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여회장(初代女會長)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① 강완숙(姜完淑) 골룸바는 내포(內浦)지방의 외교인(外敎人) 향반(鄕班) 집안에서 태어났다.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통찰력(洞察力)과 곧고 단단하고 용감(勇敢)한 마음을 아울러 보여 주었다. 그는 나쁜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으며, 자기 어머니의 까다로운 성격(性格)을 잘 참아 받았다.
고결(高潔)한 그의 마음은 벌써 위대한 무엇을 갈망(渴望)하고 있었다. 그는 불교(佛敎)의 격언(格言)을 실천(實踐)하기에 노력하였으며, 이 종파(宗派)의 도(道)를 닦는 데 전념(專念)하기 위하여 속세(俗世)를 버릴 결심을 가졌었다는 말도 있다.
②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는 덕산(德山) 고을에 사는 홍지영(洪芝榮)이라는 상처한 향반(鄕班)에게 시집을 갔었는데, 남편 홍지영(洪芝榮)은 극도로 순박(淳朴)하지만 조금도 총명(聰明)한 데가 없어, 姜(完淑)골롬바는 그와 화합(和合)하여 살기가 매우 힘들었고 많은 근심을 겪게 되었다.
姜(完淑)골롬바는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 하였고, 또 그녀의 친절과 상냥함으로 꽤 까다로운 성격(性格)을 가진 시어머니의 사랑을 얻을수 있었다.
③ 姜(完淑)골롬바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남편의 친척 바오로라는 사람으로부터 천주교 이야기를 들었다. 姜(完淑) 골롬바는
ꡒ천주라면 하늘과 땅의 주인일 것이다. 이 종교의 이름은 옳다. 그렇다면 그 교리는 진리일 것이다.ꡓ하고 생각하였다.
그가 책을 청하여 그것을 읽는 중에 그의 마음은 복음(福音)의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진리(眞理)를 깨달았다. 姜(完淑)골롬바는 그의 영혼(靈魂)의 모든 능력(能力)을 기울여 천주교에 열중하였고, 신자생활(信者生活)의 첫걸음부터 영웅적(英雄的)인 덕행(德行)을 갈망(渴望)하였다. 그녀의 모든 본분을 다하는 데 있어서의 부지런함과 열심(熱心)과 극기(克己)는 가히 감탄할 만 하였다
④ 그녀는 자기 가족(家族)과 친척(親戚)과 친구들을 입교(入敎)시키는데 골몰하였고, 그녀의 열성(熱性)은 이웃 동네에까지 미쳤다. 그의 남편(男便)은 그 관심(關心)의 주요한 대상(對象)이었다.
姜(完淑) 골롬바가 그에게 천주교인이 되라고 권하면 그는 ꡒ옳소, 옳아!ꡓ하고 말하였지만, 그 다음에 천주교의 적(敵)들이 그 교를 비난하면, 그렇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그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다. 아내가 나무라면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다가, 나쁜 친구들이 다시 그를 보러 오면 전과 마찬가지로 행동하곤 하였다. 姜(完淑) 골롬바는 그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成果)도 올리지 못하였으며, 자기는 도저히 남편(男便)에게 천주교를 진실(眞實)한 마음으로 실천(實踐)하게 만들지 못하리라 는 것을 깨달았다.
⑤ 姜(完淑) 골롬바는 또 시어머니를 입교(入敎)시키는 데에도 전념(專念)하였다. 시어머니는 하느님을 섬기고 천주교 기도문(祈禱文)을 외우기 시작했지만, 조상숭배(祖上崇拜)를 버릴 결심(決心)은 하지 못하였다. 姜(完淑) 골롬바는 끊임없이 시어머니에게 권하고, 특히 그의 완전한 회개(悔改)를 얻기 위하여 하느님께 열렬히 기도(祈禱)를 드렸다.
그의 기도(祈禱)는 마침내 들어졌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가묘(家廟)를 쓸고 있는데 별안간 물건(物件) 깨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고 방의 들보와 기둥이 흔들렸다. 원인(原因)을 찾아낼 수가 없는 그 괴상한 소리에 겁이 나서 그녀는 며느리에게 달려가 그 품에 안기며 자기의 헛된 미신(迷信)을 끊어버렸다. 이승리(勝利)를 거둔 뒤 姜(完淑)골롬바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도 입교(入敎)시고, 그들은 둘이 다 모범적(模範的)으로 세상을 떠났다.
⑥ 1791년 박해(迫害)가 일어나자, 姜(完淑)골롬바는 음식을 만들어 옥에 갖다 줌으로써 신앙증거자(信仰證據者)들을 도왔다. 그는 붙잡혀 홍주목사(洪州牧使) 앞에 끌려갔다. 그의 신문내용(訊問內容)은 알 수 없으나, 아무 형벌(刑罰)도 당하지 않고, 배교(背敎)한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석방(釋放)된 모양이다.
얼마 안 있어 그녀는 남편(男便)에게 전답(田畓)을 보살피라고 맡기고 그와 헤어져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기의 딸과 남편의 전실(前室) 소생의 아들 홍필주(洪 弼周) 필립보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살았다. 그녀가 무슨 동기(動機)로 그렇게 하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금욕생활(禁慾生活)을 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저 열심한 천주교인들 사이에서 살고자 그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끝으로 나중에 그에게 내려진 결안(結案)에 따르면, 남편(男便)에게 쫓겨났다고 한다. 과연 그녀의 남편은 박해(迫害)에 놀라기도 하고, 또 천주교(天主敎)를 실천(實踐)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姜(完淑) 골롬바에게 집을 나가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 설명이 훨씬 더 그럴 듯 하다.
⑦ 그러니까 周(文謨) 神父가 서울에 도착하였을 때에, 姜(完淑) 골롬바는 이미 서울에 와 있었다. 그는 池(璜) 사바와 그 동료들의 위험(危險)한 계획(計劃)을 돕기까지 하였었다.
神父가 볼 수 있는 모든 여교우(女敎友)들 중에서 姜(完淑)골롬바는 이내 그의 눈에 띄었다. 도착하자마자 그렇게도 헌신적(獻身的)인 보조자(補助者)를 만난 것이 너무 기뻐서 周(文謨) 神父는 그녀에게 성세(聖洗)를 주고, 여자(女子)들을 가르치는 일을 모두 맡기는 여회장(女會長)의 직책(職責)을 맡겼다. 姜(完淑)골롬바는 그 직책(職責)을 성실(誠實)히 수행(遂行)하였다.
