떤 사물을 정신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물이 운동하고 있다면, 이 운동이 그 사물의 본성 중의 일부 혹은 전부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맑스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고정된 가정들은 설명이 계속되면서 모두 불필요해진다. 그러나 처음에는 단지 가정들이 고정됨으로써, 모든 것을 혼돈시키지 않으면서 설명이 가능하다.”(이 책, III권 104쪽)(요강3,256-257)

 

이 난관은 변화에 대해 연구하는 특정한 개별 철학 분과에 국한되지 않으며, 또한 발전의 문제에 몰두하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특정한 학과에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통일체는 운동하고 총체는 발전한다.^ 그 모두는 시작과 끝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부르주아 사회를 하나의 전체로서 고찰하면, 사회적 생산과정의 최종적 결과는 사회 그 자체로 현상한다. 즉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인간 자체, 생산물 등과 같이 고정된 형태를 가진 모든 것은 이 운동 속에서 단순한 하나의 계기, 소멸하는 계기로 현상한다. 여기에서 직접적 생산과정 자체는 단지 하나의 계기로 현상하는 것이다. 이 과정의 조건들과 대상화 자체는 그것의 계기들과 동등하며, 유일한 주체는 개인이지만, 개인은 상호관계 속에서 그 조건들과 대상화를 동일하게 재생산하고 새롭게 생산한다. 그것들은 자신들이 창출한 부의 세계를 재생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재생시킨다.”(이 책, II권 389쪽)(요강3,257-258)

 

운동이 유일한 상수이기 때문에, 맑스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정지중인 어떤 체계에서 향후 요소’(element)요인’(fact)으로 불리게 될 것들을 지칭하기 위해 계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맑스에게서 이 용어는 시간 주기’(period of time)운동력’(the force of moving mass)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닌다. 그는 헤겔의 용례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는데, 헤겔에게서 이 용어는 좀더 기계적이며, 그 안에는 시간의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자본은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그 안에는 항상 자본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계기들이 있다.”(이 책,́ I256) “자본으로서의화폐는 경^직성을 상실한 가운데 하나의 실체에서 과정으로 변화된다.”(이 책, I권 262-263쪽).(요강3,258-259)

요컨대 헤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맑스에게도 사물을 이해하는 문제는 우선 그 사물이 운동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논리의 단계는 통상적인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는 결코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커다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사물이 갑자기 균열을 일으키거나 분리될 경우에만, 그 내부에는 항상 어떤 변화의 원동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대개 사물은 정지된 외양을 띠고 있다. 헤겔은 중단 없는 유동성의 이런 고요한 외관을 ‘현존’(Dasein)이라고 불렀다. 감각이 관계 속에서 조망될 때, 그것은 사물의 외양을 이룬다. 헤겔은 이러한 현존을, 외관의 이면에 놓여 있는 대립물이 “일면적이고 직접적인 통일성의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 재치 있게 규정했다(헤겔: 󰡔논리학󰡕 1권, 󰡔헤겔 전집󰡕 5권, 113쪽).(요강3,259)

 

일면적이고 직접적인 통일성의 외양, 또는 외관상의 정지와 조화라는 이러한 ‘현존’은, 단순 생산 영역이라는 본류에서 그 영역과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관계를 연구하는 맑스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시장은 가장 공적(公的)이며, 가장 공공연하고, 가장 현재적인 자본주의 사회 관계들의 집합이다. 그리고 시장에서 추상된 이데올로기는 이런 외양의 복합체일 뿐만 아니라. 좀더 진척된 단계인 유사성과 환상의 복합체이다. 시장은 여러 가지 형태의 자유와 평등이 스스로를 재현하는 곳이자, 구매자와 판매자의 구별이 그 양자의 통일성 속으로 소멸되는 곳이다. ‘모순 없이는 그것들간의 구별이 남긴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차이 하나조차도 불가능하다.’(요강3,259)

 

이러한 현존은 우연적인 것도 무차별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 아래에서 ‘일면적이고 무매개적인 통일성’만을 드러내는 외관일 뿐이지만, 전체에 대해 대상적인 ‘계기’이고, 그것의 개념 속에 포^함되어야만 한다. 이 현존은 한정된 현존이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며, 일정한 특성을 지닌 데다, 수량화되고 측정될 수도 있다. 이 현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을 수도 있는 생각이 그것 자체와 더불어 일면적인 통일성 이상으로 나가지는 않기 때문에, 그것은 순전한 착각이나 환상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외관처럼 이 현존도 처음부터 사물의 무한정한 확장을 반대하기 때문에 하나의 제약이다. 등가교환 법칙, 즉 가치법칙은 자본의 확장에 대한 제약이며, 자본주의의 표층에서 관찰되는 과정의 객관적인 부분을 형성하는 제약이다. 그것은 수량(화폐 형태를 취한 교환가치의 양, 궁극적으로 임금)으로서, 측정 수단(가치 측정 수단으로서의 노동 시간)으로서, 그리고 질(노동이 부를 조금이라도 창출하기 위한 필요조건)로서의 제약이다. 󰡔요강󰡕에는 이러한 문제들을 다룬 구절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예를 들면, 이 책, I권 272쪽, 332-333쪽, 343-344쪽과 II권 15-37쪽 등). 그러므로 이런 표면적인 과정을 공허한 형식이나 단지 명목상 중요한 것으로만 다루게 되면 전체를 이해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 예컨대 리카도는 화폐 문제에 관한 논의에서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이 책, I권 340-342쪽).(요강3,259-260)

