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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수-스탈린주의, 역사의 자산인가 먼지인가?

작성자홍승용|작성시간26.06.12|조회수108 목록 댓글 0

2026. 6. 13.일 현대사상 세미나 이건수 선생님 발제문과 발제동영상입니다. 

스탈린주의, 역사의 먼지인가 자산인가?

 

이  건 수

 

스탈린 재평가를 위해서 필요한 자료와 책을 소개함.

스탈린 뿐 아니라 소련 사회주의 전반에 대해 다루었음.

출처는 각주 없어도 알 수 있으므로 각종 자료와 책에서 인용한 문장에 따로 인용 표시를 하지 않았음.

 

Ⅰ. 스탈린 재평가의 필요성

20세기 사회주의를 평가할 때 핵심적인 평가대상이다.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의 기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 서문, “레닌은 단 2개월간 존재했던 빠리꼬뮌에서 영감을 얻으면서 10월 혁명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는 약 70여 년에 걸쳐 존재했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경험이 놓여청 있다. 이 경험, 역사적 성공과 좌절, 실패의 경험을, 단지 패배의 역사로 놓아두는 것 심지어 청산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한 자산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실패한 실천으로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물며 그 정신이 고귀했던 소중한 실천의 경험이라면 더 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그 실패의 원인을 명확하게 지목할 수 있다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진지한 건설자라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회주의의 성과와 한계를 구체적으로 공부하고, 차후 실행을 위한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

개인적 경험 :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이후 민주노총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진실, 우크라이나전쟁 초기에 극심했던 서방의 프로파간다, 식민지를 옹호하는 웨스턴맑시즘과 그 자장 아래 있는 한국의 좌파운동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 한국 사회의 인민들은 한국전쟁 이후 극심한 반공주의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오염된 환경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무리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할지라도 스딸린에 대한 평가에서 있어서는 스스로가 오염된 것은 없는지 되돌아 보아야 한다. 특히 스탈린에 대해서는.

 

 

Ⅱ. 스탈린과 관련해 논란이 되는 쟁점

스탈린 개인 뿐 아니라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논란이기도 하다.

주로 스탈린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아니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쟁점.

 

- 대기근 : 홀로도모르의 진실은?

- 굴라그 : 수용소에 관한 진실은?

- 고려인 강제이주의 배경과 영향

- 개인 숭배와 독재, 관료주의와의 투쟁

- 당원 대숙청의 진실

- 20차 당대회 비밀연설에서 후르쇼프는 거짓말 했나?

- 트로츠키의 비판처럼 진짜 스탈린과 노선 달랐나?

- 일국사회주의와 영구혁명론 검토

- 신경제정책 : 네프를 둘러싼 논쟁

- 독소불가침 조약의 진실

- 카틴숲 학살의 진실

- 얄타야합의 진실, 처칠의 거짓말

- 베를린 장벽에 관한 진실

- 동유럽(헝가리, 체코) 반혁명과 진압에 관한 진실

 

 

Ⅲ. 논란의 시작, 그리고 후루쇼프에 대한 평가

20차 당대회의 비밀연설에서 시작됨.

 

1, 후루쇼프 비밀연설의 내용

- 1956년 2월 25일, 제20차 당대회 비공개회의에서 발표한 연설문의 공식 명칭은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 핵심 연설 내용

①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 :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지나친 신격화와 1인 독재 체제를 강하게 비판. 레닌이 유언장에서 "스탈린은 너무 조폭 같으니 서기장 자리에 두면 안 된다"고 경고했던 내용을 폭로.

② 대숙청과 고문 주장 : 1930년대 후반 벌어진 대숙청(예조프시나) 당시 수많은 무고한 당원들과 군 장성들이 '인민의 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음을 밝힘. 또한, NKVD(소련 내무인민위원회)가 허위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야만적인 고문을 자행했음을 주장.

③ 제2차 세계대전(독소전쟁) 무능론 : 스탈린이 군사적 천재로 미화된 것과 달리, 전쟁 초기 히틀러의 침공 징후를 무시해 막대한 인명 피해를 냈고 지도자로서 무능하고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주장.

④ 소수민족 강제 이주 비판 : 체첸인, 인구시인, 고려인 등 전쟁 중 적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통째로 강제 이주당한 소수민족들의 비극을 언급하며 이를 규탄.

⑤ 그 밖에 고문 전보, 주코프 강등 등

 

 

2. 반응

사회주의 운동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제국주의가 사회주의를 공격하는 데 좋은 먹잇감을 주었음.

- 그러버 퍼 교수는 후루쇼프가 모두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음.(「그로버 퍼 인터뷰」 편집위원회, 『현장과 광장 13호(2025.11)』 )

- 중소논쟁 : 중국 공산당 입장은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자고 주장하며, 그의 공적들이 그의 과실을 압도한다고 봄. 스탈린을 적으로 대하거나 청산주의 입장이 아니라 과오는 지양하고 공적을 살리자고 주장.

