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20. 현대사상 세미나 (현대 맑스주의1) 손호만선생님 발제문과 발제동영상입니다.
조선공산당의 항일투쟁과 현재적 의미
손호만 대구결집 교육위원
목 차
- 들어가는 글
1. 사회주의의 수용 과정
(1) 3.1운동 패배의 원인
(2) 3.1운동이 미친 영향
(3) 식민지 자본주의가 낳은 민중 현실
(4) 왜 공산주의당이었을까?
2. 조선공산당의 창당 과정
(1) 사상 단체의 난립과 통합 노력 (1920~1924)
(2) 비밀 건당 전람회와 창당 (1925년 4월 17일)
(3) 초기 조직 구성과 인사
(4) 코민테른의 정식 승인 (1925년 5월)
3. 조선공산당의 항일투쟁
(1) 6·10 만세운동 주도 (1926년)
(2) 민족협동전선 '신간회' 창립 주도 (1927년)
(3) 노동자·농민 대중 투쟁의 조직화
(4) 여성 및 청년 운동의 다각화
(5) 활동 방식의 대전환 - 1930년대 '비합법 혁명적 조합 운동'
4. 탄압과 해체 (제1차~4차 조선공산당)
5.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특징
6. 조선공산당 항일투쟁의 현재적 의미
- 참고 자료
- 참고 문헌
- 들어가는 글
해방 후 전국을 휩쓸었던 ‘10월항쟁’은 육십 년이 지나서야 조금씩 봉인이 풀리기 시작했다. 봉인은 조금씩만 풀렸다. 국가보안법으로 협박하는 국가폭력 앞에 맨몸으로 저항하는 그 ‘목소리의 크기’만큼만 풀렸다. 유족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우리를 눈물 나고, 화나고 부끄럽게 했다. 1980년대 숨죽여 보던 ‘80년 광주 비디오’의 충격과는 또 다른 충격들이 밀려왔다. 평생을 이곳 대구에서 살면서 대체 이 기막힌 이야기들을 왜 몰랐단 말인가. 한때 대구가 ‘제2의 모스크바’라 불렸다는 데도 말이다.
작년 가을 이곳 대구에서 조선공산당에 관한 강연회가 개최되었다. 창립 100주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개최된 행사였다. 더불어 안동지역 사회주의 항일투사들의 유적들을 답사하는 행사도 있었다. 행사를 준비하고 공부하면서 크고 작은 충격들이 다가왔다. 10월항쟁의 진실을 처음 알게 될 때 그랬던 것처럼, 조공은 내게 착잡한 감정과 함께 새롭게 다가왔다. 10월항쟁을 공부하면서 당연히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야 조공에 관한 공부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가 밀려왔다. 여전히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조공을 중심으로 학습하고 토론할 생각을 갖지 못했다. 철제관에 갖혀 있는 그 진실들을 전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일찍이 민족 해방과 평등 사회 건설을 위해 헌신했건만, 조공의 선배열사들은 아직도 남에서도 북에서도 철저히 소외되어있다.
‘조선공산당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냐’ 의문이 드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변혁운동을 처음 접하는 말벌동지들의 경우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100년 전에 작성된 조선공산당 선언(참고자료 참조)을 읽다보면 적잖이 놀랄 것이다. 윤석열 퇴진투쟁의 광장에서 낭송되었던 평등수칙과 유사한 문구들이 그 선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말벌동지들은 성소수자권리에 관한 이야기를 제일로 좋아한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것, 누구도 차별 받거나 배제되지 않는 것에 대해 깊게 공감하고 박수를 보낸다. 특히 남태령투쟁 이후에는, 단순히 지지연대를 보내는 수준을 넘어 투쟁의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
지금 이땅에는 국내외 독점자본의 초과이윤을 보장하기 위한 각종 제도와 정책 때문에 젊은이들이 매우 큰 고통을 받고 있다. 넘쳐나는 실업자, 일상적인 해고와 고용불안, 최소한의 권리마저 빼앗으려는 근로기준법 무력화 시도들, 쪼개기 계약들, 무한 경쟁을 강요하는 각종 조치들을 통해 젊은이들의 삶을 옥죄고 있다. 그야말로 억압과 차별과 배제가 이땅을 지배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조선공산당과 같은 투쟁지휘부가 필요한 시기라 할 수 있겠다.
말벌동지들은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모두를 위한 평등사회’를 꿈꾸고 있다. 또 실천하고 있다. 남태령투쟁에서 보여준 모습은 평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했던 100년 전의 조공 활동가와 다른지 않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본 글은 말벌동지와 함께 대화하기 위한 글이라 할 수 있다. 학술적 치밀함보다 젊은이가 공감할 수 있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부족함이 많은 글이더라도 이 글을 통해 말벌동지들이 조선공산당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하고 공부해고자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1. 사회주의의 수용 과정
- 3.1운동 이후 식민지 조선에는 왜 사회주의 열풍이 불었을까?