 

하지만, 표층에 남아서 존재의 직접성에 기뻐 날뛴다는 것은, ‘순수한 환상으로 추락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유통표층표층의 이면에서 발생하는 어떤 과정의 현상 형태이다.”(이 책, 1252)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폐에서 자본까지 그 본질을 간파해야 한다. 이런 점 때문에 모순은 출입 금지표지판, 철조망, 무장 경관과 경비견의 이면에서만, 단순한 반영이기를 그치고 근원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 헤겔의 입장에서 부정은 창조적인 힘이다. 여기에서 노동자가 스스로를 더욱 더 부정하거나 자본에 의해서 부정되면 될수록, 그가 창조하는 부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많은 구절들이 있지만, 그 대표적인 예는 본문 I권의 314쪽을 볼 것.) 헤겔에게 부정은^ 그것의 대립물인 정립을 창출하며, 즉자적으로 어떤 사물에 일정한 특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정립으로서 사물에 대자적으로 그것의 특성을 부여한다(헤겔: 󰡔논리학󰡕 1, 116, 130-31). 자본의 본질에 있어서, 노동자는 그 자신을 부정함에 따라 잉여가치를 대자적으로 정립함은 물론, 본래의 임금 관계를, 즉 임금노예로서의 그 자신과 자본으로서의 자본을 창출하고 재창출한다. 개별적인 차원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에 관해 말한다면, 그들은 이 과정에서 단지 임노동과 대자적인 자본으로 간주되는데(이 책, I308),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이 가질 수도 있는 모종의 특질 혹은 관계는 생산과정에 의해 억제되거나 생산과정에 부적절하게 된다. 전체로서의 생산과정은 본래 무제한성을 띠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우선 노동자에 대한 절대적 부정으로, 다음으로는 상대적 모순을 끝없이 첨예화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다. 생산과정은 모든 경계에 대해 압박을 가하고 돌진한다. 만일 전체로서의 사회가 운동 중에 있고 진행 중인 것으로 이해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직접적 생산과정의 동학을 반드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헤겔이 말했듯이, 완전한 통일체로 나아가는 추동력과 에너지는 바로 그 자체의 근원적인 모순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헤겔: 󰡔논리학󰡕 2권, 275-76쪽).(요강3,260-261)

 

이제 지금까지 언급한 이 개념들에 포함되어 있는 요소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에는 두 과정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는 표층에서 일어나는 과정으로 일면적인 직접적 동일성으로 귀착되며, 자체의 재생에 필요한 원동력을 결여하고 있다. 다른 과정은 표면 아래에서 펼쳐지는 격렬한 모순의 과정이다. 전자가 동일성이라면, 후자는 동일성의 대립물이다. 그 결과 가장 추상적인헤겔의정식에서 통일체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이 되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I권, 74쪽, 2권, 40-42쪽). 이러한 통일성 속에서 비동일성, 즉 모순은 우선적인 계기이다. 모순은 자신의 특성을 타자에 각^인시키며 전체의 본질을 규정한다. 따라서 전체를 시장 체계자유 교환’, 또는 자유 기업등으로 명명하는 것은, 표층의 과정이 사물 전체의 본성을 결정짓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상 표층은 그 본질에 대한 장벽이며, 발전 과정에서 이 장벽은 전에 없이 고통스런 제한이 된다. 헤겔과 맑스가 전화(Umschlag)라고 부른 상황, 즉 전도나 전복과 유사한 도약이 일어나는 어떤 지점에서는 이전의 장벽, 동일성, 등가법칙 등이 부정되고, 근원적인 모순은 지양되며, 상이한 질서의 동일성 및 모순과 함께 보다 높은 수준에서 전체가 그 대립물로 전화된다. 이쯤에서 지양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이 말은 헤겔과 맑스의 용어 ‘Aufhebung’을 번역−맑스 자신이 이 말을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다−한 것이다. 헤겔은 이 말이 일상 언어에서 정확하게 두 가지 반대되는 의미를 표현하기 때문에 즐겨 사용했다. “지양은 보존되고 지속되는 것과 끝내는 것, 또는 중지하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헤겔: 󰡔논리학󰡕 1권, 114쪽) 영어의 ‘suspend’는 이와 정확히 동일한 모순적인 의미들을 지닌다. 예를 들면, 상업에서 그 말은 정지(지불)를 의미하는 반면, 음악에서는 계속이나 지속(음표)을 나타내며, (교육제도 같은) 관료 행정에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헤겔은 특히 지양과 폐지(annihilation)를 명확하게 구별하려고 했다. 지양된다는 것은 무로 된다는 게 아니라, ‘존재로부터 출현하는 결과, 다시 말해 그것이 자체 내에 그 자신이 출현한 규정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요강3,261-262)

