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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수기

이미현 변리사 39회 합격 발효공학선택

작성자박성욱|작성시간05.07.28|조회수689 목록 댓글 0

후회 없는 선택을 위하여.....


                            이미현 변리사 39회 합격 발효공학선택 

 

변리사를 바라며…


“축하합니다. 합격하셨네요” 한빛학원에 전화를 걸어 내 수험번호와 일치하는 이름 석자가 명단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믿을 수 없기도 하고 기쁘면서도 이상하게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미 주체할 수 없었다. 부모님께 전화를 하고 사무실의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내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지난 수험기간동안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생각나서는 아니었지만 그냥 눈물이 나왔다. 그 순간은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시험을 보기로 마음먹기까지.

대학 1학년 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변리사라는 직업에 항상 관심은 있었지만 도전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은 없었다. 학교에서 법학과 과목을 가서 듣기도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다는 확신은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대학 3년을 마치고 그 시절 유행처럼 퍼지던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1년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에게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겨있었다. 물론, 그 때는 그렇게 긴 여정이 될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부의 시작

98년 학교에 복학을 하면서 1차 시험을 준비하였다. 시험은 4월말이었고 내가 공부를 시작한 건 3월초였으니 되는 것이 이상했다. 4월초에 가서야 특허법이 바뀌었다는 걸 알고 새책으로 공부했으니 얼마나 무지했는지 지금은 생각조차 하기가 싫다. 1차 시험이후, 학교 공부가 워낙 빡빡했기 때문에 변리사 공부를 한다고는 했지만 그렇게 잘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남들에게 내가 변시 공부를 한다는 것을 밝히기가 꺼려져 혼자서 남몰래 공부하다보니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열심히 도서관은 다녔지만 남는 것은 없던 시절이었다.


99년 졸업을 하면서 근처의 시립도서관에서 다시 1차에 도전을 했다. 그때는 멋도 모르고 1차는 쉬울 것 같아 2차 과목인 민사소송법도 보면서 했다. 잠도 4시간만 자고 책상 앞에만 붙어 있었다. 하지만 효율적이지는 못했던지 몸 상태만 안 좋아지고 공부는 공부대로 부족한 상태였다. 대전에 내려가 1차 시험을 보고 올라오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막연히 1차에 붙지 않을까 기대만 했다. 결과는 평균에서도 많은 차이가 나는 너무나도 확실한 낙방이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대학은 졸업했지만 1차 시험에도 불합격한 내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했다. 내가 부족한 건 아닐까하는 의심을 하면서도 오기가 생겼다. 내 자존심은 이미 크게 상처를 입었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도전해야 했다.


다음 1차에서는 일본어를 하기로 했다. 어차피 변리사가 되더라도 일본어는 중요하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고 1차 시험을 볼 때 시간이 많이 절약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차도 안 할 수는 없었다. 선택과목은 난해하고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은 분자생물학이 아닌 발효공학을 저작권법과 함께 하기로 했다. 생물공학의 내용을 다루는 발효공학이 흥미롭기도 했고 특별히 전공을 한 사람이 없다는 점은 내가 열심히만 하면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거라는 기대마저 가지게 했기 때문이었다. 7, 8월은 종로의 어학학원에 가서 일본어를 기초부터 배웠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는 독일어였으므로 일본어는 정말 접해본 적이 아예 없어 그다지 수월한 공부는 아니었다.

(지금은영어 하나만 보지만 그전엔 여러개의 언어중 선택하게 되어있었다.)


히라가나를 익히고 단어를 외우면서 발효공학의 기초를 쌓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생물공학에 대하여 쉽게 소개한 책을 빌려 읽었고 이영렬 변리사님의 발효공학 공부방법에 따라 교재를 사서 보기 시작하였다. 처음 읽었던 것은 현대 발효공학이었는데 처음 읽기에는 내용이 자세하지 않아 이해가 잘 안되었다. 9월에는 한빛학원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공부방법과 교재에 대한 구체적인 줄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후 강의 때 소개받은 다섯 권의 모든 교재를 읽으며 이영렬 변리사님의 서브노트에 부족한 내용을 끼워 넣는 작업을 하였다. 그 작업은 2000년 1월말이 되어야 끝날 수 있었다. 일본어 공부도 같이 하고 있었는데 어학학원의 진도는 너무 느린 것 같아 9월부터는 신림동 고시학원에 가서 집중적으로 배웠다. 일본어를 과감하게 선택하기는 했지만 두려움이 앞섰다. 다음 1차 시험 때까지 실력이 갖춰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전에도 민법 책을 꾸준히 보고 있었으나 발효공학 정리가 늦게 끝나 2000년 2월 초가 되어서야 1차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1차가 되지 않으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했다. 김준호 저 민법강의는 시험 직전에는 모든 페이지를 다 암기하다시피 하고 특허법조문도 암기하였다. 그 전에는 보지 않았던 특허법 및 민법 문제집을 다 풀었다(최학현 저 1200제, 김형배 저 객관식 민법). 자연과학개론은 이론보다는 문제를 풀어서 진도를 나가는 형식으로 했다. 일본어는 김후련 일본어를 기본교재로 하고 고시일본어 문제집을 풀었다. 이번 1차에서마저 떨어지면 절대로 안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붙어야 했다. 결과는 특허 90, 민법 95, 자연과학개론 75, 일본어 87.5, 합격이었다.