- 인도의 단결중심 : 후루쇼프의 주장을 일면 받아들이면서도 스탈린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에 반대하고, 스탈린의 부정적 자질에 근거한 비난이 아니라 공산주의 윤리에 입각해서 사실조사 및 비밀을 해제하고 공개 논쟁할 것을 요구. 전반적으로 상당히 조심하는 기조 속에 완곡하게 자기 주장을 펼침.

 

 

3. 후루쇼프의 노선의 결과:

 

① 스탈린 개인에 대한 비방 : 비열한 인물로 낙인 찍음으로써 스탈린이 행한 모든 것에 대해서 평가절하도록 유도함. 제국주의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서 인격화된 스탈린을 인격적으로 매도한 것임.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의지를 꺽음.

② 평화적 이행론, 기회주의(트로츠키, 베른슈타인, 카우츠키)에 길을 열어주어 사회주의운동의 사상적 혼란을 일으킴.

③ 전인민의 당, 전인민 국가론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무너뜨림.

④ 평화 공존론과 평화적 경쟁론 : 전세계 사회주의를 후퇴시키고 민족해방운동을 봉쇄함. 레닌의 평화공존론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수정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외교정책으로 대체함.

⑤ 2차경제 : 후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경제개혁 결과 2차경제가 성장하면서, 자본주의로 후퇴하는 물질적 기초를 닦음.

 

4. 의문

후루쇼프에 대해서 수정주의라는 평가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복권되지 않나?

 

 

Ⅳ. 토니 클리프, ‘국가자본주의론’ 비판

: 노경덕(서평), 문영찬(『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

 

1. 노경덕 서평, 토니 클리프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 국가자본주의론의 분석』

클리프의 방법론 두 가지 : ① 소련 체제에 관한 실증적 관찰을 통해 : 노동자(및 농민) 지위의 하락, 당의 비민주와화 더불어 목격되는 관료제 대두 때문에 국가자본주의라고 판단 ② 이론적 논증을 통해 : 유통영역 및 생산영역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이 단순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인 것은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관료들은 국가를 소유한 채 자본축적 과정을 통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통영역 : 소련은 모종의 사용가치를 위한 생산을 지향한다는 면에서 교환가치를 위한 생산만을 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구분되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제국주의 국가와의 무기경쟁에 의해서 무계획적 세계시장의 교환가치법칙에 의해 소련 경제가 조정되므로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 하에 있는 셈이라고 주장함.

생산영역 : 첫 번째 그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가 강화되면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두 번째 논거로 그는 1929년 이후의 소련 관료층이 국가기구를 통해 생산수단을 사실상 독점하며, 과거 서유럽 부르주아와 같은 역사적 사명, 즉 자본축적을 위해 노동계급을 착취하였다고 주장한다.

 

소련 체제에 관한 실증적 관찰에 대한 반박 : 첫째, 스탈린 시대 소련이 “진정한” 사회주의로부터 “후퇴”했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될지는 몰라도,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였다는 그의 테제를 증명하는 데 아직 충분한 것은 아니다. 둘째, 그가 사용한 자료의 문제점이다. 법령, 신문, 연설 등 공식자료들의 경우 당대의 맥락을 생략한 채 단편적으로 해석하는 동시에, 자신의 주장 입증을 위해 매우 선택적으로만 가져다 사용하였다. 비공식자료의 경우 소련 출신 서방 망명자들의 기록과 회고, 그리고 빈약한 사료들에 기초하고 있는 일부 서방 학자들의 2차 연구서들이었는데, 1990년대 중반 이후 개방된 소련 문서고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연구서들이 밝혀낸 소련의 사회경제 및 정치 영역의 모습은 클리프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셋째, 그는 스탈린 시대 소련 체제의 단면을 정태적으로 묘사ㆍ분석하는데 치중한 나머지, 이 체제의 “후퇴”가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왜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한 역사적인 탐구는 시도하지 않았다. 표면적이고 부분적인 현상만 바라보았을 뿐 아니라 매우 선택적인 증거들을 통해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이론적 논증에 대한 반박 : 첫째,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문제점은 그의 자본주의 개념의 자의적인 사용이다. 자본주의 개념의 핵심은 생산수단에 대한 정치적 권력관계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사적” 소유에 있다. 관료가 만약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집단이라면, 이들은 공장 설비나 토지 등을 배타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하고 있다는 의미일텐데, 소련 시대 관료가 생산수단에 대해 이런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 대한 감독권 정도였다. 그의 저서에서 보여준 증거들도 모두 이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없다. 소련의 민주성이나 비민주성을 가늠해보는 잣대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체제에 대한 사회구성체적 성격을 증명하는 논거가 될 수는 없다.

 

이론적 논증 중 노경덕이 다루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반박하면 다음과 같다.

