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 모두가 세월이 약이더라
이제 내 몸도 어제 다르고 오늘이 달라, 하루가 다르게 짚불처럼 사그러 들고 있다 그래도 마음만은 아직도 이 세상이 영원할 것 같아 움켜잡은 자린고비 손 펴지 못하고 어제같이 발발 떨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그렇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90요년을 그렇게 살아온 몸에 밴 습관, 하루아침에 고쳐지지가 않는다.
오늘도 아침부터 몸은 천근만근 무겁키만 하다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방에 들어가 침대위에 벌렁 큰대자로 누워 아무런 생각 없이 천장을 쳐다본다. 오늘이 며칠 이들아! 벽에 걸린 달력을 힐 것 쳐다보니 6월하고도 25일이다 아! 그 지긋지긋하고 생각기조차하기도 싫은 동족상잔의 6월25날이구나.
6.25! 원한의 그날! 삼천리강토를 초토화 시키고 경찰관으로 근무하든 내 둘째형을 산화시켜 현충원에 잠들게 한 6.25 동족상잔의 그 날이다 우리가정을 가히 폐가지경에 이르게 한 그날이 어제 같은데 74주년이라니 무심한 세월은 참 빠르기도 하구나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의 비극은 없어야지 다짐을 하며 우리들의 후손만큼은 어떻게든 부국강병의 힘을 길러 유비무환으로 물려줘야지 밤을 낮 삼아 일하며 피땀으로 보릿고개도 넘어온 나날들도 뇌리에서 영사기처럼 돌아간다. 그러나 오늘날 어느 누구도 이 영감탱이들이 오늘의 10대 경제대국을 만들려고 고생했다고 알아주는 사람 없는 것은 고사하고 고지식한 수구꼴통으로 바라보지만 않았으면 그래도 대행이겠다!
너무나 원통하다 모두가 제 잘났어. 오늘의 풍요를 누린다고 말하지 늙은이들의 피땀의 결정체라고 알아주는 이 없고 다만 시내버스에 오르면 “사랑합니다”. 하는 소리는 청각장애자 내 귀에도 왜? 그렇게도 크게 들리는지? 다른 사람들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하는데 유독 나만 ”사랑합니다“하니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공짜배기 영감탱이가 탔다” 라고 큰소리로 외치는 것 같다 이것도 듣고 듣고 또 들으면 세월이 약이 되어 잊히려나. 모르겠다.
날씨는 후덥지근하게 비가 내릴 듯 말 듯 우중충하니 졸음도 온다. 요사이는 어쩐지 잠이 많아졌다 이제 곧 영원이 잠들 날도 코앞인데 이제는 잠자는 것이 내 직업이 된 것 같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작년 이맘때일이 가물가물 떠오른다. 6월초 순인가? 중순인가? 확실치 않으나 6월의 어느 날이다.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 떼가 몰려오더니 하늘이 찌어지는 덧 우당탕 천둥소리와 함께 소낙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아니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줄기에 우리 집 뒤뜰은 순식간에 빗물에 흥건히 잠겼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늙은이가 뒤뚱거려 봐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냥 멍청하게 바라만 볼뿐 대책이 없다 만사가 이지경이니 내 어찌 할 것인가 한참 정신없이 설치고 나니 목도 마른다. 애라! 모르겠다. 비가그치면 어떻게 되겠지. 설마 집이야 떠내려가겠나? 하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먹다 남은 소주가 조금 남아있다
안주도 없다 깡소주 한잔 마시고 물 한 모금 마시니 조급하든 마음도 조금 느긋해진다 참! 술이 좋다 만사는 세월이 약이라 이렇게 해결해 주는구나. 인간사 모두를 세월에 맡기면 된다.