이제는 2차가 문제였다. 그 이전에도 2차 시험을 나름대로 준비했으나 막상 닥치고 보니 2차 시험을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민사소송도 발효공학도 단시간에 암기를 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2001년 2차 준비

2001년 2차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스터디를 해보기로 했다. 공부를 할 때는 예민해지기 때문에 언제나 혼자서 공부를 하던 나였다. 그러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니 스터디의 장점도 취하고 싶었다. 우선 발효공학 스터디를 시작했다. 마침 한빛학원 게시판에서 발효공학 스터디를 구할 수 있었다. 서울대에 가서, 나를 포함하여 세 명이 했는데 혼자 공부할 때보다 책임감이 느껴져서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고 그 때 정리했던 자료들은 이후 2001년에 발효공학을 70점으로 비교적 고득점을 받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발효공학 스터디를 같이 스터디 하던 분들은 동차를 목표로 하던 분들이라 다른 스터디를 구해야했다. 12월에 들어서 연대에서 새롭게 스터디를 시작하였다. 장소도 집에서도 가깝고 다른 멤버들도 느낌이 좋은 사람들이라 스터디에 열심히 하고자 노력을 많이 했다. 민사소송법 쓰기를 먼저 하였고 이후에는 상표, 특허, 의장 등을 병행하였다. 2월부터는 신림동에서 한달 정도 발효공학 스터디도 하였다. 바쁘지만 착실하게 시험을 준비해나가는 느낌이 들어 즐겁게 공부하였다. 6월이 되면서 더위를 견딜 수 없어 신림동의 독서실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시험 때까지 두 달간 고시원과 독서실만을 오가며 공부했다. 나름대로 컨디션도 괜찮았고 이렇게 공부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시험일이 다가왔다. 첫째 날, 둘째 날 순조롭게 시험을 본 것 같았다. 시험 마지막날은 무슨 우연인지 내 생일이었다. 당연히 미역국은 먹을 수 없었다. 시험지를 받아들었을 때, 합격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문제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하던 발효공학은 내가 철저히 준비한 범위 내에서 출제되었고, 저작권법 단문 두 개도 미리 준비하던 단문이었기 때문이다. 고득점이 나오기 어렵다는 저작권법보다는 발효공학에 집중을 해서 답안을 작성했다. 내심으로는 80점을 넘는 점수도 기대하면서 정말 충실히 썼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시작이었다. 발효공학에 너무 정성을 들이는 바람에 200분밖에 안 되는 시간을 너무 소비했던 것이다. 저작권법을 쓸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사례문제에 30분 단문15분, 10분을 들여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억울했다. 저작권법도 충실히 준비했던 문제인데 이렇게 날려 쓸 수밖에 없다니…그래도 끝까지 썼다는 사실에 만족을 하며 시험장을 나왔다.


저작권법에서 과락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악몽을 꾸기도 했지만 합격에 대한 기대를 크게 하며 발표일을 기다렸다. 그러나 합격자 발표일에 확인한 명단에는 내 이름이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민사소송도 충실히 쓰고 상표도 잘 쓴 거 같았는데 이럴 수가 없었다. 점수를 확인하니 총점에서 4점 정도가 모자랐다. 걱정하던 저작권법은 45점, 80점 이상을 기대하던 발효공학은 70점이었다. 화가 났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불합격이라니. 현실은 너무나도 잔인했다. 게다가 단짝처럼 친하던 사람이 합격을 해서 혼자된 외로움과 함께 불합격의 후유증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갔다.