3·1 운동은 비록 일제를 몰아내고 즉각적인 독립을 쟁취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거대한 사상적·조직적 전환점이 된 사건이다. 당시 독립운동가들과 민중들이 온몸으로 부딪치며 얻은 한계와 교훈은 이후 1920~1940년대 항일 투쟁의 방향성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 3·1 운동의 한계 (실패의 원인)
* 비폭력 평화주의의 무력함 - 초기의 지도부(민족대표 33인)는 일제의 선의나 국제사회의 동정에 기대어 '비폭력 평화 시위'를 고수했다. 그러나 총과 칼을 앞세운 일제의 무자비한 유혈 진압 앞에서 평화시위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후기로 갈수록 민중들이 면사무소나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무력 저항으로 발전했으나, 이를 조직적으로 이끌어 나갈 정교한 군사적 지휘부가 없었다.
* 외교제일주의와 정세 판단의 착오 - 민족대표들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를 신뢰했다. 그러나 이는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원칙이었을 뿐, 승전국인 일제의 식민지(조선)에는 해당되지 않는 사실을 몰랐다.
* 지도부의 역량 부족과 민중과의 괴리 -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직후 민족대표들은 자진해서 경찰서 체포의 길을 택했다. 이로 인해 정작 탑골공원에 모인 수많은 학생과 민중들은 현장에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구심점(지도부)을 잃은 채 각자 시위를 전개해야 했다.
(2) 3.1운동이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된 결정적 계기
- 외교호소노선의 대실패와 환멸
3·1 운동의 정신적 기폭제 중 하나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였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민족 스스로가 원하면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서구 열강에 대한 거대한 기대를 품었다.
* 서구 열강의 외면 - 평화적인 만세 시위가 일제의 피비린내 나는 학살로 짓밟히는 동안,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서구의 제국주의 열강은 승전국인 일제의 눈치를 보며 조선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했다.
* 민족자결주의의 한계 - 뒤늦게 청년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위선적인 구호였을 뿐, 일제 같은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차가운 현실을 깨달았다. 이로 인해 미국과 서구의 자본주의 체제 전반에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 레닌과 소련의 파격적인 '민족 해방' 약속
서구 열강에 실망한 조선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이 바로 러시아 혁명(1917)을 성공시킨 레닌과 볼셰비키 정권이었다.
* 약소국 지원 선언 - 레닌은 전 세계 피압박 민족의 해방 운동을 물질적·정신적으로 전폭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식민지 해방 운동을 돕는 국제기구인 코민테른을 통해 임시정부와 조선 독립운동가들에게 거액의 독립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 "제국주의의 뿌리는 자본주의다": 레닌의 식민지 이론은 명쾌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한 것은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제국주의' 단계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일제를 몰아내려면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함께 무너뜨려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는 일제 타도가 곧 계급 해방과 연결된다는 강력한 확신을 주었다.
- 실력양성운동의 한계와 타협론에 대한 반발
3·1 운동 이후 국내에서는 조만식의 물산장려운동, 이광수·송진우 등의 민립대학설립운동 같은 자본주의적·개량주의적 '실력양성운동'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 운동들은 일제의 교묘한 방해와 자금 부족으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 자치론과 타협주의의 등장 - 실력양성운동이 벽에 부딪히자, 일부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당장 독립은 불가능하니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고 자치권이라도 얻자"는 자치론(타협적 민족주의)으로 경도되기 시작했다.
* 청년들의 분노 - 변절에 가까운 이 타협론에 청년 지식인들은 격분했다. 일제체제 안에서 안주하려는 민족주의 계열의 나약함에 실망한 청년들은, 일제와의 타협을 절대 용납하지 않고 급진적·근본적 변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로 대거 방향을 틀었다.
(3) 식민지 자본주의가 낳은 비참한 민중 현실
1920년대 일제는 한국을 일본의 식량 공급 기지로 만들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증식에 든 비용(수리조합비, 비료대금 등)이 농민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 소작농으로의 전락 - 수많은 자소작농이 토지를 잃고 비참한 소작농이나 토막민(빈민)으로 전락했다. 공장의 노동자들 역시 일본인 자본가 밑에서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과 차별적인 저임금에 시달렸다.
* '평등사상'의 강한 매력 - "지주와 자본가의 착취를 없애고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 되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사회주의 메시지는, 당장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조선의 절대 다수 대중(노동자·농민)에게 종교에 가까운 구원의 교리로 받아들여졌다.
(4) 사회주의운동은 왜 공산당 창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을까?
이 질문은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특수한 시대 상황과 맞물려 있다. 100년 전 일제강점기 청년들에게 공산당은 '가장 트렌디하고, 가장 강력하며, 현실적인 독립운동 백신'으로 여겨졌다. 일본에서는 새로운 서구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인 젊은이들을 ‘모던 보이’ ‘모던 걸’이라고 불렀지만, 조선에서는 ‘마르크스 보이’ ‘ 엥겔스 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식인들은 대화의 자리에서 자본론을 논하지 못하면 명함도 못 내밀었다고 한다. ‘홍대 피플’이나 ‘강남좌파’같은 비아냥의 유행어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청년들은 왜 그토록 공산당에 매료되었는가.