⑧ 선교사(宣敎師)가 고발(告發)되어 포졸(捕卒)들에게 쫓기고 있을 때, 그것을 사전(事前)에 알게 된 姜(完淑) 골롬바는 그를 구할 용감(勇敢)한 생각을 가졌다. 그녀는 자기 집 장작광에 神父를 숨기고, 자기의 시어머니와 아들 홍필주(洪弼周)필립보에게까지도 모르게, 석 달 동안을 그리로 음식을 갖다 드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神父에게 좀더 편한 피신처(避身處)를 마련하여드릴 수 없는 것을 몹시도 괴로워했다. 한편으로는 시어머니가 자기의 용감한 심경(心境)과는 딴 판인 것을 보고는 감히 마음속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여 볼 계획(計劃)을 세워, 거의 계속해서 울고 탄식(歎息)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먹지도 않고 잠도 거의 자지를 않았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잃을까봐 겁이 나서 그렇게 근심하는 까닭을 물었다. 姜(完淑) 골롬바는 그녀에게 말하였다.
ꡒ신부님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영혼을 구하러 여기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신부님은 지금 피신할 곳도 없으십니다. 제가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이 생각을 할 때마다 어찌 몹시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남장을 하고 사방을 두루 다녀 신부님을 찾아내어 구원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ꡓ
시어머니는 울면서 대답하였다.
ꡒ네가 그렇게 하면 내가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느냐? 그러니 나도 너를 따라가서 너와 함께 죽겠다.ꡓ
姜(完淑) 골롬바는 다시 말하였다.
ꡒ어머님, 저는 어머님의 덕행이 어느 정도에 까지 이르렀는지를 보고 매우 위로를 받습니다. 저는 물론 신부님을 구하기 위해서 제 목숨을 내어놓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는 우리가 신부님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고, 공연히 위험만 당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천주께서 우리의 착한 뜻을 보시고, 신부님이 우리있는 데로 오시게 허락하실 지도 모릅니다. 신부님이 나타나시면 어머님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이 거기에 동의하신다는 확약만 해주시면 저는 곧 마음의 평화를 얻겠습니다. 저는 전에 가졌던 기쁨을 되찾아 어머님께 죽을 때까지 효성을 다하겠습니다.ꡓ
시어머니는
ꡒ너하고 떨어지기는 싫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ꡓ하고 대답하였다. 姜(完淑) 골롬바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神父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안사랑으로 그를 모셔들었다. 周文謨 神父는 거기에서, 외부 사람들에게는 양반(兩班)집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는 조선관습(朝鮮慣習)의 보호로 3년 동안 계속하여 머물렀다.
4. 周(文謨) 神父의 사목활동과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활약
① 1796년 9월(양력)에 周(文謨)신부는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글을 보내어 자신의 처지와 조선천주교회의 현황(現況)을 보고하였다. 경찰의 끊임없는 사찰(査察)과 특히 국경(國境)의 더욱 엄중해진 감시(監視)로 인하여 그 전해에는 周(文謨)신부가 편지(便紙)를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② 덕산(德山) 고을 용머리에서 출생한 황필(黃泌)토마스는 1795년 국경(國境)에서 신부(神父)를 기다렸던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 그 사람 이 밀사(密使)로 뽑혔다. 그는 사신(使臣) 일행 중 한 사람의 하인(下人) 자리를 돈을 주고 사야만 했다.
황필(黃泌)토마스는 周(文謨)신부의 라틴어편지와 교우(敎友)들의 한문편지가 씌어진 명주 두 조각을 주의 깊게 옷 속에 감추어가지고 길을 떠나, 1797년 1월28일(양력)에 북경(北京)에 도착하였다.
③ 구베아(Gouvea)주교(主敎)는 선교사(宣敎師)와 신자(信者)들의 편지를 읽는 동안, 극도의 불안(不安)에서 가장 생생한 기쁨으로 옮아갔다. 周(文謨)신부는 자기의 편지에 조선교회(朝鮮敎會)에 평화(平和)를 마련해 줄 수 있는 방법(方法)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포르투갈 조정(朝廷)에 대하여 사절(使節) 한 사람을 보내어 조선왕(朝鮮王)에게 인사(人事)를 드리게 하여 그와 동맹(同盟)을 맺게 한다는 것이었고, 그 사절(使節)과 함께 수학(數學)과 의학(醫學)에 조예(造詣)가 깊은 신부(神父)들을 보내어 그들이 이 나라에 자리를 잡을 수 있고, 포르투갈 왕에 대한 경의(敬意)로 그들을 조선정부(朝鮮政府)가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건의(建議)에 대하여 사절(使節)의 파견을 요청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무도 전혀 파견(派遣)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④ 周(文謨)신부가 조선말과 이 나라의 풍속(風俗)을 넉넉히 알게 되자 이내 신자(信者)들에게 성사(聖事)를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조심하며 행해졌다. 그가 나갈 때에는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만이 어디에 가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의 모든 거동(擧動)은 조심스럽게 감춰졌다. 그는 가장 확실(確實)한 교우(敎友)들과만 접촉(接觸)을 가졌고, 대부분은 특히 지방(地方)에서는 조선에 신부(神父)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까 말까 할 정도였다.
신부(神父)는 그를 맞아들이는 집안의 식구에게도 아무에게나 자기모습을 보이지는 않았고, 누구도 신부(神父)가 와있다고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교우(敎友)의 하인(下人)들까지도 그것을 짐작만 하는 때가 많았다. 그 시대의 어떤 교우(敎友)가 쓴 편지(便紙)의 다음과 같은 발췌문(拔萃文)은 비밀(秘密)이 얼마나 엄중(嚴重)하게 지켜졌는지를 알게 하여 준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은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殉敎)한 신대보(申大甫) 베드로였다. 그는 이 편지를, 조선 천주교의 처음 시기에 관한 모든 기억(記憶)을 정성들여 모으던 샤스땅(Chstan) 神父의 명령에 따라 1838년에 옥(獄)에서 썼다.
