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내용은 게시글과 보도된 내용을 바탕으로 각색된 추리소설입니다.
범행은 새벽에 일어났다.
피해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피해자는 신뢰였다.
그리고 범인은 — 아직 아무도 몰랐다.
서울 중구 을지로 어딘가, 낡은 건물 4층 사무실. 형광등 하나가 깜박이다 꺼졌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니터를 응시했다. 화면에는 숫자 하나가 붉게 떠 있었다.
1,542.
그 숫자가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강민준은 명함이 없는 탐정이었다.
사무실은 종로3가 뒷골목, 간판도 없는 건물 3층. 문에는 그냥 302호라고만 적혀 있었다. 의뢰인들은 입소문으로만 찾아왔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오전 열 시,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오십 대 여성이었다. 단정한 회색 정장, 짧게 자른 머리카락, 그리고 눈가의 다크서클. 잠을 며칠째 못 잔 사람의 얼굴이었다.
"강민준 탐정님이시죠?"
"앉으세요."
그녀가 앉았다. 핸드백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는 기획재정부 소속 김혜란입니다. 비공식적으로 찾아왔습니다."
강민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환율이요?" 그가 먼저 말했다.
김혜란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손이 떨리고 있어요. 정부 사람이 비공식으로 사설 탐정을 찾는다면, 공식 채널로는 건드릴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뜻이죠. 그리고 오늘 아침 환율이 1542원을 돌파했어요. 뉴스를 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김혜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환율이 — 조작되고 있습니다."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깜박이던 형광등마저 멈춘 것 같았다.
"증거가 있습니까?"
그녀가 핸드백에서 USB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뿐입니다. 하지만 이걸 가져온 사람이…"
"가져온 사람이?"
"어젯밤 한강에서 발견됐습니다."
강민준은 USB를 열었다.
파일은 세 개였다.
[PAULA.enc]
[TABLET.enc]
[1542.enc]
모두 암호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파일명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했다.
"PAULA가 뭔지 압니까?"
김혜란이 잠시 머뭇거렸다.
"오늘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한·미 우호 평화 콘퍼런스가 열립니다. 미국 측 주요 인사가 방한했어요. 폴라 화이트.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명입니다."
"종교 지도자 아닙니까."
"종교 지도자이기도 하고, 그 이상이기도 한 사람이죠." 김혜란이 목소리를 낮췄다. "오후에 대통령과 비공개 면담이 잡혀 있습니다. 의제에 환율 문제가 포함됐다는 첩보가 있어요."
강민준은 두 번째 파일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TABLET."
김혜란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젯밤 죽은 사람의 주머니에서 메모가 나왔습니다. 딱 두 단어였어요."
그녀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태블릿이 먼저다.
강민준은 그 쪽지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에 젖었다 마른 흔적. 한강에서 건져올린 사람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답게.
"죽은 사람은 누굽니까."
"변 모 씨의 측근이었습니다. 현재 구치소에 수감 중인—"
"변희재."
"아는군요."
"모르는 사람이 없죠."
강민준은 일어섰다. 창문을 열었다. 종로의 소음이 쏟아져 들어왔다. 경적 소리, 발걸음 소리, 그리고 어딘가에서 울리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
—원·달러 환율이 또다시 최고치를 경신하며—
그가 창문을 닫았다.
"수임하겠습니다."
그랜드하얏트호텔 로비.
강민준은 투숙객처럼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펼쳤다. 실제로는 읽지 않았다. 그의 눈은 로비 전체를 훑고 있었다.
오전 열한 시 정각.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폴라 화이트가 걸어나왔다.
강민준은 그녀를 처음 봤지만, 즉시 알아보았다. 군중 속에서도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녀가 그랬다. 경호원 넷이 주변을 에워쌌지만, 오히려 그녀가 그들을 거느리는 것처럼 보였다.
저 사람은 무언가를 알고 있다.
탐정의 직감이었다.
콘퍼런스장으로 이어지는 복도, 강민준은 자연스럽게 흐름을 따라 걸었다. 보안요원이 입구에서 명단을 확인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기자 명함을 꺼냈다. 가짜였지만 정교했다.
"경제일보, 박진수 기자입니다."
통과.
콘퍼런스장 뒷좌석에 앉은 그는 폴라 화이트의 개회사를 들었다. 유창하고 따뜻한 영어였다. 하지만 강민준의 귀는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앞줄 오른쪽 끝.
정장 차림의 남자가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면이 반사되어 흐릿하게 보였지만 — 숫자가 있었다.
1,547.
환율이 다시 올랐다.
그 남자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강민준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저 사람은 지금 환율이 오르는 것이 반갑다.
오후 두 시.
강민준은 사무실로 돌아와 USB를 다시 열었다.
암호화된 파일 세 개. 그는 복호화 전문가 최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 씨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대신 일이 빠르고 정확했다.
한 시간 뒤, 파일이 열렸다.
[PAULA.enc] — 해독 완료.
폴라 화이트의 방한 일정표였다. 공식 일정과 비공식 일정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그런데 비공식 일정 중 하나가 눈에 걸렸다.
PM 11:00 — S.Y.G / L.J.S — 한강변
이니셜이었다. S.Y.G. L.J.S.
강민준은 잠시 생각했다.
송영길. 이준석.