1) "식민지 지배의 본질은 자본주의다"라는 완벽한 논리
당시 지식인 청년들을 가장 강력하게 설득한 것은 마르크스와 레닌이 제시한 '제국주의론'이었다. 공산주의 이론은 일제의 침략을 단순한 '영토 확장'이나 '민족 간의 갈등'으로 보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발전한 강대국(일본)이 상품을 팔 시장과 원료를 얻기 위해 약소국(조선)을 억압하는 '자본의 침략'으로 규정했다.
* 민족주의의 한계 - 당시 민족주의 계열은 "우리가 힘이 없으니 실력을 키우자", "교육을 시키자"는 온건한 이야기만 반복했다. 당장 일제의 총칼에 피가 터지는 현실에서 지나치게 한가한 소리로 들렸다.
* 공산당의 해법 - 반면 공산당은 "일제를 타도하려면 그 뿌리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부수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해방이 온다"는 매우 선명하고 근본적인 처방전을 제시했다. 선명하고 명쾌한 논리에 청년들이 열광한 것이다.
2)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돈과 무기를 주겠다"고 한 세력
독립운동을 하려면 무엇보다 '돈'과 '무기', 그리고 힘을 보태줄 '국제적 우군'이 필요했다. 하지만 전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미국도, 영국도, 프랑스도 자신들이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국제 사회에서 철저하게 왕따를 당하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민 것이 바로 러시아 혁명으로 세워진 소련(코민테른)이었다.
* 파격적인 지원 - 레닌은 "전 세계 피압박 민족의 해방 운동을 전폭 지원하겠다"고 공언했고, 실제로 행동으로 보여줬다.
* 막대한 독립 자금 - 상해 임시정부의 이동휘 등이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벌이던 독립군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군사 기지를 제공해 준 것도 소련과 공산주의 세력이었다.
독립이 절박했던 이들에게 "우리를 도와 공산당을 조직하고 싸우면 돈과 총을 주겠다"는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3) 조선 인구의 80%가 노동자·농민이었다는 현실
사상이 아무리 훌륭해도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힘을 쓸 수 없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인구 구조는 공산당 사상이 스펀지처럼 흡수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일제의 산미증식계획과 경제 수탈로 인해 당시 조선 민중의 80% 이상을 차지하던 농민들은 말 그대로 굶어 죽기 직전의 '소작농'이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다. 일본인 자본가 밑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짐승 같은 대우를 받았다.
* 가장 강력한 확성기 - 이들에게 공산당이 외친 "지주와 자본가의 재산을 빼앗아 노동자와 농민에게 똑같이 나누어주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라는 구호는 단순한 정치 사상이 아니라, 내일 당장 살아남기 위한 구원의 복음이었다.
* 대중성 확보 - 민족주의 운동이 일부 유학파, 자산가, 인텔리 중심의 '엘리트 운동'에 머물렀다면, 공산당은 가장 비참한 바닥에 있던 노동자와 농민을 독립운동의 주인공으로 끌어올렸다. 덕분에 순식간에 거대한 대중적 폭발력을 가질 수 있었다.
2. 조선공산당의 창립 과정
1925년 조선공산당의 창립 과정은 국내외에서 분열되어 있던 사상 단체들이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하나의 전위 정당으로 통합해 가는 긴박한 과정이었다.
당시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다른 행사를 가장하는 등 치밀한 지하 활동 끝에 결성되었는데, 그 구체적인 단계를 시기 순으로 보자.
(1) 사상 단체의 난립과 통합 노력 (1920~1924)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급격히 확산되면서 국내외에 수많은 파벌과 단체가 생겨났다.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은 "조선 내에 단일한 공산당을 결성하라"고 지시했으나, 주도권을 두고 다툼이 치열했다.
* 국내 3대 분파의 형성 - 국내 사회주의 운동은 크게 화요회(김재봉, 박헌영 중심), 북풍회(김약수 중심), 상해파/조선노동당(신백우 중심)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 통합의 계기 - 1924년 전국적인 노동자 조직인 '조선노동총동맹'과 청년 조직인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면서 대중 기반이 마련되었고, 이를 이끌 '하나의 지도 정당(전위당)'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강력하게 형성되었다.
(2) 비밀 건당 전람회와 창당 (1925년 4월 17일)
통합의 주도권을 잡은 화요회 세력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창당 작업이 추진되었다.
1) 비밀 회동 및 대표자 소집 (1925년 4월 초)
김재봉, 강달영 등 주동자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경성(서울) 시내의 안전한 아지트를 확보하고, 전국의 분파 대표자들에게 비밀리에 소집령을 내렸다.
2) 아서원 비밀 창당대회 (1925년 4월 17일)
서울 황금정(을지로)에 있던 중국 요리집 '아서원'에 19명의 대표자가 손님을 가장해 모였다. 이들은 단 2시간 만에 조선공산당 창립을 선포하고 강령과 규약을 채택했다. 일제의 치안유지법이 시행(1925년 5월 12일)되기 직전의 긴박한 타이밍이었다.