⑤『내 친척 이「여진」요한과 나는 5년 전부터 교우(敎友)였으나 별로 열심하지는 않았었습니다. 우리는 신부(神父) 보기를 간절히 원하여, 공직(公職)에 있는 내 친구 중 한 교우(敎友)에게 오래 전부터 진이 빠지도록 질문(質問)을 하였습니다. 하룻밤은 내가 그의 집에서 잤는데, 아침에 내가 조르는 데에 대한 대답(對答)으로, 일어나서 장에서 버선 한 켤레를 꺼내 주며 신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매우 이상히 생각하며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ꡒ장난도 심하구만. 왜 어른에게 아이의 버선을 신으라는 거야?ꡓ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ꡒ천주교는 아주 공평한 것이어서 거기에 대해서는 어른도 아이도 양반도 상놈도 없네. 그것은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서 큰 발에나 작은 발에나 다 맞는 이 버선과 비슷한 걸세. 천주교에서는 열심하기만 하면 신부를 볼 수 있네. 그것은 조금만 애를 쓰면 큰 발에도 얼마든지 신을 수 있는 이 버선과 같은 것일세.ꡓ
과연 나는 그것을 신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양(西洋)에서 온 버선으로 양털로 만든 것이어서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질문(質問)을 거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도 더는 듣지를 못했습니다. 나는 열흘 후에 다시 가서 다른 교우(敎友)들에게 물어 보았고, 이번에는 이「여진」요한을 보냈으나, 어디를 가도 절대적인 침묵(沈黙)뿐이었습니다. 요컨대 이「여진」요한과 나는 우리 집에서 140리나 떨어진 서울을 차례로 7~8번을 내왕(來往)했으나, 언제나 허사(虛事)였습니다. 이「여진」요한은 좋은 기회(機會)를 더 쉽게 잡기 위하여, 가족(家族)을 버리고 서울에 와서 살기까지 하였습니다… . 어떤 노력(努力)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부(神父)를 보는 위안(慰安)을 결코 가질 수 없었습니다. 신부(神父)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消息)을 나중에 듣게 되니 우리의 후회(後悔)는 더할 뿐이었습니다.』
⑥ 하느님의 은총(恩寵)을 주리고 목말라하는 많은 사람이 같은 시기(時期)에 이와 비슷한 발걸음을 얼마나 많아 하였겠는가? 그리고 천주교(天主敎)의 도움 가운데 살면서, 그것을 이용(利用)할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 그 많은 천주교인(天主敎人)에게는 이 얼마나 큰 교훈(敎訓)인가?
그러나 그렇게도 엄중(嚴重)한 조심을 우리는 지나친 것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신부(神父)가 조선에 와 있다는 것은 정부(政府)에 알려져 있었고, 사찰(査察)이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날마다 체포(逮捕)가 잇따랐다. 양떼 전체(全體)의 생명(生命)이 그의 머리에 달려 있는 것 같은, 오직 하나인 목자(牧者)를 보호(保護)하기 위하여 어떤 조심을 하였더라도 지나쳤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⑦ 周(文謨)神父가 이런 비밀(秘密)에 둘러싸여 있었으니, 조선전설(朝鮮傳說)이 그의 사목활동(司牧活動)에 대하여 거의 아무것도 우리에게 전하여 주지 않음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 알려진 것은 다만 그가 서울에서는 정약종(丁若鍾)아우구스띠노와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과 홍익만(洪翼萬) 안또니오 집에 몇 번 갔다는 일이다. 그는 또 양제궁(良娣宮) 혹은 폐궁(廢宮)에도 여러 번 갔었고, 거기에 얼마 동안 머무른 듯 하다.
이궁(宮)은 왕의 서제(庶弟) 이인 (李인) 또는 일왕손(逸王孫)의 궁이었는데,그의 아들 심(심)이 반역(反逆)을 꾸몄다는 죄로 사형(死刑)을 받았었다. 대관(大官)들은 그의 아버지도 죽이고자 하였으나, 王은 그것을 허락(許諾)하지 않고 다만 그를 강화도(江華島)로 귀양을 보내는 데에 그쳤다.
⑩ 폐궁(廢宮)에는 여자 둘만 남아 있었으니, 귀양 간 이인(李인)의 아내와 그의 며느리 즉 심(심)의 미망인이었다. 어떤 여교우(女敎友)가 그들의 불행(不幸)을 동정하여 1791년인가 1792년경에 천주교(天主敎)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었다. 불행(不幸)으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이 준비(準備)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쉽게 입교(入敎)하였다. 그러나 무슨 불상사(不祥事)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아무도 그들과 감히 접촉(接觸)하지 못했다.
다만 용감한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만이 그런 겁을 내지 않고 그 두 왕족(王族)을 보러가고, 神父를 그 집에 모셔가기까지 하여 성사(聖事)를 받게 하였다.이인(李인)의 아내는 송(宋) 마리아요 그의 며느리는 신(申) 마리아였다. 그들은 둘 다 매우 열심하게 되어 그들의 종(從) 여럿을 입교(入敎)시켰으며 명도회(明道會)에 입회(入會)하였다.
그들은 神父를 궁(宮)에 모셔 들이는 것이 몹시도 기뻤다. 神父가 거기에 있을 때는, 같이 붙어있는 홍익만(洪翼萬) 안또니오의 집에서 벽에 비밀히 뚫어놓은 구멍으로 왕래(往來)할 수가 있는, 따로 떨어진 방에 숨어 있었다.
귀양간 이인(李인)도 궁(宮)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런 방해(妨害)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은 끝내 천주교인(天主敎人)이 되지 않았다.
⑪ 周(文謨) 神父는 지방순회(地方巡廻)도 여러 번 하였다. 그는 자기를 인도(引導)하여 들여온 여주(驪州) 고을 尹(有一) 바오로의 집에도 갔었고, 전라도(全羅道) 전주(全州) 초남(草南)에 사는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오의 집에도 얼마동안 머물렀다.
그가 고산(高山), 염포(鹽浦), 공주(公州), 온양(溫陽) 등의 고을과 내포(內浦)에도 갔었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느 시기(時期)에 이 여러 번의 순회(巡廻)를 하였으며, 성과(成果)가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시대(時代)의 수기(手記)는 우리에게 아무런 사항(事項)도 남겨 놓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어디서나 이 선교사(宣敎師)를 보호(保護)하기로 되어 있던 엄중한 비밀(秘密)과, 박해(迫害)로 인하여 일어난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대부분(大部分)의 교우(敎友)들이 그 때 성사(聖事)를 받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⑫ 그런데 교우들이 周(文謨) 神父를 칭찬하는 데는 일치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周(文謨) 神父는 일에 지칠 줄을 몰라, 먹고 자는 데 필요한 시간을 겨우 낼 지경이었다. 그는 금식(禁食)을 하고 자기본분(自己本分)에 자기를 온전히 바쳤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종(從)의 덕행(德行)의 광채를 기적(奇蹟)으로 더 빛나게 하고자 하신 것 같다.