 

만약 우리가 󰡔요강󰡕에서 헤겔의 술어가 포괄적으로 사용된 사실뿐만 아니라, 헤겔의 방법과 그 방법의 유용함에 대해 맑스가 의식적으로 고찰한 많은 구절들을 고찰하고, 이와 더불어 그가 이 책에서 개진한 논거의 기본적 구조를 동시에 고찰한다면, 우리는 󰡔논리학󰡕 연구를 통해 드러난 맑스의 노고가 실로 위대한 것이었다는 점을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단 그 용어법은 가장 쓸모 있으^면서 가장 덧없는 노고이기도 하다. 맑스는 가끔 헤겔의 용법과의 대립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헤겔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자본론󰡕이 발간되기 전에 그 어휘 대부분을 내버린다. 이것은 마치 여행에는 긴요했으나 그 뒤에는 쓸모가 없어진 짐을 내다버리는 것과 같다. 헤겔의 유용성은, 그가 움직이고 발전하는 총체를 이해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지침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요강3,262-263)

 

자본 개념을 정확하게 발전시키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추상적이고 반영적인 형상(Gegenbild)을 자신의 개념으로 지닌 자본 자체가 부르주아 사회의 기초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 개념은 근대 경제학의 기초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 관계의 기본 전제를 선명하게 정식화하게 되면, 그 관계가 자기 자신의 범위를 넘어서 유래하는 경계는 말할 것도 없고 부르주아적 생산이 지닌 모든 모순이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이 책, 1권 340-341쪽).(요강3,263)

 

이 방법의 본질은 전체를 모순으로 이해한다는 것인데, 이는 맑스가 헤겔에게서 얻은 가장 커다란 교훈이다.(요강3,263)

 

그러나 헤겔의 방법은 동시에 자체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헤겔은 두 사람이 아니었던 까닭에 결코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에 의해 비로소 관념론과 변증법은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하며, 서로를 관통한다. 그가 가장 절대적인 은총을 국가에 부여한 것 만큼, 그의 변증법이 감행하는 도약의 정수에는 신비주의의 장막이^ 드리우게 된 것이다.(요강3,263-264)

 

맑스의 헤겔 비판은 두 가지 주요한 논리적 국면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국면은 독립적인 대상적 정신의 전체 영역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데, 이 정신은 헤겔에 의해서 천상으로 부유하게 되며, 본래의 소재지인 죽음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육체 속에 되돌아온다. 동시에 헤겔의 주체와 헤겔의 객체는 전도된 채로 발견될 것이며, 이때 그것들이 다시금 바로 세워져야 한다. 이제 실재적인 세계의 역사가 특별한(sui generis)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 정신과 그것이 지닌 모든 관계들이 인간 두뇌의 산물임이 명백해진다. 더욱이 그 인간의 두뇌는 특수하며 변화하는 사회경제적 존재 양식에 의해 추동되고 제한되는 실재 역사에 고정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두뇌는 감각적, 물질적, 사회적 육체에 통합되어 있으며, 그 자신의 행동을 통해 역사를 변경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유의 원천과 조건들도 변경시킨다. 헤겔 철학의 전복에 있어서 주요한 국면은 1840년대 초 포이어바흐와 맑스에 의해 각기 다른 형태로 성취되었다. 이 점은 󰡔요강󰡕 앞에 붙은 서문에서 훌륭하게 재차 요약되었으며, 1873년 󰡔자본론󰡕 1권에 붙인 맑스의 서문에는 “헤겔을 제대로 서게 한다”는 말로 요약되어 있다(󰡔자본론󰡕 1권, 20쪽).(요강3,264)

 