3) 조선공산청년회(공청) 결성 (1925년 4월 18일)
창당 이튿날, 훈정동에 있는 박헌영의 집에서 핵심 청년활동가들이 모여 외곽 조직이자 정예 청년 조직인 조선공산청년회를 결성하고, 박헌영을 책임비서로 선출했다.
(3) 초기 조직 구성과 인사
초기 창당을 주도한 핵심 인물들은 철저한 보안을 위해 부서별 책임자를 나누어 조직을 안정시켰다.
| 직책 | 인물 | 역할 및 비고 |
| 책임비서 | 김재봉 | 당의 최고 책임자 (화요회 영수) |
| 조직부 위원 | 독고전 | 국내 세포(하부 조직) 조직 및 당원 관리 |
| 선전부 위원 | 김찬 | 기관지 발행 및 사상 선전 활동 |
| 인사부 위원 | 김약수 | 북풍회 계열을 아우르는 인사 조율 |
| 노동농민부 위원 | 정운해 | 대중 노동·농민 단체와의 연대 책임 |
(4) 코민테른의 정식 승인 (1925년 5월)
당시 세계 공산주의 운동 체제에서 정식 '일국일당(한 나라에 하나의 당)'으로 인정받으려면 모스크바에 있는 코민테른의 승인이 필수적이었다.
창당 직후, 당 지도부는 조봉암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급파했다. 조봉암은 조선공산당의 결성 보고서와 강령을 전달했고, 코민테른은 마침내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 조선지부'로 공식 승인했다. 이로써 조선공산당은 명실상부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일원이자, 국내 항일 지하 정당으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 창립 과정의 특징
- 조선공산당 선언문의 진보성
- 철저한 비밀 속에 창립
철저하게 일제의 사법망을 피한 지하 비밀 결사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요리집이나 개인 가옥을 전전하며 극비리에 회의를 진행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제 경찰조차 당의 존재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못했을 만큼 치밀하게 기획된 거사였다.
- 화요파 중심의 창립 : 서울파를 배제한 창립
3. 조선공산당의 항일투쟁
1925년 결성된 조선공산당의 주요 활동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치안유지법) 속에서 크게 '항일 대중 운동 주도', '민족 협동 전선(구국 연대) 구축', '노동·농민 조직화'라는 세 가지 축으로 전개되었다.
(1) 6·10 만세운동 주도 (1926년)
창당 이듬해, 조선공산당은 제2의 3·1 운동을 목표로 대규모 민족 공동 전선을 기획했다. 순종 황제의 장례식(인산일)을 계기로 삼아 민족주의 계열, 천도교, 그리고 학생 조직을 연대시킨 거사였다.
• 지하에서의 격문 제작 - 부도심 곳곳의 비밀 아지트에서 일제의 식민 통치를 규탄하고 토지 혁명을 주장하는 격문 수십만 장을 인쇄하여 전국 유포를 준비했다.
• 일제의 사전 발각과 전개 - 거사 직전, 당의 핵심 지도부인 강달영 등이 체포되고 인쇄물이 압수(제2차 아지트 사건)당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 결과 : 지도부는 무너졌지만, 당이 연대해 둔 학생 조직들이 계획대로 6월 10일 당일 종로 등지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를 유도해 내며 침체되어 있던 항일 독립운동에 거대한 불씨를 지폈다.
* 6·10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
6·10 만세운동은 비록 일제의 사전 탄압으로 3·1 운동만큼의 전국적 폭발력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한국 독립운동사에 질적인 대전환을 가져왔다.
- 최초의 성공적인 좌우합작 시도 - 사회주의 세력(조선공산당)과 민족주의 계열(천도교 등)이 이념의 장벽을 넘어 공동의 적인 일제에 맞서 연대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 경험은 이듬해인 1927년 국내 최대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부상 - 이전까지 명망가들의 지도를 받던 학생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독자적인 지도부를 구성하고 직접 거사를 실행하는 핵심 주체로 성장했다. 이는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 단순 독립을 넘어선 대중 투쟁 구호 - "독립"이라는 추상적 구호에 머물지 않고, 노동자·농민·학생의 생존권 요구(지주제 철폐, 노동시간 단축, 식민지 교육 반대 등)를 항일 구호와 결합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사회적 기반을 민중 깊숙이 뿌리내리게 했다.
(2) 민족협동전선 '신간회' 창립 주도 (1927년)
6·10 만세운동을 거치며 조선공산당은 "사회주의 세력만의 투쟁으로는 한계가 있다. 합법적인 공간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결성한 거대 연대 기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 정우회 선언 (1926년 11월): 조선공산당의 외곽 사상 단체인 정우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타협하지 않는 독립운동파)과는 적극적으로 제휴·연대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 신간회 결성 (1927년 2월): 이 선언은 국내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는 기폭제가 되어, 이상재, 신석우 등 민족주의 명망가들과 좌파 운동가들이 함께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 단체 '신간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조선공산당원들은 신간회의 핵심 실무진과 지방 지회를 장착하여 합법적인 대중투쟁을 지휘했다.