 

- 유통영역에 관해서 보면, 소련에서 무기생산은 일부 판매되기도 하지만 주로 대부분 제국주의 국가로부터의 공격을 막기 위한 비생산적 소비였다. 자본주의 생산의 목적은 잉여가치를 위한 생산인데, 소련이 제국주의 국가와의 무기경쟁을 벌임으로써 세계시장의 교환가치법칙에 휘말리고, 이로 인해서 소련 경제가 조정된 적이 없었다. 무기경쟁은 화력경쟁이었지 상품경쟁도 아니었다.

생산영역에 관해서 보면, 클리프에 따르면 노동자가 생산수단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하고 관료가 자본가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만일 관료가 자본가라면 관료 간의 경쟁을 통해서 경쟁력을 상실한 관료의 파산이 이뤄지고 독점적 관료가 존재해야 한다. 또한 관료가 자본가 계급이라면 관료적 위치와 지배가 상속을 통해 자식에게 상속되었나?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모습은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은 자본주의 사회의 국유와 사회주의 사회의 국유의 차이점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에서 국유는 국가에 의한 배타적 독점적 소유이지만, 사회주의에서 국유는 전인민의 소유이며 국가에서 차지하는 노동자의 위상, 관료기구의 선출, 그 소유의 행사에 있어서 노동자의 참여 및 민주주의 등 실질적 내용에 있어서도 천지 차이다.

 

 

2. 문영찬,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 - 토니 클리프 국가자본주의

과학적 엄밀성을 찾아볼 수 없고,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함.

관료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설정하여, 그들이 인민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기초로 소련 사회전체를 착취와 수탈이 존재하는 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소련에서 관료는 지배계급인가? 계급의 본질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지 여부다. 공장장이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는 것과 공장을 소유했는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클리프는 국유기업의 소유자는 국가지만, 관료가 국가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관료가 지배계급이라는 논지다. 논리적 허점부터 짚어보면, 이때 관료가 소유하고 있다는 국가는 부르주아국가라는 전제가 성립해야 관료는 지배계급일 수 있다. 그러나 클리프는 소련이 부르주아국가라고 증명한 바 없다. 증명해야 할 사항을 증명의 전제로 사용하고 있다. 첫째, 관료층이 생산관계에 있어서 소유했는지 여부를 증명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식들에게 소유보다 더 중요한 연줄을 물려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 클리프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유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에 의한 배타적 독점적 소유와 사회주의 사회의 전인민의 소유는 전혀 다르다. 셋째, 트로쯔끼의 관료주의 문제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심화시킨 것이다. 레닌은 관료주의의 해악을 극복하는 데는 수 십년이 걸릴 것이라면서 반관료주의 강령을 채택함으로써 하룻밤에 관료주의 관행을 없앨 수는 없다고 말했다. 관료주의가 극복되기 위해서는 인민들의 문화적, 정치적 수준이 높아져서 인민 스스로가 행정에 참여하는 정도가 높아지는 장기적인 과정이 필요하다고 접근한 데 반해 트로쯔끼는 관료주의를 정치혁명의 방식으로 타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소련에서 노동력은 상품이었나? 상품이라면 반드시 존재해야 할 노동시장에 대해서 침묵하고 그 존재를 증명하지 못했다. 그는 소련에서 상품생산과 교환의 법칙인 가치법칙이 소련에서는 관철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그가 소련의 경제와 사회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소련에서 생산수단은 상품이 아니었지만, 소비재와 협동조합의 농산물은 화폐를 통하여 소비자에게 교환을 통해서 이전되었다. 즉, 소련은 자본임노동 의 착취관가 폐지되어 계획경제를 실행했지만, 상품화폐 관계가 부분적 보조적으로 존재했다. 이는 사회주의의 과도기적 성격상 불가피하다.