[TABLET.enc] — 해독 완료.
그것은 영상 파일이었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흔들렸다. 누군가 몰래 찍은 영상이 분명했다. 어두운 공간, 테이블 위에 태블릿 한 대. 그리고 두 사람이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들렸다.
"이게 터지면 끝이야. 보수 전체가 흔들려."
"언제 터뜨릴 거야?"
"환율이 1550 넘으면. 그때가 타이밍이야."
강민준은 정지 버튼을 눌렀다.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환율 조작과 정치 공작이 연결되어 있다.
그는 세 번째 파일을 열었다.
[1542.enc] — 해독 완료.
이것은 표였다. 날짜와 숫자들의 열. 은행 계좌 번호처럼 보이는 코드들. 그리고 맨 아래, 손으로 적은 것처럼 폰트가 다른 문장 하나.
누가 환율을 올리는지 알고 싶으면 — 호텔로 가라. 오늘 밤 자정.
강민준은 칠판에 이름을 썼다.
용의자 1 — 콘퍼런스장의 남자
환율이 오를 때 미소를 지었다. 정장 차림. 소속 미상. 앞줄 오른쪽 끝.
용의자 2 — 변희재의 측근 (사망)
한강에서 발견. 주머니에 쪽지. 태블릿이 먼저다. 무엇을 알고 있었나. 왜 죽었나.
용의자 3 — 송영길 / 이준석
새벽 한강변에서 만났다. 폴라 화이트의 비공식 일정표에 이름이 있다. 무슨 대화를 나눴나.
용의자 4 — 폴라 화이트
워싱턴의 심장부와 연결된 인물. 오후 대통령 면담에서 무슨 말이 오갔나. 환율 의제가 포함됐다는 첩보.
강민준은 한 발짝 물러서서 칠판을 바라보았다.
네 개의 이름. 네 개의 동기 가능성.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환율을 조작하려면 단순한 개인이나 정치 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반드시 금융 자본이 개입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본이 움직이려면 — 정보가 먼저 흘러야 한다.
정보.
그가 다시 USB를 보았다.
세 파일 모두 암호화되어 있었다. 누가 암호를 걸었는가. 그리고 왜 죽은 사람의 주머니에 있었는가.
강민준은 재킷을 집어 들었다.
호텔로 가라. 오늘 밤 자정.
밤 열한 시 오십 분.
호텔 지하 주차장.
강민준은 기둥 뒤에 서서 시계를 보았다. 손이 자정을 가리키려 하고 있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콘퍼런스장의 남자였다. 낮에 봤던 정장 차림 그대로. 다른 한 명은— 강민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김혜란이었다.
의뢰인.
기획재정부 소속이라 했던 여자.
두 사람은 차 한 대 앞에서 멈췄다. 남자가 먼저 말했다.
"USB는 회수됐어?"
"아직요." 김혜란의 목소리였다. 낮에 강민준 앞에서 떨리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차갑고 명확했다.
"탐정한테 맡겼다고?"
"미끼예요. 탐정이 움직이면 반대쪽이 반응하거든요. 그걸 보려고요."
강민준의 턱이 굳었다.
나는 처음부터 이용당하고 있었다.
남자가 코웃음쳤다.
"환율은 얼마까지 올릴 거야."
"1550이 마지노선이에요. 그 이상 가면 통제 불가예요."
"태블릿 영상은?"
"오늘 밤 자정에 유출됩니다. 플랫폼 세 곳에 동시에."
"그럼 보수 진영은—"
"사분오열되겠죠."
두 사람이 차에 타려는 순간이었다.
강민준이 기둥 뒤에서 걸어나왔다.
"흥미로운 대화였습니다."
두 사람이 굳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천천히 걸었다.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볼까요. 환율은 조작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적이 경제적 이익이 아니에요. 정치적 타이밍을 만들기 위해서죠. 태블릿 영상이 터지는 순간, 보수 진영이 흔들립니다. 그 혼란 속에서 환율을 방어할 골든타임이 생긴다 — 누군가는 그렇게 계산했겠죠."
남자의 손이 움직였다.
"하지만," 강민준이 계속했다. "그 계산에 한 가지 변수를 빠뜨렸어요."
"뭐가."
"한강에서 죽은 사람입니다."
침묵.
"그 사람은 태블릿 영상의 유출 경로를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죽었겠죠. 그런데 그 사람이 죽기 전에 USB를 누군가에게 넘겼습니다. 저한테가 아니에요."
강민준은 천장을 잠깐 올려다보았다.
"경찰한테요."
주차장 입구에서 불이 켜졌다. 차 소리. 발소리. 그리고 제복.
사흘 뒤.
환율은 1,498원으로 내려앉았다.
뉴스룸의 박지수는 새 기사를 쓰고 있었다.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타이핑했다.
[단독] 환율 쇼크의 배후 — 기획재정부 내부 인물 연루 의혹
저장 버튼을 눌렀다.
커피 한 모금.
창밖에서 서울은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다.
강민준은 그날 이후 사무실 문에 작은 간판을 달았다.
딱 세 글자.
탐정사.
명함은 여전히 없었다.
의뢰인은 여전히 입소문으로만 찾아왔다.
그리고 도시는 오늘도, 누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숫자를 움직이고 있었다.
파도는 잠시 물러났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