(3) 노동자·농민 대중 투쟁의 조직화
조선공산당은 이념 전파에 머무르지 않고, 식민지 경제 수탈에 신음하던 노동자와 농민을 전위 투쟁의 주역으로 성장시켰다.
• 전국적 대중 조직 분리 발전 - 당의 지도 하에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을 구축하여 각 지역의 파업과 소작쟁의를 배후에서 지원하고 조율했다.
• 원산 총파업 (1929년) 지원 - 비록 1928년 말 당은 공식 해체(12월 테제)되었으나, 활동가들이 축적해 둔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국 노동 운동 역사상 최대 규모인 '원산 총파업'을 이끌어내며 일제 경제 구조에 큰 타격을 주었다.
(4) 여성 및 청년 운동의 다각화
당의 정예 청년 조직인 조선공산청년회(공청)를 중심으로 청년·학생들의 동맹휴학을 배후 지원했으며, 여성 지위 향상과 해방을 위해 근우회(신간회의 자매 단체) 결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여성 운동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5) 활동 방식의 대전환 - 1930년대 '비합법 혁명적 조합 운동'
1928년 말, 내부 파벌 싸움과 일제의 가혹한 검거망으로 인해 코민테른으로부터 승인이 취소(12월 테제)되자, 이들의 활동은 더욱 지하로 침투하는 구조로 바뀐다.
"현장으로 들어가라" - 1930년대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지식인 중심의 중앙당 건립을 지양하고, 공장과 농촌으로 직접 위장 취업하여 '혁명적 노동조합',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단순한 임금 인상 요구나 소작료 감면을 넘어, 일제 식민 통치 타도를 전면에 내건 정치 투쟁이자 무장 투쟁의 성격으로 발전하여 해방 직전까지 계급 항일 투쟁을 지속했다.
4. 탄압과 해체 (제1차~4차 조선공산당)
조선공산당의 역사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따른 '파괴와 재건'의 연속이었다. 일제는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도록 가혹하게 탄압했다.
| 시기 | 구분 | 핵심 인물 | 주요 사건 및 결과 |
| 1925년 | 제1차 아지트 사건 | 김재봉, 박헌영 | 신의주에서 유출된 문서로 인해 조직이 발각되어 지도부 대거 체포 |
| 1926년 | 제2차 아지트 사건 | 강달영 | 6·10 만세운동 준비 과정에서 격문 등이 압수되며 대규모 검거 |
| 1926~27년 | 제3차 (ML당) | 안광천, 김준연 |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으며 신간회 창립 등 좌우합작에 주력했으나 유출로 와해 |
| 1928년 | 제4차 당 | 차금봉 | 근로 대중 중심의 재건을 시도했으나 일제의 촘촘한 정보망에 걸려 붕괴 |
결국 1928년 말, 코민테른은 파벌 싸움과 일제의 탄압으로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해진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하는 '12월 테제'를 발표한다. 이 테제의 핵심은 "지식인 중심의 파벌 싸움을 멈추고, 현장의 노동자와 농민 속으로 들어가 아래로부터 당을 다시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이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혁명적 노동조합·농민조합을 결성하는 비합법적 격렬 투쟁(적색노조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해방 직전까지 항일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5.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특징
일제강점기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은 전 세계 다른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과 비교했을 때 매우 독특한 환경에서 전개되었다. 단순히 계급 해방(자본주의 타도)만을 외친 것이 아니라, '민족 해방(일제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지상의 과제와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 민족주의와 계급투쟁의 이중 과제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두 가지 전선에서 동시에 싸워야 했다. 하나는 조선을 식민 지배하는 일본 제국주의(민족 해방)였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하는 자본가와 지주계급(계급해방-평등사회 건설)이었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손을 잡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1927년에 결성된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이다.
(2) 유례를 찾기 힘든 일제의 가혹한 탄압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은 "한 국가에는 하나의 공산당만 존재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25년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결성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사회주의자들을 극심하게 탄압했다. 제1차부터 제4차에 걸친 아지트 적발과 대규모 체포로 인해 조선공산당은 결성과 해체를 반복하다가, 결국 1928년 코민테른에 의해 공식 승인이 취소(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3) 해산 이후 더욱 기층 대중 속에서 더욱 치열하게 활동
- 혁명적 노조운동, 혁명적 농조운동의 전개
조선공산당은 해산했지만 재건하기 위한 운동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제가 전시체제 강요하며 치안유지법을 앞세워 탄압했지만, 조공의 활동가들은 대중 속으로 들어가 치밀하게 활동했다. 운동의 중심이 지식인 중심의 '상층부 조직 체계'에서 노동자와 농민 속으로 직접 파고드는 '기층 대중운동'으로 바뀌었다.