포이어바흐는 헤겔의 절대 ‘정신’에서 드러나는 범주와 개념 사이의 충돌을 ‘신들의 전쟁’이라고 불렀다(󰡔신성가족󰡕, MEW3, 98). 그의 이런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일단 이 천상의 전장이 현실에 발 딛게 되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충돌의 비물질적인 적대자가 주어진 육체라고 한다면, 어떤 방식을 통해서 그들이 벌이는 전투의 규칙, 즉 갈등을 해결하는 전략과 전술이 필연적으로 실물 그대로 변경될 수 있을 것인가? 관념론적 변증법의 기본구조, 달리 말해 관념론적 변증법의 기본적인 운동 과정은 역사에서 발생하는 실제적 충돌과 변형의 세계를 이념의 세계로 투사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투사, 즉 관념화에서는 물질적 역사의 변증법에 본질적으로 현존하는 중요한 요소가 은폐되고 시야에서 사라진다. 맑스는 이렇게 헤겔의 체계를 전복하는 두 번째 주요 국면을 가리켜 합리적 핵심에서 신비적 외피를 걷어내는과정으로 정식화한다. 이 과정은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에 대한 비판이고, 그의 모순 이론에 대한 비판이며, 따라서 헤겔적 개념의 기본적 과정들에 대한 비판이자, 동시에 운동에 대한 헤겔의 기본적 이해력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요강3,264-265)

 

물론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맑스의 비판이라는 이렇게 거창하고 복잡한 주제가 이 서문의 범위에서 충분하고 적절하게 다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요강󰡕은 이 주제와 관련하여 이전에 씌어진 거의 모든 문헌들을 심각한 시험에 맞닥뜨리게 함은 물론, 그 대부분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말 것이다. 이와 동시에 수고는 철학 관련 논문들이 몇 편 추가로 작성되기에 충분한 논점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이 논점들을 선점할 생각은 없다. 다만 특별히 두드러진 점 두 가지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들은 맑스의 서설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본문과 서문의 관계를 적절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도 불가피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방법에 대한 헤겔의 개념과 맑스의 개념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들을 특별히 선명하고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두 가지 측면은, 첫째 본문을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둘째 어떤 통일체 내의 모순은 직접적이고 필연적으로 동일한가 아니면 차라리 간접적이고 조건에 따라 동일한가 하는 문제로 요약될 수 있겠다.(요강3,265)

 

헤겔은 󰡔논리학󰡕을 철학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추상 개념인 순수하며 규정되지 않은 존재, 즉 존재 일반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는 이것이 가장 기초적인 실체라고 단언한다. 유물론자 맑스에게 이 존재 일반은 철학적 정신이 꾸며낸 허구이며, 거짓말쟁이의 상상 속에서만 그 실체를 가질 수 있는 범주이다. 이에 따라 그는 󰡔요강󰡕의 서두를 물질적 생활, 정치경제학, 물질적 생산이라는 범주로 시작하고 있으며, 특히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물질적 생산만이 그 범주의 유일한 실재적 형태라고 서둘러 덧붙이고 있다(이 책 151). 그러므로 헤겔이 순수한 ‘존재’와 ‘무’−그것의 대립물이 없이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가 동일하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처럼, 맑스도 서문에서 물질적 생산의 대립물인 소비−그것 없이는 결코 생산이 이해될 수 없는−에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대립물(생산과 소비)의 동일성에 대한 고찰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제 막 착수된 논의의 발단이 벌써 의문의 대상이 된다. 즉 ‘물질적 생산’은 역사 발전을 설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으로부터 추상된 범주라는 점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생산 일반은 하나의 추상 개념이지만, 공통의 요소를 실제로 명확히 하고 고정하며, 따라서 우리가 이를 되풀이하는 수고를 덜어 주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합리적인 추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반적 범주, 이 공통 요소는 비교에 의해 간추려지며, 여러 번에 철쳐 갈라지고 다양한 규정들로 흩어지게 된다. 생산에 타당한 규정들 그 자체는 통일에서각각의 본질적인 차이가 잊혀지지 않도록엄밀하게 분류되어야 한다.”(이 책, 1권 53쪽)(요강3,266)

 

다시 말해, 단순한 유물론적범주(, 물질적 생산)로 관념론적 범주(, 순수하며 규정되지 않은 존재)를 대체하는 데 그치게 되면, 맑스는 여전히 불만족스런 상태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짐작한대로 사회적 생산 일반에서 시작하여 그 직접적인 대립물인 소비^ 일반으로 나아가는 순서가 한 걸음 전진하는 데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러한 순서는 비역사적인 추상을 또 다른 추상으로 대체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런 개론적인 것들을 꼼꼼하게 암송하면서 책을 시작하는 평범한(prosaic) 경제학자들이상으로는 결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요강3,266-267)

 