믿을 만한 전설(傳說)에 의하면, 그가 서울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창골에 화재(火災)가 났었다고 한다. 불은 24시간을 계속하였는데, 그때에 神父는 그 무서운 피해(被害)를 딱하게 여겨, 자신은 현장(現場)에 갈 수가 없었으므로, 송(宋)필립보의 젊은 아들을 보내어 성수(聖水)를 뿌리라고 명령하였다. 젊은이가 심부름하는 동안 周(文謨) 神父는 기도(祈禱)를 드리고 있었는데, 거의 즉시 바람의 방향(方向)이 바뀌어 폐허(廢墟)밖에 남지 않은 쪽으로 불길이 몰아쳤다고 한다.
⑬ 조선의 전기(傳記)에 의하면 周(文謨) 神父의 조심성과 재능(才能), 열성(熱性), 덕행(德行)등은 일반 사람들의 수준(水準)을 넘는 것이었다. 그는 위험(危險)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많은 첨단(尖端)으로 둘러싸서 그 모서리를 감추기에 이른 규(圭: 옛날 왕조들의 고관을 나타내는 상아조각)와도 같이, 조심성과 임기응변(臨機應變)을 많이 써서 모든 위험(危險)한 고비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가 조선(朝鮮)에 들어왔을 때에는 천주성교(天主聖敎)가 막 탄생한 길이었다. 그 교리(敎理)의 광채(光彩)는 마치 천주교인들의 큰 무지(無知)로 가려져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불행(不幸)을 막기 위하여 그는 책을 짓고 직접 가르칠 뿐만 아니라, 단호(斷乎)하고 지혜(智慧)로운 수단(手段)으로 폐습(弊習)을 고쳐, 모든 이로 하여금 신앙(信仰)의 실천(實踐)을 충실히 하도록 하기에 성공(成功)하였다.
그는 북경(北京)에 오래 전부터 세워져 있는 비슷한 회(會)를 본을 떠서 명도회(明道會) 즉 천주교 교리(敎理)를 가르치는 회(會)를 세웠는데, 그에 대하여는위에서 말 한 바 있다. 명도회원(明道會員)들의 목적(目的)은 우선 자신들이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깊은 지식(知識)을 얻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교우(敎友)와외교인(外敎人)들에게 전파(傳播)하도록 서로 격려(激勵)하고 서로 도와주는 데 있었다.
정약종(丁若鍾) 아우그스띠노가 그 회의 회장(會長)으로 임명되었다. 그런 다음에 周(文謨) 神父는 시내에서 회합(會合)을 가져야 하는 장소(場所)를 정하고, 집회(集會)를 주관하여야 하는 지도자(指導者)들을 임명하고, 남자들은 여자와 서로 떨어져 회의에 참석하도록 정하는 등, 한마디로 모든 것을 무게 있고 절도 있게 조절하였다.
周(文謨) 神父의 열성(熱性)에 감화되어, 많은 회원은 지도자(指導者)들이 매달 각 회원(會員)에게 나누어 주는 표지(標識)를 받으러 서둘러 모여들었다. 그 표지(標識)에는 교회(敎會)에서 공경(恭敬)하는 성인(聖人) 들 중의 하나를 주보(主保)로 지정하였는데, 그것이 주보(主保)의 표지(標紙)라는 것이었다. 이런 실천(實踐)은 차차 전국에 퍼져서 신기(神奇)한 결과(結果)를 냈다.
⑭ 周(文謨) 神父는 자기의 모든 노력을 하는데 있어서 강완숙(姜完淑)골롬바의 매우 효과적(效果的)인 협력(協力)을 얻었다. 집안에서는 강완숙(姜完淑)골롬바가 神父의 시중을 들면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하였으며, 밖으로는 모든 중요한 일에 관여(關與)하였는데, 하느님께서는 그의 하는 일을 축복(祝福)하시어 언제나 성공(成功)하게 도와주셨다.
강완숙(姜完淑)골롬바는 견실(堅實)한 지식(知識)에 크나큰 말재주를 겸하였으므로 여자(女子)들을 많이 입교(入敎)시켰는데, 그 중에는 높은 양반집 부인(婦人)들도 상당히 있었다. 국법(國法)은 반역죄(反逆罪)를 제외하고는 양반집 부인(婦人)들에게 형벌(刑罰)을 가하지 않았으므로, 이 여자신입교우(女子新入敎友)들은 정부(政府)의 금령(禁令)을 개의치 않았다.
⑮ 강완숙(姜完潚)골롬바는 처녀(處女)들도 많이 모아서 단단한 교육(敎育)을 시켰다. 그녀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녀의 집에 와서 사는 동정녀(童貞女) 윤점혜(尹占惠) 아가다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 동정녀(童貞女)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나올 것이다. 그 처녀(處女)들이 결혼(結婚)한 다음에는 각기 열성(熱性) 있는 사도(使徒)가 되어 그들이 새로 들어간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天主敎 信仰)을 전하여 부모(父母) 친척(親戚)과 친지(親知)들을 입교(入敎)시키는 일이 자주 있었다.
비상한 정력(精力)과 활동력(活動力)을 타고 났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恩寵)의 도움을 받은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는 모든 자선사업(慈善事業)을 고무(鼓舞)하고 지도(指導)하였다. 모든 교우들이 그녀를 사랑하고 우러러보았다. 교우(敎友)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ꡒ강완숙(姜完淑)골롬바는 힘차고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하고, 이를테면 모든 일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비록 남자들 중에 열심한 교우가 많았으나, 모두가 기꺼이 그녀의 교화를 받고,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이 정확하게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 그녀는 불이 짚에 붙듯 열심한 그녀의 애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복잡한 일과 크나큰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녀는 마치 뒤엉킨 뿌리 뭉치를 확실하게 끊고 가르는 손과 같이 능란하게 처리하였다.ꡓ
그러므로 그 시대에 천주교(天主敎)가 이룩한 진전(進展)의 대부분은 그녀에게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 발전(發展)은 매우 큰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要約)할 수 있다.
周(文謨) 神父가 오기 전에는 조선의 천주교인(天主敎人)이 약 4천명 이었는데, 몇 해 후에는 그 숫자가 1만 여명에 이르렀다.