* 혁명적 노동조합·농민조합 - 1930년대 들어 공산주의자들은 공장과 농촌으로 들어가 비합법적인 혁명적 조합을 결성했다.
* 생존권 투쟁에서 정치 투쟁으로 - 단순한 임금 인상이나 소작료 인하 요구를 넘어, 일제 식민지 지배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정치적 투쟁으로 성격이 강해졌다.
(4) 해외 여러 곳에서 노동자국제주의를 실천
일제의 감시를 피해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 연해주, 중국 관내, 일본 본토 등 다양한 지역에서 운동이 전개되었다.
* 중국·만주 및 소련 지역 - 중국 공산당과의 연대 속에서 대장정에 참가하고, 조선의용군은 중국의 팔로군 속에서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만주에서는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해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 일본 본토 -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일본 공산당 산하에서 활동하며 강제 연행과 차별에 맞섰다.
6. 조선공산당 항일투쟁의 현재적 의미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아직도 전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또 이들과 결합된 국내 독점자본은 초과이윤을 위해 더욱 강고한 저임금체제로 민중들과 청년들을 괴롭히고 있다. 다시 말해 조공의 선배활동가들이 맞서 싸우려했던 그 모순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억압·차별하고 있는 이 모순을 타파하지 않고는 평등사회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 조공의 선배들이 성화 주자처럼 치켜들고 달렸던 사회변혁의 횃불을 이제는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그 누구보다 가장 치열하게 살아왔던 조공의 선배들로부터 배워서 그 정신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 평등사회 건설을 위해 누구도 배제시키지 않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억압과 착취, 차별과 배제가 아닌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에서 가장 고통 받는 사람에게로 가야한다. 조공의 선배들이 사회에서 가장 차별을 받던 백정의 형평운동에 함께했던 것처럼, 또 가부장제의 타파를 위해 여성해방운동에 앞장 섰던 것처럼 가장 소외되고 힘든 사람들에게로 다가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공의 정신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사회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3.1운동 당시 독립투쟁에는 단순히 민족감정에 호소하거나 일제가 아닌 미국이나 유럽의 강대국에 매달려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일본 천황의 지배를 인정하고 자치권을 획득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매우 잘못된 운동이다. 이에 젊은 청년을 중심으로 사회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올바른 노선을 세워 투쟁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이다. 지금도 이 사회의 모순을 타파하고 평등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 사회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학습이 필요하다.
* 반공주의에 정면으로 맞서 싸워야한다.
일제는 자신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사회주의운동과 조선공산당을 없애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탄압했다. 선배활동가들은 그 속에서 조공을 지키기 위해 갖가지 고문을 견디다 죽어갔다. 지금 우리는 탄압하며 사회를 휘젖고 있는 반공주의는 우리의 가장 적이다. 현재의 보수 양댱체제는 바로 여기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국가보안법은 반공주의의 근원이다.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이에 굴하지 말고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여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반공주의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 조공 선배열사들의 복권과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친일파들이 당시에 축적한 재산으로 지금까지도 이땅의 지배층으로 떵떵거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조중의 선배열사들은 항일투쟁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혹독한 고문을 견디다 옥사한 선배열사는 물론이요, 가족들 또한 평생동안 고통당해왔다. 복권과 명예회복이 시급하다.
* 조선공산당의 활동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 평가들에 맞서야 한다.
물론일부 반성해야할 과도했던 분파활동 등 반성해야 할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부의 오류로써 일제강점기 가장 큰 활약을 했던 조선공산당 활동 모든 것을 폄훼하거나 부정하려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분파성을 비판하지만 넓은 시야로 볼 때 사회주의운동이 있었던 모든 나라에서 분파활동이 없었던 곳은 없다.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맞서기 위해 철저히 비밀 활동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점, 국경을 넘어 해외에서 흩어져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점 등을 고려하여야 한다.
또한 한편에서는 코민테른의 지도로 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을 부각하여 ‘사대주의’적 활동이라거나 ‘스탈린주의’에 끌려간 잘못된 노선에 입각해 벌인 활동으로 비판하고 있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갖가지 악선전이 난무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 비밀문서고에서 발굴된 자료들에 의해 당시의 활동과 스탈린에 관한 많은 것이 재평가 되고 있다.