2002년, 가장 잔인했던, 그러나 가장 달콤했던

시험을 포기하고 싶었다. 내 길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내가 시험을 포기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보였다. 돈 많이 벌고 싶은 욕심도 없으니 아무 데나 취직을 해버릴까 하고 울면서 구인광고들을 뒤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다시 해야하겠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도 경험 미숙하였으니 다시 하면 될 거라는 위로를 했다. 결국 상원서점에 가 민법책, 강의테이프, 문제집 등을 통째로 구입했다. 민법책을 보며 이원영 강의테이프를 듣고, 영어공부를 했다. 그리고, 항상 내게 콤플렉스로 작용하던 글씨를 개선하기 위해 고시 글씨체 연습을 시작했다. 글씨만 보기 좋았어도 과목당 1점을 더 받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때부터는 마침 근처에 구립도서관이 생겨 그곳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서슴없이 2002년 1차를 준비하던 때라고 말한다. 불합격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것과 함께 하는 1차 공부는 정말 고통 그 자체였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여기저기가 아파 오래 앉아 공부를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끝까지 해야했다. 영어는 항상 걱정이 되는 과목이고 점수가 쉽게 늘지 않아 해석이 잘 되지 않는 어려운 지문은 통째로 암기했다. 암기를 하다보면 해석이 되곤 했다. 하지만 시험이 가까워 오면서 몸이 따라주지 않아 고생했다. 나중에서야 그게 빈혈증상인 걸 알았지만 그때는 원인도 모르겠는데 공부를 조금만 하면 머리가 멍하고 눈도 침침해졌다. 그런 때는 종종 집에 와서 누워서 책을 보기까지 했다. 몸은 따라주지 않고 공부는 해야하고 정말 힘든 시기였다. 시험 당일마저 컨디션은 좋지 않았다.


1차 시험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내심 80점 이상을 기대했는데 70대 초반의 점수였다. 걱정이 되어 2차 공부에 매진할 수 없었다. 결국 6월은 민사소송 G/S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월드컵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열심히 월드컵을 보다보니 시간이 지나 1차 발표일이 다가왔다. 이번 1차가 안되면 시험을 그만두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1차 합격한다면 한달 조금 넘는 시간이지만 정말 열심히 공부하리라고 몇 번씩 다짐했다. 결과는 합격. 내 자신과의 약속대로 열심히 2차 공부를 하기 위해 시간을 절약하고자 신림동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나 자신과의 한 달간 싸움이 시작되었다. 자지 않으면 공부를 했다. 스스로도 그렇게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빈혈기가 있었기 때문에 약을 꼭꼭 챙겨먹으며 맨손체조를 하며 체력을 유지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밥도 혼자 먹으면서 때로는 밥 먹으러 가는 시간마저 아끼기 위해 컵라면을 먹으며 공부했다. 이전에 해놓은 공부가 있어서였는지 암기의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한달 정도의 기간이었지만 4과목의 암기를 전부 할 수 있었다.


2차 시험장에 들어서며 매순간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먹었다. 전해와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으리라 속으로 되뇌면서 시험시간 중에는 가능하면 답안을 풍부하게 쓰려고 노력했다. 단 1점이라도 더 받으려는 필사의 노력이었다. 시험을 마치고 나오면서 정말 후회 없이 공부하고 후회 없이 답안을 썼다고 생각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불가능할 것 같던 전과목 암기와 충실한 2차 답안 작성을 했으니 떨어져도 미련은 없었다.


시험이 끝나고 작은 특허사무소에도 들어가 첫 사회경험을 하면서 결과를 기다렸다. 결과는 합격. 특허 51.5, 상표 48, 민사소송법 60, 발효공학 65, 총점에서 4점차로 떨어졌던 전년도와 달리 평균에서 4점이 남는 합격이었다.


합격 후

합격을 했다고 해서 내 앞에 장밋빛 인생이 펼쳐진 건 아니지만 역시 합격을 하니 좋은 거 같다. 무엇보다 부모님이 좋아하시고 친구들 앞이나 어디 가서 당당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수험기간동안 대인기피 증세까지 겪었던 나로서는 지금의 내 위치가 소중하기만 하다. 수험 공부를 하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가족의 소중함이다. 내게 용기를 주고 지켜봐 준 가족이 있었기에 합격도 가능했던 것 같다. 엄마, 아빠 그리고 두 오빠들 그리고 새로운 가족이 된 올케언니들에게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또, 혼자 공부하던 도서관에 때때로 찾아와 주던 찬미, 혜성, 수진, 재정이 나의 친구들 너무 고맙다. 그리고 예비합격자이신 내 주변의 모든 분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끼면서 이 글을 정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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