생산과 소비의 동일성문제를 다루는 서설의 일부는 일단 그 표준적인 교과서의 시작을 진지하게 모방한 것이며, 동시에 조롱을 섞어 풍자한 것이기도 하다. 첫 머리를 장식한 생산은 소비와 직접적으로 동일하다는 명제는 헤겔의 존재는 무와 직접적으로 동일하다라는 명제를 흉내낸 것인데, 이 명제에서 보통 무엇이 추출되는가를 비교한다면, 맑스의 논법은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관념론적 변증법이 기계적 유물론이나 경험론적 유물론에 대해 가지는 거대한 우월성이 관념론적 변증법의 표명을 통해 증명된다(레닌: 󰡔철학노트󰡕, 276). 맑스가 처음에, 그리고 나중에 이 ‘동일성들’을 조롱하며 언급했음을 경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주어진 과제가 실재적 관계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들을 조화시킨 변증법인 듯이.”(이 책, 1권 59). 그리고 헤겔에 따라 삼중으로 만든 이 동일성들을 충분히 질질 끌며 논의한 후(이 책, 1권 62-63)에, 맑스는 냉담하게 결론짓는다. “헤겔주의자에게 생산과 소비를 동일한 것으로 정립하는 것만큼 손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짓은 사회주의적인 통속 작가들(belletrist)(프루동주의자들 지칭함)뿐만 아니라 평범한 경제학자들에 의해서도 행해졌다.”(이 책, 1권 63)(요강3,267)

 

적절한 시작의 문제는 서설 가운데 ‘정치경제학의 방법’이라는 제목이 붙은 부분 도처에서 맑스를 사로잡고 있다(이 책, 1권 70-80). 초반부에서 맑스는 정치경제학 연구가 취하는 두 가지 여정 또는 경로를 묘사하고 있다. 첫 번째 경로는 ‘살아있는 통일체’, 예컨대^ 프랑스나 영국 같은 기존의 민족국가를 출발점으로 삼아 “분석을 통해 노동분업, 화폐, 가치 등 얼마 되지 않는 한정적이며,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고나계들을 발견함으로써” 종착점에 다다른다(이 책, 1권 70-71). 또 다른 경로는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즉 단순하고 추상적이며, 일반적인 관계에서 시작해 종국에는 ‘살아 있는 통일체’에 도달하는 거이다. 맑스는 “후자가 과학적으로 올바른 방법임이 분명하다”고 결론 짓는다.(요강3,267-268)

 

여기에서 맑스가 물질적 생산누구나 바랄 수 있는 단순하고 일반적이며 추상적인 관계임이 확실한이라는 범주로 시작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는 이전의 의심이 지금은 잦아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즉시 다른 방향에서 생생한 의문이 떠오른다. , “그렇지만 이런 더욱 단순한 범주들도 보다 구체적인 범주에 앞서서 개별적으로 역사적이거나 자연적인 실존을 지니지 않는가?”(이 책, 172) 다시 말해 만약 누군가가 물질적 생산같은 범주로 논의를 시작할 경우 신석기인과 신석기 도구에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게다가 어렵기는 하겠지만 그의 이런 도정을 차근차근 의도된 주제인 자본주의적 사회 형태에서의 물질적 생산에 알맞은 결론으로 이끌 수는 없다는 말인가? 이 문제에 관한 맑스의 심오한 성찰이 부분은 맑스주의 역사 서술의 기본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은 이런 시작이 잘못일 것이라는 결론으로 그를 이끌어간다. 적절한 시작은 역사의 시원에서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구성체 내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는 범주를 연구하는 데서 출발한다(이 책, 1권 79-80). 맑스가 이렇게 진술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르주아 경제의 범주(와 체계)에 대해 비판하기 위한 적절한 시작은 ‘물질적 생산 일반’이 아니라, 당연히 ‘자본’ 또는 적어도 ‘교환가치의 생산’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요강3,268-269)

 

적절한 시작이라는 문제는 맑스의 서설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가 내용을 요약하는 단락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아직 결론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이 책, 180). 순서는 명백히 (1) 어느 정도 모든 사회 형태에서, 그렇지만 위에서 설명된 의미에서 행해지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규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위에서 설명한 의미란 엄밀히 말해 어느 정도 모든 사회에서 통용되는 범주들이 아니라 출발점을 형성해야 하며, 다른 사회들과 구별되는 특정한 사회를 지배하는 범주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식화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화폐에 관한 장으로 시작하는, 앞뒤가 맞지 않고 잠정적이며, 어떤 점에서는 순전히 우연적인 출발다리몽의 은행 계획에 대한 비판이 이 케케묵은 곤란의 증거가 되고 있다.(요강3,269)

 