<< 참고 자료 >>
자료1 : 1946년 7월 미군정 비밀 보고서 <경제·정치체제 선호도>
- 조사 기관 : 미군정청 공보부 여론조사국
- 조사 대상 : 서울 및 인근 지역 주민 8,453명
| 선호 체제 | 응답 비율 (%) |
| 사회주의 | 70% |
| 자본주의 | 14% |
| 공산주의 | 7% ~ 10% |
| 기타 및 모름 | 6% ~ 9% |
* 미군정 ‘비밀 보고서 (G2 파일 및 공보부 파일)’
- 당시 기밀문서로 분류되어 대외 비공개됨
* 국립공문서관 (NARA)에 보관
* 서울과 지역의 차이, 서술형의 취합이 있었음
자료2 : < 조선공산당 선언 >
「조선공산당 선언」 ①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되, 국가의 최고급 일체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조직한 직접 · 비밀 · 보통 및 평등의 선거로 성립한 입법부에 있을 것 ② 직접 · 비밀 · 보통 및 평등의 선거로 광대한 지방자치를 건설할 것 ③ 전 국민의 무장을 실시하고 국민경찰을 조직할 것 ④ 일본의 군대, 헌병 및 경찰을 조선에서 철폐할 것 ⑤ 인민의 신체 혹 가택을 침범하지 못할 것 ⑥ 무제한의 양심,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동맹파업의 자유를 가질 것 ⑦ 문벌을 타파하고 전 인민이 절대평등의 권리를 가질 것 ⑧ 여자를 모든 압박에서 해탈할 것 ⑨ 공사 각 기관에서 조선어를 국어로 할 것 ⑩ 학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무료 의무 및 보통 및 직업교육을 남녀 16세까지 실시할 것. 빈민 학령 자녀의 의식과 교육용품을 국가의 경비로 공급할 것 ⑪ 각종 간접세를 폐지하고, 소득세 및 상속세를 누진율로 할 것 ⑫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과 우의적 연맹을 체결할 것 1926년 조선공산당 중압집행위원회 |
자료3 : 세계 공산당선언과 조선공산당 선언의 비교 (제미나이 검색 결과)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세계 공산당 선언》과 일제강점기인 1926년 발표된 《조선공산당 선언》은 마르크스주의라는 뿌리는 같지만, '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이라는 완전히 다른 토양에서 피어났다.
<< 두 선언문의 핵심 요약 비교 >>
| 비교 항목 | 《세계 공산당 선언》 (1848) | 《조선공산당 선언》 (1926) |
| 핵심 당면 과제 | 자본주의 타도 및 프롤레타리아 독재 | 일본 제국주의 타도 및 민족 해방 (독립) |
| 주요 혁명 대상 | 부르주아 (국내 자본가 계급) | 일제 제국주의 세력 및 친일 지주·자본가 |
| 주장한 정부 형태 | 국가·계급이 소멸한 공산주의 사회 | 민주공화국 (보통·평등 선거에 의한 입법부) |
| 연대의 범위 | 만국의 노동자 (국경 없는 계급 연대) | 반일 민족통일전선 (노동자·농민 + 민족자본가) |
2. 결정적인 차이점(3가지)
❶ 계급투쟁 vs 민족해방 (혁명의 성격)
- 세계 공산당 선언 :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서유럽을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당면 목표는 내부의 적인 '부르주아(자본가)'를 무너뜨리고 노동자가 권력을 잡는 '계급 혁명'이다.
- 조선공산당 선언 : "당면한 투쟁의 목적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에서 조선을 절대로 해방함에 있다"고 명시했다. 즉, 사회주의 이념을 빌려왔지만 본질은 '반제국주의 독립운동 선언문'이다.
❷ 프롤레타리아 독재 vs 민주공화국 수립 (정치적 목표)
- 세계 공산당 선언 : 부르주아 민주주의(의회제 등) 역시 자본가의 지배 도구일 뿐이라며 타도 대상으로 보았고, 궁극적으로 사적 소유와 계급이 없는 사회를 지향했다.
- 조선공산당 선언 : 놀랍게도 "직접·비밀·보통·평등 선거로 성립한 입법부"와 "지방자치"를 요구했다. 당장 공산주의 사회로 가기 전, 일제를 몰아내고 온전한 주권을 가진 '근대적 민주공화국'을 세우는 단계적 혁명을 우선시한 것이다. 또한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등 자유주의적 권리도 강하게 요구했다.
❸ 자본가와의 적대 vs 협력 (연대의 전략)
- 세계 공산당 선언 :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외치며, 민족이나 국가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속이기 위한 허상이라고 보았다. 국내 자본가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적이었다.
- 조선공산당 선언 : 일제라는 거대한 적에 맞서기 위해 '4대 계급 동맹론(노동자, 농민, 소자산가, 민족자본가)'을 펼쳤다. 비록 지주나 친일 자본가는 배척했지만, 일본에 저항하는 국내 자본가(민족주의 계열)와는 손을 잡아야 한다는 민족통일전선의 논리를 세웠고, 이는 훗날 신간회운동으로 이어진다.
3. 독자적인 '조선적 맥락'의 요구들
조선공산당 선언에는 세계 선언에는 없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반영한 구체적인 조항들이 가득했다.
- 문화적 독립 : "공사 각 기관에서 조선어를 국어로 할 것", "각종 학교에서 조선어로 교수할 것"을 요구하며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정면으로 저항했다.
- 토지 개혁 : "대지주, 동양척식회사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 교부하고 소작료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여, 당시 대다수였던 빈농들의 삶을 구제하고자 했다.