가치법칙에 대한 왜곡된 이해 : 클리프는 소련에서 내부적으로는 가치법칙 존재하지 않는다면서도 소련 경제가 세계시장과 경쟁하면서 특히 군비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율이 증가하고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예속 심화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가치법칙이 관철된다고 주장한다. 맑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피상적이 이해다. 가치법칙은 상품이 등가교환을 규정하는 법칙이고, 가치법칙이 관철된다는 것은 상품생산 사회라는 것이다. 상품생산은 노예제 사회에도 봉건제 사회에도 부분적으로 존재했고 사회주의에서도 부분적으로 존재한다.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은 가치법칙이 아니라 잉여가치법칙이고, 그 규정적 동력은 이윤추구를 위해 잉여가치를 착취하여 자본으로 전화시키고 자본축적과 확대재생산을 도모한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에서 경제의 조정자는 계획이고, 가치법칙은 계획을 보조하는 부차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의 경제적 토대, 사회주의 생산관계에 대한 왜곡 : ① 공장장 1인체제 : 경영분야에 한정되었고, 임금 및 근로조건은 노조의 통제를 받았고 임명과정 및 공장에 대한 정치적 통제는 당, 소비에트, 노조의 역할이 지배적이었다 ② 임금 결정 : 1차5개년 계획이 실시되기 전에는 노사합의로 경정되었지만, 계획경제가 실시되면서는 계획에 포함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조의 의견을 반영하여 결정하며, 실제로 계획 실시 이후 임금은 상승하였다. ③ 공장장의 기금문제 : 공장기금이 공장장 개인의 자금으로 호도하고 있으나, 개별 국유기업의 노동자들의 의욕을 제고하고 복지를 증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④ 거래세 : 소비자가 부담하기 때문에 국가에 의한 인민대중 수탈로 묘사하고 있으나, 상품화폐 관계를 의식적으로 조절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하셔 생산수단에는 가각을 낮게 책정하고, 소비재에는 가치법칙을 적용하여 등가교환을 한 것이다. ⑤ 계획개념에 대한 무지 : 계획은 상명하달이 아니라 피드백과 토론을 거쳐서 결정된다. ⑥ 소비사회주의 원시적 축적 :

소련이 상부구조, 정치적 성격에 대한 왜곡 : ⑦ 테일러주의와 생산력 발전에 대해 : 기술발전과 생산력 발전은 그 주인이 누구냐가 중요하다. ⑧ 노동규율 : 전쟁이 임박한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 강제노동처럼 묘사한다. ⑨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 : 협동조합적 소유과 집단적 소유에 대한 이해에 무지하다는 것을 의미. ⑩ 횡령에 대한 처벌 : 전 인민 재산, 국유재산을 침핻한 자에 대한 처벌을 재산에 대한 인간의 종속 사례로 들고 있다. 횡령한 자를 처벌하지 말라는 것이다. ⑪ 군대 : 소련에 민병대를 넘어서는 정규군이 존재하기 때문에 노동자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도구다. 내전과 제국주의 침략을 방어하지 말라는 주장이다. ⑫ 유고 문제 : 유고의 티토를 스탈린에 대한 반기를 든 덧을 환영한다. 티토가 그리스 점령자인 영국을 위해서 국경을 봉쇄하여 그리스 인민게 타격을 준 점, 미제국주의와 군사동맹을 뱆고 마대한 군사원조를 받은 점, 한국전쟁에서 미제국주의를지지하고, 베트남전에서 미제국주의를 지지한 점을 언급하지 않는다. 티토는 자유를 위한 투사로 미화할 뿐이다.

 

 

3. 트로츠키 주장의 진실성

- 노경덕 교수는 소련 문서고(트로츠키의 연설, 성명, 공개서한, 신문기사, 중앙위원회 회의록)를 바탕으로, 권력투쟁 과정에서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각각 내세웠던 이념과 경제정책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함.

 

- 둘 모두 당의 독재 강화와 사회주의 건설을 지상 목표로 설정하면서,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공업화를 최우선에 상정했다. 둘 모두 신경제정책 덕에 부활한 소련 경제에서의 자본주의 요소, 즉 부농(쿨락)과 자영업자의 성장을 경계하려 했다. 그들 논의는 공업화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 문제에 집중되었는데 둘 모두 신경제정책의 대원칙, 즉 농업과 공업의 동맹을 깨뜨리려는 의도, 즉 농촌의 잉여 징발을 통해 공업화를 이루려는 의도는 적어도 1920년대 중반까지 없었다. 따라서 스탈린과 트로츠키 진영의 차이는 실제로 공업화에 재원을 얼마나 더 부여하느냐의 정도 문제에 불과했다. 양자가 주장한 이 ‘정도’들은 1920년대 중엽의 경제 상황 및 국제 환경의 변동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신축적인 것이었기에, 특정 맥락에서 그것은 같아지기도, 또는 뒤바뀌기도 했다. “4년여에 걸친 이 논의의 결말을 최종적으로 결정지은 것은 유럽에서의 파시즘의 성장과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새로운 군사적 침략 가능성의 증대에 대한 당 지도부의 깊은 불안이었다. 논쟁의 초기단계, 즉 외국으로부터 침략의 위험성이 보다 덜 현실적이었던 시기에는 당 지도부는 부하린의 모델로 기울어 좌파의 모델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 위험성이 증대함에 따라서 국내의 자원에 의해서 국가를 공업화해야 할 필요성이 갈수록 절실해졌다. 1928년 마침내 당중앙위원회는 부하린과 그 추종자들의 견해를 우익망상이라고 규정하고 급속한 공업화모델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 특히, 1925년 초까지는 그 범위 내에서의 구체적 정책 논쟁조차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기 이미, 볼셰비키 지도부 내의 권력투쟁은 달아오를 만큼 달아 올라 있었지만 말이다. 그나마 이념과 경제정책 논쟁이 수면 위로 떠올 랐던 것은 1925년 봄, 부하린의 ‘부자가 되시오’ 발언 이후였다. 하지만 이 역시도 신경제정책의 대전제를 넘어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 기존의 연구들은 이러한 그들 주장의 유연성을 무시하고, 트로츠키와 스탈린(및 부하린) 이념의 좌우편향성 만을 부각함으로써, 1920년대 소련 중앙 권력투쟁의 본질적 성격에 다가갈 수 없었고 궁극적으로는 향후 스탈린의 집권과 급진 좌파 정책으로의 귀결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노경덕은 좌우파 간 경제 이념 차이의 미미함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그들 투쟁의 핵심은 스탈린의 당 기구 장악과 그에 따른 트로츠키(및 이후 통합반대파)의 소외 문제, 즉 정치적인 문제였다고 분석함. 매우 치열해 보여 많은 학자들의 시선을 빼앗았던 이들 간의 이념 및 경제정책 논쟁은 사실 이 같은 정치 쟁점을 포장하는 수사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노선투쟁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이 생기게 된 것에는 트로쯔끼 자신의 영향이 컸다. 그는 소련에서 추방된 후부터 자신이 1920년 대 펼쳤던 사회주의 건설론, 특히 공업화론을 반대 진영, 즉 스탈린과 부하린의 이론 및 정책과 뚜렷이 대조하며, 전자를 일관적으로 “혁명적”인 것으로, 후자를 “반동적”, “테르미도르”, “관료주의적 타락”으로 규정했다. 이후 트로츠키 경외자자였던 도이처의 걸출한 전기 두 편은 그의 시각을 지지하며 이후 이 주제 연구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 한편, 부하린의 이론을 트로츠키와 프레오브라젠스키로 대표되는 좌파 공업화론에 반대 하는 온건주의, 즉 우파 사회주의 건설론으로 개념화했던 일부 정치사 연구들 역시 이런 흐름의 형성에 일조했다.