―이상, 본문 상권 393쪽까지―
이상 달레한국천주교회사에서 퍼온글
① 강완숙(姜完淑) 골룸바는 내포(內浦)지방의 외교인(外敎人) 향반(鄕班) 집안에서 태어났다.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통찰력(洞察力)과 곧고 단단하고 용감(勇敢)한 마음을 아울러 보여 주었다. 그는 나쁜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으며, 자기 어머니의 까다로운 성격(性格)을 잘 참아 받았다.
고결(高潔)한 그의 마음은 벌써 위대한 무엇을 갈망(渴望)하고 있었다. 그는 불교(佛敎)의 격언(格言)을 실천(實踐)하기에 노력하였으며, 이 종파(宗派)의 도(道)를 닦는 데 전념(專念)하기 위하여 속세(俗世)를 버릴 결심을 가졌었다는 말도 있다.
②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는 덕산(德山) 고을에 사는 홍지영(洪芝榮)이라는 상처한 향반(鄕班)에게 시집을 갔었는데, 남편 홍지영(洪芝榮)은 극도로 순박(淳朴)하지만 조금도 총명(聰明)한 데가 없어, 姜(完淑)골롬바는 그와 화합(和合)하여 살기가 매우 힘들었고 많은 근심을 겪게 되었다.
姜(完淑)골롬바는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 하였고, 또 그녀의 친절과 상냥함으로 꽤 까다로운 성격(性格)을 가진 시어머니의 사랑을 얻을수 있었다.
③ 姜(完淑)골롬바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남편의 친척 바오로라는 사람으로부터 천주교 이야기를 들었다. 姜(完淑) 골롬바는
ꡒ천주라면 하늘과 땅의 주인일 것이다. 이 종교의 이름은 옳다. 그렇다면 그 교리는 진리일 것이다.ꡓ하고 생각하였다.
그가 책을 청하여 그것을 읽는 중에 그의 마음은 복음(福音)의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진리(眞理)를 깨달았다. 姜(完淑)골롬바는 그의 영혼(靈魂)의 모든 능력(能力)을 기울여 천주교에 열중하였고, 신자생활(信者生活)의 첫걸음부터 영웅적(英雄的)인 덕행(德行)을 갈망(渴望)하였다. 그녀의 모든 본분을 다하는 데 있어서의 부지런함과 열심(熱心)과 극기(克己)는 가히 감탄할 만 하였다
④ 그녀는 자기 가족(家族)과 친척(親戚)과 친구들을 입교(入敎)시키는데 골몰하였고, 그녀의 열성(熱性)은 이웃 동네에까지 미쳤다. 그의 남편(男便)은 그 관심(關心)의 주요한 대상(對象)이었다.
姜(完淑) 골롬바가 그에게 천주교인이 되라고 권하면 그는 ꡒ옳소, 옳아!ꡓ하고 말하였지만, 그 다음에 천주교의 적(敵)들이 그 교를 비난하면, 그렇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그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다. 아내가 나무라면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다가, 나쁜 친구들이 다시 그를 보러 오면 전과 마찬가지로 행동하곤 하였다. 姜(完淑) 골롬바는 그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成果)도 올리지 못하였으며, 자기는 도저히 남편(男便)에게 천주교를 진실(眞實)한 마음으로 실천(實踐)하게 만들지 못하리라 는 것을 깨달았다.
⑤ 姜(完淑) 골롬바는 또 시어머니를 입교(入敎)시키는 데에도 전념(專念)하였다. 시어머니는 하느님을 섬기고 천주교 기도문(祈禱文)을 외우기 시작했지만, 조상숭배(祖上崇拜)를 버릴 결심(決心)은 하지 못하였다. 姜(完淑) 골롬바는 끊임없이 시어머니에게 권하고, 특히 그의 완전한 회개(悔改)를 얻기 위하여 하느님께 열렬히 기도(祈禱)를 드렸다.
그의 기도(祈禱)는 마침내 들어졌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가묘(家廟)를 쓸고 있는데 별안간 물건(物件) 깨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고 방의 들보와 기둥이 흔들렸다. 원인(原因)을 찾아낼 수가 없는 그 괴상한 소리에 겁이 나서 그녀는 며느리에게 달려가 그 품에 안기며 자기의 헛된 미신(迷信)을 끊어버렸다. 이승리(勝利)를 거둔 뒤 姜(完淑)골롬바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도 입교(入敎)시고, 그들은 둘이 다 모범적(模範的)으로 세상을 떠났다.
⑥ 1791년 박해(迫害)가 일어나자, 姜(完淑)골롬바는 음식을 만들어 옥에 갖다 줌으로써 신앙증거자(信仰證據者)들을 도왔다. 그는 붙잡혀 홍주목사(洪州牧使) 앞에 끌려갔다. 그의 신문내용(訊問內容)은 알 수 없으나, 아무 형벌(刑罰)도 당하지 않고, 배교(背敎)한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석방(釋放)된 모양이다.
얼마 안 있어 그녀는 남편(男便)에게 전답(田畓)을 보살피라고 맡기고 그와 헤어져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기의 딸과 남편의 전실(前室) 소생의 아들 홍필주(洪 弼周) 필립보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살았다. 그녀가 무슨 동기(動機)로 그렇게 하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금욕생활(禁慾生活)을 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저 열심한 천주교인들 사이에서 살고자 그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끝으로 나중에 그에게 내려진 결안(結案)에 따르면, 남편(男便)에게 쫓겨났다고 한다. 과연 그녀의 남편은 박해(迫害)에 놀라기도 하고, 또 천주교(天主敎)를 실천(實踐)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姜(完淑) 골롬바에게 집을 나가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 설명이 훨씬 더 그럴 듯 하다.
⑦ 그러니까 周(文謨) 神父가 서울에 도착하였을 때에, 姜(完淑) 골롬바는 이미 서울에 와 있었다. 그는 池(璜) 사바와 그 동료들의 위험(危險)한 계획(計劃)을 돕기까지 하였었다.
神父가 볼 수 있는 모든 여교우(女敎友)들 중에서 姜(完淑)골롬바는 이내 그의 눈에 띄었다. 도착하자마자 그렇게도 헌신적(獻身的)인 보조자(補助者)를 만난 것이 너무 기뻐서 周(文謨) 神父는 그녀에게 성세(聖洗)를 주고, 여자(女子)들을 가르치는 일을 모두 맡기는 여회장(女會長)의 직책(職責)을 맡겼다. 姜(完淑)골롬바는 그 직책(職責)을 성실(誠實)히 수행(遂行)하였다.