나는 이제 아무 곳에도 쓸모 가 없는 늙은이다 나를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스스로 물어봐도 그것도 세월이다 어찌하랴 가는 세월의 포로가 된 이 몸을 세월이 가자는 데로 따라가야지 거역할 수도 없지 않나 요란하게 폭우가 쏟아지는 이 밤도 지나고 나면 광명의 맑은 날이 오기 마련이다 그 또한 세월이다
그래! 오늘은 이렇게라도 보내겠지만 내일은 또 어떻게 하루를 보낼까 코앞의 일도 감당 못하면서 내일을 걱정하는 쓸데없는 늙은이가 또 걱정에 걱정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살아가는 것이 내 몸에 밴 직업이 된 것 같다
아무런 소일 꺼리도 없다 멍청하게 방콕에 갇혀있으니 너무나 무료하다
적적해서 어디로 바깥나들이 라도 해 볼가해도 갈 곳도 없지만 나를 반겨줄 그, 아무도 없다 내젊은 지난날 오라는데도 많았고 찾아가야할 곳도 많았는데 어쩌다 세상은 이렇게 변해버렸나
책상 앞에 앉아 글이라도 한줄 쓰면서 가는 세월 배웅이라도 해보려고 해도 글이 안 된다 구상도 안 되지만 어쩌다 쓰다보면 구상한 방향을 이탈해서 엉뚱한 삼천포로 빠져버린다 이젠 이도저도 되는 것이 없으니 이것도 세월 탓이련 가?
이렇게 적적할 때 지난날 그 많든 술친구 한사람이라도 이웃에 있다면 불러내어 세상사 넋두리 안주삼아 소주라도 한잔하면 이렇게 외롭지 않을 건데 그 친구들도 모두가 가버렸다
나는 이제, 서로 의지하고 마음 터놓고 옛 예기라도 할 내 일가친척도 친구마저도 다 가버렸고 나만 혼자남아 오늘 고독에 울고 있다.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전화로라도 걸 친구도 없지만 카톡으로 라도 안부를 주고받든 친구마저도 다 가버렸다 겨우 몇몇 단체 방에서 한두 건의 글월을 보내주시니 그래도 고맙다
카톡을 주고받든 친구에게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 전화도 안 받는다 아마도 하늘나라로 가셨는지 아니면 고려장터 요양원에서 휴양중인지도 모른다. 이러하니 더욱 고독을 느낀다.
삶이 일일신日日新이어야 하는데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가 되니 이것 또한 세월이 가면 해결은 되겠지요.
옛 친구가 그립다
30여 년 전 직장에서 용도폐기 되고 은퇴한 동료들과 동내 슈퍼 살평상에 걸터앉아 몇 푼 안 되는 퇴직금으로 어떻게 남은 여백을 메꿔 갈까 막걸리 한잔 앞에 놓고 신세타령하며 우리들의 세대들은 일제에 헐벗고 굶주리며 억압을 받으며 성장했고 8,15 광복을 맞았으나 남북 이념의 대결은 전쟁상태를 방불 하는 공포의 소용돌이의 강을 건넜고 6.25의 폭우처럼 쏟아지는 총탄을 피해 5천년 가난을 물리치려고 허리끈 졸라매고 폐허의 벌판에서 보릿고개 넘어 올 때 밤을 낮 삼아 우리들의 육신에서 흘린 땀의 결정체가 오늘이 건만,
오늘의 세대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수구꼴통 꼰대로 고집 센 영감탱이로만 비춰지는 오늘의 우리들 세대의 현실이지만 그래도 나는 천만 다행으로 늦게나마 하느님을 부르심을 받아 우리 두산성당 교우 분들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아 늦게나마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되었으니 지나날 아픈 기억들도 세월이 약이 되어 옛 예기로 잊혀가고 있다 오늘도 이제 서산을 노을을 향해 한걸음 한발자국 조심, 조심 걸으며 우리 성당 모든 교우 분께 그 동안 감사했다고 행복했다고 인사를 드리며 가고 싶다
24년 6월 25일 정인환 바오로