- 또한, 대부분의 기존 연구에서 스탈린은 좌파와 우파 이념 사이를 오가면서 정치적 이득을 누리고 궁극적으로 권력을 획득한 정략적 인물로 묘사된다. 우파의 이데올로기를 이용해서 좌파를 물리쳤던 스탈린이 다시 좌파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남아있던 우파를 물리치고 그의 충직한 수하들과 함께 홀로 정권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스탈린-트로츠키 간 권력투쟁에서 일관적이었던 것은 당원 인사를 장악했다고 믿어지는 스탈린의 권력 독점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었다. 일견 치열해보였던 경제 논쟁은 이 핵심 문제에 달려들기 위해 동원된 수사들에 가까웠다.

 

 

Ⅴ. 스탈린의 공과(중국 공산당의 평가)

- 스딸린의 공적과 실수들은 역사적이고 객관적 현실의 문제이다.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그의 공적들이 그의 과실을 압도한다. 그는 일차적으로 올바랐고 그의 과실들은 이차적이다.

- 레닌 생존 시 스딸린은 짜리즘과 싸웠고 맑스주의를 전파했다.

- 레닌이 이끄는 볼쉐비끼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이 된 후에는 그는 1917년 혁명의 길을 닦기 위한 투쟁에 참가했으며,

- 10월 혁명 후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과들을 방어하기 싸웠다.

- 레닌 사후 스딸린은, 쏘련공산당과 쏘비에뜨 인민을 이끌고, 내부 및 외부의 적들과 단호히 투쟁했으며,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수호하고 공고히 했다.

- 스딸린은, 쏘련공산당과 쏘비에뜨 인민을 이끌고, 사회주의적 공업화와 농업집단화 노선을 떠받쳤으며, 사회주의적 변화와 사회주의의 건설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 스딸린은, 쏘련공산당과 쏘비에뜨 인민, 쏘비에뜨 군대를 이끌고, 불요불굴의 격렬한 싸움을 하여 ()파쇼 전쟁을 위대한 승리로 이끌었다.

- 스딸린은 다양한 종류의 기회주의에 맞서서, 레닌주의의 적들인 뜨로츠끼파들, 지노비에프파들, 부하린파들과 다른 부르주아의 앞잡이들에 맞서서 맑스-레닌주의를 방어하고 발전시켰다.

- 스딸린은 불멸의 맑스-레닌주의 저작들인 많은 이론적인 저작들을 집필하면서, 국제 공산주의운동에 지울 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 스딸린은 전체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견지하면서, 중국 인민들을 포함한 세계 모든 인민들의 혁명적인 투쟁을 크게 돕는 외교정책을 추구하면서, 쏘비에트 당과 정부를 지도하였다.

- 스딸린은 그 투쟁을 지도하면서, 역사의 흐름에서 전면에 서 있었고, 제국주의자들과 모든 반동세력들의 타협할 수 없는 적이었다.