⑧ 선교사(宣敎師)가 고발(告發)되어 포졸(捕卒)들에게 쫓기고 있을 때, 그것을 사전(事前)에 알게 된 姜(完淑) 골롬바는 그를 구할 용감(勇敢)한 생각을 가졌다. 그녀는 자기 집 장작광에 神父를 숨기고, 자기의 시어머니와 아들 홍필주(洪弼周)필립보에게까지도 모르게, 석 달 동안을 그리로 음식을 갖다 드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神父에게 좀더 편한 피신처(避身處)를 마련하여드릴 수 없는 것을 몹시도 괴로워했다. 한편으로는 시어머니가 자기의 용감한 심경(心境)과는 딴 판인 것을 보고는 감히 마음속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여 볼 계획(計劃)을 세워, 거의 계속해서 울고 탄식(歎息)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먹지도 않고 잠도 거의 자지를 않았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잃을까봐 겁이 나서 그렇게 근심하는 까닭을 물었다. 姜(完淑) 골롬바는 그녀에게 말하였다.
ꡒ신부님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영혼을 구하러 여기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신부님은 지금 피신할 곳도 없으십니다. 제가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이 생각을 할 때마다 어찌 몹시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남장을 하고 사방을 두루 다녀 신부님을 찾아내어 구원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ꡓ
시어머니는 울면서 대답하였다.
ꡒ네가 그렇게 하면 내가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느냐? 그러니 나도 너를 따라가서 너와 함께 죽겠다.ꡓ
姜(完淑) 골롬바는 다시 말하였다.
ꡒ어머님, 저는 어머님의 덕행이 어느 정도에 까지 이르렀는지를 보고 매우 위로를 받습니다. 저는 물론 신부님을 구하기 위해서 제 목숨을 내어놓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는 우리가 신부님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고, 공연히 위험만 당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천주께서 우리의 착한 뜻을 보시고, 신부님이 우리있는 데로 오시게 허락하실 지도 모릅니다. 신부님이 나타나시면 어머님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이 거기에 동의하신다는 확약만 해주시면 저는 곧 마음의 평화를 얻겠습니다. 저는 전에 가졌던 기쁨을 되찾아 어머님께 죽을 때까지 효성을 다하겠습니다.ꡓ
시어머니는
ꡒ너하고 떨어지기는 싫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ꡓ하고 대답하였다. 姜(完淑) 골롬바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神父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안사랑으로 그를 모셔들었다. 周文謨 神父는 거기에서, 외부 사람들에게는 양반(兩班)집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는 조선관습(朝鮮慣習)의 보호로 3년 동안 계속하여 머물렀다.
4. 周(文謨) 神父의 사목활동과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활약
① 1796년 9월(양력)에 周(文謨)신부는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글을 보내어 자신의 처지와 조선천주교회의 현황(現況)을 보고하였다. 경찰의 끊임없는 사찰(査察)과 특히 국경(國境)의 더욱 엄중해진 감시(監視)로 인하여 그 전해에는 周(文謨)신부가 편지(便紙)를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② 덕산(德山) 고을 용머리에서 출생한 황필(黃泌)토마스는 1795년 국경(國境)에서 신부(神父)를 기다렸던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 그 사람 이 밀사(密使)로 뽑혔다. 그는 사신(使臣) 일행 중 한 사람의 하인(下人) 자리를 돈을 주고 사야만 했다.
황필(黃泌)토마스는 周(文謨)신부의 라틴어편지와 교우(敎友)들의 한문편지가 씌어진 명주 두 조각을 주의 깊게 옷 속에 감추어가지고 길을 떠나, 1797년 1월28일(양력)에 북경(北京)에 도착하였다.
③ 구베아(Gouvea)주교(主敎)는 선교사(宣敎師)와 신자(信者)들의 편지를 읽는 동안, 극도의 불안(不安)에서 가장 생생한 기쁨으로 옮아갔다. 周(文謨)신부는 자기의 편지에 조선교회(朝鮮敎會)에 평화(平和)를 마련해 줄 수 있는 방법(方法)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포르투갈 조정(朝廷)에 대하여 사절(使節) 한 사람을 보내어 조선왕(朝鮮王)에게 인사(人事)를 드리게 하여 그와 동맹(同盟)을 맺게 한다는 것이었고, 그 사절(使節)과 함께 수학(數學)과 의학(醫學)에 조예(造詣)가 깊은 신부(神父)들을 보내어 그들이 이 나라에 자리를 잡을 수 있고, 포르투갈 왕에 대한 경의(敬意)로 그들을 조선정부(朝鮮政府)가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건의(建議)에 대하여 사절(使節)의 파견을 요청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무도 전혀 파견(派遣)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④ 周(文謨)신부가 조선말과 이 나라의 풍속(風俗)을 넉넉히 알게 되자 이내 신자(信者)들에게 성사(聖事)를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조심하며 행해졌다. 그가 나갈 때에는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만이 어디에 가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의 모든 거동(擧動)은 조심스럽게 감춰졌다. 그는 가장 확실(確實)한 교우(敎友)들과만 접촉(接觸)을 가졌고, 대부분은 특히 지방(地方)에서는 조선에 신부(神父)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까 말까 할 정도였다.
신부(神父)는 그를 맞아들이는 집안의 식구에게도 아무에게나 자기모습을 보이지는 않았고, 누구도 신부(神父)가 와있다고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교우(敎友)의 하인(下人)들까지도 그것을 짐작만 하는 때가 많았다. 그 시대의 어떤 교우(敎友)가 쓴 편지(便紙)의 다음과 같은 발췌문(拔萃文)은 비밀(秘密)이 얼마나 엄중(嚴重)하게 지켜졌는지를 알게 하여 준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은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殉敎)한 신대보(申大甫) 베드로였다. 그는 이 편지를, 조선 천주교의 처음 시기에 관한 모든 기억(記憶)을 정성들여 모으던 샤스땅(Chstan) 神父의 명령에 따라 1838년에 옥(獄)에서 썼다.