- 인권과 복지: "여자를 모든 압박에서 해탈할 것(남녀평등)", "8시간 노동제", "16세 이하 아동 노동 금지", "남녀 18세까지 무료 의무교육 실시" 등 현대 복지 국가에서나 볼 법한 진보적인 사회 개혁안이 포함되어 있다.
자료4 : 마르크스-레닌주의 (네이버 백과)
*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레닌이 20세기 초 러시아의 혁명 현실에 맞춰 발전시킨 소련 공산당의 공식 이념이자 정통 공산주의 사상.
* 단순한 이론에 그치지 않고, 실제 역사 속에서 국가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데 사용된 실천적 지침.
1. 핵심 내용
- 전위정당론
내용 :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이 자연스럽게 혁명을 일으킬 것으로 보았으나, 레닌은 노동자 대중이 스스로 고도의 정치적 의식을 갖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특징 : 따라서 철저하게 훈련받고 조직된 직업 혁명가 집단, 즉 '전위정당(공산당)'이 노동자 계급을 이끌고 혁명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훗날 일당 독재 체제의 이론적 기반이 된다.
- 프롤레타리아 독재
내용 :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린 후,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전까지의 과도기 체제.
특징 : 혁명을 방해하려는 잔존 자본가 세력의 반발을 억누르고 사회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노동자 계급(실질적으로는 공산당)이 국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강력한 독재를 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 제국주의론
내용 : 레닌이 발전시킨 독창적인 이론으로,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고이자 마지막 단계"라고 정의했다.
특징 : 자본주의 국가들이 국내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며 약소국을 수탈한다고 보았다. 이 과정에서 제국주의 국가 간의 대립이 일어나며, 이 모순 때문에 "가장 약한 고리(당시 러시아)"에서 먼저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 마르크스주의와의 차이점
| 구분 | 마르크스 | 레닌 |
| 혁명의 주체 | 자발적인 노동자 대중 전체 | 고도로 조직된 전위정당(엘리트 혁명가) |
| 혁명의 조건 |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서유럽 | 자본주의가 미성숙한 후진 농업국(러시아)도 가능 |
| 국가의 역할 | 혁명 이후 점진적으로 국가는 소멸 | 공산주의 전 단계인 사회주의 동안 강력한 국가 권력(독재) 필요 |
3. 역사적 의의
- 역사적 성과 :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키며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이후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 등 20세기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의 공식 지도 이념이 되었다.
자료4.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모두 자본주의의 모순(빈부격차, 노동 착취 등)을 비판하며 등장한 사상이라 비슷해 보이지만, "사유재산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와 "체제를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에서 핵심적인 차이가 있다.
| 구분 | 사회주의 | 공산주의 |
| 기본 개념 |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 | 사회주의가 완성된 최종적 단계 |
| 분배 기준 |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받는다" (일한 만큼 가져감) |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 (필요한 만큼 가져감) |
| 사유재산 | 집, 옷, 가구 등 개인 소비재의 사유 인정 (단, 공장·토지 같은 생산수단은 국유화) | 모든 재산의 공동 소유 (사유재산 개념 자체가 소멸) |
| 실현 방법 | 선거, 개혁 등 평화적·민주적 수단 가능 | 노동자 계급의 폭력 혁명과 독재 필요 |
| 국가의 역할 | 국가가 중심이 되어 경제를 계획하고 통제 | 궁극적으로는 계급과 국가 자체가 소멸 |
2. 결정적인 차이점 3가지
① 분배의 법칙: '노동' vs '필요'
사회주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양과 기여도에 따라 대가를 받는다. 즉, 더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을 인정한다.
공산주의: 국가에 생산물이 넘쳐나는 완벽한 풍요를 가리킨다. 이때는 돈이나 기여도와 상관없이, 각자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쓴다. (예: 대가족은 더 큰 집을, 아픈 사람은 더 많은 의료 서비스를 받는 식)
② 사유재산의 범위
사회주의: 공장, 토지, 자본 같은 '생산수단'만 사회(국가)가 소유합니다. 내가 월급을 받아 산 자동차, 옷, 가재도구 같은 '개인 재산'은 철저히 인정된다.
공산주의: 생산수단뿐만 아니라 모든 재산을 사회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을 지향한다. 완벽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개인 소유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해다.
③ 혁명의 방식 (마르크스주의 관점)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두 사상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발전 단계에 가깝다.
자본주의 ➔ 사회주의(과도기) ➔ 공산주의(최종 목적지)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곧바로 완벽한 공산주의로 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중간 단계로 국가가 강력한 권력을 쥐고 통제하는 '사회주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를 위해 혁명이 필요하다.
참고 문헌
최백순, 2017, 조선공산당 평전, 서해문집.
역사학연구소 편, 1997,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아세아문화사.
최규진, 2016, 잃어버린 기억, 조선공산당.
박종린, 2016, 1920년대 ‘통일’조선공산당의 결성과정.
박찬승, 2016, 식민지 조선 사회운동의 발전과 국제적 성격.
반병률, 2020, 일제 치하 공산주의운동의 역사적 성격.
안재성, 2026, 권오설 평전, 인문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