적절한 시작−신비주의적인 헤겔과 ‘평범한 경제학자’ 및 맑스 자신의 의구심이 남겨진 출발점−을 찾기 위해서는 󰡔요강󰡕 중 일곱 번째 노트의 마지막 쪽과, “앞으로 가져가야 함”이라는 주석과 함께 ‘(1) 가치’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는 절로 방향을 선회해야 한다. 이 짧은 절이 수고의 전체 내용을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형태로 요약하려는 최초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부르주아적 부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최초의 범주는 상품 범주이다. 상품 그 자체는 두 가지 측면(즉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통일체로 현상한다….”(이 책, 3권 189)(요강3,269)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자본론󰡕 1(1867)의 출발점을 형성하는 것도 바로 이 상품 범주이다. 그 시작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역사적으로 특수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구체적이고^ 물질적이며, 거의 실체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자신의 발전을 통해 이 생산양식의 다른 모든 모순들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핵심적인 반정립(사용가치 대 교환가치)을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다(그리고 그 반정립의 통일체이다). 헤겔의 󰡔논리학󰡕과 달리, 또한 일찍이 맑스 자신이 최초로 시도한 바와도 다르게, 이 시작은 순수하고 비규정적이며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추상 개념에서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규정적이며 경계가 지워진 구체적 통일체수많은 규정들의 통일, 그러므로 다양한 것의 통일”(이 책, 171)에서 출발한다. 요컨대 󰡔요강󰡕의 결말인 이 ‘순수하지 않은’ 시작은, 성숙하지 않은 채로 처음부터 모순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의 출발에 대해 변증법으로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순수한’ (비규정적, 영구적, 절대적, 보편적) 출발은 대립물을 배제하면서 출발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며(그렇지 않다면 순수하지 못할 것이다!), 이에 따라 모든 계기적인 발전과 변형에 대해 나쁜 선례가 되는 진행과정, 즉 자신의 반정립을 ‘무’로부터 주술을 통해 간신히 끌어내게 될 것이다.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시작, 즉 구체적인 것, 규정적인 것, 그러므로 (헤겔 자신이 주장한 것처럼) 모순 그 자체만이 진정으로 변증법적인 시작이 될 수 있으며, 그것만이 헤겔에 의해 완성되고 신비화된 방법에 잠재되어 있는 역량을 현실화할 수 있다.(요강3,269-270)

 

맑스는 󰡔요강󰡕의 서설이 잘못 시작되었다고 인정한다. 이 때가 대략 일 년 반 후인 1859년, 그러니까 인쇄를 하기 위해 「화폐에 관한 장」을 두 번이나 고쳐 쓴 다음이다. 그후에는 연구의 경로가 단순하고 일반적이며 추상적인 관계에서 복잡하고 특수한 통일체로 나아가야 한다는 견해가 더 이상 그에게 ‘명백하게 과학적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나타나지 않게 된다. 󰡔요강󰡕의 서설을 대신할 목적으로 씌어져 상당히 유명해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충 써 두었던 일반적인 서설을 수정하^고 있는데, 심사숙고해 보니 이제부터 증명되어야 할 결론들을 미리 보여주는 일이 산만해 보이는 데다가, 또 기왕에 나를 따르려고 하는 독자는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서서히 올라갈 결심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MEW 13, 7)(요강3,270-271)

 

이제 위에서 말한 두 번째 문제로 가 보자. 이 문제는 관념론 철학자와 유물론 철학자의 변증법적 방법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차이에 의해 나타나는 문제, 즉 동일성의 무매개성(immediacy)이라는 문제이다. 여기에서 이 쟁점은 이렇게 제시된다. 즉, 모든 통일성(동일성, 총체성, 통일체)이 모순적인 극단들이나 측면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는 이 대립물들의 통일이 절대적이고 직접적이며, 무조건적이라고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차라리 통일체를 형성하기 위해 대립물들이 매개를 필요로 하며, 이 매개의 효과성(따라서 통일체의 지속)은 현존하거나 현존하지 않는 일정한 조건들에 의해 좌우된다고 이해해야 하는가?(요강3,271)

 

여기에서 우리는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요구받을 수도 있는 이런 문제에 대한 장구한 철학적 논의를 삼가는 대신, 󰡔요강󰡕의 서설 중의 특정한 구절과 본문의 다른 구절을 대조함으로써, 그것의 경제적, 정치적 중요성의 일부를 제시하는 데 머무를 것이다. 만약 본문 90-94(이 책, 159-64)에서 논증된생산과 소비의 동일성󰡔요강󰡕이 저술된 노트의 본문 가운데 이에 상응하는 지점과 비교해 본다면, 맑스가 서설에서 직접적인 이중성을 고스란히 남겨둔 직접적인 동일성에 관해 역설적으로 언급한 내용이 추구하는 논의의 방향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를 하기 위한 가장 전략적인 출발점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 완성되고 그 결과인 상품들이 자체의 목적인 소비를 통해 유통에 재진입하는 순간이다. 여기에서 대립물로서의 생산과 소비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는, 전 역사에 걸쳐 일반적으로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만 특수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의 통일(실현)은 직접적 통일로 존재하는가? 그 대답은 정확히 반대이다. “우리가 자본의 일반적 개념을 논하는 여기에서 요점은 이러한 생산과 실현의 통일은 직접적이지(unmittelbar) 않고, 일정한 조건들과 연결된 과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이 책, 2권 17)(요강3,271-272)

 