⑤『내 친척 이「여진」요한과 나는 5년 전부터 교우(敎友)였으나 별로 열심하지는 않았었습니다. 우리는 신부(神父) 보기를 간절히 원하여, 공직(公職)에 있는 내 친구 중 한 교우(敎友)에게 오래 전부터 진이 빠지도록 질문(質問)을 하였습니다. 하룻밤은 내가 그의 집에서 잤는데, 아침에 내가 조르는 데에 대한 대답(對答)으로, 일어나서 장에서 버선 한 켤레를 꺼내 주며 신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매우 이상히 생각하며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ꡒ장난도 심하구만. 왜 어른에게 아이의 버선을 신으라는 거야?ꡓ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ꡒ천주교는 아주 공평한 것이어서 거기에 대해서는 어른도 아이도 양반도 상놈도 없네. 그것은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서 큰 발에나 작은 발에나 다 맞는 이 버선과 비슷한 걸세. 천주교에서는 열심하기만 하면 신부를 볼 수 있네. 그것은 조금만 애를 쓰면 큰 발에도 얼마든지 신을 수 있는 이 버선과 같은 것일세.ꡓ
과연 나는 그것을 신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양(西洋)에서 온 버선으로 양털로 만든 것이어서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질문(質問)을 거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도 더는 듣지를 못했습니다. 나는 열흘 후에 다시 가서 다른 교우(敎友)들에게 물어 보았고, 이번에는 이「여진」요한을 보냈으나, 어디를 가도 절대적인 침묵(沈黙)뿐이었습니다. 요컨대 이「여진」요한과 나는 우리 집에서 140리나 떨어진 서울을 차례로 7~8번을 내왕(來往)했으나, 언제나 허사(虛事)였습니다. 이「여진」요한은 좋은 기회(機會)를 더 쉽게 잡기 위하여, 가족(家族)을 버리고 서울에 와서 살기까지 하였습니다… . 어떤 노력(努力)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부(神父)를 보는 위안(慰安)을 결코 가질 수 없었습니다. 신부(神父)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消息)을 나중에 듣게 되니 우리의 후회(後悔)는 더할 뿐이었습니다.』
⑥ 하느님의 은총(恩寵)을 주리고 목말라하는 많은 사람이 같은 시기(時期)에 이와 비슷한 발걸음을 얼마나 많아 하였겠는가? 그리고 천주교(天主敎)의 도움 가운데 살면서, 그것을 이용(利用)할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 그 많은 천주교인(天主敎人)에게는 이 얼마나 큰 교훈(敎訓)인가?
그러나 그렇게도 엄중(嚴重)한 조심을 우리는 지나친 것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신부(神父)가 조선에 와 있다는 것은 정부(政府)에 알려져 있었고, 사찰(査察)이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날마다 체포(逮捕)가 잇따랐다. 양떼 전체(全體)의 생명(生命)이 그의 머리에 달려 있는 것 같은, 오직 하나인 목자(牧者)를 보호(保護)하기 위하여 어떤 조심을 하였더라도 지나쳤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⑦ 周(文謨)神父가 이런 비밀(秘密)에 둘러싸여 있었으니, 조선전설(朝鮮傳說)이 그의 사목활동(司牧活動)에 대하여 거의 아무것도 우리에게 전하여 주지 않음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 알려진 것은 다만 그가 서울에서는 정약종(丁若鍾)아우구스띠노와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과 홍익만(洪翼萬) 안또니오 집에 몇 번 갔다는 일이다. 그는 또 양제궁(良娣宮) 혹은 폐궁(廢宮)에도 여러 번 갔었고, 거기에 얼마 동안 머무른 듯 하다.
이궁(宮)은 왕의 서제(庶弟) 이인 (李인) 또는 일왕손(逸王孫)의 궁이었는데,그의 아들 심(심)이 반역(反逆)을 꾸몄다는 죄로 사형(死刑)을 받았었다. 대관(大官)들은 그의 아버지도 죽이고자 하였으나, 王은 그것을 허락(許諾)하지 않고 다만 그를 강화도(江華島)로 귀양을 보내는 데에 그쳤다.
⑩ 폐궁(廢宮)에는 여자 둘만 남아 있었으니, 귀양 간 이인(李인)의 아내와 그의 며느리 즉 심(심)의 미망인이었다. 어떤 여교우(女敎友)가 그들의 불행(不幸)을 동정하여 1791년인가 1792년경에 천주교(天主敎)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었다. 불행(不幸)으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이 준비(準備)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쉽게 입교(入敎)하였다. 그러나 무슨 불상사(不祥事)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아무도 그들과 감히 접촉(接觸)하지 못했다.
다만 용감한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만이 그런 겁을 내지 않고 그 두 왕족(王族)을 보러가고, 神父를 그 집에 모셔가기까지 하여 성사(聖事)를 받게 하였다.이인(李인)의 아내는 송(宋) 마리아요 그의 며느리는 신(申) 마리아였다. 그들은 둘 다 매우 열심하게 되어 그들의 종(從) 여럿을 입교(入敎)시켰으며 명도회(明道會)에 입회(入會)하였다.
그들은 神父를 궁(宮)에 모셔 들이는 것이 몹시도 기뻤다. 神父가 거기에 있을 때는, 같이 붙어있는 홍익만(洪翼萬) 안또니오의 집에서 벽에 비밀히 뚫어놓은 구멍으로 왕래(往來)할 수가 있는, 따로 떨어진 방에 숨어 있었다.
귀양간 이인(李인)도 궁(宮)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런 방해(妨害)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은 끝내 천주교인(天主敎人)이 되지 않았다.
⑪ 周(文謨) 神父는 지방순회(地方巡廻)도 여러 번 하였다. 그는 자기를 인도(引導)하여 들여온 여주(驪州) 고을 尹(有一) 바오로의 집에도 갔었고, 전라도(全羅道) 전주(全州) 초남(草南)에 사는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오의 집에도 얼마동안 머물렀다.
그가 고산(高山), 염포(鹽浦), 공주(公州), 온양(溫陽) 등의 고을과 내포(內浦)에도 갔었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느 시기(時期)에 이 여러 번의 순회(巡廻)를 하였으며, 성과(成果)가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시대(時代)의 수기(手記)는 우리에게 아무런 사항(事項)도 남겨 놓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어디서나 이 선교사(宣敎師)를 보호(保護)하기로 되어 있던 엄중한 비밀(秘密)과, 박해(迫害)로 인하여 일어난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대부분(大部分)의 교우(敎友)들이 그 때 성사(聖事)를 받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⑫ 그런데 교우들이 周(文謨) 神父를 칭찬하는 데는 일치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周(文謨) 神父는 일에 지칠 줄을 몰라, 먹고 자는 데 필요한 시간을 겨우 낼 지경이었다. 그는 금식(禁食)을 하고 자기본분(自己本分)에 자기를 온전히 바쳤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종(從)의 덕행(德行)의 광채를 기적(奇蹟)으로 더 빛나게 하고자 하신 것 같다.