- 스딸린의 활동은 위대한 쏘련공산당과 위대한 쏘련 인민들의 투쟁들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고, 전 세계 인민들의 혁명적인 투쟁과 분리될 수가 없다.

- 스딸린의 삶은 위대한 맑스-레닌주의자의 삶이자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의 삶이었다.

- 그러므로 스딸린의 오류들이 정확하게 평가되고, 비판되고 그리고 극복되기 위해서는, 스딸린의 생애에서 일차적이었던 것을 수호하는 것, 그가 방어했고 발전시켰던 맑스-레닌주의를 수호하는 것이 필요하다.

 

 

Ⅵ. 소련의 붕괴 원인

 

1. 키란과 케니의 소련 몰락 6가지 요인

: 「그로버 퍼 인터뷰」 중에서 키란, 케니의 『배반당한 사회주의』 요약.

 

① 사회주의 근본 결함은 없었다는 이론 : 1980년대에 겉으로 보기에는 위기 국면이 없었고, 별 중요해보이지 않는 문제로 무너졌다. 어떤 근본적 결함인지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

② 인민의 반대 때문에 파멸했다 : 인민의 불만족은 고르바초프의 개혁 때문이었다.

③ 외적 요인 : 외부의 반응에 고르바초프가 특별한 반응을 보인 것이 문제였다.

④ 관료주의적 반혁명 : 위로부터의 혁명에 의해 관료주의가 새롭게 형성된 계급을 변해갔다는 이론. 카린과 키니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며 2차경제가 원인이라고 주장함.

⑤ 민주주의 결여와 과도한 중앙집중주의 :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구별 못하는 것.

⑥ 고르바초프 요인 : 고르바초프는 단 하나의 요인이 아니라 어떤 전통의 일부. 소련 붕괴는 혁명 속에 내재해 있던 어떤 경향의 승리다. 즉, 소련 농민의 특성과 2차경제가 그것이다.

 

: 키란과 케니는 이 책에서 소련 몰락의 원인으로 2가지 요인을 지목함.(「그로버 퍼 인터뷰」 중에서)

 

- 러시아의 어떤 경향의 승리, 즉 농민의 특성에서 시작해서 2차경제에서 유래

- ‘부하린과 후르쇼프의 전통’ + ‘2차경제의 소부르지아 탄생’ 의 결합 산물로 봄

- 결국 당이 원칙 지키지 못한 것

 

2. 바만 아자드,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1) 사회주의의 위기를 초래한 객관적 · 외부적 요인

급속한 공업화모델(1928-1945년) : 차등임금제 등 물질적 유인을 위한 공헌보상 원리, 공업화를 위한 농업 희생, 부농의 저항을 막기 위한 급속한 농업집산화 및 억압으로 노농동맹 약화, 숙청으로 인한 당내 민주주의 훼손, 급속한 공업화를 위한 당과 국가의 일체화로 관료주의 성장.

파시즘 침략의 파괴적 영향 : 사회주의 건설 10년 후퇴, 또 다시 급속한 공업화모델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상황,

냉전과 군비경쟁 : 동유럽 등 반사회주의 책동, 식민지해방운동 원조, 군비경쟁에 의해서 강제된 거액의 비용으로 경제성장 감속

 

(2) 사회주의의 위기를 초래한 주체적 · 내부적 요인

50년대 개혁의 필요성 : 공업화를 위해 농업 희생한 결과 농촌 노동자와 도시 노동자의 생활수준 격차 심각, 장기간 중공업에 중점을 두어 경공업과 소비재 산업 경시로 소비물자 부족, 양적 성장 치중한 결과 질적 성장과 관리 필요한 단계, 농업 희생으로 노농단결이 타격 받은 상황, 계획의 성장과 급속한 공업화로 관료주의 성장, 당과 국가의 일체화로 당원의 관료화

잘못된 진단 : 집단지도 및 민주집중제 원칙의 붕괴, 국가기관 내 관료제의 성장, 출세주의, 당 간부와 지도부에 의한 권력 및 지위의 남용, 사회 전체에 걸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춴칙 위반과 같은 모든 현상의 원인을 단순히 스탈린 ‘개인숭배’ 탓으로 돌렸다. 특히 국가와 당 조직 사이의 경계선이 모호해진 것, 당 자체 내부에 관료주의가 성장한 것과 관련하여 그 구조적 뿌리를 찾아내려는 어떤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급속한 소비성장 모델’ : ① 임금 특히 농업부문의 임금 수준을 급격히 인상하였으나, 그에 상응하여 소비재 생산도 증가하지 않음. 이 결과 노동에 대한 물질적 자극을 약화시켰을 뿐 아니라, 기존의 재화에 대한 암시장을 조장하였음. 이로 인해 정부 관료, 특히 소비재의 분배를 책임진 관료들 사이에 부패와 뇌물에 기반한 지하경제 창출함으로써 대중이 공산당으로부터 이반해가는 시발점이 됨. ② 20차 당대회 이후 임금 격차를 없애고 임금을 균일화시킴.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 농업 내부의 임금 격차, 농업과 비농업 사이의 임금격차가 모두 사라짐으로써 생산증가율 저하와 과학기술 및 경제현대화 방해,