맑스는 본문 중 자본주의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소비의 통일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부분(이 책, 2권 11-81) 가운데 한 곳에서, ‘생산은 소비와 직접적으로 동일하다’는 견해를 명쾌하게 공격한다. 또힌 그는 이 개념이 가장 뛰어난 학자−예컨대 리카도−로 하여금, 과정 중인 총체성은 아니지만, 궁극적인 결과들을 이해하는 심오한 통찰로 이끌었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유치함과 불합리에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보여준다(이 책, 2권 21-60). 우선 첫째, 생산 일반이 아니라, 자본에 기초한 생산에 고유한 제약이 있다.”(이 책, 226) 이 구절은 대립물의 동일성에 대한 유물론적 정식화라고 볼 수 있다. 이 정식화는 이러한 동일성의 직접성과 절대성, 필연성을 부정하는 대신에, 이 동일성이 시공간에서 발생하는 과정이며, 본래 제한적인 데다 사실상 조건이 부여된 물질적 수단들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요강3,272)

 

󰡔요강󰡕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상세히 연구하려면 맑스가 말하는 매개(mediation)에 대해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연구에 필요한^ 풍부한 소재들은 󰡔요강󰡕은 물론 󰡔자본론󰡕 각 권에도 있다.(요강3.272-273)

 

헤겔을 두둔하는 자들은 그도 역시 매개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그가 매개를 다룬 장과 맑스의 화폐 장 사이에 일련의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사실이며, 그 장은 헤겔의 글 중 가장 유물론에 가까운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헤겔이 제기하는 논의의 기본 구조에서 매개는 주체적이거나 절대적이지만, 보통 동시에 두 가지 성격을 다 갖고 있기도 하다.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자. 헤겔은 어느 곳에서 존재와 무의 동일성을 좌우하는 조건들을 지적하고 있는가? 그 모순의 어떤 계기가 비동일성의 가능^성을 담지 하는가? 생성을 매개하는 운동에서 잠재적인 붕괴의 가능성은 무엇을 기초로 해서 주어지는가? 결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기초는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가능성도 없다. 동일성과 매개는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자본론󰡕에서 맑스가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상품을 비교해 보자.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두 대립물의 통일체(동일성)이다. 그 누가 이 동일성의 붕괴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매개 운동(화폐, 교환)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밀인가? 틀림없이 그렇다. 이 저작 전체는 엄밀하게 말해서 이 최초의 동일성에 의존하는 역사적 조건, 경제적 조건, 정치적 조건 등을 제기하고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해 보자. 이 저작의 주요한 목적은, 이러한 동일성 내에 자리하는 모순에 의해 동일한 조건들이 지양된다는 것, 그러므로 상품 생산이 붕괴한다는 것, 나아가 결국 사용가치에 기초하는 생산체계가 등장한다는 것을 논증하는 데 있다. 맑스에게 대립물들의 동일성은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대립물들의 비동일성, 투쟁, 적대, 붕괴는 불가피하다. 헤겔에서는 단지 대립물일 뿐이지만 말이다. 이처럼 회유하고 서로를 조화롭게 하는 헤겔의 변증법’(궁극적으로는 결코 변증법이라고 할 수 없다), 혁명적이고 전족적인 맑스의 방법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요강3,273-274)

 

이러한 방법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헤겔과 맑스의 사유 결과 또한 상이하게 나타난다. 헤겔은 단순한 자기 동일적 존재, 휴지 중인 존재, 무 없는 존재(Being-without-nothing)로 논의를 결말짓는 반면, 맑스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적대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생성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요강3,274)

 

이제 초기에 제기된 특수한 의문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결론을 맺어야겠다. 맑스가 리카도의 이윤론을 전복하는 과정에서 헤겔의 󰡔논^리학󰡕은 어떤 방법으로 이것을 가능하게 하였는가? 더 많은 문제들을 추적하는 데 관심을 가진 독자는 수고의 557쪽(이 책, 2권 194) 이후에서 필요한 해결책을 찾게 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임금과 이윤이라는 대립물들의 동일성(또는 현대인들이 말할 법한 대립물들의 역()상관성)은 리카도가 생각했던 것처럼 절대적이지도 직접적이지도 않지만, 어떤 동요하는 매개들과 언제나 변화하고 있는 외부 조건들에 좌우된다.(요강3,274-275)

 

그러므로 본문의 형태는 처음 다가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일련의 장애물로만 나타난다. 그러나 그 다음의 시도에서는 제거하려던 장벽이 오히려, 맑스의 다른 어떤 저작들이 출판되더라도 이 저작에 필적하지 못할 만큼, 풍부한 시각을 제공하게 된다.(요강3,275)

 

만약 우리가 󰡔요강󰡕을 저자의 의식 작용의 기록으로 읽는다면, 우리는 맑스가 고전적 정치경제학과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동시에 자신의 무기를 연마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역도 성립한다. 다시 말해 그는 불가피한 동일성들이 지닌 신비주의적 방법에 맞서 전투를 수행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본의 본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구조와 방법의 통일은 󰡔요강󰡕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요강3,275)