믿을 만한 전설(傳說)에 의하면, 그가 서울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창골에 화재(火災)가 났었다고 한다. 불은 24시간을 계속하였는데, 그때에 神父는 그 무서운 피해(被害)를 딱하게 여겨, 자신은 현장(現場)에 갈 수가 없었으므로, 송(宋)필립보의 젊은 아들을 보내어 성수(聖水)를 뿌리라고 명령하였다. 젊은이가 심부름하는 동안 周(文謨) 神父는 기도(祈禱)를 드리고 있었는데, 거의 즉시 바람의 방향(方向)이 바뀌어 폐허(廢墟)밖에 남지 않은 쪽으로 불길이 몰아쳤다고 한다.
⑬ 조선의 전기(傳記)에 의하면 周(文謨) 神父의 조심성과 재능(才能), 열성(熱性), 덕행(德行)등은 일반 사람들의 수준(水準)을 넘는 것이었다. 그는 위험(危險)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많은 첨단(尖端)으로 둘러싸서 그 모서리를 감추기에 이른 규(圭: 옛날 왕조들의 고관을 나타내는 상아조각)와도 같이, 조심성과 임기응변(臨機應變)을 많이 써서 모든 위험(危險)한 고비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가 조선(朝鮮)에 들어왔을 때에는 천주성교(天主聖敎)가 막 탄생한 길이었다. 그 교리(敎理)의 광채(光彩)는 마치 천주교인들의 큰 무지(無知)로 가려져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불행(不幸)을 막기 위하여 그는 책을 짓고 직접 가르칠 뿐만 아니라, 단호(斷乎)하고 지혜(智慧)로운 수단(手段)으로 폐습(弊習)을 고쳐, 모든 이로 하여금 신앙(信仰)의 실천(實踐)을 충실히 하도록 하기에 성공(成功)하였다.
그는 북경(北京)에 오래 전부터 세워져 있는 비슷한 회(會)를 본을 떠서 명도회(明道會) 즉 천주교 교리(敎理)를 가르치는 회(會)를 세웠는데, 그에 대하여는위에서 말 한 바 있다. 명도회원(明道會員)들의 목적(目的)은 우선 자신들이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깊은 지식(知識)을 얻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교우(敎友)와외교인(外敎人)들에게 전파(傳播)하도록 서로 격려(激勵)하고 서로 도와주는 데 있었다.
정약종(丁若鍾) 아우그스띠노가 그 회의 회장(會長)으로 임명되었다. 그런 다음에 周(文謨) 神父는 시내에서 회합(會合)을 가져야 하는 장소(場所)를 정하고, 집회(集會)를 주관하여야 하는 지도자(指導者)들을 임명하고, 남자들은 여자와 서로 떨어져 회의에 참석하도록 정하는 등, 한마디로 모든 것을 무게 있고 절도 있게 조절하였다.
周(文謨) 神父의 열성(熱性)에 감화되어, 많은 회원은 지도자(指導者)들이 매달 각 회원(會員)에게 나누어 주는 표지(標識)를 받으러 서둘러 모여들었다. 그 표지(標識)에는 교회(敎會)에서 공경(恭敬)하는 성인(聖人) 들 중의 하나를 주보(主保)로 지정하였는데, 그것이 주보(主保)의 표지(標紙)라는 것이었다. 이런 실천(實踐)은 차차 전국에 퍼져서 신기(神奇)한 결과(結果)를 냈다.
⑭ 周(文謨) 神父는 자기의 모든 노력을 하는데 있어서 강완숙(姜完淑)골롬바의 매우 효과적(效果的)인 협력(協力)을 얻었다. 집안에서는 강완숙(姜完淑)골롬바가 神父의 시중을 들면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하였으며, 밖으로는 모든 중요한 일에 관여(關與)하였는데, 하느님께서는 그의 하는 일을 축복(祝福)하시어 언제나 성공(成功)하게 도와주셨다.
강완숙(姜完淑)골롬바는 견실(堅實)한 지식(知識)에 크나큰 말재주를 겸하였으므로 여자(女子)들을 많이 입교(入敎)시켰는데, 그 중에는 높은 양반집 부인(婦人)들도 상당히 있었다. 국법(國法)은 반역죄(反逆罪)를 제외하고는 양반집 부인(婦人)들에게 형벌(刑罰)을 가하지 않았으므로, 이 여자신입교우(女子新入敎友)들은 정부(政府)의 금령(禁令)을 개의치 않았다.
⑮ 강완숙(姜完潚)골롬바는 처녀(處女)들도 많이 모아서 단단한 교육(敎育)을 시켰다. 그녀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녀의 집에 와서 사는 동정녀(童貞女) 윤점혜(尹占惠) 아가다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 동정녀(童貞女)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나올 것이다. 그 처녀(處女)들이 결혼(結婚)한 다음에는 각기 열성(熱性) 있는 사도(使徒)가 되어 그들이 새로 들어간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天主敎 信仰)을 전하여 부모(父母) 친척(親戚)과 친지(親知)들을 입교(入敎)시키는 일이 자주 있었다.
비상한 정력(精力)과 활동력(活動力)을 타고 났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恩寵)의 도움을 받은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는 모든 자선사업(慈善事業)을 고무(鼓舞)하고 지도(指導)하였다. 모든 교우들이 그녀를 사랑하고 우러러보았다. 교우(敎友)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ꡒ강완숙(姜完淑)골롬바는 힘차고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하고, 이를테면 모든 일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비록 남자들 중에 열심한 교우가 많았으나, 모두가 기꺼이 그녀의 교화를 받고,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이 정확하게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 그녀는 불이 짚에 붙듯 열심한 그녀의 애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복잡한 일과 크나큰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녀는 마치 뒤엉킨 뿌리 뭉치를 확실하게 끊고 가르는 손과 같이 능란하게 처리하였다.ꡓ
그러므로 그 시대에 천주교(天主敎)가 이룩한 진전(進展)의 대부분은 그녀에게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 발전(發展)은 매우 큰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要約)할 수 있다.
周(文謨) 神父가 오기 전에는 조선의 천주교인(天主敎人)이 약 4천명 이었는데, 몇 해 후에는 그 숫자가 1만 여명에 이르렀다.
―이상, 본문 상권 393쪽까지―
이상 달레한국천주교회사에서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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