‘발달한 사회주의 모델’과 정치적 위기의 배경 : 수입에 의존한 소비, 자본주의 성장과 단순비교한 경제적 성과, 핵과 인공위성 등 과학기술 성과 등 착시효과로 사회주의의 성과에 대한 주관주의적 과장이 자리잡았다. 1959년 21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의 승리에 기초하여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난 결과” 소련이 “새로운 발전의 시기인 공산주의 사회의 전면적 건설기에 들어갔다”고 결론지었다. 그 결과 이전의 모델에서는 소비를 강조하긴 했지만 생산의 증대가 경제계획의 첫번째 목표였는데, 22차 당대회(1961)에서는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을 최우선 목표로 채택함.

이 결과 ① 소비재가 질과 양 두 측면에서 모두 기존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임금을 더욱 올리고 물가를 내린 결과 암시장이 더욱 성장하고 지하경제가 확대되었다. ② 일용품의 소매가격의 인하는 소비재에 대한 정부보조금의 증액, 즉 개인소비 영역에서의 국가지출의 증액을 의미했는데, 이는 ‘공적소비기금의 증대’라는 표명된 목표와 명백히 모순되는 정책이었다. ③ ‘주민에 대한 세금의 폐지’는 사람들의 가처분소득을 더욱 증액시킴으로써 첫 번째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을 뿐 아니라, 정부의 세입을 감소시켰다. ④ 가장 중요한 것인데, 임금차이가 축소된 상황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공적소비기금의 증대’를 고집하는 것은 유용노동의 양을 고려하지 않고 물질적 복리를 누구에게나 보증하려는 것이고, 이에 따라 생산증대를 위한 물질적 자극을 더욱 파괴하였다. 이에 따라 물질적 자극 대신 공산주의적 도덕적 동기에 의한 생산증대를 강조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노동에 대한 무관심과 나태한 태도 및 기생성을 조장하였고, 마침내는 경제성장률 저하를 초래하였다. 70년대의 침체는 22차 당대회의 주관주의적 평가의 직접적 결과였다.

전체 인민의 국가, 전체 인민의 당 : 22차 당대회에서 ‘공산주의 건설’의 개시가 선언됨으로써 정치적 상부구조에도 중대하고도 심각한 변화가 뒤따랐다. 이 문제는 국가의 성격과 역할, 노동자계급과 국가의 관계에 관련하여 결정적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역사적 사명을 다했으므로, 국가는 전체 인민의 국가, 전체 인민의 이익과 의지를 표현하는 기관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명백히 사회주의 이론과 운동으로부터 일탈하고 현존하는 계급관계를 무시한 것이었다. 이러한 잘못된 평가의 뿌리는 관료 및 테크노그라트가 성장하고 차츰 강화된 데서 찾아야 하는데, 이 결과 당과 국가의 관계가 역전되고 사실상 국가가 당을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2차 당대회는 관료층의 사고방식이 사회주의의 정치구조를 지배하게 된 명확한 증표이자 소련의 사회주의 발전과정에서 주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아닐 수 없다. 22차 당대회에서는 소련공산당 강령과 규약도 개정하였는데, 당원 자격 기준에서 노동자 계급성을 탈각시킨 것이다. 그 결과 당원 구성에서 노동자, 농민의 비중이 줄고 지식인과 관료의 비율이 절반 이상 차지하고 당내에 관료와 출세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계혁명 : 22차 당대회에서는 또한 제국주의에 대한 승리선언과 함께 자본주의가 전반적 위기의 제3단계에 들어갔다며, 그 완전파괴를 주장하였다. 사회주의의 경제력을 이렇게 과도하게 낙관적으로 평가하고, 경제와 과학기술면에서 자본주의의 거대한 능력을 무시함으로써, 한편으로는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많은 비용이 들고 파괴적인 군비확장 경쟁에 끌려들어갔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거액의 경제적 군사적 국제지원을 떠맡게 되었다.

결과 : 70년대의 침체 후, 80년대에 개혁을 위한 안드로포프의 제안이 있었고, 86년 당대회에서 그의 제안이 ‘뻬레스트로이카’로 알려진 구조개혁의 기초가 되었으나, 20차 당대회(1956년)에 제기되었어야 할 너무 늦은 개혁이었다.