 

그렇지만 방법과 구조의 통일, 유물론적 변증법과 정치경제학적 명제들의 통일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요강󰡕에서 피력된 것처럼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이지 않다. 이러한 통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원과 결말을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이 저작을 하나의 과정으로, 즉 도약과 퇴행을 반복하는 투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자세는 맑스의 서설에 특히 알맞으리라고 본다. 그 글은 매우 탁월하며 중요하다. 그 글은 맑스가 모든 방면에 걸쳐 헤겔과 리카도, 프루동에 맞서서 벌인 투쟁의 흔적을 반영하고 있다. 맑스는 이것에 근거해 그들 모두에게 가장 중요했던 이론적 대상, 즉 역사 서술의 기본 원리를^ 변증법적으로 전취(戰取)했다. 그러나 그는 당장 자신의 승리를 모든 부분에서 꼼꼼히 완결 짓지는 못했으며, 이는 일부 중요한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헤겔과 리카도의 지양−그들의 학설에서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것을 타파하고, 합리적인 핵심을 보존하는 것−은, 맑스가 쓴 일곱 권의 연구 기록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투쟁의 흔적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경우에서처럼 합리적 핵심은 그것이 출현했던 존재의 여러 가지 양상 중의 일부를 여전히 보존하고 있는 셈이다. 맑스는 수고를 저술하면서 자신의 글에서도 이런 출현의 오점들을 인식했다. 그는 분명히 생산물은 상품이 된다. 상품은 교환가치가 된다. 교환가치는 화폐가 된다.”(이 책, 1130)와 같은 구절들이 관념론적 서술 방식을 나타낸다면서 스스로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 문구들이것은 다른 경우에도 나타난다은 헤겔의 󰡔논리학󰡕에서 유래한다. 󰡔논리학󰡕에서 생성이란 결코 실패하지 않는 매개이고, 정신은 그것을 정립하고사고할 뿐이며, 모순들은 하나이다. 맑스에게 이 문구들은, 전화(transformation)와 관련된 실재적 모순들과 매개들이 향후 자세히 고찰될 것임을 자기 자신에게 강조하는 단편적인 메모와 같다. 그에게 절대적인 것은 그 자체로 조건적이다. 그는 그 조건들은 자본주의적 관계가 인간의 생산력에 부과한 장벽이 깨지고 버려지는 시기에만 존재하며, 그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류가 생성의 절대적인 운동”(이 책, 2112-113)에 진입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요강3,275-276)

 

󰡔요강󰡕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책의 완성 과정과 조건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요강󰡕에서 맑스가 개창한 시각들은 다시 한 번 장벽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요강3,276)

 

󰡔요강󰡕과 헤겔의 탁월한 저서 󰡔논리학󰡕에는 지금까지 이 글에서 언급한 것보다 한층 더 풍부한 방법이 포함되어 있다. 헤겔과 맑스의 대단히 복잡한 관계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어져 왔거나 간결함을 위해 생략됐기 때문이다.(요강3,276-277)

 

맑스는 1857~8년 훨씬 이전에 처음으로 공개된 헤겔의 관한 수고에서 󰡔논리학󰡕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평할 의향이 있음을 공표했으며, 헤겔이 제시하고 사용했던 변증법적 방법의 결점을 추상적으로나마 지적했다. 󰡔요강󰡕은 중요한 이론적 문제들에 적용되는 방법을 변화시키는 동시에 이를 실제로 적용하려던, 최초로 공개된 맑스의 의식적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요강3,277)

 

맑스는 이미 앞서 인용된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논리학󰡕에 대해 언급하면서 “만일 언젠가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다시 돌아온다면, 헤겔이 발견했지만 동시에 신비화한 방법에서 어떤 요소가 합리적인지”를 평이한 문체로 서술해 꼭 인쇄물로 남기고 싶다고 쓰고 있다. 물론 그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맑스도 신비화된 외피와 합리적 핵심에 관해서 1873년 서문 외에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상세히 부연하지 않았다.(요강3,277)

 

󰡔요강󰡕이 씌어진 시기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요강󰡕이 오랫동안 공간(公刊)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물론적 변증법의 지식은 발전해 왔으며, 많은 독자들에게 확산되고 성장했다. 유물론적^ 변증법은 유물론적 변증법 그 자체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맑스의 발전 과정에 대한 논의가 온당하다면, 유물론적 변증법을 매우 보편적인 인류의 획득물로 간주하고, 그것을 연구하고 통달하기 위해서 결코 예외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것을 실제 생활에까지 적용하는 일도 마치 산택을 하는 것처럼 특별하게 인식되 않을 날은 먼 미래에나 가능할 것이다.(요강3,277-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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