 

문영찬은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에서 브레즈네프를 후루쇼프 수정주의의 연속으로 보고 있다. 후루쇼프가 ‘리베르만 제안’을 통해서 사회주의 기업의 설비와 인원을 자본으로 간주하고 최대한의 이윤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국유기업을 운영해야 한다고 이론적 시도를 했다면, 브레즈네프는 1965년에 ‘꼬씌긴 개혁’을 실시하여 경제를 이윤 중심으로 운영하는 새로운 체제, 이른바 ‘신경제 체제’를 수립하기 시작하여 1972년에 소련 경제를 이윤 중심의 ‘신경제체제’로 이행을 마무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리베르만 제안’은 ‘꼬씌긴 개혁’의 이론적 원형으로서, 품목별 생산총량과 국가에 대한 이윤상납액을 빼고는, 소련의 국유기업에게서 국가로부터의 지령적 계획에 따른 구속을 제거하여 기업 자율로 경영계획을 수립하고 수행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이 구상은 개별 국유기업을 이윤추구를 중심에 놓는 기업으로 전환시키자는 것이다. ‘꼬씌긴 개혁’은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물 모두를 상품으로 간주하는 이론적 전환을 대로 하는 것이며, 이러한 전환은 사실상 국가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시작한 것이었다고 본다. ‘꼬씌긴 개혁’의 자본주의 요소를 보면, ① 생산기금(고정기금과 유동기금의 합으로 기계,설비,원료,임금 등) 무상제공의 폐지 : 국유기업은 은행대출을 받아 생산기금을 충당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자본으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② 국유기업으로부터 고정기금 사용료 징수 : 고정기금이 자기 증식하는 자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유동기금 사용료 징수 : 노동자가 피용자로, 임금노동자로 전락한다는 의미이다. ③ 이에 따라 기업이 이윤추구를 1차적 목적으로 삼게 되고, 소련 사회에서 생산력 발전의 동력과 그 기준은 개별기업의 이윤추구 욕구에 맡겨지고 중앙의 계획은 무력화의 길을 걸었다.

 

 

3. 소결

- 사회주의가 최종목표는 아니다.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할 정도로 계급투쟁이 필요한 체제이며, 언제든 자본주의로 후퇴할 수 있는 이행기 체제다. 이런 근본조건 속에서 외부 제국주의의 간섭과 공작은 상수이므로 소련의 후퇴원인을 외부요인으로 돌릴 수 없다. 결국 내부문제가 근원.

- 일국사회주의와 러시아의 후진성을 감안했을 때 관료주의와 2차경제의 위험성은 예상되었고, 스탈린도 근절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 일국사회주의는 ‘자본가가 했던 걸 우리가 한다’는 입장인데, 결국 폭탄을 안고 가는 셈이다. 러시아 특유의 사회적, 역사적 한계가 있었지만, 당이 얼마나 원칙을 굳건히 지키는가가 관건인 셈.

- 대중에 대한 차별임금제 실시하더라도 공산당 내부의 불평등 용인은 잘못.

- 중국공산당은 자본가 당원 인정하며,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으로 이를 정당화.

마오의 모순론에 따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도시와 농촌 간의 모순에 대해서 신중하게 대응방법을 연구할 필요성 있다.

 

* 참고자료

○ 배움터 세계노동운동사 특강,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 그 진실과 왜곡」 노경덕, 2010년

○ 스탈린-트로츠키 권력투쟁 재고 : 좌우파의 경제 이념과 관련하여, 1923-2927, 노경덕, 2011년

○ 서평, 토니 클리프, 정성진 옮김,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 국가자본주의론의 분석』 (책갈피, 2011) 196pp. 노경덕

○ 소련은 어떻게 악마가 되었나 [인문견문록] 마리오 소사의 <진실이 밝혀지다> 김창훈 민족미래연구소 연구실장 | 프레시안, 2019.06.22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45981

○ 「스딸린 문제에 관하여 -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공개서한에 대한 두 번째 논평」 (‘인민일보’와 ‘홍기’ 편집부, 1963.9.13.)

○ 「스딸린에 반대하여 쏘련공산당이 취한 조치들에 대하여 - 흐루쇼프 동지와 해외의 다른 동지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스브다시 고쉬(인도사회주의자단결중심 중앙위원회 서기장) 1962년

○ 「스탈린 바로 알기 1」 김남기, 『현장과 광장 13호(2025.11)』

○ 「그로버 퍼 인터뷰」 편집위원회, 『현장과 광장 13호(2025.11)』

○ 「사회주의에 관한 진실, 제3부 : 역사왜곡에 대하여」 그리스 청년공산주의자(KNE) 중앙위원회, 『현장과 광장 13호(2025.11)』

○ 「수정주의와 쏘련의 붕괴」 하르팔 브라르, 『현장과 광장 13호(2025.11)』

○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바만 아자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 문영찬, 노동사회과학연구소

○ 「20세기 사회주의에서 수정주의의 발전」 문영찬, 노동사회과학연구소

○ 「쏘련 사회주의의 흥망과 스탈린」 문영찬, 노동사회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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